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라이브러리









산업혁명의 숨은 주인공 산·알칼리 공업

천연원료에서 인공합성에 이르기까지 산·알칼리 공업의 발자취는 바로 근대화학공업 발달의 역사였다.
 

산을 영어로 'Acid'라 한다. 이 말은 라틴어의 '시큼하다 Acidus'에서 유래한다. 고대 연금술사들이 알고 있었던 산은 식초나 과일즙 뿐이었다. 그러나 중세 아라비아 연금술사 '게버'(약 721~약 815)는 초석(NaNO₃), 황산구리, 명반〔KAI(SO₄)₂·12H₂Ο〕을 섞어 가열해 질산을 얻었고, 또 명반을 가열해 황산을 만드는 방법을 알고 있었다.
 

순수한 염산을 최초로 만든 사람은 15세기 B. 바렌틴(1394~1450무렵)으로, 소금과 녹반(祿礬 FeSΟ₂·7H₂Ο), 명반을 건류시켜 만들었다. 그리고 이를 염정(鹽精)이라 불렀다. 또 게버와 바렌틴은 질산과 염산을 1:3으로 혼합해 금을 녹이는 왕수(王水)도 만들어 냈고 그 성질을 알아냈다.
 

근대에 들어와 독일의 화학자인 '그라우버'(1604~1668)는 당시 산을 만드는 방법을 개량하고 특히 알칼리와의 관계를 폭넓게 조사하였다. 영국의 근대 화학자 R.보일(1626~1697)은 어떤 특수한 식물즙이 산에 의해서 매우 민감하게 반응한다는 사실을 발견하여 최초로 지시약을 창안해 냄으로써 산과 알칼리의 관계를 한층 명확하게 하였다.
 

한편 알칼리는 기원전 7천년 경부터 이미 석회석과 같은 광물에서 만들어냈다. 고대말기 그리스, 로마, 터키 사람들은 비누를 만들어 사용했다. 폼페이의 유적지에서 비누 제조공장이 발견된 데서 그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특히 이슬람 사람이 '알칼리'라는 말을 사용했던 것을 보면 이들도 알칼리를 만들어 사용한 것이 분명하다(A1kali의 AI 은 아라비아어의 정관사이고, Kali는 식물의 재를 의미한다).
 

지금은 그 모습이 거의 사라져 볼 수 없지만, 우리 선조들도 빨래를 하기 위해서 알칼리성 용액을 만들었다. 떡시루 안에 삼베 천을 깔고 그 위에 아궁이에서 꺼낸 재를 붓는다. 그리고 수시로 물을 부어 재를 우려낸다. 이 때 떡시루에서 갈색을 띤 물이 흘러 나오고, 이를 모아두었다가 빨래를 할 때 쓴다. 이 갈색의 물을 재로부터 나왔다 하여 '잿물'이라 불렀다(KOH가 함유되어 있다). 흔히 수산화나트륨(NaOH)을 '양잿물'이라 부르고 있는데, 이것은 아마도 '서양에서 들어온 잿물'이라는 뜻에서 그렇게 불렀는 지도 모른다.
 

천연원료에서 인공합성에 이르기까지

 

산림의 황폐를 막으려면
 

산업혁명기에 접어 들면서 당시 유리 제조업자, 비누 제조업자, 표백업자 기타 제조업자들에게는 알칼리가 절대적으로 필요했다. 이 알칼리는 풀이나 나무를 태운 뒤 생기는 재로부터 공급받았다. 그런데 석탄이 연로로서 아직 일반화 되지 않았던 그 당시 목재는 연료로서 엄청나게 소모되었고, 이로 인하여 산림이 점차 황폐화하고 있었다. 그러므로 알칼리의 원료를 목재의 재로부터 구하는 일은 마치 전쟁과도 같았다. 목재의 값은 해마다 치솟았기 때문이다. 결국 천연 알칼리를 대신하는 새로운 제조방법을 찾아내야만 했다.
 

