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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오의 나라

제5화 혜명공주의 산대놀이


지오의 나라


다음 날 아침, 지오의 가슴은 방아 찧기라도 하는 듯 쿵쿵거렸다.
‘공주님이 날 부른 이유가 뭘까?’
알 수 없는 호기심과 기대로 마냥 부풀고 있었다.
“대체 혜명공주님이 지오를 부른 이유가 뭐여?”
지오의 마음을 알기라도 하듯 천복도 고개를 갸웃했다.
“글쎄? 지오 녀석이 귀여워서 불렀나? 동생 삼으려고?”
장도사가 장난스레 말할 때였다. 마침 문을 열고 들어선 황산사가 말했다.
“산학에 대해 물으실 게다.”
황산사는 옆구리에 한 짐 끼고 온 책 보따리를 내려놓으며 지오를 보았다.
“혜명공주님은 산술에 대해 관심이 많으시지. 대신이나 왕족들 대부분은 산술에 관한 일을 천한 일로 여기며 외면하지만, 혜명공주님은 다르단다. 아마도 네가 셈을 잘한다는 소문을 듣고 궁금증이 생기신 걸 게다. 요즘 혜명공주님이 보는 책들이라고 하니, 너도 한 번 훑어보고 가거라.”
 

혜명공주의 산대놀이


보따리를 펼치자 ‘주비산경’ ‘구장산술’ ‘해도산경’ 등 산술 책들이 쏟아지듯 나왔다. 지오는 지금껏 산술 책을 본 적이 없었다. 사실 책이 있다 한들 읽을 수도 없었다. 어려운 한자를 배운 적이 없기 때문이다.
“이깟 책은 필요 없어요. 산술 책 따위 안 봐도 셈은 자신 있는 걸, 뭐…….”
지오는 괜스레 짜증을 냈다. 글자를 모르는 지오에게서 책이란 그림의 떡이나 다름없다. 이 사실이 지오의 자존심을 상하게 한 것이다.
이런 지오의 마음을 안 걸까? 황산사는 묵묵히 책의 한 쪽을 펼쳤다. 그런데 황산사가 펼친 책에서 보이는 낯익은 글자들!
[一一如一(일 곱하기 일은 일), 一二如二(일 곱하기 이는 이)…… 二二如四(이 곱하기 이는사)…….]
곱곱구구였다. 한자를 모르는 지오지만, 숫자를 나타내는 글자 정도는 알고 있는 터였다.
“글을 몰라도 읽을 만할 게야. 주로 산술법을 적어 놓았으니까. 모르는 글자는 내가 가르쳐 주마. 그러니 이제부터 너도 산학 공부를 시작해 보아라.”
황산사의 목소리는 진지했다. 마치 지오에게 산학 공부를 시키려고 벼르던 사람 같았다. 사실 지오도 산학 공부를 하고 싶은 맘이 있었다. 누나의 바람을 들은 후부터였다. 누나는 종종 지오의 손을 잡고 말했다.
“우리 지오는 셈을 잘하니까, 산학을 공부해서 산사가 되면 좋을 텐데…….”
하지만 이 꿈도 누나의 죽음과 함께 날려 버린 지오였다.
“공부해서 산사 시험을 보아라. 넌 뛰어난 산사가 될 수 있을 거야.”
황산사가 책을 지오 앞으로 밀었지만, 지오는 세차게 책을 밀쳐 버렸다.
“싫어요! 누가 산사 같은 거 되고 싶데요?”
지오는 문을 박차며 천지관을 나와 버렸다.
‘누나도 없는데 산사가 되면 뭘 해. 기뻐해 줄 사람도 없는데……. ’
하지만 무엇인가가 옷자락을 잡아당기는 느낌에 지오는 자꾸 뒤를 돌아보았다.
공주가 있는 내전으로 들어서자마자, 꽃 냄새가 먼저 반겼다. 향긋한 냄새에 심통으로 끓던 지오의 마음도 봄눈 녹듯 스르르 녹았다.
“어서 오렴. 이리 가까이 오려무나.”
반겨 주는 공주를 보니 누나를 본 듯 기분이 좋았다. 공주는 지오를 가까이 앉히더니, 무언가를 쑥 내밀었다. 산대(산가지)였다. 예전에 황산사가 보여줬던 것과 비슷한 상아 산대였다.
“지금부터 내가 산대를 놓아 볼 테니, 여기에 어떤 규칙이 있는지 맞혀 보렴.”
공주는 포대에서 꺼낸 산대를 들어 일정한 모양을 만들었다.
 

