낡은 이론의 허구를 파헤쳐 근대화학의 기초를 다신 '라보아제'는 프랑스 혁명의 제물이 되었다.
1789년 하면, 맨 먼저 머리에 떠오르는 것이 프랑스 정치혁명이다. 왜냐하면 그해 이후 비로소 자유와 평등이 정치적으로 실현되었을 뿐 아니라, 프랑스는 물론 그 밖의 다른 나라의 역사에 커다란 영향을 주었기 때문이다. 한편 바로 이 해에 '라보아제'(Lavoisier, Antoine Laurent : 1743~94)가 중심이 되어 화학의 혁명이 일어났다. 화학발전이 본궤도에 이른 계기가 되었던 것이다.
화학과는 달리 물리학은 일찌기 17세기 중반부터 눈부신 발전을 거듭하고 있었다. 물리학 연구의 핵심인 역학은 이미 갈릴레오와 뉴톤에 의해서 완성되었고, 이를 바탕으로 한 걸음 나아가서 천체역학을 비롯하여 열역학 전기학 등 여러 분야에서 빠른 속도로 발전하고 있는 실정이었다.
세 가지 장애물
그러나 화학분야는 세 가지 고질적인 장애물 때문에 물리학에 비하여 거의 1백여년이나 뒤져 있었다.
이 세 가지 장애물은 첫째 그리스 시대에 뿌리를 두고 있던 4원소설, 둘째 중세 때 매우 유행하였고 정착했던 환상적인 연금술, 셋째 산소가 발견되지 않아 산화현상을 기형적으로 설명했던 '플로지스톤'(phlogiston) 설이다. 따라서 화학이 본궤도에 오르기 위해서는 우선 세 장애물들이 제거되어야만 했다. 그러나 고질적인 전통은 그리 쉽사리 무너지지 않았다.
4원소설이란 만물의 근본은 네 가지 원소 즉 흙 물 공기 불인데, 이 네 원소가 양적인 여러 비율로 결합함으로써 만물을 생성한다는 설이다. 이를테면 혈액이나 근육은 네 원소가 같은 비율로 혼합되어 있고, 뻐는 불 물 흙으로 되어 있는데 그 비율은 4:2:2로 보았다. 그리고 이 네 원소를 결합시키거나 분리시키는 힘을 '사랑'과 '미움'으로 보고, 사랑하는 원소끼리는 결합하지만, 미워하는 원소끼리는 분리한다고 생각하였다. 이같은 고대 4원소설이 화학혁명 이전까지 화학계를 지배하고 있었다.
화학발전의 또 하나의 장애물은 연금술이었다. 연금술은 플라톤의 금속진화사상, 아리스토텔레스의 원소전화 사상에서 비롯한 것으로 값이 싸고 천한 금속(구리 아연 철 납 등)을 적당히 처리하여 값 비싸고 고귀한 금속 즉 금으로 만들어 보려는 환상적인 사상이었다. 다시 말해서 화학연구의 목표가 오로지 금을 만드는데 있었다. 이 사상은 고대부터 기원하여 중세 1천년 동안을 지배했던 것이다. 따라서 연금술 사상이 화학계로부터 떨어져 나가지 않는 한 진정한 의미에 있어서의 화학은 탄생될 수 없었다.
화학발전의 마지막 장애물은 '플로지스톤' 설이었다. '플로지스톤'이란 그리스어로 '불꽃이 도망친다'는 뜻으로 연소(燃素)라고도 부른다. 산소가 발견되지 않았던 당시(1774년 이전), '물질이 탄다'는 현상을 설명하기는 매우 어려웠다. 따라서 이 현상을 설명하기 위해서 무리하게 '플로지스톤'설을 도입한 것이다. 다시 말해서 물질이 탄다는 것은 그 물질속에 함유되어 있는 '플로지스톤' 이 그 물질로부터 도망쳐 버리는 현상이라고 생각했다.
