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자, 찬이야, 이쪽으로 오렴.”
오 선생의 말이 감상에 빠져 있던 찬이를 깨웠다. 찬이는 삼촌을 힐끗 쳐다 봤다. 삼촌은 어서 가보라는 듯 싱긋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어떠냐, 참 튼튼하게 생겼지?”
오 선생은 물끄러미 벽을 바라보며 말했다. 찬이도 찬찬히 벽을 살펴 봤다. ‘정말 꼼꼼하게 만들었구나’하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어느 것 하나 흐트러진 부분이 없었다. 딱딱 맞춘 블록처럼 벽돌은 서로 완벽히 직각으로 만나고 있었다. 반드시 그 자리에 있어야 한다는 강박마저 느껴졌다.
“여기 벽돌이 몇 개나 있는 거 같니?”
언뜻 봐도 100개는 훨씬 넘어 보였다. ‘쉽게 계산할 방법이 없을까?’ 한 걸음 뒤로 물러나 벽을 유심히 관찰했다. 벽돌은 가로와 세로로 16개씩 있었다. ‘16 곱하기 16.’
“이백…, 이백오십육 개요.”
“그래, 맞다. 이 벽은 모두 256개의 벽돌로 이뤄져 있단다. 이백오십육. 내가 아주 좋아하는 숫자란다. 그 얘긴 나중에 하기로 하고. 이제부터 아주 신기한 걸 보여 주마.”
오 선생은 구석에 놓여 있던 의자를 끌고 와 위로 올라섰다. 그리곤 왼쪽 맨 위에 있는 벽돌을 힘껏 밀기 시작했다. ‘드드득!’ 너무 딱 들어맞아 영원히 그대로일 것만 같던 벽돌이 조금씩 움직였다. 벽돌은 처음보다 절반쯤 들어가 멈췄다. 오 선생은 부지런히 의자를 오르내리며 붉은 벽 곳곳의 벽돌을 밀기 시작했다. 마지막으로 오른쪽 맨 아래의 벽돌을 밀어 넣곤 의자에 털썩 주저 않았다.
“아이고, 숨차다. 이젠 이 일도 자주 못하겠군. 이보게 박 군, 물 한 잔만 떠다 주겠는가?”
어느새 오 선생의 이마와 희끗희끗한 머리에 땀이 송글송글 맺혀 있었다. 삼촌은 한 컵 가득 찬물을 담아 오 선생에게 건넸다.
“이젠 그냥 보일러로 하자니까요. 이러다 허리 다치세요.”
‘보일러?’ 찬이는 보일러를 한 번 힐끗 쳐다봤다. 어쩐지 아까보다 더 씩씩 끓는 것처럼 보였다. 찬물을 한꺼번에 들이킨 오 선생이 거친 숨을 가다듬은 뒤 말을 건넸다.
“이제 수수께끼를 내마. 여기서 벽돌을 4개만 움직여 마방진을 완성해 보거라. 문제가 생기면 전화기의 숫자판을 떠올리렴.”
‘마방진? 전화기?’ 찬이는 삼촌의 수수께끼 책에서 봤던 9칸짜리 마방진을 떠올렸다. ‘1부터 9까지 숫자를 가로, 세로, 대각선에 들어갈 수의 합이 모두 같게 빈 칸을 채워 넣어라!’ 찬이는 이리 저리 숫자를 넣어봤지만 계속 합이 안 맞았다. 옆에서 신문을 읽던 삼촌이 한 마디 툭 내뱉었다.
“무작정 채우지만 말고 어떤 합을 만들지부터 정하면 어떨까?”
맞는 말이었다. 가로, 세로, 대각선을 모두 만족 시키는 ‘합’을 찾는 게 우선이었다. 찬이는 9칸의 정사각형을 한참 쳐다봤다. ‘가로 3개, 세로 3개, 대각선 3개…, 9를 3으로 나누면 3.
1부터 9까지의 숫자를 모두 더해봤다. 45. 가로, 세로, 대각선 3군데 45를 골고루 나눠주면 15. 찬이가 찾던 바로 그 합이었다. 합을 구하자, 문제는 생각보다 금방 풀렸다.
1, 2, 3은 어느 방향으로든 겹쳐 있어선 안 됐다. 그렇게 되면 어느 경우라도 15를 만들 수 없기 때문이다. 4도 1과 맞닿아 있지 않아야 했다. 1과 4를 더하면 5. 여기에 가장 큰 수 9를 더해도 15가 되지 않았다. 남은 건 단순한 덧셈 문제뿐이었다.
