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9화 공주님의 나들이
'해가 정말 사라진다고? 그런 일이 어떻게 생길 수 있지?'
지오가 제 귀를 의심하며 고개를 갸웃거릴 때였다.
“일식이란 걸 아느냐?”
장도사가 지오의 곁으로 바싹 다가앉으며 목소리를 낮추어 말했다. 지오는 절레절레 고개를 저었다.
“일식이란 말이다, 달이 태양과 우리가 사는 세상(지구) 사이에 들어오는 현상이야. 생각해보렴. 그럼 어떤 일이 벌어지겠니?”
지오는 머릿속으로 달과 태양을 그려 보았다.
“그럼 태양이 달에 가려지니까……. 오호라! 사람들 눈에는 태양이 안 보이겠네요.”
그제야 말뜻을 알아챈 지오가 고개를 끄덕이자, 장도사는 믿기지 않는 말들을 계속 쏟아냈다.
“그렇지! 태양이 사라진 게 아니라, 달에 가려지는 것뿐이야. 그중에서도 달이 태양을 완전히 가려서 사라지는 경우를 개기일식이라고 하지. 분명 정대섭 대감의 사람들이 천문학자들을 이용해서 그 날짜를 알아낸 것이 분명해.”
“일식이 일어나는 날짜를 알아낼 수 있어요? 어떻게요?”
“태양과 달의 움직임을 관찰하면서 과거에 일식이 일어났던 기록들을 자세히 조사해보면 날짜를 계산해낼 수 있지. 일식은 비교적 규칙적으로 일어나거든. 물론 이때를 알려면 아주 복잡한 계산을 해야 해서 아무나 알아낼 수 있는 건 아니지만 말이야.”
일식은 하늘의 세상에서 일어나는 현상이다. 그런 현상까지도 산학 계산법으로 알아낼 수 있다니!
‘정말 신기해! 해와 달을 살피면 하늘에서 벌어질 일을 미리 알 수 있다니!’
인간의 세상을 넘어 아득한 천체의 세상에 대한 궁금증이 지오를 흥분시켰다. 하지만 지금은 천체에 대한 궁금증으로 여유를 부릴 시간이 없었다.
“그럼 이미 장도사 아저씨와 황산사님도 일식 날짜를 계산해냈겠네요?”
“물론이지. 연월기 제작 계획을 세울 때부터 알고 있었단다.”
“정말요? 언젠데요?”
“연월기를 작동시키기로 한 날! 바로 그날이란다.”
황산사의 말에 장도사가 설명을 보탰다.
“우리는 처음부터 일식을 이용할 작정이었어. 일식이 일어나면 해와 달이 하나가 되지. 그 힘은 막강할 거야. 연월기의 쇠침을 이용해서 하나가 된 해와 달의 힘을 끌어온다면 못해낼 일이 없지. 하지만 사람들은 일식이 일어나는 것 자체를 두려워하기 때문에 지금껏 비밀로 하고 있었던 거야.”
“임금님도 아시겠네요? 그럼 백성들에게도 잘 알려주면 되잖아요.”
“그리 단순하지가 않아. 예부터 일식이 벌어지는 날이면 태양이 사라졌다는 것만으로도 백성들은 두려움에 떨었거든. 그날 이후 전쟁이 일어나거나 흉년이 들기라도 하면 그것조차 태양이 사라졌기 때문이라고 생각했지. 그래서 백성들은 일식이 나타난 뒤 전쟁 같은 무서운 일이 벌어진다고 믿고 있지. 정대섭 대감은 백성들의 그런 두려움을 이용한 거야.”
장도사의 말에 지오는 어쩐지 기분이 상했다.
“백성들은 어리석지 않아요. 일식에 대해 잘 알려주면 두려움 같은 건 떨쳐버릴 거라고요.”
“하지만 어떻게 알려줄 수 있겠느냐? 무슨 수로?”
황산사는 고개를 저었지만, 지오는 오히려 두 눈을 반짝거렸다.
“소문을 이용하면 되죠.”
“소문이라니?”
“어차피 헛소문 때문에 생긴 일이잖아요. 소문은 소문으로 해결해야죠. 우리도 저잣거리에서 소문을 퍼트리는 거예요.”
그럴 듯한 해결책이라고 여긴 듯 장도사가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이내 기운 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하지만 우리에겐 그럴 여유가 없어. 연월기를 만들기에도 시간이 부족한 걸.”
“걱정 마세요. 제가 있잖아요. 제가 궁궐을 나가겠어요.”
언제 앓았냐는 듯 지오는 벌떡 일어나더니 주섬주섬 짐을 챙겼다.
희미한 달빛 때문인지 천지관 대문이 장승처럼 보였다. ‘끼이익!’ 대문이 열리는 소리도 비명처럼 으스스했다. 그래도 문밖으로 나오는 지오의 발걸음은 팔랑팔랑 가볍기만 했다. 궁궐을 나가는 건 꼭 1년 반 만이었다. 사람들로 북적거리는 저잣거리로 나갈 생각만으로도 지오는 가슴이 두근두근 설레었다.
‘축시가 지났으니까, 궁궐을 나가서 저잣거리에 닿을 무렵이면 날이 밝을 거야.’
어깨에 둘러멘 망태기를 흔들며 지오가 막 궁궐 문 쪽으로 걸음을 옮길 때였다.
“나도 같이 가자꾸나.”
낮은 음성과 함께 어깨를 턱 잡아당기는 손길!
