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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엽제(枯葉劑)살포, 그이후

월남전의 화학무기가 자연과 인간에 남긴 유산

현대 화학전이 얼마나 두려운 상처를 남겨주는가. 본고는 스웨덴의 '스톡홀름 국제평화연구소'가 펴낸 '전쟁에서의 고엽제- 그 길고 긴 생태 및 인간에 대한 영향'을 기초로 '뉴욕타임즈'지 등을 인용해 정리한 것이다.

붙어있는 쌍동이

 

쌍동이 형제인 '베트와 '독'은 두 달만 지나면 다섯살이 되지만 아직까지 한 번도 뛰어놀지 못했다. 명랑하며 잘 웃는 '독'과 커다란 눈이 초롱초롱하고 얌전한 성격의 '베트'는 상반신과 두뇌 만이 독립되어있을 뿐, 하반신은 붙어있는 기형아이기 때문이다.

미군이 대량으로 고엽제를 살포했던 남베트남의'지아라이 콘툼' 마을에서 1981년에 태어난 이들은 전쟁과 '과학무기'가 엮어낸 비극을 자기네 몸으로 증명하고 있다.
 

1961년에 시작되어 1975년까지 계속된 2차 인도차이나 전쟁 동안, 교묘히 잠적하고 좀처럼 잡히지 않는 베트콩 때문에 골머리를 썪이던 미군은 적의 은신처와 이동의 자유를 빼앗고 그들을 먹여살리는 지역의 민간경제를 파괴하기로 결심했다.

'고엽작전'이라 불리우는 이 전략의 요체는 남베트남의 산림과 해안 그리고 논의 수목을 말려 죽이는 고엽제를 전례 없이 대량으로 또한 지속적으로 퍼붓는 것이었다.
 

이러한 전략이 소기의 성과를 거두었는지에 대해서는 의문이 많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고엽제의 사용으로 말미암아 광대한 농토가 폐허가 되었으며 내륙의 밀림과 해안 생태계가 오랫동안 회복하지 못할 큰 타격을 입었다는 사실이다. 기형아 출산, 염색체 손상, 간암 및 간염의 발생등 수많은 인체의 건강피해는 또한 빠뜨릴 수 없는 고엽작전의 유산이다.

 

1g으로 2만명을 죽이는 '다이옥신'
 

적의 농작물이나 산림을 파괴하는 것은 수백년 동안 전쟁의 중요한 부분이 되어왔다. '전쟁론'으로 유명한 '클라우제비츠'도 산림의 군사적 중요성을 강조한 바 있다.
 

그러나 실제로 식물을 상대로 한 군사작전이 최초로 벌어진 것은 1950년대 중반 '말라야'반도에서 였다. 영국은 식민지였던 말라야의 반란군을 진압하는데 고엽제를 사용했다. 반도들이 도로변에 매복하는 것을 방지하거나 그들이 재배하는 작물을 파괴하려는 것이 주목적이었다. 이때 쓰인 고엽제는 2,4,5,-T와 2,4-D 그리고 '트리클로로 아세트'산의 혼합물이었다.
 

고엽제는 제초제와 같은 뿌리에서 나온 것이다. 이미 19세기 이래 농업과 원예에 무기(無機)제초제가 널리 쓰였다. 1930년대 중반 이후에는 유기제초제가 다양하게 개발되어 일상적으로 쓰이게 되었다. 그러나 제초제 발전의 가장 중요한 계기는 '페녹시'의 발견으로 볼 수 있다. 이 화학물질은 식물 호르몬과 비슷하게 행동함으로써 식물을 보다 효과적으로 죽이는 강력한 무기가 되었기 때문이다.
 

2차대전 동안 미국은 작물을 파괴하는 무기를 만들기 위해 1천 종의 화학약품을 시험했다고 한다. 이때 개발된 것이 오늘날 세계에서 가장 널리 쓰이는 제초제인 2,4-D이다. 이것의 사촌격이며 널리 사용되면서도 많은 안전성의 논란을 일으킨 2,4,5,-T도 이 기간동안 개발되었다.

