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염료이야기 신비롭고 아름다운 색깔을 찾아

식물에서 얻던 천연염료는 합성화학의 발달에 따라 인공염료로 대체되었다.

여름날 비가 내린 뒤 산 중턱에 걸린 무지개를 보는 순간 사람들은 그 신비로움과 아름다움에 도취된다. 또 장미꽃이나 철쭉꽃을 볼 때도 같은 심정일 것이다. 그 때마다 사람들은 그 아름다움과 신비로운 색깔을 자신들의 곁에 영원히 잡아두고 싶은 심경에서 일찍부터 천이나 주변의 가구 그리고 일상용품에 색깔을 착색시키려 했다. 이리하여 인류는 일찌기 물감을 찾아 냈을 뿐 아니라 염색하는 기술까지도 터득해 냈던 것이다.

그런데 그 물감 모두는 동물과 식물 그리고 광물에서 얻어진 천연물감들이었다. 우리나라에서도 일찌기 남색에는 쪽, 빨간색에는 꼭두서니, 노란색에는 치자, 자주색에는 자초(紫草) 그리고 분홍색에는 홍화(紅花) 등이 이런 목적에서 이용되어 왔다.

왕족의 염료 사프란

서양에서도 사프란(Saffron)이라는 오렌지색의 염료가 옛날부터 사용되어 왔다. 이 염료는 잇꽃(Safflower)의 수술을 따서 모아 판자 사이에 넣고 짖누른 후, 이를 가열하여 덩어리로 만든 다음 이 덩어리를 빻아서 가루로 만든 것으로 오렌지색을 내는데 사용하였다. 그런데 약 4천개의 꽃에서 30g정도의 가루가 나오는게 고작이었다. 자연히 사프란염료는 매우 값이 비싸서 부자가 아니면 구할 수 없었다.

고대 그리스에서는 이 선명한 오렌지색은 왕족만이 사용하는 신성한 색깔이었다. 그들은 이 염료로 염색한 망또를 입었다. 이런 습관은 오래도록 지속되었으며 헨리 8세는 사프란으로 염색한 셔츠 머리수건 네커치프 리닌모자 등을 착용하는 것을 금지하는 법령을 공포하기도 했다.

또 이 염료는 향료로도 사용되었다. 로마황제 네로는 사프란의 향기를 좋아하였으므로 로마의 거리를 행차할 때, 미리 사프란 가루를 뿌려놓도록 명령했다고 한다. 또 로마의 부자들은 자기집 방이나 회의실 바닥에 금방 따온 잇꽃을 깔아 놓았다고 전해진다.

사프란 가루는 독특한 맛을 가지고 있어 요리에도 쓰인다. 최근까지 수프나 갖가지 요리의 조미료로 쓰이고 있다. 또 케익이나 빵을 만들 때 거기에 넣어 노란색깔을 내기도 하였다.

16세기의 한 저술가에 의하면, 1339년 북아프리카의 트리폴리에서 약 80km 떨러진 높은 언덕에서 자라고 있는 잇꽃을 몰래 영국으로 반입했다고 한다. 당시 이 식물을 국외로 반출하다가 발각될 경우 사형에 처해질 정도로 엄격하게 통제되어 있었다. 이 이야기는 사프란이 귀중한 천연염료의 하나임을 입증해주고 있다.

꼭두서니는 뼈속까지 붉게 물들여

고대로부터 사용된 또 하나의 식물염료는 꼭두서니에서 채취한 것이다. 이 풀은 약 1m 높이로 자라고 뿌리는 가늘며, 길고 잘게 갈라져 퍼진다. 그리고 뿌리의 속과 껍질 사이에는 빨간 층이 끼어 있다. 이 뿌리를 건조시켜 도리깨로 두드린 다음, 더러운 것을 털어 내고 이를 맷돌로 갈아 가루로 만들어 염료로 쓴다.

꼭두서니의 잎은 소의 먹이로도 쓰였다. 그런데 소가 이 풀을 먹으면 우유가 붉은 색깔로 되고 버터는 노랗게 되었다. 하지만 인체에 해는 없었다.

꼭두서니는 고재 이집트 사람들이 이미 염료로 사용하였다. 이것으로 염색된 천이 미이라에서 나왔던 것. 염료는 19세기까지 널리 쓰여졌다. 터키의 염색업자들은 꼭두서니를 매우 잘 처리하여 다른 나라의 염색업자들 보다 훨씬 선명한 빨간색을 나타냈다. 그래서 꼭두서니의 빨강 염료를 터키레드(Turkey Red)라 부르기도 한다. 터키레드를 만드는 방법은 수백년 동안이나 엄격히 비밀로 전수되어 왔다.

