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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대한 역사의 비밀 수학을 사랑한 王

염라! 이제 천상의 왕을 뽑아야 할 때가 됐어. 그런데 왕은 뭐니뭐니 해도 얼굴이지? 일단 잘생기면 호감이 가잖아. 나처럼.
그게 말이나 돼? 결코 내가 외모에 자신이 없어서 하는 말이 아냐. 자고로 왕이란 똑똑해야지. 특히 수학을 잘해야 한다고! 나처럼.

왕이면 정치지, 어떻게 수학이야? 염라, 요즘 저승사자들이 말을 안 들어? 왜 자꾸 딴소리야. 근데 정치도 잘생기면 참 쉬워. 나를 봐~!
수학을 잘해야 한다니까! 안 되겠군. 거기 무영이 없느냐? 옥황상제께 수학을 사랑한 왕들을 소개해 올리거라.

 
알렉산더 대왕의 스승은 아리스토텔레스

인류 역사상 가장 거대한 제국인 알렉산드로스를 세워 ‘정복왕’으로 불리는 알렉산더 대왕은 고대 그리스의 수학자이자 철학자인 아리스토텔레스의 제자였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수학 문제를 증명할 때 필요한 절차를 만들어, 고대 그리스의 수학이 빠르게 발전하도록 기틀을 만든 인물이다.

그런데 아리스토텔레스가 알렉산더 대왕을 처음 만났을 때만 해도 알렉산더 대왕은 공부보다는 말 타기나 술을 마시는 것을 더 좋아하고, 신하들에게 걸핏하면 성질을 부리는 악동이었다. 왕자 교육을 맡은 스승 모두가 그를 포기할 정도였다. 사실 아리스토텔레스도 알렉산더 대왕을 포기하려고 했다. 하지만 그의 아버지인 필립왕의 부탁을 거절할 수 없어 어쩔 수 없이 수학과 물리, 생물, 정치를 가르쳤다.

그러던 어느 날, 알렉산더 대왕은 매일 같이 포기하지 않고 자신을 가르치러 온 아리스토텔레스의 정성에 감동받아 착실한 학생이 되기로 결심한다. 모두가 자신을 포기하고 도망가 버렸는데, 아리스토텔레스만은 그의 성질을 다 받아 주었기 때문이다. 이후 알렉산더 대왕은 모든 학문을 열심히 공부하기 시작했다.

기하학에는 왕도가 없다!

알렉산더 대왕에게는 기하학을 가르쳐 준 또 한 명의 스승이 있다. 바로 메네쿰스다. 알렉산더 대왕과 메네쿰스 사이에는 다음과 같은 아주 유명한 일화가 있다.


이 일화에는 제 아무리 왕이라고 해도 기하학을 잘할 수 있는 비결은 오직 자신의 노력뿐이라는 의미가 담겨 있다. 여기서 ‘수학에는 왕도가 없다’는 말이 유래됐다.

그런데 알렉산더 대왕은 왜 하필 기하학을 배웠을까? 기하학과 정치가 무슨 상관이 있는 걸까? 놀랍게도 고대 그리스와 이집트 시대에는 기하학이 왕이 꼭 배워야 하는 제왕학이었다. 나라의 군사력을 높이기 위해서는 성능 좋은 무기가 있어야 하는데, 이런 무기는 기하학을 이용해야 제작할 수 있기 때문이다. 또 전쟁을 통해 영토를 확장하면 그 땅을 측정하고 백성들에게 나눠 줘야 하는데, 이때도 반드시 기하학이 필요했다. 실제로 고대 그리스의 기하학자 아르키메데스는 로마와의 전쟁 중에 군사 기술 책임자로 활약했으며, 이때 지레나 겹도르래 등을 개발했다.
 

알렉산더 대왕이 고대 바빌로니아의 수도였던 바빌론에 입성하는 모습을 그린 작품이다.
알렉산더는 바빌론을 거쳐 이란과 인도까지 정복했다.


취미는 수학 문제 풀기!

프랑스 혁명을 이끌고, 나가는 전쟁마다 승전보를 울려 천재적인 군사전문가, 권력의 화신으로 알려진 나폴레옹. 그런데 나폴레옹의 취미는 의외로 수학 문제 풀기였다.