'랜치 핸드'(Ranch Hand : 목동)라는 암호 아래 미군이 남베트남에서 수행한 고엽작전의 주역은 흔히 '오린지'제라는 고엽제 혼합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실상은 4가지 고엽제가 여러가지로 섞인 3종의 혼합물이 주로 쓰였다.
 

즉 '오린지'제는 2,4-D와 2,4,5,-T의 혼합물이며 '화이트'제는 2,4-D와 '피클로램'의 혼합물이며 '블루'제는 '카코딜' 산으로 이루어져 있다. 여기서 '오린지' '화이트' '블루'라는 이름은 고엽제를 담은 드럼통에 두른띠의 색깔에서 연유한다.

고엽제를 구성하는 화학물질 중 문제가 되는 것은 '카코딜'산과 2,4,5,-T이다. 총 3백만 ㎏이 뿌려진 '카코딜'산에는 거의 2백만㎏의 맹독성 비소가 섞여있다. 또한 2천4백만 ㎏이 살포된 2,4,5,-T에는 최근 미국에서도 물의를 빚은 '다이옥신'이라는 독성물질이 1백70㎏ 정도 불순물로 섞여있다.
 

'다이옥신'의 가공할 독성은 유명하다. 이 물질 1g으로 2만명의 사람을 죽일 수 있을 정도다. 실험적으로는 0.6ppb(10억분의 1단위)의 '다이옥신'으로 모르모토가 죽으며 그보다 낮은 농도에서도 기형을 발생시켰다고 보고된 바 있다.

더욱 무서운 사실은 '다이옥신'이 환경에서 안정하기 때문에 쉽게 분해되지 않고 DDT처럼 지방질 조직에 축적되는 성질을 갖는다는 점이다. 다시 말해서 환경 속에 미량이라도 누출된 '다이옥신'이 먹이사슬을 통해 인체에 고농도로 농축될 가능성이 크다는 것이다.

 

<;표1>;2차 인도차이나전쟁 중 미군이 뿌린 고엽제의 양


9천1백만 ㎏의 고엽제 살포
 

굉음을 울리는 두 대의 전투용 헬기가 사이공 북방의 '마다' 산림을 저공비행하며 무차별 사격을 가했다. 뒤이어 나타난 세 대의 육중한 C-123 수송기가 희뿌연 안개를 일으키며 사라졌다. 순식간에 이루어진 고엽작전으로 정글의 밀림은 사형을 선고받았다.
 

수송기가 고압노즐을 이용해 뿌린 고엽제는 직경 0.35㎜의 물방울 상태였다. 보통 전투기의 엄호 아래 2분간 살포작업이 이루어지는데, 급할 때는 30초 동안 30ha에 고엽제를 뿌리기도 했다. 3대에서 5대의 수송기가 나란히 편대를 이루어 이 일을 하는데 한 대의 비행기는 보통 폭 1백50m 길이 8.7㎞의 대지를 고엽제로 적신다.
 

남베트남에 뿌려진 고엽제의 총량은 9천1백만 ㎏에 달한다. <;표1>;에서 볼 수 있듯이 고엽제의 사용은 1961년에 시작되어 1969년에 절정을 달했다가 1971년에 종료되었다. 가장 많이 살포된 것은 말썽 많은 2,4,5,-T를 포함한 '오린지'제로서 전체의 61%를 차지한다.
 

'오린지'제와 '화이트'제는 식물호르몬의 작용을 흉내내는 물질이어서 대상식물의 정상적인 대사를 교란시켜 죽음으로 이끈다. 한편 '블루'제는 건조제를 함유하기 때문에 식물을 말려 죽인다. 따라서 산림 파괴용으로 주로 쓰인 것은 '오린지'제와 '화이트'제였고, '블루'제는 주로 벼와 곡물을 죽이는데 사용되었다. 그 비율은 산림의 파괴에 전체 고엽제 중 86%가 쓰였고 14%는 작물의 파괴에 이용되었다.
 

고엽제의 세례를 받은 지역은 주로 남베트남의 산림과 논으로서 그 면적은 1백70만헥타아르에 달한다. 그 가운데 34%에 해당하는 57만8천 핵타아르는 두 번 이상 화학무기의 공격을 받았다. 전체적으로 볼 때 모든 지역은 평균 1.5회의 고엽제 공격을 받은 셈이다. 헥타아르 당 42리터(순약제 32㎏) 가 뿌려진 셈이다.
 

