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를 공부하는 분들이 아니라도 '처음'이 갖는 뜻에 대해 누구든지 관심이 크게 마련이다. 1883년 창간된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신문인 '한성순보'(漢城旬報)에 대한 관심은 신문사를 연구하는 사람들 뿐 아니라 일반 호사가들에게도 심심찮게 관심의 대상이 되고 있다.
과학기사 많이 다룬 최초의 신문
한성순보의 여러가지 특징중의 하나는 외국의 과학기사를 많이 다루었다는 점을 꼽을 수 있다. 주로 중국의 상해에서 펴낸 과학잡지 '격치편'(格致編·The Chinese Scientific Magazine)과 '화학감원'(化學鑑原)에서 옮긴 이 과학기사들은 당시 서양의 전신, 전기, 철도, 기선, 천문학에 관한 이야기들이었다. 그런데 당시 일본은 이미 과학계몽가들이 있어 같은 소스의 자료를 이해하기 쉬운 말로 번역하여 과학을 대중화하기 시작한데 비해 우리는 중국어로 된 서양과학기사를 전재하는데 그쳤으나 지도층의 과학기술에 관한 관심을 부추기는데 적지않은 역할을 했던 것으로 생각된다. 우리 말로 된 과학기사를 실은 최초의 대중매체는 1897년 4월1일에 창간된 순한글의 주간지 '그리스도신문'이었다. 미국 장로교 선교사 '언더우드'(H.G.Underwood)가 펴낸 이 신문은 당시 주한미국공사이며 농업전문가였던 '실'(John M.M.Sill), 미 북장로교회의 선교의사였던 '알렌'(H.N.Allen)과 '에비슨'(O.R.Evison)을 비롯한 여러 재한 미국인들이 집필한 과학기사를 언더우드 등 선교사들이 우리말로 옮긴 것이다. 그러나 이밖의 개화기에 나온 다른 신문들은 과학기사에 대한 관심이 거의 없었다.
우리나라에서 처음 나온 과학 전문지는 1905년에 창간된 '물리학잡지'(物理學雜誌)였으며 1908년에는 '공업계'(工業界)가 나왔다. 우리나라 최초의 과학기술 종합월간지인 공업계는 발행인 신규식(申圭植)이 창간사에서 밝히듯 "2천만 공중에게 공업사상을 고취할 목적"으로 발행했으나 4호의 단명으로 종간하고 말았다. 1908년11월 최남선(崔南善)이 창간한 '소년'(少年)은 과학지가 아니면서도 많은 과학기사를 다루어 청소년들의 과학지식계몽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일제하의 민족언론 과학저널리즘
1920년 봄을 기해 '동아일보' '조선일보' '시사신문'등 3개의 민간지가 창간되면서 종전의 과학지식전달이라는 소극적인 영역을 벗어나지 못했던 과학저널리즘은 새로운 전환기를 맞이하게 되었다. 특히 "우리나라 문화계발의 근거는 과학운동에서 출발해야 한다"고 주장한 동아일보는 '과학화운동'을 제창한 첫번째의 언론매체가 되었다. 우리나라 언론기관이 주최한 문화사업중에서 가장 성공적인 행사의 하나로 평가되고 있는 '안창남의 모국방문비행'을 계기로 제창된 이 운동은 과학지식보급에만 그치는 것이 아니라 과학기술진흥을 통해 민족의 실력을 배양하기 위해서는 과학인재를 우선 양성해야 하며 그 방법으로서 대학을 설립하고 연구기관을 건설하며 해외유학을 위한 장학금의 적립이 필요한데 이 모든 것을 민족사업으로 추진해야 한다는 주장을 폈다.
당시 이 신문은 과학기사에 파격적인 배려를 했다. 예컨대 1920년 4월 창간된 직후부터 1면에 '우주'라는 과학해설기사를 장장55회에 걸쳐 연재했으며 1922년 '알버트 아인시타인'이 노벨물리학상을 타게 되자 당시 독일 베를린에서 연구하고 있던 황진남(黃鎭南)의 해설기사 '아인시타인의 상대성 원리'(6회 연재) '아인시타인은 누구인가?'(3회) '상대론의 물리적 원리'(4회)등 13회에 걸쳐 제1면에 연재했다.