그는 학창시절 공부를 썩 잘하지 못했지만 수학만큼은 1등 자리를 놓치는 법이 없었다. 기분이 안 좋을 땐 간단한 수학 문제를 풀면서 기분전환을 할 정도로 수학에 남다른 애정이 있었다. 육군사관학교를 다니던 시절에는 졸업시험 성적이 58명 중 42위로 하위권이어서 장교가 될 수 없었지만, 수학에서만은 최우등상을 받을 정도로 뛰어났다. 이 덕분에 결국 왕실 포병대 장교가 될 수 있었다.

군인이 된 나폴레옹은 군사 전략을 짜는 방법과 수학에서 어떤 정리를 증명하는 방법이 비슷하다고 믿었다. 이에 전쟁에서 승리하기 위해서 수학 공부에 더 몰두했다. 이후 그는전쟁을 계속해서 승리로 이끌었고, 1804년 드디어 프랑스의 황제로 즉위했다.

*프랑스 혁명 전후의 왕들과 귀족들은 실력이 뛰어난 수학자가 있어야 부강한 나라를 만들 수 있다고 믿었다. 성능 좋은 무기를 개발하고, 최적의 방법으로 군사 전략을 짤 수 있는 사람이 수학자라고 여겼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로 나폴레옹은 권력을 손에 쥐자 바로 수학자를 양성할 수 있는 학교를 세웠다. 이것이 1794년 세워진 ‘에콜 폴리테크니크’다. 에콜 폴리테크니크는 오늘날에도 프랑스에서 수학을 가장 잘하는 학교로 명성이 자자하다. 나폴레옹은 또한 프랑스의 모든 학교의 교육과정에서 수학을 필수과목으로 만들었다. 이전까지는 문학과 어학만이 필수과목이었던 데 비해 수학의 중요성을 인정한 것이다.

나폴레옹은 수학자들과도 친하게 지냈다. 서로 수학 문제 내기를 하면서 친목을 다졌고, 전쟁 중에도 틈틈이 수학 문제를 풀었다. 특히 이탈리아 원정에서 만난 이탈리아 수학자 로렌초 마스케로니와 유난히 친했다. 그의 영향으로 한동안 작도 문제에 심취했을 정도다.

그러던 어느 날, 나폴레옹 황제는 컴퍼스만을 이용해서 원을 사등분할 수 있는지가 궁금했다. 나폴레옹은 이 문제를 해결해 달라고 마스케로니를 괴롭혔는데, 결국 마스케로니가 그 문제를 풀어냈다. 마스케로니는 나폴레옹에게 긴 송시를 덧붙여 헌정했고, 이후로 이 문제를 ‘나폴레옹 문제’라고 부르게 되었다.

*프랑스 혁명은 1787~1789년까지 프랑스에서 일어난 시민혁명으로, 부르봉 왕조를 무너뜨리고 국민 의회를 열어 공화 제도를 이룩했다.
 
나폴레옹의 세 남자 몽주, 라플라스, 푸리에

나폴레옹은 생각했던 것보다 수학을 잘했구나. 근데 수학자들이랑 친했다며? 나도 알 만한 유명한 사람들은 없는 거야?
몽주와 라플라스, 푸리에와 친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 세 수학자는 나폴레옹의 몰락 이후 서로 다른 처신으로 엇갈린 운명을 맞았습니다.


나폴레옹과 같은 길을 간 충신, 몽주


한 번 군주는 영원한 군주 아니겠어요? 저 몽주는 나폴레옹 황제에게 받은 넘치는 사랑을 잊지 않고 끝까지 황제의 뜻을 받들었습니다. 황제와의 인연은 1787년 프랑스 혁명이 일어났을 때부터 시작됐어요. 썩을 때로 썩은 부르봉 왕조를 밀어내고 민주주의를 외치는 혁명이 일어났는데, 저도 잠자코 있을 수만은 없었어요. 새로운 무기를 만들어 시민군에게 힘을 보탰죠. 이때 황제를 만났습니다. 제 수학 실력을 한 눈에 알아보신 황제는 저를 군수 공장 총책임자로 임명해 주셨어요. 이집트 원정을 떠났을 때도 이집트 수학을 공부하라며 함께 가길 권유하셨죠. 덕분에 전 수학 실력을 한 단계 높일 수 있었습니다. 이후에는 에콜 폴리테크니크에서 *화법기하학과 미분기하학을 학생들에게 강의할 수 있도록 도와 주셨죠.

