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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요기사] 시공간과 생명을 연결하는 거대한 통로 | 실라브르 동굴

편집자 주
동남아시아의 보르네오섬은 지구에서 세 번째로 큰 섬이자 열대우림과 생물다양성의 보고입니다. 한국 대표 생태학자인 장이권 이화여대 에코과학부 교수가 보르네오섬 곳곳을 탐사하며 만난 생존과 진화의 경이를 전해 드립니다.

 

어둠도 아직 채 가시지 않은 이른 새벽에 길을 나섰다. 목적지인 실라브르동굴을 탐사하는 여정에 꼬박 하루가 걸리기 때문이다. 보르네오섬 북부에 있는 말레이시아 사라왁의 쿠칭에서 남쪽으로 약 90km 떨어진 곳에 동굴이 있어서 차량으로만 왕복 네 시간 가까이 달려야 했다.

 

실라브르동굴 안쪽에서 바라본 바깥쪽 숲의 풍경. 어둡고 암석뿐인 동굴과 푸르른 나무와 덩굴이 우거진 열대우림이 선명한 대조를 이룬다. 하지만 둘은 다른 세계가 아니다. 박쥐는 두 공간을 가로지르며 태양 에너지를 밖에서 안으로 전달한다.

 

실라브르산의 단단한 반전

실라브르동굴 탐사는 로방바투라는 작은 마을의 입구에 있는 관리사무소에서 시작됐다. 우리를 안내한 사람의 이름은 베네딕트로, 이 마을에서 태어나 지금도 가족과 사는 비다유(Bidayuh)족 가이드다.

함께 숲길을 걸으며 베네딕트는 서두르지 않았다. 수시로 멈춰 나무를 가리키고 새소리를 들었으며 작은 곤충 하나도 지나치지 않았다. 우리도 그때마다 사진을 찍고 소리를 녹음하며 서서히 숲에 스며들었다. 한 시간쯤 걸었을 무렵, 숲이 갑자기 열리며 시야가 넓어졌다.

 

실라브르산이 서 있었다.

멀리서 바라본 이 산은 마치 거대한 종을 엎어놓은 듯 단정한 곡선을 그렸다. 주변 산들보다 특별히 높지는 않았지만 숲 한가운데 홀로 솟은 모습이 시선을 단번에 사로잡았다. 그러나 가까이 다가갈수록, 부드러운 곡선은 점점 수직에 가까운 암벽으로 바뀌었다. 실라브르산은 흙이 쌓인 산이 아니라, 거대한 석회암 덩어리였다.

 

보르네오는 한때 바다 밑에 있었다. 얕은 열대 바다에 산호, 조개, 유공충 같은 수많은 해양생물의 껍데기가 쌓여 두꺼운 석회암층이 만들어졌다. 이후 이 지층이 지각운동으로 솟아올라 오늘날의 모습이 됐다. 석회암은 단단하지만 빗물에 약하다. 빗물이 공기 중의 이산화탄소를 녹여서 약한 탄산을 만들고, 이 탄산이 수천만 년 동안 석회암의 약한 틈을 조금씩 녹여냈다. 그렇게 석회암의 단단한 부분만 남아서, 오늘날 사라왁 곳곳에서 볼 수 있는 카르스트 지형이 탄생했다.

 

그래서 이 지역의 산들은 흙이 덮인 완만한 능선이 아니라 숲속에 불쑥 솟은 거대한 바위섬처럼 보인다. 실라브르동굴도 그런 시간의 산물이다. 지금 우리는 동굴 하나를 찾아가는 것이 아니라 열대 바다에서 시작한 지질학적 시간을 거슬러 오르는 셈이다.

 

동굴 입구까지의 마지막 이동 구간은 예상보다 훨씬 험했다. 열대우림의 높은 습도 탓에, 암벽에 설치된 밧줄은 곳곳이 삭은 채였다. 바위 표면이 두꺼운 이끼로 덮여서 조금만 방심해도 발이 미끄러질 듯했다. 나는 밧줄을 움켜쥐고 몸을 조금씩 끌어올렸다. 손끝에 거친 섬유의 감촉이 전해졌고, 발밑으로 작은 돌들이 굴러떨어졌다.

 

우리는 마침내 동굴 하부에 이르러서야 배낭을 잠시 내려놓고 숨을 골랐다. 역시 가파른 암벽이 머리 위에 우뚝했고, 그 밑에는 어둠이 깊게 패인 듯한 동굴이 입을 벌리고 있었다. 빛과 그늘의 경계가 선명해진 순간, 새 한 마리가 어둠 속에서 튀어나왔다. 암벽을 스치듯 날아올라 단번에 시야 밖으로 사라졌다. 제비를 닮은 모습이었다.

 

베네딕트는 이 동굴 깊숙한 곳에 제비들이 둥지를 지어 번식한다고 설명했다. 이 지역에서는 오래전부터 그 둥지를 채취해 왔으며, 그래서 이 동굴은 지금도 일반인 출입이 엄격히 제한된다고 했다.