산대 규칙 그림


“자, 여기엔 어떤 규칙이 있느냐?”
공주는 ‘어디 맞혀 봐!’하는 눈길로 지오를 보았다.
‘뭐야? 고작 나 하고 산대놀이를 하려는 거였어?’
지오는 맥이 탁 풀렸다. 잔뜩 부풀었던 마음이 푹 꺼져 버렸다. 하지만 공주의 명령이니 어쩔 도리가 없지 않은가.
“답은 아홉입니다. 가로로 더해도 산대는 아홉 개고, 세로로 더해 봐도 산대가 아홉 개니까요. 가운데는 비었으니 따로 계산하지 않아도 되는 거고요.”
지오는 맥 빠진 목소리로 답했다.
“오호라! 눈썰미도 제법이구나. 근데 이 정도는 누구나 안다. 그러니 이건 문제랄 수가 없지. 진짜 문제는 지금부터니까, 잘 들어 봐.”
공주는 두 눈을 반짝거리더니, 산대 네 개를 지오의 손에 쥐어 주었다.
“네 손에 있는 산대를 여기에 모두 덧붙여 봐. 하지만 여전히 가로와 세로의 개수는 아홉 개씩이 되도록 만들어야 해. 이게 진짜 문제야.”
공주는 또다시 지오를 빤히 보았다. ‘요건 모를걸!’하는 눈치였다. 사실 이 정도는 지오에겐 문제도 아니었다. 단박에 산대를 올려 문제를 풀어 버리고 싶었다. 하지만 공주를 골려 주고 싶은 마음도 동시에 들었다. 지오는 고개를 갸웃갸웃하며 능청을 떨었다.
“음……, 이렇게 하면 되나, 아니, 이렇게 해야 하나……, 당최 모르겠네.”
한참 능청을 떨자, 공주의 눈가로 웃음이 번졌다. ‘그럼, 그렇지!’ 하는 듯. 지오는 또다시 능청을 떨며 말했다.
“이렇게 어려운 문제를 제가 어떻게 맞힙니까? 답이 뭐예요? 물론 공주님은 답을 아시겠죠?”
난데없이 공주가 딸꾹질을 시작한 건 그때였다.
 “딸꾹! 물…… 물론이지. 그 정도야 아주 쉬운 문젠걸. 딸꾹!”
복사꽃처럼 발그레해진 공주의 얼굴엔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지오는 삐져나오는 웃음을 애써 참았다. 그리고는 보란 듯이 산대 네 개를 공주가 놓은 산대 위에 덧놓고 몇 개 를 움직였다.
 

산대를 움직인 후 그림


 “이렇게 하면 되지요.”
순간 공주의 입이 헤벌쭉 벌어졌다.
“오호! 요렇게 하면 되는 걸, 괜히 나흘 밤이나 고민했네.”
공주는 ‘아차!’ 싶었던지, 자세를 고쳐 앉으며 괜스레 헛기침을 해댔다.
“흠! 흠! 이 정도 문제야 누워서 떡 먹기가 아니겠느냐? 그래도 어린 나이에 이런 문제를 서슴없이 푸는 걸 보니, 소문대로 보통 아이는 아닌가 보다. 그래서 가까이 두면 좋을 인재라고 황산사가 말했군.”
지오는 그제야 모든 정황이 짐작됐다. 산대문제는 황산사가 공주에게 낸 문제였고, 이것을 계기로 공주가 지오를 찾게 했다는 것을.
“황산사가 그러는데, 너는 자신보다 더 뛰어난 산사가 될 거라더군. 혹여 연월기가 실패하더라도 너를 좋은 산사로 키워서 다시 도전할 수 있게 한댔어.”
공주는 펼쳤던 산대를 포대에 넣더니, 문득 떠오른 듯 문갑에서 무언가를 주섬주섬 꺼내었다.
“참! 내가 진귀한 걸 보여 줄게.”
문갑에서 나온 물건을 본 지오는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한 번도 본 적 없는 이상한 물건들이었기 때문이다.
 “요건 방향을 알려 주는 물건이라지. 그리고 요것은 확대경이라는 거야. 뭐든 아주 크게 보이게 한단다.”
공주는 기다랗게 생긴 확대경을 지오의 눈에 가까이 댔다. 순간, 지오는 흠칫 놀라고 말았다. 갑자기 커져 버린 발! 하지만 확대경을 떼자, 발은 다시 본래의 크기로 돌아왔다.
“호호호! 놀란 모양이로구나. 나도 처음엔 무척 놀랐지.”
공주는 지오의 당황한 모습이 재미난 듯 배꼽을 쥐고 웃었다.
“대체 이게 뭐예요?”
지오는 슬그머니 뒤로 물러나 앉으며 놀란 가슴을 쓸어내렸다.
“황산사가 중국을 다녀오며 가져온 것들이지. 중국을 오가는 서양인들에게서 구했다더군. 서양은 이미 과학이 많이 발전했다더구나. 서양의 소식을 듣다 보면 우리 조선도 하루 빨리 과학을 발전시켜야겠다는 생각이 든단다. 그런데 과학 기초는 산학이라지? 정확히 셈을 할 줄 알아야 발명품도 만들고 역법도 발전시킬 수 있다더구나. 집을 짓거나 탑 하나를 세우는 일에도 정밀한 계산이 필요하고, 악기를 만드는 데에도 산학이 필요하지. 그러고 보니 세상엔 산학이 필요하지 않은 것이 없구나. 허나 조정 대신들은 과학이나 산학은 천시하고, 당파싸움에만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으니…….”
조정 대신들 이야기에선 공주의 낯빛이 어두워졌다. 공주는 무언가를 말할 듯 말듯 입술을 옴찔옴찔 하더니 마음먹은 듯 말을 이었다.
“연월기 만드는 일을 못마땅하게 여기는 대신들이 많아. 연월기가 성공하면 천한 신분의 너희가 벼슬에 오르게 될 테고, 그럼 자신들의 입지가 좁아질까 봐 두려워하는 거지. 어떤 음모로 연월기 작업을 방해할지 모르니 조심해야 해. 특히 영의정 정대섭 사람들을 특히 조심하도록 해.”
공주는 목소리를 잔뜩 낮추며 속삭이듯 말했다. 조금 전까지의 명랑하게만 보이던 공주의 모습이 아니었다.
‘공주님도 나라 걱정을 많이 하시는구나.’
지오는 어쩐지 공주가 미덥게 느껴졌다. 공주의 모습에서 늘 자신을 지켜주던 누나의 모습을 보는 듯했다.

2010년 09월 수학동아 정보

  • 진행

    장동일
  • 이향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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