그런데 행복도 잠시, 나폴레옹 황제께서 몰락의 길을 걷게 되었죠. 부르봉 왕조에서는 저에게 거액의 돈과 명예를 주겠다며 황제를 배신할 것을 요구했어요. 그런데 어떻게 제가 황제를 배신할 수 있겠어요? 황제에게 받은 사랑이 얼마인데…. 비록 모든 공직에서 퇴출당하고 쫓기는 신세가 되었지만 전 후회하지 않습니다.

*화법기하학은 3차원의 도형을 2차원으로 표현하는 방법을 연구하는 기하학의 한 분야로, 몽주가 창시했다.


기회주의자, 라플라스

제가 뭘 어쨌다고 뒤에서 쑥덕거리는지 모르겠어요. 여러 명의 군주 밑에서 일을 하면 안 되는 건가요? 제 연구만 잘 하면 될 것 같은데….

제가 수학 하나는 끝내주게 잘하거든요. 수학자이면서도 ‘프랑스의 뉴턴’이라고 불릴 만큼 물리도 잘했어요. 두 학문을 융합해 수리물리학의 기틀도 세웠죠. 수리물리학은 물리적 현상을 수학적으로 설명하는 방법을 연구하는 학문이에요.

확률론과 미분방정식, 천체역학에 대해서도 저를 따라올 사람이 없었어요. 덕분에 나폴레옹 황제 눈에 들어 상원의원으로 임명되고, 백작 작위도 받았습니다. 더 출세하고 싶은 욕심에 새로운 책을 쓰면 황제에 대한 헌사도 빠뜨리지 않았죠.

그런데 황제가 전투에서 진 거예요. 어쩌겠어요? 그렇다면 부르봉 왕조 밑에서 일을 해야죠. <;천체역학>;의 재판 본에서 나폴레옹 황제에게 바치는 글을 지우고, 루이 18세의 헌사로 바꾸니 절 받아 주더라고요. 더 높은 지위도 주고요. 그래서 전 제가 하고 싶은 연구를 하며 평생을 지냈답니다. 정말 몰라서 물어보는 건데, 이게 욕먹을 일인가요?

나폴레옹을 배신한 푸리에

제 이름이 붙은 ‘푸리에 급수’라고 들어보셨나요? 이래봬도 이 정리가 함수에 대한 새로운 정의를 도입해 수학사에 한 획을 그었다고요. 현대 수학의 시초인 집합론을 발견하게 된 계기도 마련했지요. 제 입으로 말하긴 그렇지만, 참 대단하죠?

저도 프랑스 혁명을 통해 나폴레옹 황제와 알게 됐어요. 몽주와 같이 에콜 폴리테크니크에서 해석학과 역학을 가르쳤지요. 이집트 원정에도 동참했고요.

나폴레옹이 황제 자리에서 쫓겨나자 부르봉 왕조에서는 제게 나폴레옹을 등질 것을 요구했어요. 마다할 이유가 없었죠. 조건이 좋았거든요. 그런데 아뿔싸! 황제가 유배지에서 탈출한 거예요. 다시 나폴레옹 황제에게 충성을 맹세했죠. 헌데 이것이 100일 천하로 끝나고 만 거예요. 결국 전 부르봉 왕조에서도 추방당해 빈민굴에서 생활했지요. 그런데 제 제자가 통계 국장 자리를 제안한 거예요. 덕분에 끼니 걱정은 안했죠.

하지만 전 결국 심장마비로 조금 일찍 생을 마감하고 말았어요. 황제를 배신한 벌을 받은 걸지도 모르겠네요.

