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세기에 설립붐을 이룬 과학연구소는 과학문명의 터전을 닦았고 오늘날 선진국이 존재하게끔 결정적 기여를 했다.
서양의 역사에 있어서 17세기는 하나의 분수령을 이룬다. 이 시기를 기점으로 해서 중세 봉건사회는 근대사회로 탈바꿈을 하였고, 특히 자연과학이 참된 모습을 갖추게 되었는데 이를 17세기의 과학혁명이라 부르기도 한다. 17세기 과학혁명은 여러 분야에서 일어났는데, 특히 과학을 연구하는 연구소가 유럽 각지에 설립되었고 이를 중심으로 과학연구가 매우 활발하게 진행되었다. 그리고 그곳에서 얻어진 과학적 성과는 기술과 산업발전에 있어서 큰역할을 하였다.
최초의 연구소, 알렉산드리아의 '무세이온'
물론 과학연구소가 17세기에 들어와 처음으로 선을 보인 것은 아니다. 플라톤의 '아카데미아'(Academia) 아리스토텔레스의 '류케이온'(Lykeion) 등은 학문을 연구하고 교육하는 장소였다. 또 알렉산드리아의 '무세이온'도 빠뜨릴 수 없다.
알렉산드로스대왕이 사망한 후 그 영토가 부하들에 의해서 각각 나뉘어졌는데, 그중 톨레미 1세는 지금의 이집트 지방을 장악하고 국가를 새로이 열었다. 그는 과학을 열렬하게 보호하고 장려한 사람으로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시에 역사상 유명한 박물관인 '무세이온'(Museion, 그리스의 지혜의 여신인 '뮤즈'의 이름에서 유래하였고, 박물관(Museum)은 바로 여기서 유래하였다)을 세웠다.
이 곳에서는 당시 저명한 과학자 1백 여 명이 머물면서 제법 조직적인 연구를 하였으며 그 대가로 국가로부터 봉급을 받았다. 박물관에는 문학, 수학, 천문학, 의학의 분과가 있었고, 50만권의 장서를 갖춘 도서관, 동식물원, 천문관측소, 해부실 등이 부속되어 있었다. 이 '무세이온'은 약 6백년간 지속되었는데 처음 2백년은 제법 운영이 잘 되고, 성과도 있었다. 사실상 '무세이온'은 국립학술원의 성격을 지닌 역사상 최초의 과학연구기관으로서, 국가가 의식적으로 과학의 연구를 도왔던 것이다.
그후 제법 조직적인 과학연구소가 출현한 것은 중세 이슬람 시대였다. 서기 800년무렵 바그다드는 이슬람의 칼리프 제도를 바탕으로 한 학문의 중심지였다. 철학자이자 신학자인 칼리프 '알마문'(alMa'mun : 재위 813~833)은 도서관과 연구소 그리고 번역기관의 성격을 두루지닌 유명한 '지혜의 집'(Bayt al-hikma)을 세웠다. 이곳에서는 교육과 연구가 수행되고 있었지만, 특이한 것은 그리스의 원전을 번역하는 일을 맡고 있었다.
특히 칼리프 '알마문'은 국적이나 종교를 불문하고 저명한 학자를 초빙하여 번역토록 하였다. 이 번역사업으로 이슬람의 학문발전은 물론, 서유럽 기독교 사회에서 흩어지고 사라져가는 그리스의 귀중한 고전이 잘 지켜졌다. 이슬람어로 번역된 그리스 문헌은 문예부흥을 맞이한 서유럽으로 되돌아 갔고 서유럽의 학문을 부활시키는데 큰 몫을 하였다.
교회의 미움산 '실험연구소'
17세기에 들어와 과학연구소설립의 착상은 1624년 '베이컨'(Bacon, Francis:1561~1626)이 쓴 '뉴 애틀란티스'(New Atlantis)에 잘 나타나 있다. 태평양 상의 가상적인 외딴 섬 '뉴 애틀란티스'에는 '베이컨'의 사상과 뜻을 같이하는 과학자와 기술자들이 한데 모여 연구하고 있는 '솔모몬의 집'이 있다. 이곳에서 과학자와 기술자는 인류의 복지증진을 위해서 과학과 기술을 연구하고 있는데, 그들의 연구 방법은 모두 '실험'에 바탕을 두고 있다. 그리고 진리의 탐구에 있어서 '상호협조'를 강조하고 있다. 베이컨의 이런사상은 이후 과학연구소 설립을 자극하고 과학 연구소의 모형이 되었다.
17세기의 유럽 여러 나라 중에서 가장 먼저 세워진 연구소는 로마의 '린체이 아카데미'(Accademia dei Lincei)였다. 갈릴레오가 자신을 "아카데미의 회원"이라고 말한 것은 바로 이 아카데미의 회원이었기 때문이다. 이 아카데미는 생각을 같이 하는 과학자가 모여 자연철학을 비롯한 여러 자연현상에 관해서 토의하고 연구하였다. 그러나 이 아카데미는 1630년까지 밖에 존속할 수 없었다.