안참남의 모국방문비행이 몰고 온 공전의 과학붐은 과학학술단체들의 창립과 과학지식보급 운동의 횃불을 드높이는 계기가 되었으며 과학에 대한 일반의 관심이 높아지자 '공우'(工友), '문명'(文明), '신발명'(新發明), '과학'(科學), '백두산'(白頭山), '과학조선'(科學朝鮮)등 과학지들이 뒤를 이어 창간되었다. 백두산은 과학진흥단체인 백두산이학회(白頭山理學會)가 발간한 우리나라 최초의 소년과학지였다. 과학을 동화나 역사물을 중심으로 쉽고 재미있게 꾸며 어린이들에게 과학의 꿈을 심어 주려고 노력한 이 잡지의 체제는 오늘날의 수준에서도 높은 평가를 받을만한 것이었다. 그러나 거의 모든 과학지들은 그 시대의 다른 잡지와 마찬가지로 유능한 필자를 구할 수 없는데다 재정난에 겹쳐 단명에 그치고 말았다.
일제하에서 가장 장수를 누린 과학종합지는 '과학조선'이었다. 1933년 6월 발명학회가 창간한 이 잡지는 그 뒤 1930년대의 과학대중화운동이라는 큰 바람의 핵심체였던 과학지식보급회의 기관지로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 이 잡지는 당시로서는 풍부한 화보와 다양한 국내외의 과학기사외에도 많은 지면을 과학평론에 할애하여 평론지로서도 돋보였다. 예컨대 김해림(金海琳)의 '자연과학, 그 관념의 보급, 저널리즘'은 다른 분야의 저널리스트도 자연과학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고 주장하고 과학의 대중화는 과학자들이 해야할 일 중의 하나라고 갈파했다. 이 잡지는 과학저널리즘에서 언제나 핵심적인 쟁점의 하나로 되고 있는 기사의 난이성 문제도 다루었으며 당시 과학대중화운동에 참여했던 문인들인 이하윤(異河潤), 김억(金億)과 과학기술자들간의 이 문제를 둘러싼 논쟁에도 언급했다. 과학전문기자가 없던 당시의 과학기사의 필자들은 거의가 모두 과학자나 기술자들이었으며 과학지식보급회의 과학독본간행사업도 과학자들이 쓴 원고를 일단 김억에게 넘겨 문체를 다듬은 뒤에 이윤재, 이극로에게 한글교열을 받게 했다.
그런데 동아일보의 자매지인 '신동아'(新東亞)가 1933년 5월호를 과학기사만으로 편집한 '과학호'로 펴냈다는 사실은 우리나라 일반종합지사상 전무후무한 일이었다. 특히 이 호의 기획물인 '50년후의 세계'는 1980년대의 의식주를 비롯하여 교통기관, 통신수단, 생산공장의 모습을 내다보는 일종의 미래 예측기사로서 큰 관심을 불러 일으키기에 충분한 것이었다. 오늘날과 같이 미래예측방법이 발달하지 않은 당시로서는 매우 대담한 전망이었으나 50년이 지난 오늘날 이 기사의 내용중 거의가 이미 실현되었다.
일제하의 과학저널리즘의 한가지 특징은 '과학사상주의'가 풍미한 가운데 과학기술의 진흥을 통해 민족의 실력을 쌓고 나아가서 독립의 길을 찾는다는 이념이 언제나 배경에 깔려 있었다는 점이다.
거대과학시대와 과학저널리즘
1945년의 광복의 기쁨은 곧 사상적 대결과 정치의 과열현상으로 사회는 혼란기를 겪었으나 광복후 최초로 과학종합지인 '과학시대'(科學時代)가 중앙공업연구소에서 간행되었다.
휴전후 언론에서 과학에 관한 기사를 본격적으로 다루기 시작한 것은 한미간의 원자력 평화 이용에 관한 협정이 조인될 무렵인 1956년이었다. 국내 일간신문들은 원자력의 평화이용에 관한 특집을 연일 내놓으면서 원자력에 관한 지식보급에 노력하는 한편 몇몇 전문가들을 내세워 우리의 원자력 수용 태세를 검토하는 논평을 다루기 시작했다.
우리나라 과학저널리즘사상 지상을 통한 첫번째의 과학논쟁은 1955년 10월 동아일보 지상에서 현안의 한미간 원자력 평화 이용 협정을 둘러싸고 장내원과 윤세원간에 전개되었다. 이 논쟁의 요지는 장차 국산 원자로와 국산 핵연료를 사용할 미래를 내다보면서 협정조항의 불리한 내용은 배제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 귀결이야 어떻든 2주일 남짓 격렬하게 벌어진 이 지상논쟁은 과학저널리즘을 크게 활성화시키는 결과를 가져왔다.