혁명의 준비작업
장애물을 제거하는데 있어서 가장 커다란 힘이 되었던 것은 다름아닌 기체화학의 발전이었다. 1766년부터 1785년까지 약 20년간은 기체화학 연구의 전성기로서 화학혁명의 예비기간이었다. 가스의 발견이 13건, 성분과 조성을 알아낸 것이 4건, 불활성 가스를 예상한 것이 1건 등 그 연구가 다채로왔다. 그러므로 이와 같은 기체화학의 발전은 사실상 화학혁명의 튼튼한 토대가 되었다. 왜냐하면 기체화학의 발전으로 화학발전의 장애물이었던 전통적인 4원소설과 연금술 그리고 플로지스톤설 등이 제거되었기 때문이다.
기체연구의 첫 포문을 연 사람은 영국의 생리학자이자 목사인 '헤일스'(Hales, Stephan : 1677~1761)였다. 그는 1727년 최초로 물 위에서 기체를 잡아 가두어 놓는 소위 수상기체포집법을 고안하였다.
또 기체화학의 선구자인 영국의 '블랙'(Black, Joseph : 1728~99)은 1756년 탄산가스를 만들고 그 성질을 발표하였다(처음에는 탄산가스를 '고정공기'라 불렀다). 그리고 이러한 연구과정에서 최초로 천칭(天秤)을 사용하여 화학의 실험적·정량적 방법을 개척하였다. 나아가서 그는 또 다른 기체가 존재한다는 예언을 함으로써 기체화학의 연구를 더욱 자극시켰다. 한편 '블랙'의 제자인 '러더퍼드'(Rutheford, Daniel : 1749~1819)는 질소를 발견하였다(처음에는 '플로지스톤'화 공기라 불렀다). 그리고 이 기체는 가연성도 지연성도 없는 '생명이 없는 독가스' 라는 사실을 실험을 통해서 확인하였다.
영국의 과학자 '카벤디쉬'(Cavendish, Henry : 1731~1801)는 수소를 발견하였다(처음에는 '타는 공기'라 불렀다). 이 기체는 매우 가볍고 잘 타며 특히 공기와 결합할 때는 강렬하게 폭발하고 동시에 물이 생긴다는 사실을 실험을 통해서 증명하였다. 이로써 물은 원소가 아니고 화합물이라는 새로운 사실이 밝혀지게 되었다. 이전에 물은 하나의 원소로 믿어졌던 것이다.
또 개방적이고 진보적인 과학자이며 목사인 '프리스틀리'(Priestley, Joseph : 1733~1804)는 1774년 산소를 발견하였다(처음에는 탈〔脫〕'프로지스톤' 공기라 불렀다). 이 가스는 촛불을 잘 타게 하고 쥐의 생장을 두 배로 촉진시켜준다는 사실을 밝혀냈다. 특히 '프리스틀리'는 수은 위에서 기체를 가두어 모으는 방법을 고안하여 기체화학의 발전을 더욱 도왔다. 이처럼 몇몇 과학자에 의한 기체화학의 발전은 곧 라보아제의 화학혁명으로 연결되었다.
1789년, 화학혁명의 해
프랑스의 화학자 '라보아제'는 금속을 공기 속에서 가열할 때 반드시 그 금속의 중량이 증가한다는 사실을 정량적 실험을 통하여 증명하였다. 이 사실은 '플로지스톤' 설을 부정하는 실마리가 되었다. 당시 '플로지스톤'이 그 물질로부터 도망치므로 연소된 물질은 반드시 중량이 감소되어야만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실은 반대로 그 무게가 증가하였다. 이러한 현상을 '라보아제'는 어떻게 설명하였을까.
그는 금속의 무게가 증가하는 이유를 금속과 공기중의 산소와의 결합으로 설명하였다. 다시 말해서 어떤 물질이 타는 동안 주위의 공기에서 감소된 산소의 무게는 곧 그 물질의 증가된 무게와 같다는 사실을 실험을 통해서 확인하였다.