영국에 있어서 꼭두서니의 재배는 극히 소수의 농가에서 가정염료로 사용하는 것을 제외하고는 거의 소의 먹이로 이용하는데 있었다. 그런데 꼭두서니의 잎을 소의 먹이로 이용하는 과정에서 염료로서 꼭두서니의 진가가 밝혀지고, 염료의 원료로서 대대적인 재배가 시작되었다.

1736년 J. 벨처라는 외과의사는 농부인 친구와 식사를 같이 할 약속을 했었다. 그날 식사를 위해서 농부는 자기집에서 기른 돼지고기를 잘라내는데, 그 돼지의 뼈가 빨갛게 물들어 있었다. 이 사실을 들은 외과의사는 그 까닭을 물었다. 그 원인은 바로 사료인 꼭두서니에 있었다. J. 벨처는 그 과정을 철저히 조사하였다. 그는 꼭두서니를 분말로 만든 다음, 이를 수탉의 먹이에 섞어 먹였다. 그 수탉은 꼭두서니가 섞인 먹이를 먹기 시작한지 16일이 못가서 죽고 말았다. 죽은 즉시 그 닭을 해부하여 조사하였다. 그런데 그토록 짧은 기간내에 닭뼈가 빨갛게 물들어 있었다. 전혀 예기치 않았던 일이었다.

이로써 그후부터 꼭두서니는 빨강물감의 경제적인 농작물로서 중요성이 날로 증가하였다. 이처럼 당시의 염료는 모두가 천연에서 얻어졌다.

합성화학이 열어놓은 길

라보아제(1743~94)의 화학혁명(과학동아 87년 3월호 테마과학사 참조)을 바탕으로 화학은 빠른 속도로 발전하였다. 연구분야도 매우 다양하였고, 그 성과 또한 풍성하였다. 그중 합성화학의 진전은 합성염료를 출현시키는 직접적인 동기가 되었다.

당시 화학계의 일반적인 생각으로는, 유기물은 '생명력(生命力)'이라는 개념을 빼놓고서는 이야기할 수 없었다. 다시 말해서 무기물과 유기물을 구분하는 기준이 바로 '생명력'이라는 개념에 있었다. 무기물은 '생명력' 없이도 만들 수 있으나, 유기물은 '생명력' 없이는 절대로 만들 수 없다는 생각이 화학계를 지배하고 있었다.

그런데 1828년 독일의 화학자 F. 뵐리(1800~82)가 시안산암모늄(NH₄CNO)으로부터 '생명력' 없이 유기물질인 요소〔尿素, (NH₂)₂CO〕를 인공적으로 합성해냈다. 이로써 인간은 자연계에 존재하지 않는 물질은 합성해낼 수 있다는 확실한 신념을 갖게 되었고, 인간의 창조력은 신의 창조력을 넘어설 수 있다는 자신마저 갖게 되었다. 합성화학의 문이 활짝 열린 것이다.

더우기 유기화합물의 모체인 벤젠(${C}_{6}$${H}_{6}$)의 구조가 케클레(1829~96)에 의해서 알려졌고, 반트호프(1852~1911)가 유기화합물의 입체적 구조를 밝혀 냄으로써 합성화학의 전망은 더욱 밝아졌다. 이를 바탕으로 인간은 유용한 물질을 오직 천연에만 의존하지 않고, 인공적으로 값싸게 대량으로 만들어 낼수 있게 되었다. 합성염료는 그 대표적인 한가지 예라 할 수 있다.

「호프만」과 「퍼킨」의 등장

19세기 중엽 연료인 석탄가스를 석탄에서 만들 때 부산물로 생기는 코울타르는 그 이용가치가 매우 적어서 이를 처리하는 일이 매우 걱정스러웠다. 그런데 독일의 화학자 호프만(1818~92)은 골치거리인 코울타르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연구하였다. 그 결과 1843년 코울타르에 함유되어 있는 여러 유기화합물을 검출하고 분리하는데 성공했다.

그는 독일 태생이며 독일의 화학자 리비히의 조수였다. 그런데 1845년 영국 런던에 왕립화학칼리지가 설립되자 호프만은 그 학교의 교장으로 취임하였다.

