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광이 양자문을 통과해 도착한 첫 도장은 양자 연구의 꽃, 양자컴퓨터 연구실이다. 그중에서도 이온트랩 양자컴퓨터 연구를 한국에서 최초로 시작한 김태현 서울대 컴퓨터공학부 교수를 6월 2일 찾아가 이온트랩의 비급을 엿봤다.
편집자 주
양자역학 100주년을 맞아 관련 기사도 넘쳐납니다. 그래서 조금 다른 콘셉트를 준비했습니다. 출생의 비밀을 간직한 주인공 ‘양자광’이 한국의 대표 양자 연구실들을 하나씩 깨며 성장합니다. 여정을 재밌게 따라가다 보면 어느새 독자 여러분들의 양자 실력도 쑥쑥 자라 있을 겁니다.
“양자컴퓨터가 생각보다 크죠? 전혀 컴퓨터처럼 보이지 않을 거예요.”
김태현 서울대 컴퓨터공학부 교수가 지하 연구실 문을 열고 가려진 천막을 걷자, 은빛의 거대한 기계 장치가 빛을 반사하며 시야를 가득 채웠다. 성인 남성 키를 훌쩍 넘는 크기의 양자컴퓨터. 그 속에는 갖은 장치들이 난잡하게 얽혀 있었다. 김 교수의 말처럼 겉보기엔 전혀 컴퓨터와 연관 짓기 어려운 자태였다.
“양자컴퓨터가 복잡하고 커다란 이유는 오로지 이 조그만 칩을 구동하기 위해서입니다.” 김 교수는 양자컴퓨터 앞에서 자신이 만든 이온트랩 양자칩을 자랑스레 내보였다. “양자컴퓨터는 극도로 민감한 양자를 다뤄요. 이 때문에 진공 챔버, 자기장 장치, 레이저 등 수많은 장비가 복잡하게 얽혀 있죠. 우리가 일상에서 상상조차 못 하는 압도적인 계산이, 이렇게 입자의 떨림을 제어하면 가능합니다.”
컴퓨터를 작동하는 데 왜 진공이 필요한 걸까. 입자의 떨림은 또 무엇이고. 김 교수가 설명을 이어갈수록 되레 궁금증은 증폭됐다. 일단 양자컴퓨터가 무엇인지부터 정확히 파악해야 했다.
김태현
김태현 서울대 컴퓨터공학부 교수가 연구실 내 양자컴퓨터 앞에서 자신이 만든 이온트랩 양자칩을 선보이고 있다.
이름은 익숙한데… 양자컴퓨터 대체 뭘까
양자컴퓨터는 눈에 보이지 않는 입자의 성질로 정보를 처리하는 컴퓨터다. 물리학자들은 ‘무작위 상태에서 구분되는 특정한 패턴’을 정보라고 말한다. 패턴을 조절할 수 있으면 규칙에 맞춰 미리 정의한 정보값을 입력할 수 있기 때문이다. 예컨대 아무것도 안 적힌 백지에는 어떠한 정보도 없지만, 한 번 접힌 상태를 ‘맞음’으로 두 번 접힌 상태를 ‘틀림’으로 정보를 정의한다면 그 또한 정보값으로 활용할 수 있다.
양자컴퓨터는 정보 정의를 위해 양자 상태를 띠는 입자를 조작한다. 입자의 양자 상태에 정보를 정의해 정보값을 저장하거나 목푯값을 계산하기 위함이다. 따라서 양자컴퓨터는 정보를 저장하는 데 있어 기존 컴퓨터와 차이를 둔다. 기존 컴퓨터가 정보를 반도체에 저장했다면, 양자컴퓨터는 정보를 ‘양자 상태’에 저장한다. 기존 컴퓨터의 정보 저장 단위가 비트라면, 양자컴퓨터의 단위는 양자와 비트가 합쳐진 ‘큐비트(Qubit)’다.
