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은 생명체를 조절하는 신비의 열쇠이다.
가장 행복한 인생이란 자기가 원하는 일을 일생동안 할 수 있는 것이라고 믿고 있는 터이다. 해마다 치루는 입학시험의 면접때 마다 대학을 지원하는 젊은이들에게 장래의 희망직종을 물어보면 거의가 대학교수가 되기를 원함을 알 수 있었다. 이런 견지에서 약학대학의 한 교수로서 연구실을 지키고 있는 나로서는 'Dreams come true'라는 영어표현이 걸맞는 행운아라고 자처하고 싶다.
유학 통해 이론약학 도입
그러나 내가 약학을 택한 동기는 지극히 평범하여 중학교의 생물반의 과외활동중 접촉한 은사의 권유가 크게 작용했다.
소위'전쟁세대'라고 자처하는 나의 세대가 대학에 입학한 시기는 우리 민족의 격동기인 6·25 동란 다음해로서 부산의 영도 한구석에 판자집 몇평을 강의실로 하던 전시 피난대학 시절이었다. 따라서 실험도 강의도 지금은 상상도 못할 정도로 엉성했다. 그나마 휴강이 절반이 채 일년이 지났고 대학이 서울로 돌아와서도 어려운 대학살림으로 변변한 대학생활을 해보지도 못한채 졸업이라고 하였다.
졸업 후 진로를 걱정하던 나머지 대학의 한 은사를 찾아 상의 하던 자리에서 희망한다면 연구실에 남아도 좋겠다는 뜻하지 않은 말씀이 나의 운명의분수령이 된 셈이다. 대학시절의 성적도 좋은 편이 못되었음은 물론이고 여러가지 여건도 수월치 않았던 터에 감히 기대하지 못한 영광스러운 자리인지라 전후 생각할 겨를도 없이 승낙했다. 다음날부터 시작한 무급조교 생활이 6년여, 해군장교로 군 복무 2년, 그후의 시간강사 생활 3년여의 어려운 시련기를 아내의 고생과 이해 덕분으로 견디고 꿈의 실현을 위한 연구생활을 계속해 왔다.
차차 대학의 사정도 자리를 잡아 안정을 찾았고 새로운 학풍의 조성으로 선진 약학의 도입이 요구되었다. 이에 이미 뜻있는 몇몇 동료들이 외국 유학에서 돌아와 약학 영역에서도 새로운 바람이 일기 시작했다.
이 무렵 초조한 기다림 속에서 마침내 기회가 찾아와 동경대학 약학부 약품물리화학 연구실에 연구생 입학이 이루어졌다. 당시 일본의 약학도 바야흐로 이론을 기반으로 하는 연구의 필요성을 느껴 물리화학을 응용한 연구가 상당한 비중을 차지하고 있었으며 나의 연구실의 교수진도 물리화학에 정통한 분들로 약품의 작용기전을 물리적 방법 특히 분광학적 수단을 이용하여 구명하는 첨단적 연구에 열중하고 있었다.
나의 지도교수는 3대를 동경대학 교수로 이어온 수재가문 출신으로 자기 학문을 존중하고 작은 진실을 소중히 여기는 학자였다. 그 인상은 뇌리에 생생히 남아 지금까지 나의 연구생활에 영향을 끼치고 있다. 우물안 개구리였던 나에게는 모든 것이 새로웠고 두번 다시 없는 기회였음은 말할 나위없는 일이다.
밤낮도 없었다. 시간에 쫓기던 나머지 유독하기로 이름난 클로로포름을 서슴지 않고 입으로 빨아 실험에 열중하던 일은 지금도 나의 연구실 학생들에게 자주 들려주는 후일담이다. 또 다른 잊을 수 없는 일로는 당시 동경대학은 학생의 소요가 극치를 이루던 때라 대학 건물이 학생들에 의해 부분적으로 봉쇄되어 나의 연구실도 내일을 기약할 수 없었다. 이에 교수의 권유로 실험자료를 늘 가방에 꾸러들고 다니던 일이 생각난다.
나의 체중은 유학기간 동안 10kg이나 줄어들었고 덕분에 짧은 시기에 소기의 목적을 달성할 수 있었던 것 같다. 유학생활이 소중하게 여겨지는 것은 이를 계기로 나의 학문세계를 공고히 다질 수가 있었기 때문인가 싶다. 연구방법 등 시야가 넓어져 물리화학을 기본으로 한 이론약학을 한국에 접목시켜 생리활성약품의 구조연구 또는 이를 근거로한 신약의 개발가능성 연구등 나름대로의 첨단연구를 할 수 있었음은 지금도 큰 보람으로 여기고 있다.
생물학과 화학의 경계에 위치
다음은 아직 약학의 세계에 접하지 못한 젊은 학생들이 자칫 오해가 있을 수 있는 약학의 학문세계를 알아보기로 하자.
약학은 약(藥)의 학문이다. 약학의 원리나 방법론을 연구 하려면 우선 약에 관하여 고찰할 필요가 있다. 생명체의 특징은 종족을 번식시키려는 소위 자기복제(自己復製)와 개체를 지탱하려는 항상성 유지(恒常性 維持)라는 본능적 특성이 있다.
어떤 원인에 의하여 항상성의 균형이 깨어져 비정상적으로 되는 것은 질병이라하여 이를 치료하여 본래의 상태로 유지시켜 주기 위하여 투여하는 물질을 '약'이라고 한다. 다시 말해 약이란 생명체에 작용하여 질병을 예방 또는 치료하는 물질이다. 따라서 약은 인류역사와 더불어 필수불가결한 존재였으며 이를 창제 개선하여 확보하고 보급해야 하는 당위성 때문에 약학은 필연적으로 진보 발전되어 왔다.