<;그림1>;은 남베트남에서 고엽제의 공격을 받은 지역을 표시한다. 대략 남베트남 전토의 10%가 고엽제 세례를 받았다고 추산되지만 사이공(현재의 '호치민'시)를 둘러싸고 있는 제3군사지역은 가장 집중적인 고엽제 공격을 받아 피해지역은 30%에 이른다.

 

(그림1) 남베트남의 고엽제 살포지역


심각한 만성적 영향
 

1983년 1월 '호치민'시에서는 "전쟁에서의 고엽제가 인간과 자연에 미친 장기적 영향에 관한 국제 심포지움"이 21개국 1백28명의 과학자와 여러 유엔 전문기구의 대표가 참석한 가운데 개최되었다. 각각 4개의 생태학 및 생리학 작업단으로 나뉘어 진행된 이 모임에서는 화학전쟁이 베트남에 미친 장기적 결과를 심층적으로 분석했다. 전쟁의 와중에는 흘려넘겼던'과학전쟁'의 결말을 과학자들의 양심은 외면하지 못했는지도 모른다.
 

이미 국제자연보존연학(IUCN)은 한 보고서에서 베트남 국토의 3분의1이 고엽제 살포와 융단폭격으로 황무지가 되어 버렸으며 이대로 방치할 경우 21세기 이전에 전 베트남이 불모의 땅으로 돼 버릴 것이라고 경고한 바 있다. 2차대전 중 미군이 사용한 폭탄 양의 2배가 좁은 베트남 땅에 투하되어 3천만개 이상의 구덩이가 생겼고 이로 인해 토양이 불모화되고 말았다는 이야기는 믿기지 않는 사실이다.
 

그러나 위 심포지움에서 충격적으로 밝혀진 사실은 자연 뿐만 아니라 인간까지도 고엽제의 심각한 후유증에 시달리고 있다는 것이다.

고엽제에 노출된 인간은 즉각적으로 현기증 두통 구토 호흡곤란을 느끼며 사망자가 생기기도 한다. 문제는 이러한 증세를 일으키는 고엽제가 다량으로 투입된다는데 있다. 왜냐하면 적지에서 위급한 경우에는 비행기가 순식간에 많은 고엽제를 투하해야 하기 때문이다.
 

또한 앞서도 지적했듯이 '오린지'제에 포함된 다이옥신은 1㎎에서 1㎍만 있어도 조직과 대사에 광범한 기능장애를 일으키는 매우 위험한 독물질이다. 대개 다이옥신은 헥타아르당 1백10㎎ 정도 뿌려졌지만 때로는 그 양이 1~2g에 달하기도 했다.

간접적인 효과지만 고엽작전은 인구이동을 촉진시켜 전염병의 확산에 기여했고, 농작물의 파괴는 식량부족을 야기하여 만성적이고 심각한 보건문제를 야기했다.
 

고엽제는 토양과 생물체 내에 잔류하여 독성이 오래 지속되며 먹이연쇄를 통해 독성이 농축되기도 한다. 독성의 잔류기간은 1주일에서 18개월까지 다양하지만 맹독성의 다이옥신은 독성이 절반으로 줄어드는 데만도 3년 반이 걸린다.

 

유산, 사산, '괴물'의 출생
 

환경과 음식물을 통해 고엽제가 인간에 미치는 만성적 영향은 보다 심각하다. 우선 고엽제에 노출된 사람이 만성간염에 걸릴 확률이 높다는 것이 밝혀져 관심을 끈 바 있다.

고엽제는 또한 임신에 불행한 결과를 초래한다. 유산과 사산의 빈발, 기형아 출산 그리고 포상기태(胞狀奇胎 : molar pregnancy ; 태아가 발생하는 대신 태반 세포가 이상 증식하는 것으로 암으로 발전할 수 있다)등이 그것이다.
 

고엽제가 인간의 생식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가에 대한 서구 과학자들의 견해는 '클라인'의 다음과 같은 말에 잘 요약돼 있다. 즉 "결론적으로 지금까지 출판된 어떤 연구도 고엽제에의 노출과 기형아 출산과의 연관을 증명하지 못했으며, 그렇다고 부정하지도 못했다."
 