양자 상태는 원하는 대로 유지하기 까다롭고 다루기에 만만찮지만, 잘만 쓴다면 엄청난 성능을 뽐낸다. 기존 컴퓨터의 비트는 0 또는 1 중 오직 하나의 상태만 정의할 수 있다. 처음에 0을 넣고 계산한 뒤 이후 1을 넣어 또 다른 수식을 계산하려면 앞서 0으로 저장된 정보값을 초기화하고 다시 계산해야 한다. 반면 큐비트에는 0과 1이 함께 존재해 두 경우를 동시에 계산할 수 있다. 이 덕분에 결과를 더 빨리 낼 수 있다.
정보가 커질수록 둘의 성능 차이는 기하급수적으로 벌어진다. 비트 하나에 들어가는 경우의 수가 0과 1 두 가지이므로, 컴퓨터가 5비트에 해당하는 정보를 계산하는 경우 총 32가지의 경우를 1번부터 32번까지 일일이 계산해야 한다. 반면 양자컴퓨터는 각 큐비트에 0과 1이 동시에 들어가 있기 때문에 5개의 큐비트면 32가지의 경우를 동시에 계산할 수 있다. 양자컴퓨터는 이러한 성능으로 기존 컴퓨터가 우주 나이만큼의 시간을 써도 풀지 못하는 문제를 단 몇 초 안에 풀 수 있다고 알려졌다. 양자컴퓨터가 우주나 바이오 분야에서 슈퍼컴퓨터로도 풀지 못한 미지 세계를 밝혀줄 ‘게임 체인저’로 평가받는 이유다.
이온트랩 양자컴퓨터 구조
이온트랩 양자컴퓨터는 이온트랩 칩 속에 이온을 포획하고 제어하기 위해 여러 장치가 동원된다. 이온 상태를 유지하기 위한 초고진공 챔버를 비롯해, 이온을 섬세하게 제어할 고성능 레이저, 측정된 양자 정보를 제어하기 위한 클라우드 시스템 등이 포함돼 있다.
이온 vs 초전도 vs 광자…, 양자컴 춘추전국시대
이렇게 특정 문제에서 압도적 성능을 지녔음에도, 양자컴퓨터를 사용한다는 건 상상 이상으로 어려운 작업이다. 힘들게 큐비트를 양자 상태로 만든들, 조그마한 조작에도 양자 상태가 쉽게 무너지는 탓이다. 물질이 양자역학적 성질을 띠도록 하는 조건도 극저온이나 초고진공 등으로 까다롭다. 그럼에도 양자컴퓨터를 연구하는 물리학자들은 큐비트의 양자 상태를 안정적으로 구현하기 위해 여러 접근법을 시도 중이다. 가장 널리 알려진 방법은 초전도 기반의 큐비트다.
초전도 큐비트는 초전도 성질을 띠는 물질의 양자 상태를 큐비트로 사용한다. 초전도 큐비트를 오류 없이 작동하려면 절대영도(약 영하 273°C)에 근접할 정도로 냉각해야 한다. 큐비트는 외부 입자나 광자 등이 만드는 상호작용으로 쉽게 오류를 띠는데, 절대영도에 가까울 정도로 차갑게 유지하면 외부 입자의 움직임이 거의 멈추면서 상호작용이 사라지기 때문이다. 트랜스몬 큐비트 등 상용화된 초전도 큐비트들은 양자 오류를 방지하기 위해서 주변 환경을 절대온도에 가까운 극저온으로 만든다. 이런 까다로운 조건을 만족하지 않으면 큐비트는 외부의 작은 상호작용에도 오류가 나타난다.
이 외에도 광자 기반 양자컴퓨터나 양자점 등 양자 상태를 유지할 수 있는 큐비트를 구현하는 다양한 접근법이 우위를 겨루고 있다. 마치 진시황이 중국을 하나로 통일하기 전의 춘추전국시대처럼, 수많은 ‘큐비트 문파’들이 양자컴퓨터 시장의 지배권을 놓고 경합 중이다. 이 경쟁에서 김 교수가 양자컴퓨터 통일에 도전하는 비기는 ‘이온트랩’이다.