王3 수학 실력으로 세상을 놀래킨 미국 대통령 링컨, 가필드, 클린턴

에이, 나 아랑을 빼놓고 이렇게 재밌는 왕 얘기를 하면 섭섭하지~. 사실 내가 얼마 전 미국 여행을 다녀왔거든. 거기서 링컨이라는 사람을 만났어. 미국의 대통령이라던가, 암튼 왕 같은 거래. 근데 그 사람도 수학 공부를 했다지 뭐야? 무영아, 미국 왕들도 소개해 줘~. 응?
넌 또 천상에 왜 온 거야? 너의 죽음을 밝히기도 바쁜 녀석이 미국 여행까지 다녀오고 팔자 좋구나. 컬컬컬~.

논리력을 키우기 위해 <;원론>;을 공부한 에이브러험 링컨


헬로우! 남북전쟁에서 승리해 미국 연방을 보호하고, 노예를 해방시켜 미국 역사상 가장 위대한 대통령으로 뽑힌 링컨입니다. 업적만 들으면 엘리트 코스로 탄탄대로를 걸었을 것 같지만, 멋진 대통령이 되기까지 제게도 큰 고민이 있었습니다. 바로 학력! 전 가난한 집에서 태어나 제대로 된 교육을 받은 적이 거의 없거든요. 그런데 국회의원이 되려니 “교육도 받지 못한 사람이 무슨 정치야!”라는 비아냥거림을 들을까 걱정이 됐어요.

그래서 첫 번째 도전한 국회의원 선거에서 낙선한 이후, 유클리드 <;원론>;을 읽었습니다. <;원론>;은 오늘날 중고등학교 교육과정에서 배우는 수학에서 가장 핵심이 되는 내용을 모두 담고 있을 정도로 수학 공부에 기본이 되는 책입니다. 이 때문에 성경에 이어 전 세계에서 두 번째로 많이 팔린 책이 됐지요. 이렇게 모두가 인정하는 책을 읽고 논리력을 키우면 사람들이 제 논리를 믿어 줄 거라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원론>;을 읽다 보니 수학적 증명이 너무 재미있는 거예요. 처음에는 단순히 논리력과 언어 표현력을 향상시키기 위해 읽었는데 말이죠. 그래서 모든 증명을 책을 안 보고도 할 수 있을 정도로 공부했죠.

결국 대통령 선거 연설에서 당당하게 “전 <;원론>;을 세 번이나 읽었습니다. 증명도 할 수 있습니다.”라고 말할 수 있었죠.
 
16대 대통령 에이브러험 링컨 (1809~1865)은 1832년 일리노이 주 의회 선거에 출마했지만 낙선해 1년 동안 법 공부를 해서 변호사가 됐다. 2년 뒤 일리노이 주 주의원으로 당선돼 정치계에 입문했다.

피타고라스 정리를 증명한 제임스 가필드

흑~, 시작부터 가슴이 아프군요. 저는 대통령이 된 지 4개월 만에 암살범의 총에 맞아 생을 마감했거든요. 그래서 미국에서 가장 불운한 대통령으로 알려져 있죠. 그런데 사실 피타고라스의 정리를 증명한 독특한 이력도 가지고 있습니다.

하원의원 시절 다른 의원들과 수학에 대해 토론을 하고 있었어요. 저는 원래 교육학을 공부했는데, 워낙 수학을 좋아해서 가끔 의원들에게 수학 문제를 내곤 했죠. 그날은 피타고라스의 정리에 대해 이야기했어요. 그런데 갑자기 증명에 대한 아이디어가 번쩍 떠오른 거예요.

임의의 사다리꼴을 그리고 직각삼각형 3개로 나눈 뒤, 각각의 삼각형 넓이의 합과 사다리꼴의 넓이가 같다고 놓으면 피타고라스 정리를 증명할 수 있겠더라고요. 이 증명법은 <;뉴앵글랜드 교육 잡지>;에 소개되며 저를 수학을 사랑한 대통령으로 널리 알려 주었죠. 그러니 저를 불운의 대통령으로 기억하면 아니아니 아니 되오~!
 

수학 문제도 척척, 빌 클린턴

1999년 어느 날 저는 빈곤 퇴치를 위해 전국을 방문하고 있었어요. 그러던 중 저는 버거킹의 납품업자들이 미시시피 삼각주의 채소 재배업자들로부터 밭 200만 에이커와 오이 320만 파운드를 구입하기로 약속했다고 발표했어요. 그런데 얼마나 많은 피클 조각이 나올지는 모르겠다고 말했죠. 돌아오는 비행기에서 이 말을 기억한 기자가 질문을 했어요. “오이 3개의 무게를 1파운드, 오이 1개에서 피클 20조각을 만들 수 있다면, 320파운드의 오이로는 피클 조각을 몇 개 만들 수 있을까요?”