이에 비해 베트남의 학자들은 최근 여러가지 인상적인 실증자료를 제시하고 있다. '누엔 딘 코아'는 1965년에서 82년까지 17년동안'아 뤄이' 계곡에서 고엽제가 심하게 살포된 지역과 그렇지 않은 지역을 비교 조사한 결과, 살포된 지역에서는 10%의 유산(1천 3백 30번의 임신 중 1백 34회 유산)이 발생했으며 비살포 지역에서는 그 비율이 6%였다고 보고했다. 또한 기형아 출산은 비살포 지역이 1%인데 비해 살포지역은 3%(8백 20회 임신 중 23회)라고 밝혔다.
 

'호 당 누엔'은 전쟁 중 심하게 고엽제가 살포되었던 '타이 닝'지역의 한 병원에서 1979~82년 기간의 출산기록을 검토했다. 그결과 57명의 선청성 기형아 중 2명은 그야말로 '괴물'이었으며,8명은 뇌가 없었고, 4명은 눈이 없었으며, 4명은 사지가 짧았고 4명이상은 골격이 심하게 휘었음을 알아냈다.
 

<;표2>;는 고엽제가 임신에 얼마나 악영향을 미쳤는가를 잘 보여준다.

의학적 관심을 끄는 사실은 고엽제에 노출된 남자와 그렇지 않은 여자 사이에서도 유산의 빈도가 높고 기형아 (특히 언청이)가 태어나는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이것은 고엽제의 영향이 남자를 통해 나타난다는 것을 시사한다.

 

회색의 죽음의 계곡
 

"…나무가 모두 죽어 거무죽죽하고, 낙엽이 져서 헐벗은 땅이 그대로 노출되어 시커먼 바위와 회갈색 나무들이 황량한 풍경을 이루었고, 생명체라고는 찾아볼 수 없을 만큼 살벌한 땅…"
 

소설가 안정효씨는 월남전 참전의 경험을 바탕으로 쓴 한 소설에서 고엽제가 쓸고 간 '죽음의 계곡'을 이렇게 묘사했다.

남베트남 전국토의 60%를 덮고 있던 울창한 산림과 그 속에서 뛰어놀던 동물들 그리고 미묘한 생태계의 균형을 유지하던 해안가의 홍수림은 고엽제의 가장 눈에 띄는 제물이 되었다.
 

고엽제의 공격을 받은 나무의 꽃과 열매는 물론 거의 모든 잎사귀가 2~3주 내에 떨어졌다. 10% 이상의 나무는 공격을 받은 즉시 죽었으며 살아남은 나무라도 다음 우기(雨期)가 올 때까지는 몇 달 동안 벌거숭이 인채로 남겨졌다.

두 번 이상 공격을 받거나 짧은 간격을 두고 고엽제 세례를 받은 나무가 죽는 비율은 훨씬 높았다. 결과적으로 2천만 ㎥의 상업적으로 유용한 목재가 상실되었다. 전문가들은 이러한 내륙산림이 원래대로 되살아나려면 최소한 80년 내지 1백년은 걸릴 것으로 내다보고 있다.
 

고엽제 공격을 받은 산림은 잡초와 대나무 숲으로 바뀌었다. 또한 토양의 조성이 바뀜으로써 유용한 미생물이 죽어 땅의 비옥도는 떨어졌다. 토양의 산성화와 침식이 가속되어 영양분이 누출되었고 비옥한 정글은 황량한 초원으로 바뀌었다. 설상가상으로 건조기가 되면 빈번한 폭격과 네이팜탄 공격이 화재를 몰고와 황무지는 점차 산림을 침식해 들어가는 양상을 보였다. 열대우림의 산악국가가 사막화를 걱정하게 된 것이다.

 

고무농장 3분의 1 파괴
 

고엽제를 이용한 대규모 농장물 파괴작전은 미국 내에서 윤리적인 논란을 일으켰지만 2차 인도차이나 전쟁 중 체계적이고 대규모로 수행되었다. 그 결과 전 경지의 8%에 해당하는 35만 6천ha의 농경지가 1회 이상 화학무기 세례를 받았고 3억㎏ 이상의 식량이 즉각적으로 못 쓰게 되었다. 더불어 남베트남의 주요한 플랜테이션인 고무농장의 3분의1이 파괴되었다.
 