이로써 연소현상은 물질로부터 '플로지스톤'이 달아나는 것이 아니라 반대로 가연성 물질이 산소와 결합하는 것임이 밝혀졌다. 1백년 동안 화학계를 지배해 왔던 '플로지스톤'설이 붕괴되고 합리적인 화학발전의 토대가 수립된 것이다.
한편 '라보아제'는 원소의 개념을 명확히 하였고 이를 토대로 많은 원소를 발견하고 정리함으로써 원소표를 작성할 수 있었다. 그는 원소랑 어떤 수단에 의해서도 그 이상 분해될 수 없는 물질이라 정의하였다. 이런 정의 아래 '라보아제'는 33종의 원소가 실린 원소표를 작성했지만, 그 곳에는 약간의 산화물과 열소(熱素)나 광소(光素) 등이 원소로 규정되어 있다.(근대적인 것은 23종). 이것은 고대부터 화학계를 지배했던 4원소설에 종지부를 찍게 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런 연구성과를 내용으로 '라보아제'는 1789년에 유명한 '화학개요'(Traité Élémentaire de Chimie)를 출판하였다. 우연히도 이 해에는 프랑스에서 정치혁명과 화학혁명이 동시에 일어났다. 이 저서가 출판된 다음 해에는 영어로, 이어서 독일어 화란어 이탈리아어로 번역되서 새로운 화학교과서로 널리 보급되었다. 1791년 '라보아제' 는 한 화학교수에게 보낸 편지에서 "…젊은 사람들은 모두 새로운 학설에 따르고 있으므로 화학에 있어서 혁명이 성취되었다고 나는 단정하고 있읍니다" 라고 썼다.
단두대의 이슬로 사라진 '라보아제'
근대화학 혁명의 주인공이었던 '라보아제'는 프랑스 혁명과 동시에 그의 입장이 난처하게 되었다. 그 까닭은 '라보아제'는 처음부터 직업적인 화학자가 아니었고 당시 파리 시민들의 원성의 대상이었던 징세청부인(국가를 대신해 세금을 걷는 사람) 이었다. 1793년 11월 24일 혁명정부는 징세청부인을 반혁명분자로 규정하고 모든 징세청부인의 체포를 명령하기에 이르렀다. '라보아제'도 예외가 될 수 없었다. 그러나 그의 동료과학자와 외국의 과학자들이 그의 구명운동에 나섰다. 수학자 '라그랑쥬'는 재판관에게 "라보아제 와 같은 과학자를 양성하는 데는 1백년이 걸려도 어려우나 이를 처형하는 데는 단 1분도 걸리지 않습니다" 라고 탄원하였다.
재판은 형식적이었다. '라보아제'의 혐의를 입증하는 증인의 대표는 그 밑에서 일하던 사람인데, 절도와 사기의 기결수였다. 드디어 혁명정부의 재판부가 판결을 내렸다. "우리 프랑스 공화국은 과학자 따윈 필요 없다. 정의만이 필요하다." 물론 정의 그 자체는 혁명의 병적인 흥분 상태에서는 눈을 씻고 찾을래야 찾을 수 없을 것이었다. 그는 단두대에서의 처형을 선고받았다.
'라보아제'는 부인에게 유서를 남겼다. "여보, 몸 조심하시오. 그리고 내가 할 일은 다 마쳤다는 걸 잊지 마시오. 이에 대해서 신에게 감사를…." 그는 단두대로 끌려갔다. 1794년 5월 8일 아침, 그의 나이 51세 때였다.