질문을 들었을 때는 조금 막막했어요. 그런데 찬찬히 생각해 보니 의외로 쉽더라고요. 오이의 무게가 총 320만 파운드이므로, 오이의 개수는 320만×3=960만 개죠. 오이 1개에서 피클 20개의 조각이 만들어지니까 피클의 총 개수는 960만×20=1억 9200만 조각! 암산으로도 답을 쉽게 구할 수 있었죠. 그래서 어떻게 되었냐구요? 이 일화가 기사로 소개돼 수학도 잘하는 대통령이라는 인식이 커졌어요. 하하~.

王4 수학 열풍을 일으킨 중국의 왕 강희제와 장쩌민

그런데 말이야, 죄다 서양의 왕들이잖아. 동양의 왕들 중에는 없는 거야? 가까운 중국에라도 있어야 내가 마음을 바꾸지.
성미가 급하긴. 어련히 알아서 소개할 것을. 그 얼마 전에 중국에서 왕을 했던, 한 300년 정도 됐나? 강희제라고 있잖아. 그 사람이 수학을 좀 잘했어. 기억 안 나?

수학 공부를 위해 선교사를 스승으로 삼은 강희제


중국에서 가장 존경받는 지도자를 꼽으라면 단연 청나라의 4대 황제 강희제다. 8살에 황제에 올라 청나라를 강대국으로 만들었고, 15살 때 타이완과 러시아 일부까지 정벌해 중국 전체를 장악했다.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이렇게까지 할 수 있었던 비결은 무엇일까? 역사학자들은 예수회 선교사들에게 수학과 과학, 천문학을 배운 것을 그 이유로 꼽는다. 학문적 지식을 바탕으로 군사력을 강화하고, *역법을 재정비해 나라의 안정을 이뤘기 때문이다.

그런데 강희제가 수학에 눈을 뜬 것은 우연한 사건 때문이었다. 어느 날, 강희제는 역법 담당관들과 독일의 선교사 아담 샬 폰 벨이 이야기를 나누는 광경을 보았다. 아담 샬이 관료들에게 서양의 역법을 소개하고 있었던 것이다. 아담 샬은 예수회 선교사로 역법과 수학, 과학에 뛰어났다. 그런데 역법 공부를 수십 년간 해온 관료들이 아담 샬의 말을 하나도 알아듣지 못하는 게 아닌가!

강희제는 큰 충격을 받았고, 이후 자신부터 먼저 역법 공부를 시작했다. 본인이 직접 나서면 관료들도 따라서 공부를 하고, 중국의 역법도 발전할 것이라고 믿었던 것이다.

강희제는 역법을 알기 위해 모든 학문의 기초가 되는 수학부터 공부했다. 예수회 선교사 중 수학을 잘하는 사람들을 선발해 수학 선생으로 모셨고, 매문정과 진후요 등 당대 최고의 수학자들을 불러 수학 문제를 논의하는 시간을 매일 가졌다. 그를 가르친 선교사 장 프랑수아 제르비용은 “황제는 대단한 인재야! 유럽 사람들에게 반년 동안 가르쳐도 다 이해하지 못하는 문제를 황제는 한 달 만에 깨우쳤어. 난 이제 밑바닥이 드러날까 봐 못 가르치겠어!”라는 말을 남기기도 했다.

강희제는 유클리드 <;원론>;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 라틴어까지 배우는 열정을 발휘했다. 이미 선교사 마테오리치가 중국어로 번역한 책이 있었지만, 번역 과정에서 뜻이 바뀔 수도 있기 때문에 원래의 언어로 공부하고자 했다. <;원론>;을 적어도 20번 이상 읽었다고 하니, 그 열정이 얼마나 대단했는지 짐작할 만하다. 강희제는 자신이 공부한 것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많은 관료들이 읽을 수 있도록 <;원론>;을 만주어로 번역하도록 했다.

