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대의 낙원 통가는 식인, 생매장등 야만의 습속을 가졌던 곳이기는 하지만 이상하게도 사람들은 친철하고 이기심이 거의 없다.
세계에서 사망률 가장 낮은곳
1983년에 인구 1백명당 3.3명이 사망하여 통가는 세계에서 가장 사망률이 낮은 나라가 되었다.
섬주민 대부분은 거의가 아주 신앙심이 강한데 그중에서 약70%는 감리교도이다. 일요일에는 아무 일도 않으며 장사조차도 하지 않는다. 감리교가 들어온 이후 카톨릭 교단이 세워져 현재 이나라에서 두번째로 큰 종교집단을 형성하고 있으며 주민의 약 16%를 차지하고 있다.
수심 1만8백82m의 깊은 통가해구가 지나가고 있는 군도의 서쪽 섬들은 화산으로 형성되었으며 동쪽 저지대에는 산호층이 만들어져 있다.
통가섬 앞에 처음으로 정박한 최초의 유럽인은 1616년 화란인 '샤우텐'과 '르메르'였다. 그 후 1773년 이곳에 온 영국인 제임스 쿠크(James Cook)선장은 섬주민들이 대단히 우호적인 것으로 느꼈다. 그러나 주민들은 싸움을 아주 잘하는 전사들이었고, 그들은 카누를 타고 약6백50km나 떨어져 있는 피지섬을 빈번히 공격하였다.
오늘날에도 통가에는 쿠크가 당신의 통가의 수령이었던 투이통가(Tui Togna) 에게 보냈던 거대한 거북이의 잔해가 보존되어 있다. 이 거북이는 1966년까지 왕국의 정원에서 살고 있었다.
기이한 얘기와 습속들
이 작은 태평양의 왕국의 군주는 나라의 규모에 어울리지 않게 많은 사치를 즐긴다. 왕궁은 예쁜 작은첨탑과 둥근 창문을 가진 빅토리아식의 저택이다. 한편 이나라 왕들에게는 한 전설이 이어지고 있다. 전설에 의하면 옛날 한 추장의 부인이 임신 중에 인간의 피를 먹고 싶다는 끔찍한 생각을 하였다. 추장은 앞으로 큰 위험을 가져올 악마가 태어날 것으로 생각, 태어나는 아기가 남아일 경우에는 즉시 죽이라고 명령했다.
그러니 남자 아기를 난 부인은 아기를 살리기 위해 그 아이와 함께 숨었다. 세월이 흘러 그 아이가 성장하자, 그는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 아주 놀라운 재능을 나타내었다. 그는 북쪽의 방대한 섬나라들을 손아귀에 넣었고, 후에 왕이되어 가능한 경우는 설득으로, 어쩔수 없는 경우에는 폭력으로 모든 주변의 종족을 평정하였다.
통가왕국에는 약 2백명의 의장부대가 있다. 이 부대는 4백명의 경찰과 30명의 선원들에 의해서 증강되기도 한다. 국왕인 '토파우'(Topou)4세는 자신의 온화한 국민들이 평화시대와 함께 끔찍한 전쟁의 시기도 체험했다는 것을 잘 알고있다. 화란의 선원 '타스만'이 통가를 찾아내고 4반세기 후에 다시 화란인 '샤우텐' 등이 첫 유럽인으로서 이 섬을 방문했을 때 그들은 토착인들이 무기를 전혀 가지지 않은 것을 알았다. 또한 1773년 영국인 쿠크 선장이 왔을 때에도 그는 섬주민들이 아주 우호적임을 느꼈다.
그러나 통가인의 혈통에는 살륙, 고문, 살아있는 사람을 제물로 바치는 것 등과 같은 끔찍한 요소들이 섞여있다. 물론 그것은 '피지'에 있는 야만적인 멜라네시아인의 타락된 영향때문이기도 한것같다. 거기에서 통가인들은 식인과 남편의 무덤에서 미망인들을 죽이는 음울한 의식들을 배웠던것 같다. 결국 이러한 식인행위는 섬의 한 풍속이 되었다.
독일의 문화인류학자이며 저술가인 '게오르그-포르스터'는 이 섬에 왔을 때 통가인들이 노래를 아주 잘 하며 '타이티'인 보다도 더 좋고 우아하다고 느꼈다. 또한그가 보기에 이곳의 결혼한 부인들은 아주 예의바르게 행동하고 정조를 잘 지키는 경향이 있어 보였다. 그러나 결혼하지 않은 처녀들도 많이 있었는데 그들은 물가의 올챙이 새끼처럼 여기저기 몸을 비비꼬면서 돌아다니고 남자들과 쉽게 수작을 부리며 뱃전에 와서는 아주 알몸으로 잠을 자는 것이었다.