 

동굴 속 생태계를 만든 박쥐의 비결

▲David Hemprich-Bennett(W)
작은양털박쥐(Kerivoula intermedia)

크기     머리~몸통  30~40mm     
            꼬리  24~42mm
서식지  보르네오섬 등 말레이시아 일대
특징    애기박쥐과에 속하는 박쥐로 포유류 중에서 크기가 매우 작은 종이다.     
            현재까지 이 박쥐는 말레이시아 내에서만 번식이 확인됐다. 사진의 작은양털박쥐는 보르네오섬의 다눔계곡 보호지역에서 촬영됐다.

 

좀 더 올라가자 산 중턱에 숨겨진 실라브르동굴의 입구가 드러났다. 안으로 한 걸음을 내딛자마자 멈췄다. 내가 알던 동굴이 아니었다.

 

좁고 긴 통로가 이어질 줄 알았는데, 곧바로 산속을 통째로 비운 듯한 거대한 공간이 펼쳐졌다. 천장은 아득히 높았고, 한쪽에 구멍이 뚫려 있어서 그 틈으로 한낮의 햇빛이 쏟아져 들어왔다.

 

게다가 운이 좋게도 그날은 맑았다. 햇빛이 천장에서 동굴 바닥까지 곧게 떨어지며 거대한 빛기둥이 됐다. 암벽들이 이 빛기둥을 둘러싸며 지하 성당 같은 엄숙함을 자아냈다. 한동안 그 풍경을 응시했다.

 

그때 베네딕트가 조용히 손전등을 들어 천장을 비췄다. 불빛이 암벽을 훑어 올라가자 어둠 속에 숨어있던 작은 실루엣들이 하나둘 모습을 드러냈다. 어떤 것은 천장에 거꾸로 매달려있었고, 어떤 것은 날개를 펼치고 원을 그리며 날아다녔다. 박쥐였다.

 

눈이 어둠에 익숙해질수록 천장 곳곳에서 새로운 박쥐 개체들이 보였다. 움직이지 않는 개체까지 합하면 그 수를 세기 어려웠다. 베네딕트는 20종 이상의 박쥐가 실라브르동굴에 서식한다고 설명했다.

 

조용히 귀를 기울이자 이미 동굴에 가득 차 있던 박쥐들의 소리가 들렸다. 거대한 공간을 따라 그들이 내는 가청음(사람의 귀로 들을 수 있는 16~2만 Hz의 소리)이 속삭이듯 흘렀다.

 

실라브르는 박쥐에게 특별한 장소다. 실라브르의 숲과 동굴에 서식하는 박쥐를 조사한 연구자들은 지금까지 무려 27종을 확인했다.  그중 콕스둥근잎박쥐(Hipposideros coxi)는 보르네오섬만의 희귀한 고유종으로, 실라브르동굴에서도 확인됐다. 이 종은 코 주변에 복잡한 잎 모양의 기관인 비엽이 발달해, 코로 초음파를 내보내고 그 반향을 감지해 어둠 속에서도 먹이와 이동 방향을 찾아낸다.

 

이 밖에도 실라브르에는 관코박쥐류와 애기박쥐류를 비롯한 다양한 박쥐가 서식한다. 사는 장소는 모두 같지만, 각자 사용하는 초음파의 주파수와 먹이를 찾는 장소, 방법이 다르다. 그래서 이 동굴과 숲 일대에서 여러 박쥐 종이 함께 살 수 있다. 동굴은 이들에게 낮의 은신처이고, 주변의 열대우림은 밤의 거대한 사냥터인 셈이다.

 

조금 더 안으로 들어가자 빛은 거의 사라졌다. 대신 박쥐들의 움직임이 더욱 활발해졌고 발밑의 감촉도 달라졌다. 단단한 암반 위를 걷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어느 순간 발이 푹 꺼졌다. 아래를 비춰보니 배설물이 두껍게 쌓인 갈색 퇴적층, 구아노(guano)였다.

 

동굴은 빛이 거의 닿지 않으므로 대부분 에너지가 부족하고 식물이 광합성도 할 수 없다. 그러나 실라브르는 다르다. 박쥐들이 밤마다 숲에서 먹고 소화되지 않은 곤충들의 잔해를 배설한다. 배설물엔 질소와 인 등의 영양분이 남고, 이것들이 오랫동안 동굴에 쌓여 구아노가 된다. 박테리아, 곰팡이 같은 미생물이 먼저 이를 분해하고, 이들을 먹는 작은 절지동물과 그 포식자들까지 모여 하나의 먹이망이 형성된다. 동굴은 숲과 단절된 공간이 아니라 숲의 엄연한 일부였다.

 

우리는 구아노가 두껍게 쌓인 구간을 기다시피 통과했다. 천장에서 떨어진 날카로운 석회암 덩어리들이 바닥을 덮었고, 그 위에 신선한 박쥐 배설물이 묻어서 몹시 미끄러웠다. 지독한 냄새부터 떠오르겠지만, 의외로 냄새는 거의 나지 않았다. 천장의 구멍과 여러 통로로 공기가 계속 돌며 구아노 냄새가 동굴 속에 머물지 않아서인 듯했다.