강희제의 수학에 대한 열정은 책의 편찬으로 이어졌다. 서양 수학을 체계적으로 정리해 53권으로 이루어진 수학백과사전인 <;수리정온>;을 만든 것이다. 이 책에는 서양 수학뿐만이 아니라 고대 중국 수학부터 시작해 당시까지 알려진 모든 수학 내용이 담겨 있었다. 강희제는 수학교육의 활성화를 위해 <;수리정온>;을 나라 전체에 보급했다.

*역법은 천체 운행의 주기에 따라 달이나 날짜, 시간을 묶는 방법이다.

강희제 황제(1654~1722)는 중국 청나라 4대 황제로, 예수회 선교사들로부터 서양의 학문과 기술을 도입해 문화를 발전시켰다.

가상 인터뷰 수학 문제 풀기 열풍을 주도한 장쩌민

과거에 중국 수학을 일으킨 왕으로 강희제가 있다면 현재는 누가 있을까요? 기자는 지금 ‘수학 문제 풀기’ 열풍을 주도한 장쩌민 주석을 만나러 중국에 나왔습니다. 학생들은 대체 왜 쉬는 시간만 되면 수학 문제를 푸는 것일까요?

장쩌민 : 허허허. 제가 낸 수학 문제 하나가 이렇게까지 화제가 될 줄 몰랐습니다. 지난 2000년에 포르투갈로부터 마카오를 반환받은 지 1주년이 된 것을 기념하여, 마카오의 한 중학교를 방문했었죠. 학생들에게 좋은 이야기를 해 줄 것이 없을까 생각하다가, 학창시절 기하학 문제를 푸는 것이 취미였다는 이야기를 했어요. 그리고 번뜩 한 문제가 생각나더라고요. 그래서 그 문제를 학생들에게 풀어보라고 시켰죠.

학창시절 수학을 잘하셨나 봐요? 학생들에게 출제한 문제는 어떤 거죠?

장쩌민 : 임의의 오각별 도형을 그렸을 때 이 도형의 5개 외접원의 교차점들이 동일한 원 위에 있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이었어요. 아쉽게도 그 자리에서 바로 푼 학생은 없었어요. 그런데 이후 학생들 사이에서 수학 문제 풀기 열풍이 분 거예요.

‘오각별 정리’라고 알려진 문제를 이제는 ‘장쩌민 문제’라고 부르던데 소감이 어떠세요?

장쩌민 : 당연히 좋죠. 마치 수학자가 된 기분이랄까…. 하하하. 사실 기하학 문제를 푸는 것은 사고를 단련시키고 탐구 정신을 높여 줍니다. 이 일을 계기로 학생들에게 수학 문제 푸는 취미가 생겼으면 좋겠네요. 수학은 시험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합리적인 사고를 하기 위해 필요한 것이니까요. 허허허~.

王5 조선시대 수학을 꽃 피운 세종대왕과 정조

상제, 우리나라에도 수학을 좋아하고 중요시 한 왕이 있습니다. 바로 세종대왕이옵니다. 제가 알아본 바에 의하면 세자 교육에도 없었던 수학을 스스로 찾아 공부하고, 수학교육을 장려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수학을 기반으로 도량형을 정비하고, 일식 예측도 정확하게 했습니다.
맞다! 첫 번째 일식은 틀렸는데, 두 번째는 정확하게 맞혀서 깜짝 놀랐었지. 세종을 깜박하고 있었네. 또 세종의 업적을 계승한 정조도 있잖아!

수학자를 발굴해 새로운 역법을 개발하다


때는 세종이 즉위한 지 4년이 되는 1422년 1월 23일. 궁궐 뜰 앞에 세종대왕과 신하들이 소복을 입고 의식을 준비하고 있다. 긴장감이 감도는 가운데 모두들 하늘을 바라보며 태양이 가려지기만을 기다리고 있다. 때가 지나도 태양은 가려지지 않자, 세종의 얼굴은 일그러지고 일부 신하들의 이마에서는 땀이 흐른다.
한 식경이 지났을까. 그때 사악한 기운에 태양이 서서히 가려져 어둠이 찾아온다. 의식은 모두 끝났지만 세종대왕은 고민에 휩싸인다. 신하들은 세종대왕에게 일식을 잘못 예측한 관리를 곤장에 처하라고 고하는데….