붉은 벽의 비밀
옛 기억에서 실마리를 얻은 찬이는 다시 한번 벽을 바라봤다. ‘어떤 합이 숨어 있는 걸까?’ 256개의 숫자로 이뤄진 마방진을 떠올렸다. 숫자를 16개씩 더할 생각만 해도 머리가 아팠다. 차근 차근 생각해 보기로 했다. 오 선생이 밀어 넣은 벽돌의 수부터 세어 봤다. 모두 12개였다. 여기에 오 선생이 움직이라고 한 벽돌 4개를 더하면 16이었다. 붉은 벽의 마방진을 완성시키기 위해선 16개의 벽돌을 움직여야 했다. 아까 벽돌의 개수를 구한 방법이 생각났다. 16칸 곱하기 16개 벽돌은 256. ‘만약 가로, 세로 4칸씩 벽돌 16개가 하나의 숫자라면?’ 날카로운 생각이 찬이의 머릿속을 스쳐갔다. 벽돌을 가로와 세로로 4개씩 끊어 봤다. 그러자 움직인 벽돌이 하나씩 있는 칸이 떠올랐다.
벽돌 256개로 이뤄진 붉은 벽은 16칸의 4차 마방진이었다. 찬이는 이번에도 ‘필요한 합’부터 구해 보기로 했다. 1부터 16까지 모두 더한 값은 136, 이걸 4로 나누면 34다. 벽돌 4개의 합은 34가 돼야 했다. 과연 벽돌은 각기 어떤 숫자를 나타내고 있는 것일까? 찬이는 오 선생님이 준 힌트를 떠올렸다. 1부터 16으로 이뤄진 전화기 숫자판을 상상해봤다.
16개의 벽돌. 16개의 숫자. 드디어 붉은 벽의 비밀이 모습을 드러냈다. 숫자판에 대입시킨 맨 왼쪽 윗 칸은 1, 그 아래는 15, 14, 4. 네 숫자의 합은 34. 나머지도 딱딱 맞아 떨어지기 시작했다.
남은 일은 가운데 빈 칸에 6, 7, 10, 11을 채워 ‘34’를 만드는 것뿐이었다(퍼즐2 참고). 몇 년 전 밤새 수수께끼 책을 모두 풀었을 때 느꼈던 짜릿한 쾌감이 다시 찾아왔다. 그런 찬이의 기분을 읽었는지 삼촌이 말을 걸어왔다.
“찬이야, 가서 한 번 벽돌을 밀어 볼래?”
찬이는 오 선생을 쳐다봤다. 오 선생은 흐뭇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찬이는 떨리는 마음으로 붉은 벽에 마주 섰다. 조심스레 ‘7’에 해당하는 벽돌을 눌렀다. ‘끄응’ 있는 힘껏 힘을 주자 ‘드드득’ 벽돌이 앞으로 쑥 밀려 들어갔다. 나머지 벽돌도 차례로 밀어 넣었다. 마침내 ‘11’에 해당하는 벽돌이 ‘딱’하고 들어간 순간, 씩씩거리던 보일러가 ‘삐리릭’하는 소리와 함께 멈춰 버렸다. 주변이 금세 고요해졌다. 그 순간이었다. 붉은 벽이 정확히 절반으로 갈라졌다.
비밀의 방
입이 떡 벌어질 만큼 놀라운 광경이었지만, 오 선생과 삼촌은 익숙한 듯 붉은 벽을 미닫이 문처럼 열어 젖혔다. ‘끼잉’ 하는 소리와 함께 숨어 있던 지하 이분의 일층이 찬이의 눈 앞에 펼쳐졌다. 찬이의 놀란 표정을 확인한 오 선생이 긴 설명을 시작했다.
“지금으로부터 20년 전 세상은 핵전쟁에 대한 공포로 가득했단다. 사람들은 핵으로 오염된 땅 위 대신 안전하게 지낼 곳을 찾기 시작했지. 그 때 주목 받은 장소 중 하나가 바로 지하상가란다. 많은 사람이 들어갈 만큼 넓고, 화장실이나 식당 같은 시설이 이미 갖춰져 있기 때문에 조금만 고치면 충분히 살만한 곳으로 만들 수 있다고 본거지.