“엄마야!”
화들짝 놀란 지오는 비명을 지르며 그 자리에 주저앉고 말았다. 새벽이슬이 서늘하게 엉덩이를 적셔왔다. 소름과 함께 머리털이 쭈뼛쭈뼛 섰다. 귀신인걸까? 지오는 두 눈을 질근 감아버렸다.
“호호호! 사내대장부가 무슨 겁이 이리 많담?”
웃음소리가 지오를 더욱 소름끼치게 했다. 그런데 어쩐지 귀에 익은 웃음소리였다.
“나야 나!”
따뜻한 손길이 지오의 팔을 당겼다. 혜명 공주였다.
“에이! 놀랐잖아요.”
그제야 지오는 엉덩이에 묻은 흙을 툭툭 털며 일어섰다.
“너 지금 궁궐에서 나갈 거라며? 황산사가 그러더라. 나도 같이 가. 나도 저잣거리를 구경하고 싶었거든.”
공주는 척 앞장까지 섰다. 가만 보니 단단히 작정을 한 모양새였다. 평소 입던 옷은 온데 간데없고, 남루한 평민의 옷차림이었다. 고운 꽃신도 벗어던진 채 허름한 짚신을 신고 있었다. 지오도 공주와 함께 궁궐을 나간다는 사실이 싫지 않았다. 함께 저잣거리를 구경할 상상을 하니 오히려 기분이 들떴다.
“그런데 공주님, 그런 차림으로 어떻게 궁궐 문을 빠져나갑니까? 병사들이 내보내 주지도 않을 걸요?”
지오가 걱정스럽게 묻자, 공주는 돌아서며 히죽 웃었다.
“공주 옷을 입었어도 어차피 궁을 나갈 순 없어. 아바마마께서 허락을 하지 않으실 테니까.”
“그럼 어떡해요?”
“걱정 마. 내가 비밀 통로를 알고 있거든.”
“예? 비밀 통로요?”
“나만 따라오면 돼.”
공주는 손가락을 까딱까딱 손짓을 하더니 허리를 바싹 구부려 거북이걸음을 걷기 시작했다. 병사들의 눈을 피하기 위해서였다. 지오도 허리를 구부려 공주의 걸음을 따라 걸었다.
호젓한 궁궐 담 밑에 닿았다. 까마득한 담장 앞엔 커다란 소나무 한 그루가 장대처럼 서있었다.
“바로 여기야.”
공주는 소나무 곁으로 가더니 털썩 주저앉았다. 지오도 따라 앉았다. 나무 밑에 켜켜이 쌓인 나뭇잎이 푹신하게 엉덩이를 받쳐주었다.
“공주님, 여긴 문도 없잖아요. 어떻게 궁궐을 나간단 말이에요.”
지오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공주가 품에서 한지 한 장을 꺼내었다.
“이 문제의 답만 맞추면 돼. 그럼 나가는 문을 찾을 수 있어.”
지오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바라보자, 공주는 손끝으로 담장을 가리켰다.
“저길 봐.”
공주가 가리킨 담장을 보았지만 별다른 것이 보이지 않았다.
“좀 자세히 들여다보렴. 요것 봐. 다른 담장하고는 무늬가 다르잖아.”
공주가 손가락으로 몇몇 담장을 가리켰다. 자세히 보니 정말 무늬가 달랐다. 담장엔 십장생이나 꽃 문향이 새겨져 있기 마련이다. 그런데 공주가 가리킨 곳엔 별 문향이 박혀 있었다. 뜨문뜨문 박힌 별 문향이 아홉 개나 되었다.
“아홉 개 별 중 하나를 밀면 문이 생길 거야. 몇몇 궁녀들만 아는 비밀의 문이지.”
“어느 별인데요?”
지오는 당장 밀어볼 태세였다. 그러자 공주가 방금 펼친 한지를 내밀며 말했다.
“그 답은 여기에 있지. 어서 풀어봐.”
공주의 음성엔 장난기가 잔뜩 묻어났다. 알면서도 지오를 놀리는 게 분명했다. 그래도 지오는 싫지 않았다. 공주와 하는 놀이라면 언제라도 좋았다. 지오는 달빛을 등불 삼아 한지를 보았다. 한지엔 익숙한 숫자들이 네모 모양을 만들고 있었다.
한지를 본 지오의 얼굴로 이내 웃음이 번졌다.
“마방진이네. 이건 너무 쉽잖아요.”
어린 시절부터 즐기던 마방진 놀이였다.
“물론 너라면 금세 맞힐 줄 알았지. 그래도 그냥 알려주는 것보다는 이 방법이 더 재밌잖니. 어서 들어갈 숫자를 맞혀봐.”
공주의 마방진은 1에서 9까지의 9개 숫자를 이용해 가로, 세로, 대각선의 수의 합이 모두 15가 되도록 맞히는 쉬운 문제였다. 지오는 무릎걸음으로 담장 가까이 다가갔다. 그리고 별 모양 담장 중 다섯 번째 것을 힘껏 밀었다. 마방진에 들어갈 숫자는 2와 5, 8인데, 이중 하나라면 5가 2와 8의 중간이고 가운데 답이니까, 다섯 번째 문이 틀림없었다.
스르륵, 열리는 쪽문!
“우와!”
지오의 입에서 저도 몰래 탄성이 흘렀다. 하지만 감탄하고 있을 틈이 없었다.
“빨리 가자. 금세 날이 밝아올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