일식은 조선시대 왕들이 가장 두려워하는 자연재해였다. 유교 사상이 짙게 깔려 있었던 조선시대에는 일식을 제대로 예측하지 못하면, 하늘이 왕을 거부하는 것으로 여겨 왕이 정치적으로 공격을 받았기 때문이다. 우리나라 역사상 가장 존경받는 왕인 세종대왕도 일식 때문에 곤욕을 치렀다. 하지만 그는 일식 예측에 실패한 것을 하늘의 뜻이 아니라 잘못된 역법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당시에는 우리나라만의 독자적인 역법이 없어 중국의 역법을 이용했는데, 위도와 경도 차이로 인해 정확한 예측이 불가능했던 것이다.

이에 세종대왕은 우리나라에 알맞은 역법을 만들기 위해 유능한 수학자를 발굴했다. 대표적인 인물이 이순지와 김담이다. 역법을 만들기 위해서는 천체의 운행을 3차 이상의 고차방정식으로 표현해야 한다. 당시 우리나라 수학 실력으로는 방정식을 세울 수는 있었지만, 고차방정식을 풀 수 없었다.

세종대왕은 이순지와 김담에게 최신 역법 정보를 모아 우리나라만의 독자적인 계산법을 만들게 했다. 이렇게 탄생한 것이 ‘칠정산 외편’이다.

칠정산 외편에는 고차방정식과 삼각함수, 제곱근을 이용해 1년의 길이, 일식 등 여러 자연현상을 예측할 수 있는 방법이 소개돼 있다. 현대의 1년 기준과 단 1초밖에 차이가 나지 않을 정도로 정확하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세종대왕(1397~1450)은 조선시대 4대 왕으로, 수학을 국가 발전을 위한 기초 학문으로 여겼다.

음악으로 도량형을 정비하다

세종대왕은 밤새 수학공부를 할 만큼 수학에 대한 애정이 남달랐다. 사실 조선시대에는 수학을 무시하는 풍토가 짙게 깔려 있었다. 왕족은 물론 양반들도 수학은 상거래를 하는 중인이 하는 학문이라고 여겨 거들떠도 보지 않았다.

하지만 세종대왕은 수학에서 배울 내용이 반드시 있다고 여기고 공부를 시작했다. 처음에는 책을 읽는 것으로 시작했지만, 다른 책들과 달리 쉽게 읽히지가 않았고 궁금한 것도 너무 많았다. 이에 훈민정음 창제에 공을 세운 정인지를 수학 선생으로 모시며 질문이 있을 때마다 물으며 공부했다.

세종대왕의 수학에 대한 열정은 도량형 정비로도 이어졌다. 도량형은 길이, 무게, 들이 따위를 재는 단위계나 자나 저울 등의 측정 기구를 통틀어 이르는 말이다. 당시에는 지역에 따라 무게나 길이, 들이의 단위가 달라, 부당하게 많은 세금을 걷거나 비싼 가격에 물건을 파는 등 문제가 심각했다.

세종대왕은 우선 음악가 박연에게 명을 내려 ‘황종관’을 기준으로 길이와 들이, 무게의 표준 기준을 정하게 했다. 황종관은 음정을 맞추기 위해 쓰던 12개의 음을 내는 관 중 가장 긴 관을 말한다. 이 관에서 나는 음은 조선시대 음계인 ‘십이율’의 기본음으로, ‘황종’이라고 부른다.

음의 기본이자 도량형의 기본, 황종관

• 길이 황종관의 길이 9치= 기장 90알을 나란히 늘어놓은 것. 1알=1분, 10분=1치, 10치=1자, 10자=1장
• 들이 1작 = 황종관에 기장 1200알을 담은 것. 1200알=1작, 10작=1홉, 10홉=1되, 10되=1말, 10말=1곡
• 무게 10리 = 황종관에 우물물을 가득 채워 그 무게를 88 등분 한 것. 100배=1전, 10전=1냥, 16냥=1근

조선시대 수학의 르네상스를 이끈 정조

정조 시대를 일컬어 ‘조선의 르네상스’라고 부른다. 국왕의 학구열에서 시작된 학문적 연구가 사회 곳곳에서 꽃피워 정치, 사회, 문화뿐만 아니라 수학과 과학 분야에서도 두각을 나타냈기 때문이다. 특히 정조는 세종대왕의 업적을 계승해 조선 초기처럼 부강한 나라를 만들려고 했다. 그래서 시작한 정책이 역법의 정비다.