약학은 자연과학의 한 분야로 생명과학(Life sciences) 영역에 속하며 화학 생물 또는 물리학을 바탕으로 하는 종합과학이라고 정의 할 수 있다.
생명과학내에서도 약학과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는 의학 또한 종합과학이며 이들 종합과학의 특징은 기초와 응용, 이론과 기술이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는 점이다. 단지 의학의 연구대상은 생체중심이고 약학에서는 생리적으로 활성을 갖는 약물이 연구대상이 된다는 데 차이가 있을 따름이다. 즉 약학은 약을 통하여 의학 융합함과 동시에 인간에 생명 또는 생활과 밀접한 관계가 있는 약의 기술과학이다. 이들이 생명체를 조절하는 신비의 열쇠라는 의미에서 약학의 발전은 결과적으로 생명현상을 연구하는 생명과학으로서의 가치를 지니는 것이다.
이와 같이 약학은 '생명체에 작용하는 물질'의 종합과학으로서 생물학과 화학의 경계영역에 있는 특수성을 갖고 있다. 따라서 생물학 생화학 유기화학 도는 물리화학 등을 기초학문으로 요구한다. 또 기술면에서는 의약품의 창제 생산 관리를 목표로 하는 응용기술과학임이 특징이다.
연구분야에는 어떤 것이 있나
학문의 시대적 발전과 더불어 약학도 분야가 나뉘어져 약의 창제 개발에 치중하는 제약학과와, 약을 사용관리(즉 용약)함에 치중하는 약학과 등이 설치되고 있는 것이 오늘날의 추세이다.
분류방법에 따라 차이가 있겠으나 나름대로 약학의 전공 연구분야를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생약학 : 약효물질을 천연물로 부터 분리, 추출하여 화학구조와 약리작용을 구명하는 학문. 천연물에서 화학적 약리학적 방법을 이용해 새로운 의약성분을 찾는 일은 물론이고 원료의 선택, 품질의 향상, 새로운 용도 등의 연구도 포함된다.
□약품제조학 : 생체에 유효한 약품을 화학적으로 합성, 정제, 분석하여 생산하는 기술을 대상으로 하며 의약품을 비롯한 관련 화합물의 용도에 따른 제조과정 연구도 실시하는 학문이다.
□약제학 : 약품이 생체에 가장 바람직한 형태로 작용하게 하여 약효가 최대한으로 활용될 수 있도록 하는 조제가술과 제제기술을 연구개발하는 학문. 의약품의 물성에 따른 흡수 배설등 생체내 반응기전을 물리화학적으로 구명하기도 한다.
□약물학 또는 약품작용학 : 약물의 생체내에서의 작용기전을 생리화학과 관련지어 구명하는 학문으로 약효의 발현기전과 독성학도 연구대상이다. 동물실험을 기초로 한 실험약리학과 인체를 대상으로 한 임상약리학 등으로 세분된다.
□위생화학 : 이색적 약학분야로서 예방 약학적 목적을 가지며 의약품 및 관련 물질의 위생관리, 공기 공장폐수 방사능오염 등의 공중위생을 다루는 학문이며 각종 화학물질이 인간환경에 미치는 영향을 연구 대상으로 하고 있다.
이외에도 의약품을 생체내외에서 정밀분석하는 약품분석학, 환자 중심의 약학인 임상약학, 약물의 작용기전을 물리화학적으로 구명코자 하는 물리약학, 미생물에서 항생제를 찾아내는 미생물 약품화학 등도 근래 발전된 약학의 중요 연구분야이다.
공급 달리는 약학 인력
양자역학의 거장인 '슈뢰딩거' 박사는 그의 수기에서 "나는 다시 태어난다면 생명과학을 연구하겠다"고 밝힌 바 있다. 최근 눈부시게 발전한 자연과학이 인류의 문명을 변화시킨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그러나 물리학이나 화학의 발전에 비하여 생명현상의 신비는 아직도 충분히 벗겨지지 않고 있는 상태라고 생각된다.
1960년대에 왓슨과 크리크가 DNA의 구조를 밝힌 이후 분자생물학의 발전과 더불어 생명과학은 매력적인 학문으로 대두되었다. 약학에서도 분자생물학적 또는 유전공학적 기법에 의한 연구가 눈에 띄게 활발해졌다. 이는 약이 생명체를 조절하는 열쇠 역할을 하며, 생리활성물질을 취급하는 것이 약학의 본질인 점을 고려하면 필연적인 발전추세라고 하겠다.
한국의 약학은 바야흐로 종래의 기술적(記述的) 약학에서 탈피하여 이론적 약학으로 도약하고 있다. 뜻있는 젊은 세대에 의하여 우리의 약학이 국제적 수준의 생명과학으로 발전해야 할 필요성이 절실한 것은 그 때문이다.
스위스와 같은 작은 나라가 제약공업의 발전으로 국가를 부흥케 한점을 상기하고 싶다. 고무적인 사실은 근년 우리나라도 중화학공업의 발전여세를 타고 국가적으로 제약공업에 눈을 돌리고 있다는 점이다. 따라서 우수한 인적자원만 확보된다면 약학의 눈부신 발전은 약속될 것이 분명하다.
이를 인식함인지 최근 약학대학 졸업생에 대한 요구가 약학영역을 비롯한 생명과학 분야에서 급격하게 늘고 있다. 단지 현재로서는 그 수요를 공급이 따를 수 없는 것이 안타깝다.
현재 약학대학을 졸업한 학생들이 대학원 진학과 외국유학뿐 아니라 약학 연구자로서 국내 대학, 관련 연구기관 또는 일선 제약계의 중진으로 발탁되어 활약하고 있는점은 약학의 앞날을 위한 길조라고 여겨져 흐뭇한 감을 느끼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