호프만이 코울타르에서 분리한 물질 중에는 벤젠이 있었다. 벤젠은 수많은 유기물의 모체가 되는 화합물이다. 가령 벤젠을 질산(HNO₃)으로 처리하면 니트로벤젠(${C}_{6}$${H}_{6}$NO₂)이라는 황색을 띤 기름과 같은 물질이 되고, 이 물질을 환원시키면 역시 기름과 같은 아닐린(${C}_{6}$${H}_{5}$NH₂)이 된다.

한편 영국의 W.H. 퍼킨(1838~1907)은 15세때 이미 호프만의 조수가 되었다. 그는 천연물질을 실험실에서 합성시키려 하는 호프만 교수의 연구에 크게 감동을 받고 관심을 갖게 되었다. 1856년 퍼킨은 부활절 휴가를 이용하여 키니네(${C}_{20}$${H}_{24}$O₂N₂)를 인공적으로 만들어 보려고 결심하였다. 당시 키니네는 매우 중요한 의약품으로서 사실상 20세기 중엽까지 널리 쓰였다(이것은 '키나' 나무로부터 얻고 있었다).


석탄에서 얻은 아름다운 보라색
 

석탄에서 얻은 아름다운 보라색

퍼킨은 실험을 시작하기 전에 실험 방법에 대해서 신중하게 검토하였다. 우선 코울타르로부터 얻은 물질의 조성이 키니네와 매우 비슷하였으므로 이것부터 손을대기로 하였다. 그리고 코울타르로부터 얻은 물질을 키니네로 바꾸기 위해서는 다른 어떤 물질이 필요한가를 여러 각도에서 연구하였다. 그러나 그의 최초의 실험은 실패로 끝났다. 따라서 이번에는 다른 물질 즉 아닐린을 사용하기로 했다.

퍼킨은 소량의 아닐린을 실험관에 넣고 신중하게 선택한 또 다른 물질을 반응시켜 보았다. 이때 시험관 바닥에 검은 침전물이 생겼다. 그리고 그 침전물이 거의 알콜에 녹는 것을 알았다. 하지만 이 검은 침전물은 그가 구하려 했던 무색의 키니네의 용액이 아니고 아름다운 보라색의 용액이었다. 검은 침전물은 보라색 물질을 5% 함유하고 있었다.

퍼킨은 곧 5%의 액체가 염료의 성질을 가지고 있는 것을 발견하였다. 그리고 이 물질이 강한 햇빛이 쬐어도 쉽게 색깔이 바래지 않는다는 사실도 밝혀냈다. 또한 당시 유명한 염료회사인 퓨러스상회로부터 우수한 염료로 인정받았다. 이것이 '모브(Mauve)'염료인데 이 때 퍼킨의 나이는 18세였다.

퍼킨의 아버지는 아들이 화학을 전공하는데 대하여 강력히 반대하였지만 퍼킨이 아닐린염료 합성에 성공한 것을 보고서 자신의 저금통장을 모두 털어 염료공장 건설의 자본금으로 내놓았다. 그리고 퍼킨의 형도 원조를 아끼지 않았다. 이렇게 해서 퍼킨의 가족은 염료공장을 설립하게 되었다. 그러나 처음에는 어려움이 매우 많았다. 기본원료인 벤젠을 쉽게 구할 수 없었다. 뿐만 아니라 강한 질산도 구입하기가 어려워 손수 제조해야만 했다. 또 모든 공정에 필요한 특수장치도 손수 설계하고 마련해야만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든 난관을 극복하고 6개월만에 '아닐린 퍼플'이라는 이름으로 제품을 생산하는데 성공했다.

이로써 퍼킨은 나이 겨우 23세 때 화학자로서, 또 세계적인 염료의 권위자로서 그 명성을 떨쳤고 또한 거부가 되었다. 그가 런던의 화학협회에서 염료에 관한 강연을 했을 때, 그 청중속에는 그에게 영감을 주었던 전기학의 아버지인 패러데이도 끼어있었다.