몇몇 기업이 비밀리에 전국의 지하상가를 벙커로 만들 계획을 세웠단다. 핵전쟁이 일어나면 사람들에게 지하상가를 팔려고 했던 거지. 그런데 얼마 안 있어 경제위기가 찾아 왔고 엄청난 돈이 드는 ‘벙커’ 계획은 물거품이 돼 버렸지.
그런데 한 괴짜 건축가만이 꿈을 접지 못하고 비밀리에 홀로 계획을 이어갔단다. 부족한 예산을 다양한 아이디어로 극복해가며 마침내 ‘벙커’를 완성할 수 있었지. 그는 자신이 만든 걸작에 뭔가 특별한 이름을 붙이고 싶었어. 수학을 좋아하던 그의 머릿속에 숫자 ‘이분의 일’이 떠올랐지. 땅 위라 할 수도 땅 아래라 할 수도 없었거든. 그 곳이 바로 여기 ‘지하 이분의 일층’이란다.”
붉은 문 뒤에 위치한 작은 계단을 올라가자 동그란 거실과 그곳을 둘러싼 방들이 있었다. 타원 모양의 문, 동그란 창문과 창문만큼 동그란 문고리가 눈에 들어왔다. 마치 잠수함 속에 들어온 듯 했다. 붉은 벽 너머의 정원보단 지하 이분의 일층이라는 이름과 어울리는 곳이었다. 삼촌은 12시 방향에 있는 방을 가리켰다.
삼촌이 힘차게 문고리를 돌리자 ‘푸쉭’ 공기가 빠져 나가는 소리와 함께 방문이 열렸다. 또 하나의 작은 잠수함이었다. 방금 전의 공간을 그대로 작게 옮겨 놓은 듯이 동그란 테이블이 가운데에 있고 양 끝에 이층침대와 책상, 그리고 옷장이 있었다.
“먹을 것만 충분하면 이 안에서만 한 달 넘게 살 수도 있어.”
삼촌의 설명에 ‘핵 전쟁을 위해 지은 벙커’라는 오 선생의 말이 실감났다. 얼마 없는 짐을 정리하고 거실로 나갔다. 오 선생이 테이블에 앉아 신문을 보고 있었다. 찬이는 방금 들어 왔던 붉은 벽, 아니 붉은 문을 쳐다봤다. 조그만 계단 아래 보이는 정원이 참 낯설었다. 어리둥절 지나쳤던 홀을 유심히 살펴 봤다. 동서남북 방향으로 큰 방들이 있고, 사이사이 작은 방이 있었다. 직선과 곡선이라는 차이만 있었을 뿐, 붉은 벽처럼 빈틈없이 맞물린 구조였다. 다시 한번 블록 쌓기가 생각났다. 수건을 들고 나오는 삼촌을 향해 오 선생이 물었다.
“이렇게 마음놓고 있어도 괜찮을까? 이 씨가 저번처럼 갑자기 찾아 올까 걱정이 되네.”
“걱정하지 마세요. 오늘 이 씨 아저씨 쉬는 날이에요.”
오 선생의 얼굴엔 찜찜함이 남아 있었지만, 삼촌의 넉살 좋은 웃음이 분위기를 바꿨다.
“찬이야, 어서 씻고 나와서 밥 먹자. 오늘은 삼촌이 특별히 맛있는 걸로 차려 줄게.”
삼촌은 가리킨 작은 문을 열자 한 사람 겨우 서 있을 정도의 샤워실이 나왔다. 따듯한 물에 몸을 적시자, 굳어 있던 근육이 풀리고 마음도 노곤해졌다. 불과 얼마 전 지하상가 입구에서 서 있던 자신의 모습이 떠올랐다.
그땐 잠수함 같이 생긴 이 곳에서 따뜻하게 샤워를 하리라곤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문득 이 벙커를 만든 건축가가 생각났다. 벽돌을 하나하나를 올릴 때 어떤 기분이었을까? 블록 놀이처럼 마냥 재미있었을까? 아니면 벙커를 만드는 비장한 마음이었을까? 어떤 마음이었든지, 자기도 그처럼 뭔가를 쌓아 올리고 싶다는 생각이 간절해졌다.
우당탕탕
밖에서 갑자기 큰 소리가 났다. 샤워기를 잠그고 귀를 문 밖으로 기울였다. 삼촌과 오 선생 그 누구의 목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으악!”
삼촌의 목소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