이 문제가 18세기 말 쯤해서 해결되었을 때, 알칼리를 많이 소모하는 제조공업은 실제로 화학공업의 핵심이 되었다. 따라서 알칼리 공업은 더욱 발전할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영국에 있어서 알칼리의 국지적 공급은 일찍부터 수요의 증가를 따르지 못하였다. 결국 부족한 부분은 잡초의 거친 재를 사용하거나 때로는 정제된 칼리를 수입하였다.(수입된 것으로는 두 종류가 있다. 하나는 지중해 지역의 해초의 재, 또 하나는 북부 유럽이나 미국에서 수입한 나무의 재).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럽 특히 영국의 경제발전과 함께 공급은 수요를 도저히 따를 수 없었다. 이를 해결하는 방안으로 기술자들의 관심은 ① 수입의 조직화 ② 나무재의 국내생산 증대 ③ 나무재 이외의 또 다른 원료의 개척 ④ 합성등이었다. 그 중 세번째의 가능성이 당시 가장 주목을 끌었다.
 

다시 말해서 해초를 태워서 알칼리의 원료를 얻으려는 방법이었다. 이 방법은 이미 1694년에 스코틀랜드에서 보급되어 있었는데, 특히 1730년에 크게 주목을 끌었다. 이는 어느 의미에서 영국 화학공업의 뿌리가 되기도 했다.

 

현상금 2천4백 루블
 

소금을 원료로 한 알칼리 제조에 관해서 관심을 가진 사람은 꽤 많았다. 그중 영국의 화학자 J.블랙(1728~99)의 연구에 이어서 역시 영국의 J.로빅(1718~94)과 J. 와트(1736~1819)도 이에 깊은 관심을 나타냈다. 또 와트의 친구인 화학자 J. 케어(1735~1820)도 관심이 컸다. 이들은 모두 소금을 원료료 해서 소다(NA₂CO₃)를 만드는 문제를 토의하였고 많은 특허를 냈다.
 

이들 모두는 알칼리 공업의 발전에 기여했는데 그중 누가 가장 많이 공헌했는지는 확실히 말하기 어렵다. 짚고 넘어갈 것은 영국 기술자 '단드날드'가 프랑스에 건너가 모아놓은 지식을 바탕으로 여러 협력자와 함께 1796년 알칼리 공장을 세운 사실이다. 동시에 그는 광물성 알칼리의 제조에 관한 특허를 얻었다.
 

이 공정은 대게 다음과 같다. 우선 소금(NaCI)에서 그라우버 염(망초)(Na₂SO₄·10H₂O)을 만들고, 이를 황화나트륨(Na₂S)으로 바꾼다. 다음, 탄산가스(CO₂)를 가하여 탄산나트륨(Na₂CO₃)을 만들고 이를 가수분해하면 가성소다(NaOH)가 된다.
 

이 방식을 이용한 최초의 생산량은 그렇게 많지 않았지만, 종전의 원료 취득방법(나무나 해초를 태워 재를 얻는 방법) 보다는 훨씬 많았다. 이로써 알칼리 시장은 큰 영향을 받았다. 이 공장 말고도 몇개 회사가 이렇게 알칼리는 제조하였기 때문이다.
 

한편 유럽 대륙에서도 영국과 마찬가지로 알칼리의 원료가 부족하였다. 그러나 영국과는 그 사정이 달랐다. 그 까닭은 유럽의 경우 알칼리의 생산에 대해서 군사적 측면에서 관심이 깊었기 때문이었다. 다시 말해서 알칼리가 군수물자로서도 그 가치가 인정되었던 때문이었다. 이러한 사정 때문에 프랑스 과학자들은 소다 합성의 가능성에 관심을 기울였다. 결국 1787년 N.르블랑(1742~1806)은 한 공정을 개발하였는데, 이 공정은 한 세기 가깝게 중화학공업의 핵심이 되었다.
 

이 방법은 소금(NACI)을 황산(H₂SO₄)으로 처리하여 황화나트륨(Na₂S)으로 만든 다음 이를 목탄(C)과 잘 섞어 도가니에서 가열한다. 여기서 '흑회'가 생기고 이를 물로 우려낸다. 그다음 물을 증발시켜 소다(Na₂CO₃)를 분리하여 회수한다. 이 공정은 1791년 프랑스에서 특허를 얻은 다음 공장을 세웠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프랑스 혁명으로 르블랑은 체포되었고, 그 의 후원자인 오를레앙공은 사형당하였다. 이 공정을 발명한 사람에게 주기로 한 2천4백 루블의 현상금도 받지 못한채 그는 공장까지 몰수 당했다.

 

공해문제 해결한 솔베이법
 

그런데 르블랑법으로 알칼리를 만드는 과정에서는 악취가 심한 염산가스가 배출된다. 또 알칼리성 폐액(소다 1t을 생산할 때 2t의 비율로 생긴다.) 때문에 공장 주변 사람들로부터 끊임없이 소송문제가 제기되었다. 또한 황산중에 있는 값이 비싼 유황의 절반이 회수되지 않으므로 생산원가에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 따라서 르블랑법의 개선이 시급해졌다.
 

