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 소년의 이야기 ♥
19세기 말 영국.
한 11살 소년이 생각에 잠긴 채 창가에서 노을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그날 소년은 형에게 ‘유클리드 기하학’을 배웠습니다. 소년의 형은 모든 기하학의 정리가 ‘공리’라고 불리는 5가지 전제로부터 나온다는 놀라운 사실을 가르쳐 주었습니다. 시범을 보이겠다면서 형은 공리를 이용해 ‘피타고라스의 정리’를 증명했고, 소년은 그 과정을 경이에 찬 눈빛으로 바라보았지요. 5개의 공리만으로 이토록 우아하고 정교한 학문을 구성했다니! 소년은 감탄하며 형에게 말했습니다.
“형, 이건 정말 대단해. 유클리드(에우클레이데스)는 천재야! 이젠 공리를 증명하는 방법을 소개해 줘!”
그러자 형이 어깨를 으쓱하며 대답했습니다.
“버트런드, 공리는 증명할 수 없어.”
소년의 안색이 급격히 어두워졌습니다.
“증명할 수 없다니, 무슨 말이야?”
“공리는 모든 증명의 출발점이야. 그러니까 공리를 증명할 수 없지.”
“하지만 사람들은 기하학이 학문 중 가장 명확하다고 했는데?”
“맞는 말이지. 하지만 그런 기하학도 몇 가지 가정은 필요하단다.”
소년은 마음속 무언가가 무너져 내리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일종의 분노가 담긴 눈빛으로 형을 노려보며 소년은 말했습니다.
“난 그 사실을 인정할 수 없어!”
♥ 또 다른 소년의 이야기 ♥
2020년 한국.
한 소년이 생각에 잠긴 채 도서관에서 책을 읽고 있습니다.
소년은 공학자의 길을 걷고 있었습니다. 고등학교에서 우수한 성적을 받은 소년은 한국에서 내로라하는 공과대학에 합격했습니다. 대학에 입학하고 나서는 열심히 수업을 듣고, 프로그램을 개발하는 공부도 했지요.
하지만 사실 소년은 공학보다 수학에 더 흥미를 느꼈습니다. 기술은 금세 낡고, 과학은 더 나은 이론으로 대체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수학은 다르다고 느꼈어요. 고대인이 발견한 ‘피타고라스의 정리’는 여전히 확고부동한 진리로 남아 있으며, 앞으로도 영원히 그럴 것이라는 걸 알았으니까요. 만약 소년이 새로운 수학 정리를 발견한다면, 그 정리에는 소년의 이름이 붙어 후대 인류에게 계속해서 전수되겠지요. 소년은 수학의 세계가 선사하는 확신과 영원불변함에 매료되었고, 틈틈이 수학 서적을 읽으며 수학을 향한 열의를 키워나가곤 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소년은 책에서 이런 내용을 발견했습니다.
‘이게 무슨 말이지?’ 소년은 당황했습니다. 수학적으로 증명된 사실이 우리의 상식과 충돌한다고? 그래서 수학의 세계에서도 논쟁이 벌어진다고? 수학이 확실하고 틀림없는 학문이라고 굳게 믿었던 소년은 이 사실을 받아들이기 힘들었습니다. 어쩌다가 바나흐-타르스키 정리가 나왔는지 소년은 알고 싶었습니다. 나아가 수학자가 발견하는 정리는 무엇에 관한 지식이며, 수학은 어떤 원리를 토대로 세워진 학문인지, 그리고 도대체 수학의 본질은 무엇인지 알고 싶었습니다.
♥ 우연히 발견한 책 ♥
이런 의문을 해결하기 위해서 무슨 책을 찾아야 하는지 몰랐지만, 무작정 도서관으로 향했습니다. 먼저 수학 코너를 둘러보았습니다. 하지만 크게 도움이 될 만한 책은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냥 기숙사로 돌아가서 과제나 마저 할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도 도서관까지 온 것이 아까우니,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철학 코너로 향했습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소년은 정말 신기한 제목의 책을 찾았습니다. 직감적으로 소년은 이 책이 자신이 찾던 책이라고 느꼈습니다. 소년은 책을 선반에서 뽑았습니다. 그렇게 소년은 영국의 수학자이자 철학자인 버트런드 러셀의 <;수리철학의 기초>;를 읽기 시작했습니다.