열대지방 해안의 홍수림(紅樹林)은 생태학적으로 중요한 역할을 한다. 홍수림은 해양생물의 산란장이자 어린 생물의 양육장이며 해안의 침식을 막아준다. 그러나 베트남 남해안의 습지를 이루는 홍수림도 고엽제 공격을 피하지는 못했다. 내륙의 산림과는 달리 홍수림은 단 한번의 공격에도 괴멸적인 피해를 입으며 재생되는 일이 거의 없다고 한다. 전쟁이 끝난 후 베트남의 어업은 이러한 홍수림의 파괴로 인해 현저한 어획량의 감소를 보였다. 전체 홍수림 가운데 40%를 차지하는 12만 4천 ha가 황폐화한 당연한 귀결이었다.
 

베트남의 밀림은 동물의 낙원이었다. 나무가 크고 식물의 종류가 다양하며 계절의 차이가 적기 때문에 동물들은 다양한 거주지와 먹이를 찾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사실 내륙산림의 나무들은 높이가 40m가 넘고 곧은 줄기를 가졌으며, 줄기의 중간 부분의 지름이 2m에 이르는 것들이 허다했다.
 

고엽제는 이러한 좋은 조건들을 앗아가버렸다. 질 좋은 숲이 나쁜 식물로 바뀌면서 거주지가 없어졌고 따라서 먹이 찾기가 힘들어졌다. 동물의 경우 대개 고엽제의 직접적 영향을 받는 밀림의 상층부에 살기 때문에 숲의 상실은 그들의 삶에 결정적 타격을 입힌다. 한 조사는 비살포 지역에서 조류와 포유류가 각각 1백70,55 개체인데 비해 할포지역에서는 24,5 개체 밖에 관찰되고 있는 않음을 보고했다. 특이한 점은 전체적으로 야생동물이 감소한데 반해 쥐 등 설치류는 증가했다는 사실이다.

 

<;표2>;남베트남의 생식이상 통계


시민운동으로 고엽제 금지
 

1971년 닉슨행정보는 남베트남에서의 고엽작전 중지를 선포했다. 이미 미국내에서 제초제용으로 다량 사용돼던 2,4,5,-T에 대한 국민들의 비등한 우려와 부작용을 규명키 위한 과학자들의 끈질긴 노력의 결과였다.
 

2,4,5,-T와 그 속에 포함된 다이옥신이, 기형아를 낳게 하는 악명 높은 수면제인 '탈리도마이드' 처럼 기형발생 물질이라는 것은 이미 1963년 미국 바이오네틱스연구소의 생쥐실험으로 밝혀졌다. 그러나 이 사실은 정부에 의해 공표되지 않다가 시민운동그룹에 의해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한편 미국 과학진흥 협회(AAAS)는 1969년 베트남에서 고엽작전이 환경과 건강에 미치는 영향을 조사하기로 결정했고 이듬해 8월'메젤슨'과 '웨스팅' 등을 베트남 현지에 파견했다. 정부의 고엽작전 중지 결정은 AAAS의 고엽제 평가 위원회의 충격적인 보고서가 발표되기 며칠 전에 내려졌다.
 

고엽제의 유산이 베트남에만 남겨진 것은 아니었다. 베트남에서 고엽제를 직접 뿌렸거나 고엽제가 살포된 지역에서 작전했던 미군들 중 많은 수가 암에 걸렸거나 간 또는 신경질환에 시달렸으며 부인이 유산 또는 기형아를 낳는 일이 속출하기 시작했다.
 

이에 퇴역군인들은 전국조직인 "베트남 재향군인 오린지제 희생자회"(VVAOV)를 조직했다. VVAOV의 대표인 39세의 '맥카디'씨는 아직 자식이 없다. 그는 "월남에서 7번이나 오린지제가 뿌려진 곳에서 근무했는데 고엽제를 뿌리는 비행기를 볼 때 마다 무척 즐거웠다. 그 이유는 빽빽이 우거진 정글을 칼로 쳐내면서 뚫고 나가본 사람이면 알것이다. 하지만 전우 두 사람이 최근 기형아를 낳고부터는 아이를 가질 용기를 잃었다"고 털어놓았다.