현상금 걸린 알리자린 인공제조

퍼킨에 의한 합성염료의 개발과 생산은 염료업계와 화학계에 큰 충격을 주었다. 당시 유럽에 있어서 꼭두서니의 재배는 1868년 약 7만 t의 수확고를 올렸다. 그런데도 꼭두서니의 적색염료 즉 알리자린의 인공적 제조에는 다액의 현상금이 걸려 있었다. 따라서 많은 과학자들은 일찍부터 이 분야의 연구에 몰두하였다. 마침내 1868년 독일의 화학자 K. 그라베(1841~1927)는 코울타르에서 얻은 안트라센(${C}_{14}$${H}_{10}$) 으로부터 알리자린(${C}_{14}$${H}_{8}$O₄)을 합성하는데 성공하였다.

한편 영국의 퍼킨도 여세를 몰아 독립적으로 이를 연구하고 있었다. 그러나 독일의 K. 그라베쪽이 하루 먼저 특허를 따냈다. 그 날이 1868년 6월 25일이었고, 퍼킨쪽은 6월 26일이었다. 그러나 퍼킨이 영국에서 알리자린 염료를 제조하도록 허가를 받음으로써 사태는 잘 수습되었다.

퍼킨은 석탄가스 공장에서 부산물로 나오는 코울타르속에서 알리자린의 원료인 안트라센을 확보하기 위한 연구에 착수하였다. 그때까지만 해도 안트라센은 쓸모없는 물질이었지만 이를 모으는데는 어려움이 매우 많았다. 그러나 많은 어려움 끝에 공업적 규모로 보다 쉽게 알리자린을 합성하는 새로운 방법을 개발하고 특허를 따냈다.

그 새로운 방법이란 출발점이 안트라센 그것이었다. 우선 염소(Cl₂)에 의해서 안트라센 분자가 가지고 있는 두개의 수소원자를 염소원자로 치환하여 안트라센을 디클로로화합물로 변화시킨다. 이번에는 디클로로화합물을 황산으로 처리한다. 그리고 술폰산(-HSO₃)기를 알칼리로 처리하여 수산기(-OH)로 치환시켜 알리자린을 만들었다.

이와같은 알리자린염료의 합성은 청색염료인 인디고의 합성을 자극하였다. 우선 많은 화학자가 인디고의 분자구조의 해명에 도전하였다. 그중 독일의 바이에(1835~1917)는 선두주가가 되어 그 해명에 성공하고, 1880년 이 염료의 합성방법을 발표하였다. 그러나 그 공정이 너무 복잡하고 값이 비싸 채산이 맞지 않아 대량생산에 실패하였다.

그러나 연구는 그치지 않고 K. 호이번(1850~93)이 이에 도전하였다. 이 도전으로부터 채산성이 맞는 합성방법이 개발되기까지는 실로 17년의 세월과 약 1백만 파운드의 연구비가 투자되었다. 그 뿐만이 아니라. 이 합성에 있어서 가장 기초가 되는 무수프탈산(${C}_{8}$H₄O₃)을 얻는데도 커다란 어려움이 있었다. 이 원료를 만드는 기본 과정은 나프탈린(${C}_{10}$${H}_{8}$)에 열농(熱濃)황산을 작용시키는데, 그 반응속도가 매우 느렸다. 따라서 제조원가가 매우 높았다.

그런데 우연한 일이 일어났다. 실험도중 반응탱크에 꽂아놓은 수은온도계가 우연히 파열되면서 반응속도가 매우 빨라졌음이 우연히 발견되었다. 이것은 수은과 황산에서 생성된 황산수은(HgSO₄)이 촉매로서 작용한 까닭이었다. 이러한 행운에 찬 발견으로 다량의 무수프탈산이 매우 값싸게 만들어 짐으로써 인디고의 공업적 생산이 가능하게 되었다. 이 합성염료는 1897년 부터 시판되었다.

무대에서 사라진 천연염료

이처럼 합성화학을 바탕으로 합성염료가 값싸게 대량생산됨으로써 천연염료는 작별을 고하게 되었다. 우선 꼭두서니의 염료공업이 파멸되었다. 세계 여러곳에서 재배되고 있던 꼭두서니 재배지가 다른 곡물재배지로 전환되었다. 또 천연 인디고도 추방되었다.

인도의 인디고 수출은 1895~96년의 1만9천t에서 1913~14년의 1천1백t으로 줄었다. 그리고 인디고 재배에 쓰였던 20만 에이커 이상의 토지가 쓸모없게 되고, 여기에 종사하던 업자들은 모두 파산되었다. 인간이 자연을 지배 했다는 말은 여기서도 통용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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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7년 11월 과학동아 정보

  • 오진곤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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