◆ 다시 만나서 반가워요! ◆
안녕하세요, 수학동아 독자 여러분! 저는 현재 KAIST에서 수학을 공부하고 있는 최정담입니다. 2020년에 <;발칙한 수학책>;이라는 수학 교양서를 집필했고, 작년에 <;수학동아>;에서 ‘역설 나라의 앨리스’를 연재했습니다. 올해도 <;수학동아>;에서 연재를 맡게 돼 영광입니다.
여러분이 이 글을 읽고 있을 때쯤이면 아마 저는 영국에 있을 거예요. 수리논리학과 철학을 공부하고 싶어서 영국 리즈대학교 교환학생을 신청했거든요. 많고 많은 나라 중 영국을 선택한 이유 중 하나는 영국이 수리논리학과 수리철학의 발상지이기 때문입니다. 19세기 전후, 영국을 무대로 일군의 수학자와 철학자들이 논리학과 철학에서 전례 없던 발전을 이뤄 냈죠.
버트런드 러셀(1872~1970)은 이 사상사에서 중요한 사건들의 중심에 있었던 인물이자 ‘러셀의 역설’을 발견함으로써 수학계를 한바탕 뒤흔든 것으로 유명한 수학자이지요. 하지만 그는 역설뿐만 아니라 논리주의, 유형이론, 기술이론 등 수학과 철학에서 다양한 업적을 세웠습니다. 말년에는 대중을 위한 책을 집필해 노벨 문학상까지 받았지요.
하지만 제가 러셀을 존경하는 데에는 더 큰 이유가 있습니다. 러셀은 인류의 복지와 평화를 위해 부단히 노력한 인물입니다. 학자의 책임은 연구뿐만 아니라 사회에도 있음을 누구보다도 의식하고 있었던 것이지요. 그가 남긴 에세이에서 그의 따뜻한 생각을 들여다볼 수 있는데요. 저는 이 에세이를 읽고 러셀의 ‘팬’이 됐답니다. 지금 제 휴대전화의 배경화면도 러셀의 사진이에요!
◆ 연재를 시작하며 ◆
제가 러셀의 팬이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던 이채린 기자님이 제게 러셀에 관한 연재를 부탁했습니다. 덕분에 저의 팬심을 <;수학동아>;에 쏟을 수 있게 되었네요. 분명 여러분도 저만큼이나 러셀의 스펙타클한 인생 이야기에 매료될 것입니다.
그것은 유클리드 기하학에 실망한 어린 소년이 세계적인 학자로 성장하기까지의 이야기이자, 앙리 푸앵카레, 다비트 힐베르트, 쿠르트 괴델 등 전설적인 수학자들이 함께한 19세기 수학계의 치열했던 논쟁 그리고 세계가 비논리적인 전쟁에 미쳐 있던 암울한 시대에 논리학을 연구한 사람의 이야기예요. 다시 말해 한 편의 드라마입니다.
아울러 러셀보다 훨씬 덜 스펙타클하긴 하지만, 저의 학문적 여정에 관한 이야기도 틈틈이 풀어볼까 합니다. 어쩌다가 수학과 철학이라는 난해한 분야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는지, 영국에서의 대학 생활은 어떤지, 수리철학이라는 생소한 분야를 공부하는 경험은 어떤지, 공부하다가 머리가 터질 것 같지는 않은지(스포일러: 터질 것 같습니다) 등을 주제로 살짝 이야기해 보는 것이죠.
물론 저는 이제야 막 학자로서의 발을 뗀 일개 학부생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러나 제 마음 깊숙이 타오르는 학문적 열정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고 있고, 어떻게든 그 열정이 가리키는 곳을 향해 나아가고자 노력하고 있습니다. 교환학생도 그 노력의 일환이고요. 그런 저의 이야기가 여러분의 열정 또한 자극할 수 있기를 조심스레 바라 봅니다.
서론이 길었네요. 그럼 다음 화부터 본격적인 내용으로 찾아뵙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