근대화학의 개화
'라보아제' 는 단두대의 이슬로 사라졌다. 그가 유서에 남겼듯이 그는 할 일을 다 했던 것이다. '라보아제'의 화학혁명으로 근대화학은 튼튼한 기초 위에 서게 되었다. 이제 화학은 본 궤도에 올려졌다. 이 때를 맞추어 영국에서 서서히 일기 시작한 산업혁명은 화학을 새로운 모습으로 연구하도록 촉구하였다. 그 까닭은 산업혁명과 함께 대규모 섬유공업의 부산물인 화학공업과 그에 수반한 물질이론에 과학자들의 관심이 모아졌기 때문이었다.
이 시기에 정량적인 화학실험이 거듭되면서 몇 가지 경험적인 화학법칙이 발견되었다. 이런 법칙들을 초대로 영국의 '달톤'(Dalton,John : 1766~1844)은 원자론을, 이탈리아의 '아보가드로'(Avogadro, Amedeo : 1776~1856)는 분자설을 수립하였다. 이로써 화학변화의 근본적인 설명이 가능하게 되었다.
1828년 독일의 화학자 뵐러(Wöhler, Friedrich : 1800~82)는 시험관이나 플라스크 속에서 무기물질로부터 유기물질을 합성해 냄으로써 결국 합성화학의 가능성을 열어 놓았다. 합성 화학은 곧 염료공업과 연결되었다. 영국의 젊은 화학자 '퍼킨' (Perkin, William Henry : 1838~1907)은 18세 때인 1856년에 아닐린 염료를 합성하는데 최초로 성공하였고, 또 독일의 '바이어'(Baeyer, Adolf von : 1836~1917)는 알리자린이란 아름답고 빨간 합성연료를 무진장 만들어 내는데 성공하였다. 나아가 1878년 '바이어'는 남색 염료인 인디고를 합성하는 개가를 올렸다.
독일의 '하버' (Harber, Fritz : 1868~1934)는 풍부한 계획과 끈기있는 연구의 결과 촉매를 발견하였다. 이것을 바탕으로 그는 질소와 수소를 원료로 암모니아를 합성하였고 질산공업을 육성하여 화학공업의 기초를 다져 놓았다.
그밖의 스웨덴의 화학자 '베르첼리우스'(Berzelius, Jöns Jakob : 1779~1848)는 원자량을 정확히 측정하여 원자량표를 만드는 한편 원소기호를 창안하여 화학방정식을 표기하도록 기초를 다져 놓았다. 그리고 이를 바탕으로 러시아의 '멘델레프'(Mendeleef, Dimitri Ivanovich : 1834~1907)는 원소주기율표를 만들어 냈다.
이 시기의 두 가지 특기할 사실은 첫째 19세기 후반기에 화학자들은 다른 분야의 과학자들 보다 공업과 밀접하게 관련을 맺고 있는 새로운 스타일의 과학자들이었으며, 그들은 복잡한 원자의 공간적 배치를 연구하고 나아가서 그러한 연구를 산업과 결부시킴으로써 화학을 새로운 형태의 과학으로 전환시켜 놓았다는 점을 들 수 있다. 둘째로 진보적인 독일의 '화학자' '리비히'(Liebig, Justus von :1803~73)는 '기센'대학의 교수 전용의 실험실을 공개하고 많은 학생들이 실험할 수 있도록 교육제도를 개혁함으로써 근대교육방법의 선구자가 되었다는 점이다.
19세기 말까지 계속 발전한 화학은 20세기에 접어들면서 질적으로나 양적으로 크게 모습이 달라졌다. 이를테면 20세기초에 합성섬유가 출현한 이래 계속 개량과 발전을 거듭하더니 드디어 합성섬유 시대를 열어 놓았고, 화학의 의학에 대한 연구는 합성의약 시대를 열어 놓았다. 또 베이크라이트를 필두로 합성수지 시대가 시작되었고 합성고무도 대량으로 이용하게 되었다.
'라보아제'가 근대화학의 기초를 다진 '화학개요'를 출판하고 단두대의 이슬로 사라진 지 근 2백년이 되는 지금 화학은 신소재의 개발과 표면과학 연구 등 첨단과학으로 새롭게 꽃피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