결맞음이 무려 1시간, 이온트랩이 주목받는 이유
“원자에서 전자를 하나 떼어내면, 원자는 양의 전하를 띤 양이온 상태가 됩니다. 중성인 원자 때와 달리, 양이온 상태가 되면 같은 극은 밀어내고 다른 극은 서로 당기는 성질이 생기죠. 전자기장을 이용하면 이온을 밀고 당기며 원하는 공간에 가둘 수 있습니다.” 비기의 이름이 왜 ‘이온트랩’인지 알 수 있는 대목이다. 김 교수는 이온트랩 양자컴퓨터를 가리키며 설명을 이어갔다. 그러면 어떻게 이온에서 양자역학적 성질을 이끌어내는 걸까.
“이온은 두 개의 에너지 준위를 가지는데, 여기에 레이저를 쏘면 두 상태를 넘나들게 조작할 수 있습니다. 0과 1이 동시에 존재하는 중첩 상태가 될 수 있죠. 이런 상태를 유지하면서 연산을 수행합니다.”
이온의 두 개의 에너지 준위에 0과 1이 동시에 존재하는 양자 상태가 유지될 때만 연산할 수 있다. 이런 양자 상태를 오래 유지하는 게 본래 쉽지 않다. 그런데 이온트랩 방식의 가장 큰 장점이 여기서 드러난다. 진공 챔버 앞에 선 김 교수는 “초고진공 챔버에 넣고 이온을 조작하면 외부 영향을 거의 받지 않는다”며 “이온트랩은 큐비트가 양자 상태를 유지하는 시간인 ‘결맞음(coherence)’이 1시간 이상까지 유지된다”고 말했다. 초전도 큐비트의 결맞음 시간은 아직 밀리초(1000분의 1초) 수준이다.
물론 이온트랩 역시 단점이 존재한다. 우선 연산 속도가 다른 방식보다 느린 편이다. 이온을 조작하는 데 사용하는 레이저는 매우 정밀해서, 조금의 오차에도 이온 제어에 실패해 결맞음이 붕괴된다. 또한 큐비트 수를 늘리는 일에도 제약이 따른다. 수십 개의 이온은 다루기 쉬운 편이나, 100개 이상의 이온을 일렬로 배열할 경우 이온끼리 반발력이 급증해 제어 난이도가 급격히 커진다.
양자컴퓨터는 이렇게 큐비트를 구현하는 방법마다 장점과 한계가 뚜렷하다. 김 교수는 현재 이온트랩의 장점을 극대화한 ‘이온 셔틀링’이라는 방식으로 한계를 극복할 궁리 중이다. 여러 개의 마카롱을 기다란 사각형 통에 넣어 하나의 세트로 만들듯, 우선 다수의 이온을 하나의 칩 속에 일렬로 묶는다. 이후 이온 셔틀링을 통해 이온끼리 연산이 이어지게 만드는 전략이다. 칩과 칩은 양자 얽힘으로 연결한다.
이온트랩 양자컴퓨터를 선도하는 기업으로는 한국에도 잘 알려진 미국의 아이온큐(IonQ)가 있다. 한국의 아이온큐(IonQ)를 그리는 김 교수는 이온트랩 방식의 미래를 낙관했다. “큐비트는 현재 어느 하나가 확실히 치고 나가는 모델이 없습니다. 양자컴퓨터를 비롯한 양자 기술이 보편화됐을 미래에 이온이 그 중심에 있을 거라 기대합니다.”
서울대, 김태현
김태현 교수팀이 제작한 이온트랩 칩. 칩 중심에 일(一)자로 보이는 작은 선에 이온들이 포획돼 있다. 사진의 파란 점은 내부 이온을 확대한 이미지로, 이온이 잘 보이도록 칩 사진과 합성했다.
오른쪽 사진은 포획된 이온 하나를 실제로 촬영한 이미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