이러한 과학연구소 설립의 분위기 속에서 1657년 이탈리아에서 역사상 유명한 '실험연구소'(Accademia del Cimento)가 세워졌다. 이 연구소는 그 당시 부호이자 실권자인 '메디치'집안의 재정적 후원으로 세워졌는데, 갈릴레이의 제자들에 의해서 운영되었고 또한 많은 업적을 남겼다. 이 연구소의 특색은 자연을 연구하는데 있어서 어디까지나 '실험'(Cimento)을 바탕으로 한점이다. 그들의 주요 연구과제는 전기와자석, 온도 및 대기압의 측정, 고체나 액체의 열팽창 속도, 렌즈와 망원경의 개량 등이었다.
그런데 이 연구소의 회원들이 실험을 바탕으로 연구를 한 까닭에, 실험을 기피하는 교회와 아리스토텔레스의 옹호가들의 비위를 건드렸고 또한 미움을 사게 됨으로써 결국 1667년에 문을 닫고 말았다. 하지만 이 학회는 유럽 최초의 조직적인 과학연구소였고, 그 당시 실험을 바탕으로 연구를 진행했다는 점에서 그 설립 의의가매우 컸다.
무보수의 영국왕립학회
한편 17세기에 설립된 연구소중 현재까지 남아있는 과학연구소는 1662년에 설립된 영국의 왕립학회(Royal Society)이다. 영국에는 1644~45년 무렵부터 실험과학을 표방하는 자주적인 두개의 단체가 있었다. 그중 한 단체는 수학자 '윌리스'(Willis, John: 1616~1703)를 중심으로 만들어진 '철학협회'이고, 다른 하나는 명확한 조직이 없는 소위 '보이지 않는 학회'로서 화학자 보일(Boyle, Robert: 1627~1691)을 중심으로 만들어진 모임이었다.
그후 1660년 찰스 2세의 왕정복고와 함께 침체되었던 학문적 분위기가 되살아나자 위의 두 모임은 1662년 7월 15일 국왕의 정식인가를 받고 '왕립학회'라는 이름아래 정식으로 출발하게 되었다. 최초로 가입된 회원은 1백여명에 달하였다(1670년대에는 2백명, 1700년대에는 1백5명, 1800년대는 5백명).
이 학회의 전반적인 연구분위기는 순수한 이론보다도 경험을 중요시 하였다. 따라서 연구의 중점도 강연이 아닌 실험이었으므로 새로운 사실이나 법칙을 발견한 사람은 회원들 앞에서 그에 관한 실험을 통해서 증명하였다. 미국의 정치가이자 과학자인 프랭클린(Franklin, Benjamin : 1706~90)도 전기에 대한 실험을 직접 보여줌으로써 회원으로 추대되었다.
실험 못지 않게 중요한 몫을 한 것은, 이 학회에서 발간하는 잡지였다.이 학회는 1665년 3월, '과학보고'(Philos ophical Transaction)라는 이름으로 발행했는데, 여기에 당시 과학기술에 관한 지식을 실어서 국내외의 과학자에게 보냈다. 이로써 과학기술 지식의 보급은 물론, 비판과 자극을 줌으로써 과학발전에 크게 이바지하였다.
그러나 왕립학회의 회원들은 국가로부터 어떤 종류의 연금이나 보수를 받지않았고, 신분상의 특권도 누릴 수 없었다. 따라서 학회의 운영비는 회원들의 회비나 기부금으로 운영되는 것이 보통이었다. 그러므로 왕립학회라는 이름의 '왕립'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 차라리 '왕인(王認)'이라는 표현이 적절할지 모른다. 이 학회는 다만 자연과학에 대해서 호기심이 있는 지식인과 귀족 그리고 상인들로 구성된 아마추어 단체라 볼 수 있다.
이 학회의 운영에는 우여곡절도 많았다. 그 예로서 운영비를 조달하기 위해서는 자연과학에 대한 지식이 매우 천박한 사람일지라도, 학회의 회원이 되는 조건으로 다액의 기부금을 내놓기도 했다. 그래서 이 학회는 한 때 고급 사교클럽의 성격을 띠고 타락하기도 했다.
1800년대에 5백명의 회원을 확보했던것은 겉으로 보아서는 성장한듯 보였지만 질적으로 크게 뒤떨어진 것을 말해주고 있다. 그래서 왕립학회에 대한 비판의 소리가 높았던 때도 있었다. 지금 이 학회의 회원수는 약 8백명이고(회원의 약칭은 FRS이다) 그중 80여명이 외국회원이다. 오늘날 그들의 임무는 영국 과학기술정책에 관한 대체적인 자문에 머물고 있다.