그는 이곳의 아주 친절한 처녀들은 구혼자의 많고 적음에 관계없이 몸을 허락하는 것이 허용된다는 것을 이해할 수 없었다. 즉 통가인의 꾸미지 않는 진실성이 그에게는 유럽인의 윤리개념과 완전히 다르다는것을 알고 놀랐다.
1797년 최초의 영국 선교사들이 와서 완고한 전통에 대항, 약간의 선교를 할수 있었다. 그러나 그들이 선물로 가져온 유용한 도구들이 바닥이 나자 처음에 보여주었던 통가인의 친절은 급격히 사라졌다. 더구나 이때 오스트레일리아 죄수 식민지에서 탈출한 죄수들과 배에서 도망한 선원들이 통가 섬으로 몰려와 주인 행세를 하며 행패를 부렸다. 이어 이상하게도 많은 추장들이 죽었기 때문에 선교는 중지되었다. 선교사 중 3명은 맞아 죽었고 한명은 귀화했으며 다른 한 사람은 1800년 한 배에 의해 구출되었다.
1822년 최초로 오스트렐리아에서 온 감리교도들이 새로운 개종을 시도했으나 실패했다. 그후 4년 뒤에 그들은 또한번 개종을 시도했다. 후에 '조지토파우'1세가 되는 막강한 세력이 '타우파아하우'(Tauf'a hau)의 도움으로 선교에 새로운 전환점을 맞았다.
토파우 왕은 일부다처제를 버렸으며 1839년에는 그의 신화들도 그것을 포기했다. 간통죄는 공개적인 곤장형으로 처벌되게 되었다. 그후, 통가의 고문이며 성직자였던 '셜리베이코'의 도움으로 헌법이 마련되었는데, 이때 만들어진 벌률의 핵심적인 부분은 오늘까지 유지되고 있다. 왕국의 모든 권력은 국왕에게 있다. 수상도 각료도 내각을 구성하는 지사도 국왕이 임명한다. 의회는 내각의 구성원과 귀족이 뽑는 7명의 대표, 일반인이 선출하는 7명의 의원으로 구성된다.
국회 총회는 탁자 하나에 둘러앉아 할수 있다. 국회의 회의모습에서 그들은 아주 생기있고 사심이 없는 것처럼 느껴졌다. 어떤 사람도 목청을 돋구어 큰소리로 떠드는 경우가 없었으며 서로의 말 속에서 서로를 느끼는 것 같았다. 국회의 열려져 있는 문앞으로 시민들이 지나갔다. 그러나 그들은 젼혀 안에서 진행되는 회의를 들여다보지 않았다. 관심의 부족일까? 호기심의 부족일까? 아뭏든 이 나라에는 정치적 투쟁이라고는 없다.
부분적으로 이러한 평화는 다복한 헌법규정의 산물이다. 토지의 모든 소작행위는 내각의 찬성을 얻어야 가능하며 매매는 법률로 금지되어 있다. 이런 규정은 통가의 식민지화를 막아주었다. 더구나 아시아로부터의 이민이 봉쇄되어 통가는 주민의 동질성을 유지할 수 있다. 현재 통가는 '토파우'4세가 다스리는데 그는 1백50개가 넘는 섬과 10만명의 사람들을 잘 이끌고 있다.
인구 10만의 영연방, 젊은이들 영어권나라 방랑
'우정의 섬'이라고도 불리우는 통가 왕국은 영연방의 일원이며, 총7백47㎢의 면적과 1백50개의 이상의 섬으로 이루어져 있다. 그 중에서 약36개의 섬만이 사람이 많이 살고 있는데, 수도 '누쿠알로하'(Nuku'alofa, 사랑의 고향이라는 뜻)가 위치하고 있는 통가타푸(Tongatapu) 도가 왕국의 중심지. 여기서 약1백60km 북쪽에 하아파이 군도가 있으며 1백km 더 북쪽으로 올라가면'바바우' (vava'u)군도가 있다. '바바우'는 섬 자체가 숲으로 덮여 있으며 왕국에서 가장 인상적인 섬일뿐더러 태평양에서 가장 아름다운 항구의 하나로 꼽힌다.
원주민들은 근처의 사모아군도에서 이주해온 것으로 여겨지는 폴리네시아인으로 약 10만명의 통가인 중에서 약 2만명이 수도인 '누쿠알로하'에 살고있다.
통가군도는 토지 부족으로 뚜렷한 산업이 발달되어 있지 않다. 청년들의 대부분은 하와이, 뉴질랜드, 오스트레일리아, 그리고 미국의 서부 해안등으로 떠돌아 다닌다. 그러나 국가와 교회에 의해서 행해지는 모범적인 교육제도에 의해서 통가의 젊은이들은 기술문명세계에서도 충분히 적응하여 살아나 갈 수 있도록 교육받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