그런데 우리나라 과학저널리즘발전에 중요한 계기가 된 것은 미소의 우주경쟁이었다. 1957년 10월 2일 소련의 '스푸트니크' 인공위성의 발사로 막이 오른 미소간의 우주경쟁은 냉전의 틈바구니에서 민감한 입장에 있던 우리나라의 대중매체들에게 과학기사를 다루는 전문기자의 필요성을 인식시켰다. 1958년 우리나라 신문으로서는 한국일보가 처음으로 편집국에 과학부를 신설하고 과학전문기자를 두기 시작한 이래 우주경쟁이 절정에 이른 1960년대 후반까지 조선일보, 중앙일보, 경향신문, 서울신문, 동아일보가 각각 과학부를 창설하고 과학전문기자를 확보하거나 양성하게 되었다. 이리하여 60년대말에 이르러 국내 일간지의 과학전문기자는 5개사에 16명을 헤아리게 되었다.
우리나라의 과학저널리즘은 이렇듯 미소간의 냉전을 계기로 활성화 된 것은 사실이라고 하더라도 그 뒤 국내의 과학기술활동이 점차 활발해 지면서 우주경쟁이라는 외신 의존 일변도의 보도에서 벗어나 능동적인 보도에 들어가기 시작했다. 과학보도의 취재대상 연구기관은 60년대 중반까지는 주로 원자력원 산하의 3개연구소 정도였으나 그 뒤 한국과학기술연구소, 한국과학원 등 여러 교육기관들이 새로 창설되면서 계속 늘어났고 1967년에는 정부의 독립부서로서 과학기술처가 발족하자 정책기사의 보도도 활발해졌다.
그러나 60년대 우리나라 과학저널리즘을 주도한 주제는 미국의 아폴로 계획을 중심으로 한 우주개발이었다. 특히 1969년에 10년을 끌어오던 아폴로계획이 '인간의 달착륙'이라는 대단원의 해를 맞자 국내의 주요 일간지들과 방송매체는 보도과열 현상까지 빚어 냈으며 그 덕에 과학저널리즘은 다른 모든 분야의 보도에 앞서는 최우선권이 부여되기도 했다.
신문의 경우 지면확보에서는 언제나 불리한 입장에 있던 과학기사는 짧은 시간이나마 '전성시대'를 누릴 수 있었다. 이 기간동안 텔레비젼은 과학저널리즘의 강력한 동반자 구실을 했다. 텔레비젼이 어렵고 복잡한 우주과학을 쉽고 세련된 방법으로 시청자들에게 제시하게되자 이들은 더 자세한 내용을 알기위해 기록성을 가진 신문의 과학보도에 관심을 돌리게 되었고 제한된 지면의 내용에 만족하지 못한 독자층은 다시 과학지나 또는 과학단행본에 눈을 돌리게 되어 과학저널리즘에 대한 수요를 부추겼던 것이다.
1969년 7월 아폴로계획이 대단원의 막을 내리자 우주개발에 보내던 뜨거운 관심도 점차 사라지기 시작했다. 그래서 우주개발붐을 타고 한때 웅성거렸던 우리나라의 과학저널리즘은 내리막 길을 걷게 되었다. 때 마침 공업화의 역기능인 환경오염이 심화되어 중대한 사회문제로 대두되었으며 이것은 과학저널리즘의 주요한 주제로 될뻔했으나 당시 환경문제의 여론화를 원하지 않던 당국의 제재로 대중매체의 과학리포트는 건강 가이드나 생활과학에 눈을 돌릴 수 밖에 없었다. 그래서 과학리포트가 대중매체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있어도 좋고 없어도 좋은 위치'로 전락해 버렸다. 엎친데 덮쳐 1973년 유류 파동이 몰고 온 불황의 여파로 언론계는 기구축소에 나섰으며 일부의 신문들은 그 첫 대상으로 과학부와 과학기자를 꼽았다. 이리하여 1970년대 후반에 이르러 2개신문사를 제외한 모든 신문은 과학부를 다른부에 통폐합시켜 버렸으며 많은 과학저널리스트들이 대중 매체에서 물러났다.