여기서 개선된 한 가지 방법이 곧 암모니아 소다법으로서, 벨기에의 E. 솔베이(1838~1922)가 이 방법을 1872에 창안하였다. 이 방법은 이미 1811년 프랑스의 물리학자인 A.J.프레넬(1788~1827)을 필두로 연구개발되기 시작하여 많은 기술자들의 개량이 거듭되었다.
 

A.J. 프레넬은 1811년 소금의 진한 용액을 암모니아(NH₃)로 포화시킨 다음, 여기에 탄산가스(CO₂)를 통하면 중탄산소다(NaHCO₃)가 침전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중탄산소다는 열에 의해서 쉽게 탄산나트륨으로 변하였다.
 

이 반응은 두 공정으로 생각할 수 있다. 먼저 암모니아(NH₃)가 물, 탄산가스와 결합하여 중탄산암모늄〔(NH₄)₂CO₃〕이 되고, 그 다음 이것이 소금과 반응하여 염화암모늄(NH₄CI)과 중탄산소다(NaHCO₃)로 된다. 중탄산소다는 물에 잘 녹지 않는 침전물로서 용액 밖으로 끄집어낼 수 있다.
그리고 암모니아는 염화암모늄으로부터 재생되며, 탄산가스는 중탄산소다를 가열해 얻을 수 있다.
 

이 반응은 언뜻 보아서 간단하지만, 그 주변에는 실제적인 많은 어려움이 도사리고 있었다. 그중에서도 암모니아의 재생과 함께, 오래 동안 시장에서 상품으로 등장하지 못한 염화칼슘(CaCI₂)이 생성되는 일이 있었다. 이러한 어려운 문제점을 해결하는 과정에서 역사적으로 보아 가장 큰 기술적인 진보를 가져온 사람은 역시 E. 솔베이였다. 그리고 그의 연구가 사실상 사업계획으로 옮겨진 것은 그의 형제인 A. 솔베이의 힘을 입은 바 컸다.
 

1863년 '솔베이의 회사'가 설립되었고, 그후 끊임없이 개량을 거듭하여 1873년에 '든바르'에 공장이 세워졌다. 이로써 1903년 르블랑법에 의한 소다 생산량이 15만t인데 비해서 솔베이법에 의한 생산량은 1백 65만t에 이르렀다. 솔베이는"공업적 실현을 둘러싸고 암모니아·소다법 만큼 오랜 세월을 두고 실험이 반복된 것도 없다"고 말하였다. 실로 알칼리 공업의 역사는 끈질기고 오랜 세월의 연구의 결과라 말할 수 있다. 이런 점을 미루어 보아, 알칼리 공업은 축적되고 숙련된 기술적 지식에 바탕은 둔 공업에서, 응용화학의 지식에 바탕을 둔 공업으로 옮겨간 전형적인 제조업이었다. 그러나 이 전환은 하루 아침에 이루어진 것은 아니었다.

 

연금술사가 남긴 유산
 

한편 황산에 관한 지식은 연금술사가 남긴 유산의 하나이다. 연금술사는 황산을 가리켜 반유(礬油)라 불렀다. 이에 관해서는 증세 말기의 화학자 '파라켈서스'(1493~1544)와 근대 초기 독일의 광물학자 '아그리콜라'(1490~1555)의 저서에 기록되어 있다. 즉 황산은 녹반(祿礬 FeSO₄·7H₂O)을 증류하여 만든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이 방법은, 황산제1철(FeSO₄)이 열로 분해되어 황의 산화물이 되고, 이것이 결정수에 흡수되어 황산이 된다. 황산으로 바꾸어지는 비율은 녹반 중량의 10%에 불과하였으므로 증대하는 황산의 수요에 훨씬 미달되었다. 따라서 새로운 제법, 특히 유황의 산화에 주의가 집중되었다.
 

영국에 있어서 황산이 처음 연속적으로 생산된 것은 1736년이었다. 이 해에 황산제조의 실험실적 규모가 공장생산의 규모로 전화하였다. 이에 따라 황산의 가격도 약 20분의 1로 하락되었다(1750년 이전까지 영국은 폴란드에서 황산을 수입하였다). 1746년 영국 버밍햄에는 금속업자에게 공급하기 위한 대규모 황산공장이 설립되었다. 이를 추진한 사람은 영국의 기업가이자 제조업자인 J.로빅과 S.가벳(1717~1805)이었다.
 

