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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 SF스토리 공모전 수상작] 안스리움

[지난 줄거리] 현세의 자본력에 따라 내세의 등급이 인간, 동물, 식물로 정해지는 세계에 사는 설진은 구청에서 식물 등급을 얻은 아버지의 내세 좌표를 받는다. 이후 채식 음식점에서 중요한 미팅을 하게 되고, 다음날 있을 중요한 발표에 시간 약속을 잘 지키라는 조언을 듣는다. 설진은 발표를 성공적으로 끝내 다음 생의 등급을 동물 이상으로 보장받고 싶어 한다. 그러나 필리핀에서 안스리움으로 태어난 아버지가 팔려 갈까 봐 조바심을 내는 가족을 대신해 발표 당일 새벽에 필리핀으로 떠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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굵직한 장대비를 맞으며 설진은 이리저리 둘러보았다. 마을 언덕배기에 위치한 비닐하우스 몇 채가 눈에 띄었다. 엊그제 드라이한 정장은 이미 흥건히 젖었으나, 그것은 전혀 중요한 일이 아니었다. 비닐하우스 앞에 도착하자 한 늙은 사내가 우비 차림으로 하우스에 천을 덧씌우고 있었다. 설진의 급박한 심정과는 대조적으로 아주 느릿느릿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설진은 어설픈 영어로 자신이 온 목적과 찾고 있는 식물에 대해 사내에게 설명했다. 늙은 사내는 설진의 언어를 단 하나도 알아듣지 못하는 것처럼 보였다. 설진은 지갑에서 내세 좌표 주소를 메모한 종이를 꺼내 보여 주었다. 메모를 본 늙은 사내는 이제야 알겠다는 듯 자신을 따라오라는 손짓을 했다. 하지만 그는 여전히 느린 걸음으로, 아주 천천히 앞장서 나아갔다.

 

둘은 C라고 적힌 비닐하우스 앞에 도착했다. 사내는 문을 손수 열어 주며 먼저 들어가라고 얘기했다. 설진은 께름칙했지만 서둘러 안으로 들어갔다. 이내 사내도 들어와서 문을 닫았다.

 

비닐하우스 안은 전혀 다른 세상 같았다. 미친 듯이 퍼붓는 폭우 소리도 여기서만큼은 나른한 멜로디처럼 들리는 것 같았다. 천장과 바닥 군데군데 설치된 인공 조명기가 빼곡히 심겨 있는 식물들을 향해 따스한 빛을 내리쬐고 있었다. 설진은 낯선 공간이 주는 느낌에 다소 당황했다. 그는 정장 소매 끝에서 빗방울이 똑똑 떨어지고 있다는 사실조차 인지하지 못했다. 양옆으로 나란히 만들어진 두 개의 둔덕에는 이제 막 싹을 틔우기 시작한 식물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었다. 이 관엽식물에게는 하루하루가 봄이고 낮인 셈이었다. 어쩐지 축복을 받고 있다는 느낌마저 들 정도였다. 설진은 지금껏 요동쳤던 마음이 이상하게 잠잠해지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생경한 장면에 한참 넋 놓고 있던 설진에게 늙은 사내가 다가와서 말을 걸었다. 아까 그 메모를 다시 한번 보자는 얘기 같았다. 문득 정신을 차린 설진은 주섬주섬 메모지를 꺼내어 사내에게 넘겨주었다.

 

사내는 종이에 적힌 숫자를 중얼거리며 주변을 살피기 시작했다. 군집을 이루고 있는 새싹들은 나름의 구역을 가지고 있는 듯했다. 설진은 터덜터덜 앞으로 나아가는 사내의 뒤를 따라갔다. 지나쳐 온 둔덕에 조그마한 숫자 팻말이 하나씩 놓여 있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숫자를 마주한 설진은 순간 침을 꿀꺽 삼켰다. 오묘한 긴장감을 느꼈다. 어디에서 촉발된 긴장인지는 정확히 모르겠으나, 그것은 아마 곧 경험하게 될 아버지와의 만남에서 비롯된 것일 거라고 설진은 생각했다. 그는 대수롭지 않은 일인데 뭘 그러냐고 자신의 요동치는 감정을 다그쳤다. 이 시점에서 적잖은 혼란을 느끼고 있는 자신이 괜스레 부끄러웠다. 그렇지만 복잡한 감정이 사그라들 기미가 좀처럼 보이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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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내는 걸음을 멈추었다. 아마도 그는 아버지를 찾았을 것이다. 설진은 알고 있었다. 사내의 손가락이 향하는 곳에서 아버지가 새로운 숨을 쉬고 있으리라는 것을. 설진은 사내가 새싹을 향해 손을 뻗지 않기를 내심 기대해 보았다. 그러나 사내는 제 할 일을 할 뿐이라는 듯, 무심하게 손을 뻗어 조그마한 새싹 하나를 가리켰다.

 

 

무성의하게 휘갈겨진 팻말 옆에는 이제 막 태어나 눈도 제대로 뜨지 못한 신생아 같은, 새끼손톱의 절반도 안 되는 크기의 잎사귀가 듬성듬성 돋아 있는, 따가운 인공조명에 아직 적응이 어려운지 잎을 활짝 펴지 못하고 있는 조그마한 안스리움 하나가 쌔근쌔근 숨을 쉬고 있었다. 멍한 설진의 머리칼에 맺힌 빗방울 하나가 똑 하고 떨어졌다.

 

오후 2시. 설진은 공항 대합실에서 창밖만 멍하니 내다보았다. 빗물로 흥건했던 정장은 어느덧 말라 있었다. 설진은 옆자리로 시선을 돌렸다. 그곳엔 검은색 봉지 하나가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은은한 바람 때문인지 봉지는 이따금 바스락거리는 소리를 냈다. 설진은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마닐라에는 여전히 폭우가 내리고 있었다

2022, Kang, Dong-In All Rights Reserved.

 

❋ 본 작품은 동아사이언스가 주최하고 한국과학창의재단이 지원한 ‘2022 SF스토리 공모전’ 수상작입니다. 공모전에는 483개의 작품이 출품됐으며 대상, 최우수상 등을 비롯해 우수작 25개를 뽑았습니다. 수상작은 <;수상한 작품집>;을 통해서도 만날 수 있습니다.

<;수학동아>;는 수상작 중 숫자가 소설의 중요한 장치로 쓰이는 단편소설 <;안스리움>;을 여러분께 소개했습니다. 지금까지 사랑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소설의 전문은 SF스토리콘 홈페이지에서 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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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04월 수학동아 정보

  • EASTMAN
  • 일러스트

    안재원
  • 디자인

    정영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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