전환기를 맞은 과학저널리즘
70년대말을 전후하여 정보, 기전, 재료, 생물공학 등 여러 분야에서 새로운 기술혁명의 기운이 움트기 시작했다. 이 새로운 첨단기술들이 장차 세계산업구조에서 차지할 비중으로 미뤄 세계의 여러 정부와 기업들은 생사를 건 기술개발경쟁에 나서고 있다. 이 새로운 기술개발 붐을 타고 선진국에서는 과학저널리즘에 대한 폭발적인 수요가 창출되었다.
한동안 침체에 빠졌던 우리나라의 과학저널리즘도 정부와 기업의 첨단기술에 대한 관심과 투자가 커짐에 따라 다시 활성화하기 시작했다. 신문의 과학기사량은 급격히 늘어나는 추세에 있으며 과학전문지들이 뒤를 이어 창간되고 있다.
80년대의 우리나라 과학저널리즘이 당면한 과제는 이런 양적인 확장과 병행하여 질적인 전환을 모색하는 일이라고 하겠다. 오늘날 과학기사의 소비층이 요구하는 것은 과학기술의 새로운 발견이나 발명의 내용뿐 아니라 정치·경제·사회·문화에 어떤 영향을 끼칠 것이며 우리의 생활과는 어떤 연관성이 있을까하는 해설적이며 심층분석적인 기사들이다.
따라서 우리의 과학저널리즘은 종래의 계몽적인 역할은 물론, 한걸음 나가서 창의적인 역할이 절실하게 요청되는 새로운 시대를 맞게 된 것이다.
선진국의 과학저널리즘
과학기술정보에 대한 사회적인 수요가 최근 10여년간 폭발적으로 늘어나면서 선진국의 과학저널리즘은 일찌기 없었던 붐을 맞이하였다. 예컨대 미국에서는 70년대말 나온 과학대중지인 '옴니'(Omni)에 이어 미과학진흥협회가 월간 과학대중지 '사이언스80'(해마다 제호의 수자가 바뀜)을 펴냈으며 80년에는 타임-라이프사가월간 과학종합지 '디스카버'(Discover)를 창간했다. 뒤이어 '사이언스 일러스트레이티드'(Science Illustrated), '래디컬 사이언스'(Radical Science)등이 나왔다. 이중에서 "사이언스80'의 경우는 창간3년만에 70만부선을 돌파했으며 디스카버지와 함께 과학잡지사상 일찌기 없었던 발행부수를 자랑하게 되었다. 일본의 경우도 81년부터 '코즈모', '뉴턴', '포퓰러 메카닉스', '쿼크', '우탄', '옴니'등 월간 과학대중지들이 비온 뒤의 죽순처럼 연달아 등장했다. 특히 '뉴턴'의 경우는 당초5만부를 예상했던 발행인의 기대치를 훨씬 웃도는 30여만부의 발행부수를 한 때 기록했고 그 독자층은 과학도외에도 변호사와 젊은 여성직장인과 가정주부에 이르기까지 다양하다. 이런 현상은 남의 스캔들이나 캐는 백해무익한 종래의 저속한 그나라 주간지들에 염증을 느낀 여러층의 독자들이 보다 실생활과 정신문화를 풍요하게 해 주는 과학지에 참신한 매력을 찾았기 때문이라고 평론가들은 풀이하고 있다.
미국의 과학지는 1981년 말부터 다시 두번째의 붐을 맞는다. 이 붐은 종래의 과학대중지의 내용으로서는 만족할 수 없는 특정한 독자층의 요구에 부응하기 위해 조성된 것이었다. 예컨대 81년말 창간된 월간 '테크놀로지'(Technology)는 기술에 관심을 가진 경영인과 실업인들을 위한 것이며 '하이 테크놀로지'(High Technologh)는 대상이 엔지니어들이다. '테크놀로지 일러스트레이티드'(Technology Illustrated)는 일반독자들이 기술을 쉽게 이해할 수 있게 펴낸 기술대중지이다. 이밖에도 일반잡지와 경영전문지들의 과학기술기사 게재량도 크게 늘어나고 있다. 과학잡지에 대한 투자가들의 인식도 많이 달리지고 있다. 예컨대 83년 창간된 미국의 건강대중지 '아메리칸 헬드'(American Health)의 창간자본 5백만달러는 뉴욕 '월'가에서 조성된 벤쳐 캐피틀이었다. 정보화시대가 성숙되면서 과학정보에 대한 사회적인 수요는 더욱 더 커질 것으로 전망된다. 이런 시대적인 큰 흐름에서 밀려나지 않고 치열한 경쟁시대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보다 적극적으로 과학지식과 과학정보에 접근해야 하는 시대에 우리는 살고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