 

구아노 구간을 빠져나오니 신발과 바지, 배낭이 박쥐 똥으로 범벅돼있었다. 그런데도 불쾌하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이 생생한 공간을 온몸으로 직접 통과하고 있다는 실감이 더 크게 다가왔다.

 

장이권의 탐험 노트: 구아노
구아노(guano)​는 박쥐나 바닷새의 배설물이 오래 쌓인 퇴적물이다. 질소와 인 등 영양분과 유기물이 풍부해, 미생물과 작은 절지동물의 먹이가 된다. 박쥐의 구아노는 햇빛이 들지 않는 동굴 속 거의 모든 생명체의 유일한 에너지원이다. 또한 구아노는 바다의 영양분을 외딴섬으로 옮겨 그곳의 먹이망에 영향을 주기도 한다. 바닷새가 물고기, 무척추동물을 먹고 섬에 배설하며 구아노가 형성돼서다.

 

시공간, 동식물, 인간을 잇는 거대한 연결망

한참 걸었더니 꺾인 통로 저 너머에서 눈부신 빛이 갑자기 쏟아졌다. 방금까지 어둠과 박쥐 소리만 가득하던 공간이 순식간에 바뀌었다. 큰 틈으로 열대우림의 나무와 덩굴이 내려다보였고, 암벽에는 푸르른 이끼와 양치식물이 자랐다. 숲과 동굴은 분리된 두 세계가 아니었다. 바깥쪽은 태양 에너지를 받아 생명을 키우고, 안쪽은 그 에너지를 가져다 또 다른 생태계를 만들며 하나의 세계를 이루고 있었다.

 

우리는 다시 숲으로 내려왔다. 그때 베네딕트가 거대한 메란티나무로 다가갔다. 그는 땅 위에 넓게 퍼진 이 나무의 판근(buttress root)을 막대기로 힘껏 내리쳤다. 둥— 둥— 둥—. 낮고 묵직한 소리가 숲속 깊이 울렸다. 잠시 뒤, 이 울림은 나무와 땅을 타고 더 멀리 퍼졌다. 베네딕트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예전 원주민들은 숲에서 길을 잃거나 동료를 찾을 때, 이렇게 판근을 두드렸어요.”

 

판근은 열대우림의 거목이 제 몸을 지탱하기 위해 발달시킨 넓은 뿌리다. 사람 키만 한 판근을 두드리면 저주파 진동이 발생해 사람 목소리보다 훨씬 멀리 전달된다. 울창한 숲에서는 이 소리가 시야보다 더 멀리 닿는다. 오래전부터 보르네오 원주민들은 자연이 만든 이 기관으로 서로의 위치를 알리고 소식을 전했다.

 

실라브르동굴의 여정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또 하나의 특별한 공간이 기다리고 있었다. 동굴 안을 따라 흐르는 얕은 지하 하천이다.

 

차가운 물이 무릎 가까이 차올랐다. 맑은 물속에 손을 담그자 작은 물고기 떼가 달려들어 손가락과 손등을 연신 쪼았다. 열대 석회암지대의 물은 질소, 인 등의 영양염 성분이 매우 적어서, 물고기들이 먹을 플랑크톤이나 해조류도 부족하다. 그래서 이곳 물고기들은 인간의 땀 속 염분, 피부 각질, 작은 유기물도 놓치지 않고 먹이를 찾는다.

 

실라브르에서 나는 단지 숲과 동굴을 걸었던 것이 아니다. 수천만 년의 지질학적 시간, 숲과 동굴을 아우른 공간부터, 이 시공간에서 살아온 동식물 그리고 사람까지 하나로 이어지는 거대한 연결망을 걸었다. 이 거대한 길을 걸으며 나는 자연이란 결국 모든 것을 서로 이어주는 가장 오래된 연결의 역사라는 사실을 다시 한번 깨달았다. 

 

1 실라브르동굴의 천장으로 들어온 햇빛이 넓은 공간을 환히 밝히고 있다. 입구에 들어서자마자 펼쳐진 석회 동굴의 거대한 규모에 필자는 깊은 인상을 받았다.
2 실라브르동굴 위쪽에 흩어진 박쥐들을 관찰 중인 필자. 이 동굴에만 20여 종의 다양한 박쥐가 사는 것으로 알려졌다.

 

장이권
이화여대 에코과학부 교수. 진화적인 관점에서 동물의 행동과 생태를 연구하고 있으며, 특히 소리를 이용해 의사소통하는 곤충, 개구리, 새 등의 연구에 관심이 많다. 2013년부터 ‘어린이 과학동아’와 함께 생태 연구 시민과학 프로젝트 지구사랑탐사대를 운영하고 있다. 저서로 ‘지금 자연은’ 등이 있다. jangy@ewha.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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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년 10월 과학동아 정보

  • 장이권 이화여대 에코과학부 교수
  • 사진

    이원재
  • 에디터

    라헌
  • 디자인

    이형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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