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뺨 너비의 상자, 그 안에 가득 차 있는 A4 용지에 인쇄된 논문. 그 상자를 사람 키만큼 쌓아 올리고, 또 같은 높이 만큼 쌓아 올렸습니다. 그 안에 들어있는 논문을 다 읽으려면 얼마나 많은 시간이 걸릴까요?
2009년 9월에서 2011년 5월까지 미국 일리노이주립대학교의 수학과 건물인 알트겔드 홀 지하 컴퓨터실에는 항상 종이와 프린터 토너가 부족했습니다. 매일 수백 장씩 논문을 프린트하는 한 학생 때문이었습니다. 그 학생은 그렇게 인쇄한 논문을 모두 꼼꼼히 밑줄을 치며 읽고, 그 종이에 본인의 생각을 적어 두었습니다.
2011년 5월, 그는 미국 미시간대학교로 대학원을 옮기기 전까지 한국을 다녀오겠다며, 짐을 맡아 달라고 부탁을 했습니다. 함께 일리노이대에서 공부하던 저는 여러 짐과 함께 논문이 가득한 상자를 제 집에 두었습니다. 이미 눈치채셨겠지만, 그 학생이 바로 허준이 교수입니다.
본인의 표현을 빌려 말하면, ‘마치 고래가 크릴을 먹어 치우는 것처럼, 지식을 최대한 많이 습득한 후에 그 지식들 사이에 연결성을 찾는 과정을 반복했다’고 합니다. 한번은 포커를 치고 있는데, 본인이 든 카드가 먼저 죽자 남은 사람들이 베팅하는 그 시간 동안 가방에서 논문을 꺼내서 읽기도 했습니다. 종일 논문을 읽다가 도저히 더 읽지 못할 때는 스타크래프트 경기 방송을 틀어 놓고 논문 초록을 읽으며 더 읽을 논문들을 찾았다고 합니다. 정말 고래 못지않은 지식 먹방러였던 것 같습니다. 허 교수는 그런 과정을 ‘운이 좋아지는 알고리듬’이라고 표현하며, ‘그 과정에서 서로 다른 분야를 연결하는 행운을 얻어 좋은 논문은 썼지만, 깊이 있는 공부를 하지 못해 후회가 된다’고 회고했는데요. 이 정도면 겸손인지, 겸손을 가장한 자랑인지 모르겠네요.
행복에 가치를 두는 사람
이렇게 쓰고 보니 허 교수가 수학만 하느라 인생을 즐기지 못하는 사람으로 오해할 수 있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인생에서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합리적으로 판단하고 행복에 집중하는 사람입니다. 음식을 기다리는 시간을 줄여 공부하려고 일부러 손님이 없는 인기 없는 음식점을 가고, 저렴하면서 좋은 물건을 사는데 쏟는 시간과 정신이 아까워 무조건 가장 비싼 물건을 사는 등, 본인이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하는 일에는 시간을 쓰지 않습니다.
반면 본인을 행복하게 하는 일에는 더 집중하고, 본인이 좋아하는 사람과 보내는 시간은 전혀 아끼지 않습니다. 매우 가정적인 사람이고, 정말 좋은 아버지입니다. 요즘은 아들과 노는 일에 가장 큰 열의를 보입니다. 얼마 전 방문했을 때는 일곱 살 난 아들 ‘단’이 뮤직비디오를 찍겠다고 감독을 자처했습니다. 단이 자작랩을 하고 저와 허준이 교수 부부 전원이 그 뒤에서 함께 춤을 추는 영상을 찍기도 했었지요. 가족과 시간을 보내는 모습을 보면, 도대체 공부할 시간은 언제 있나 싶은데, 그렇게 가족과 있는 시간에는 온전히 가족에 집중하고, 아들이 학교 간 사이에 공부하고, 또 새벽에 혼자 일어나 공부합니다.
예전에 허 교수가 자신의 전성기는 막내를 대학에 보낸 뒤에야 올 거라고 말한 적이 있습니다. 허 교수의 필즈상 수상은 수학자로서 끝이기보다는 시작일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