 

손해배상청구
 

1979년9월24일 재향군인들은 오린지제의 제조회사인 '다우케미칼'을 포함한 7개 업체를 상대로 4백억 달러 규모의 집단 손해배상 소송을 제기했다.
 

이 소송의 원고에는 1961년부터 71년까지 베트남에서 근무했고 오린지제로 인한 피해가 있는 재향군인이면 모두 포함되었고, 호주와 뉴질랜드에서 파병된 4만명 이상의 퇴역군인도 이에 가담할 예정이었다,
소송비용만 1억 달러로 예상된 이 소송의 증인으로는 '헨리 키신저' 전 국무장관, '윌리암 웨스트모어랜드' 전 주월 미군사령관 등 5백 명에 가까왔다.
 

이 소송은 거의 5면 동안 양자간의 격력한 논쟁을 불러 일으킨 끝에 1984년 5월 8일 '부룩클린' 연방 법원에서 재판이 열리게 되었다.

그러나 재판이 열리기 수시간 전 재향군인 대표와 기업측의 극적인 합의에 도달했다. 7개 제조업자들은 재판을 피하기 위해 고엽제로 인한 피해를 입었다고 주장하는 수천의 재향군인과 그 가족에게 1억 8천만 달러의 기금을 마련해 주기로 제안했고 이것이 재향군인 대표에 의해 받아들어진 것이다. 원고는 소송을 취하했다.
 

원고측 변호사인 '야나코'씨는 "퇴역장병들이 베트남전의 최후전쟁에서 승리했다"고 기뻐했다. 한편 '다우 케미칼'측은 "비록 과학적으로는 우리가 유리하지만 이처럼 감정이 개입되기 쉬운 재판에서 재판관이 사리를 옳게 가릴지는 의문"이라고 토로했다.

하루에만도 6만 1천 달러씩 불어나는 이 거액의 타협액도, 대상이 되는 재향군인이 많기 때문에 일부의 불만은 막을 수 없었다. 이들은 정부를 상대로 다시 한번 소송을 제기하려고 벼르고 있다.
 

결국 미국 정부는 1984년9월25일 고엽제의 피해를 규명키 위한 1억 달러 상당의 연구에 착수했다. 최소한 10년이 걸릴 이 연구는 정부가 추진한 최대규모의 의학연구라고 한다.
 

'애틀란타'에 새로 세워질 연구소에서 수행될 이 연구의 목적은 고엽제로 인한 피해의 여부와, 피해가 있다면 그들을 가려내는 방법과 치료법을 찾아내는 것이다. 한 가지 흥미로운 연구 주제는 베트남의 전방과 후방에 떨어져 복무한 6백 쌍의 쌍동이를 대상으로 고엽제의 영향을 비교분석하는 것이다.

 

과학자와 과학무기
 

월남전이 끝난지도 만 11년째 접어들고 있다. 하지만 아직까지도 베트남의 농·어민들은 고엽제의 후유증을 매일 실감하고 있다. 미국이 싸운 상대가 베트남의 가난한 농·어민이 아닐텐데 말이다. 이 불모의 땅을 베트남인에게 충분한 식량을 제공할 수 있는 비옥한 땅으로 만들기까지 얼마나 걸릴지 어떤 전문가도 예측하지 못하고 있다. 해결방안을 제시하는 과학자는 더우기 없다. 과학자는 건설보다는 파괴에 더 재능을 발휘하는 것일까?

 

내가 본 베트남의 밀림 고엽제에 대해서 아무도 관심갖지 않았다
 

1968년 주월특파원 임기를 마치고 귀국한 필자는 미처 쉴 사이도 없이 남태평양의 2차대전 전적지 순회취재길에 올랐었다. '파푸아 뉴기니'동북쪽에 위치한 '비스마르크'제도의 그 유명한 '라바울', '마누스'섬의 야자나무숲은 그야말로 장관이었다. 뜨거운 태양이 작열하는 적도상의 섬들인데도 유난히 넙적한 야자나무잎은 푸르다 못해 검을 정도로 생기를 내뿜고 있었다. 금새 잎사귀에서 기름이 뚝뚝 방울져 내릴 것처럼 햇빛에 번들거렸다.
 