세종대왕 때 우리나라 고유의 역법이 만들어졌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점점 시차가 생기기 시작했다. 정조는 역법을 연구하는 관리에게 1777년부터 100년 동안, 천문과 절기를 예측하는 책을 만들게 했다. 결국 5년간의 작업 끝에 87년간의 절기를 예측한 <;만세력>;을 편찬한다.

정조는 세종대왕이 그랬던 것처럼 수학자 발굴에 힘을 쏟았다. 그렇게 찾아낸 대표적인 수학 천재가 김영과 이가환이다. 김영은 농사꾼 출신으로, 어려서 고아가 되어 떠돌이 생활을 해 언행과 용모가 모두 형편없었다. 하지만 수학 실력만큼은 최고였다. 그의 실력은 고을 밖으로 전해져 당대 최고의 수학자 서호수도 알게 되었다. 서호수는 김영의 천재성을 정조에게 고해 관리로 발탁했다. 이후 정조는 김영의 실력에 감탄하며 역법 제정을 맡겼다. 김영은 칠정산 외편을 연구했고, 오차가 생기는 부분을 수정해 정조 시대 수학 발전에 박차를 가했다.

이가환은 수학뿐만 아니라 모든 방면에서 뛰어났는데, 특히 자신이 죽으면 기하학 연구가 끊어질 것을 염려해야 할 정도로 기하학에 특출났다. 일식은 물론 황도와 적도의 교차 각도, 지구의 둘레와 지름도 계산할 줄 알았다.

특히 서양 수학을 접한 이가환은 정조에게 망원경과 같은 관측기구를 만들고, 역법도 정비해야 한다고 상소를 올렸다. 정조는 이가환의 뜻을 받아들였다.

정조는 박학다식한 이가환에게 곧잘 평소 궁금했던 것을 묻곤 했다. 그때마다 이가환은 국가 발전을 위해서는 수학이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또 수학책을 읽는 것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근본 원리를 이해해야 정사에 도움이 된다고 조언했다.

정조는 신분에 상관없이 수학자를 발굴하고 아낌없이 지원을 해, 조선 후기 수학의 황금시대를 이룩했다.

정조(1752~1800)는 조선시대 22대왕으로, 왕실 도서관인 규장각을 설치하였다. 능력이 특출하면 과거 급제자가 아닌 사람도 선발하는 등, 뛰어난 인재를 고루 등용했다.

옥황, 이제 알겠지? 왕이 수학을 얼마나 중요시 여기는지에 따라 나라의 발전이 좌우된다고. 오늘날과 같이 수학이 경쟁력인 시대에는 더욱 수학을 사랑하는 사람이 왕이 돼야 하지. 그런데 천상에서는 수학으로 나를 따라올 자가 없으니 내가 왕이 돼야 할 것 같아. 컬컬컬~.
무슨 소리! 무영이 소개한 왕들을 쭉 살펴보라고. 다 잘 생겼잖아! 세종대왕과 정조만 봐도 알 수 있지. 염라 덕택에 나도 이제 수학을 잘하게 됐고. 그러니 얼굴 되지, 인기도 많지, 수학도 잘하지. 나보다 더 좋은 왕이 어디 있겠어?
뭐…, 뭐? 옥황이 왕이 되겠다고? 안 돼! 얼굴은 바꿀 수 없잖아! 안 돼! 안 돼! 그래도 수학은 내가 더 잘한다고!
옥황, 염라! 뭘 그렇게 걱정해. 지금은 민주주의 시대라고! 민주주의 꽃! 투표로 하면 되잖아. 난 옥황에게 한 표! 잘생겼으니까.
저도 투표로 하겠습니다. 결과는 비밀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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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12월 수학동아 정보

  • 조가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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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용운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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