J. 로빅은 원래 화란의 '라이딘'대학에서 의학공부를 마친, 당대최고의 과학교육을 받은 의학도였지만, 의료사업을 포기하고 황산의 재조에 전력을 다했다. 우선 그는 납이 황산에 의해서 침식당하지 않는다는 '그라우버'의 발견을 바탕으로 납을 이용하여 황산 제조 시설을 갖추었다.

 

유리에서 납으로
 

종래의 유리 대신에 납을 이용하여 황산을 제조한 사실은 화학기술의 역사에 있어서 매우 커다란 발전이라 하겠다. 그 까닭은 부서지기 쉬운 실험실적 규모의 시설로부터 제조업자를 해방시켰고, 공업용 자재의 가격을 일단 하락시켰기 때문이었다.
 

당시 황산의 제조법을 대강 적어 보면, 유황이나 황화철(FeS)을 태워서 이산화황(SO₂)을 만들고 이것을 산화시켜 물에 흡수시킨다(SO₂+H₂O+N₂O₃→H₂SO₄+2NO, 4NO+O₂→2NaO₃). 이런 반응이 납으로 된 방(연실) 안에서 산화질소(N₂O₃)를 촉매로 일어나므로 여기서 얻은 황산을 연실황산이라 불렀다.
 

그런데 알칼리 공업 특히 르블랑법에 의한 알칼리 생산과정에서 많이 소비되는 원료가 바로 황산이었다. 따라서 이방법에 의한 생산이 늘어나면 늘어날수록 이에 비례하여 황산의 수요가 급격히 증대되었다. 그 뿐 아니라 황산은 모든 제조업자들로부터 열렬히 환영받았다. 특히 비료 제조업자들로부터 황산의 주문이 쇄도하였다.
 

한편 유기화학공업의 발달로 급속히 성장한 합성 염료공업은 순수한 황산 뿐 만 아니라, 아황산(SO₃)을 과다하게 함유한 발연황산을 많이 필요로 하였다. 여기서 새로운 황산의 제조방법이 모색되었다. 이에 따라 개발된 방식이 곧 접촉법이다. 이 방식은 발연황산이나 순수한 황산을 만드는 데는 안성맞춤이었다.
 

새로운 방법으로는 이산화황을 산화시키는데 산화바나듐(V₂${O}_{5}$)이 촉매로 사용된다는 점이다. 1870년 독일의 화학자 R.멧셀(1847~1920)이 창안한 이 방식은 촉매인 산화바나듐이 오랜 시간 그 기능을 유지할 수 있으므로 한 공장에서 하루에 1천t까지를 생산할 수 있었다.
 

기계 발명과 맞먹어

 

기계 발명과 맞먹어
 

산·알칼리 공업은 중화학공업의 핵심이다. 그것은 산·알칼리의 용도가 넓고 화학반응에 있어서 그 성질이 다양하기 때문이다. 알칼리를 대표하는 가성소다는 인조섬유공업, 화학약품공업, 석유 정제공업, 펄프공업, 방직공업, 고무공업 등에서 그 수요가 매우 크다. 또 대표적인 산인 황산은 화학공업에 있어서 기초원료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으로 꼽힌다. 그 용도는 금속제련, 제강, 방직, 제지, 식품 등 광범하다. 이 밖에도 실험실용 시약, 의약품으로 쓰이기도 한다.
 

따라서 한 국가의 공업수준을 평가할 때, 흔히 그 국가의 가성소다나 황산의 연간 생산량이나 연간 소비량을 지표로 삼는 것은 이 때문이다.
 

아뭏든 18세기 초기부터 19세기에 걸쳐서 산·알칼리 공업은 여러가지 형태로 유럽 경제에 크게 영향을 미쳤다. 산·알칼리 공업의 발달은 당시 산업혁명의 기틀이 되었던 기계의 발명과 어깨를 나란히 할 수 있는 성과였다.

이 기사의 내용이 궁금하신가요?

기사 전문을 보시려면500(500원)이 필요합니다.

1987년 07월 과학동아 정보

  • 오진곤 교수

🎓️ 진로 추천

  • 화학·화학공학
  • 환경학·환경공학
  • 역사·고고학
이 기사를 읽은 분이 본
다른 인기기사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