'콜베르'의 진보적 아카데미 정책
한편 영국과는 대조적인 성격을 지닌 과학연구소가 1666년 프랑스에 설립되었다. 이 과학 연구소가 바로 왕립과학아카데미(Acad'mie Royale de Science)이다. 물론 프랑스에서도 이 연구소가 설립되기 전에 연구소 설립의 기운이 오랫동안 크게 감돌고 있었다. 이러한 움직임을 자극했던 이유로서는, 영국의 왕립학회가 활동하고 있다는 점, 과학연구가 한 개인의 원조로 오랫동안 지속될 수 없다는 점, 그리고 과학 그 자체가 사회에서 커다란 기능을 발휘하기 시작한 점 등을 들 수 있다.
여기에 생각이 미친 프랑스의 지식인들은 비공식적이고 비정기적인 모임을 여러곳에서 자주 가졌다. 그 예로서 '파스칼'(Pascal, Blaise: 1623~1662)을 중심으로한 그룹은 거리의 카페 같은 곳에 모여 발명·발견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었고, 때로는 서신교환을 하기도 했다.
과학사상가인 '메르센느'(Mersenne, Marin: 1588~1648)는 자기집 지하실에 프랑스의 유명한 과학자들 초대하여 과학·기술에 관한 이야기를 진지하게 논의했다. 그리고 경우에 따라서는 국내외의 과학자들과 서신교환을 하는데 돕거나 앞장섰다. 그래서 '메르센느'의 지하실은 프랑스 과학 뿐만 아니라, 전유럽과학의 정보교류의 중심이 되었다. 이런 면에서 보면 '메르센느' 개인이 하나의 과학연구소였다고 보아도 과언이 아니다.
메르센느가 죽은지 얼마 안되어서 부유한 귀족인 '몽모르'(Montmor, de Habert: 1600년경~1679)는 프랑스 과학의 후원자가 되었고 그의 집에서 '몽모르 아카데미'회원들이 모였다. 여기에서 1650년대의 프랑스 과학의 구심점을 찾게 되었다. 그리고 '몽모르 아카데미'의 모임은 그후 과학연구소로 자라게 될 기초를 닦아 놓았다.
그러나 당시 이와 같은 모임은 비공식적이고 비정기적인데다가 재정적 바탕이 매우 빈약했다. 이런 이유를 들어 각종 모임의 회원들은 1663년 루이14세의 재상인 '콜베르'(Colbert, Jean Baptiste:1619~1683)에게 재정적 원조를 요청하였다. '콜베르' 자신도 과학의 발달과 그 응용이 프랑스의 공업과 상업을 발전시키는 원동력임을 확신하고 과학의 연구를 그의 정책(중상주의)에 편승시켰다. 이로써 영국과 달리 프랑스는 순수한 왕립과학아카데미를 갖게 되었다. 이곳에는 20명의 엘리트 과학자들이 왕실로부터 급료를 받으면서 연구를 진행시키고 있었다. 아마추어적인 과학자가 아니고 직업적인 과학자들이었다. 이 아카데미의 주요연구과제는 자연과 기술에 관한 자료의 수집, 동식물의 연구, 프랑스의 지도작성, 망원경과 현미경의 개량, 동력기관의 연구, 인체해부학, 수질검사 등 이었다.
왕립과학아카데미는 1789년 프랑스 혁명과 함께 1793년 폐쇄되었다가 1975년 국립학사원의 일부로서 재건되었다.
영국이나 프랑스에 비해서 사회발전이 뒤늦었던 독일은, 1700년에 이르러서 철학자이자 수학자인 '라이프니츠'(Leibniz,Gottfried Wilhelm: 1646~1716)가 중심이 되어 베를린과학아카데미(Akademie der Wissenschften zu Berlin)를 설립하였다. 그 뒤를 이어서 1724년 러시아의 피터스부르크의 과학아카데미가 피터대제에 의해서 설립되었다. 그러나 이들 두 학회는 별다른 진전이 없었다. 그 까닭은 두 나라는 당시 과학이 뿌리를 깊게 내리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회원의 지도자는 모두 외국의 과학자들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밖에 스웨덴, 노르웨이 그리고 멀리는 미국에까지 과학연구소 설립의 분위기가 점차로 잡혀갔다.
이처럼 17세기 유럽각지의 조직적인 과학연구소 설립붐은 유럽 과학발전의 원동력이 되었다. 과학연구소는 바로 과학적 성과가 탄생되는 온실과도 같았다. 많은 과학자들이 모여 과학정보를 교환함으로써 거대한 과학문화의 토대를 닦아 놓았다.
현대에 있어서도 과학연구소의 의의는 대단히 크다. 각 국가는 어떤 형태의 과학 연구소를 설립 운영하느냐에 커다란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 이런 관심의 결과는 한 국가의 과학정책으로까지 번져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