문득 베트남의 야자나무숲이 떠올랐다. 같은 상하(常夏)의 땅인데도 베트남의 야자나무들은 왜 그토록 생기가 없었을까. 주월미군당국이 고엽제를 뿌린 탓만은 아닌것같았다. 너무도 긴 세월 이어져 온 전쟁 때문에 사람처럼 식물들도 그렇게 지쳐 버린 탓은 아니었을까.
 

베트남 전쟁은 68년 '테트'공세를 고비로 사이공 정권의 패망을 향해 줄달음질치고 있었다. 주월미군이 고엽제라는 화학무기를 쓰기 시작한 것은 이보다 전의 일이었지만, 필자가 특파원으로 근무했던 67~68년 전후의 무렵에는 한국특파원은 물론 외국특파원들 사이에도 고엽제가 화제로 오른 바가 없었다. 물론 종군 취재할 때, 여기저기 정글이 바싹 말라붙어 나무들이 죽어 있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미군들이 고엽제를 뿌렸다는 말은 현지 하급 지휘관들이 들려주었다.
 

그러나 당시만 해도 고엽제가 그처럼 문제삼을 정도는 아니었던 것 같다. 고엽제가 화학무기로서 사람에게 유전적 장애를 일으키는 등 생태계의 파괴를 초래한다는 문제제기도 베트남 전쟁이 끝난 뒤의 일이었으니까. 그때만 해도 모든 특파원들은 이 화학무기인 고엽제를 단순한 잡초제거용 농약쯤으로 인식한 수준에 머무르고 있었던 것 같다.
 

사이공 시청 앞 '렉스'호텔에 자리잡은 주월 미군 공보실(JUSPAO)에서는 매일 오후 5시면 전황에 관한 브리핑이 열린다. 이 자리에서 미군당국이 스스로 고엽제의 사용을 브리핑할 수는 없었겠지만, 신랄할 정도로 심한 질문을 퍼붓기 일쑤인 미국특파원을 비롯한 외국특파원들도 고엽제에 관한 질문을 한번도 한 적이 없었다. 모두 전투종군 취재중 고엽제로 말라 죽은 숲을 목격했으면서도 말이다.
 

주월한국군의 고위지휘관들도 그들의 숙소에서 필자와 밤늦도록 술잔을 기울이며 갖가지 이야기를 나누는 기회가 많았지만, 한번도 고엽제에 관한 이야기는 한 일이 없었다. 가정사에서부터 베트남 전쟁 등 종횡무진으로 이야기가 펼쳐지는데도 그러했던 것을 보면, 주월한국군지휘관들도 고엽제가 내포하고 있었던 심각한 문제점을 미처 예기치 못했던 것으로 짐작된다.
 

헬리콥터에서 내려다본 베트남의 정글은 문자 그대로 수해(樹海)였다. 특히 미군이 담당하고 있었던 베트남중부지역은 왕 대나무와 아름드리 관목으로 우거져 한치앞이 안보일 정도로 울울창창했다. 어쩌다 띄엄띄엄 쥐 파먹은 머리통처럼 극히 일부분만 나무들이 죽어있을 뿐이었다. 그 드넓은 정글지대를 초토화하여 월맹군의 동정을 관측하기 쉽도록 하기위해서는 아마 10t이 아니라 수백, 수천만t의 고엽제를 뿌려야 했을 것이다. 더구나 나무등걸은 그대로 남아있게 마련이어서 고엽제의 전술적 효과도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 상공에서 미군의 정찰기가 아무리 휘젓고 다녔어도 대규모의 월맹군 이동을 전혀 눈치채지 못했으니 말이다. 베트남 전쟁사상 최대 격전지였던 '닥토'에 종군했을 때, 한 미군장교가 내뱉은 푸념이 이를 반증한다.
 

"적이 보여야 싸움을 하죠"

베트남 전쟁이 끝난 지도 어언 11년. 우리군과 파월기술자들이 머물렀던 그곳은 지금 어떤 모습들을 하고 있을까. 지금이라도 달려가면 재미있는 기사가 무진장 쏟아질 것만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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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6년 02월 과학동아 정보

  • 동아일보사 편집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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