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라이브러리









    [주요기사][SF] 코스믹 디프레션

    Midjourney, 라헌

     

    1. 우라노스 이론


    긴급 기자회견장.
    “제임스 러브록이 가이아 이론을 생각해낸 뒤, 사람들이 우라노스 이론을 상상하기까진 긴 시간이 걸리지 않았습니다. 문제는 지금까지의 연구 결과, 우라노스 이론이 물리학적 사실에 가까울 확률이 극히 높아졌다는 점입니다.” 국제연합(UN) 청사의 방탄유리로 보강된 넓은 상자 안에서, 발표를 맡은 신소민 팀장은 삼엄한 경비를 받으며 곧게 서 있었습니다. 이 발견이 매우 중요하다는 뜻이겠죠. 인류의 운명이 달려있을 정도로.
    가이아 이론이란 지구 자체를 하나의 생명체로 바라보는 가설로 인간을 비롯한 모든 생명, 대기, 지형 등 지구의 모든 부분이 인체처럼 일정한 역할을 하고 있다는 가설입니다. 여기서 더 나아간 우라노스 이론은 혹시 이 우주 자체가 하나의 생명이 아닐까 하는, 과학자들의 망상 내지 유머였고 아무도 진지하게 받아들이는 사람은 없었습니다. 
    “종말의 징조는 붉은색 별들이 서서히 파란색으로 바뀌면서 다가왔습니다. 태초의 불꽃놀이 이래 무한 팽창하던 우주가 뜬금없이 팽창을 정지한 것입니다. 인플레이션 우주의 증거 중 하나였던 도플러 효과로 인한 적색편이 현상이, 5년 전부터 서서히 사라지고 있습니다. 천문학자들은 이 기이한 현상을 두고 많은 가설을 세웠고, 오늘 이 자리에서 그간 천문학계에서 보안을 유지하며 합의한 연구 성과를 전달드리겠습니다.”
    그 시각 송출돼야 했던 예능 프로 대신, 별 구경하며 먹고 사는 한가한 사람들이 전 지구에 내보낸 속보에 많은 사람이 짜증을 냈겠죠. 하지만 종말의 징조라뇨? 그 한마디에 사람들은 채널을 쉽게 돌릴 수 없었나 봅니다.
    “우라노스 이론이 맞았습니다. 우주는 생물입니다. 우주의 모든 부분은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는 어떤 생명의 일부이며 우리 인류는 그 한구석, 태양계의 미세한 자락에 달라붙어서 사는 중입니다.” 발표회장이 웅성거립니다. “미쳤나봐” “아무래도 게임을 너무 많이 했나 본데” 소란이 약간 잦아들자 신소민 팀장은 다시 발표를 이어갈 타이밍을 잡았습니다.
    “우주거대구조와 뇌의 신경 세포의 형태가 유사한 것은 익히 알려졌습니다. 지금까진 그저 우연의 일치로 여겼지만 더는 그렇지 않습니다. 뿐만 아니라 우주의 팽창이 멈추면서 거의 평평했던 시공간의 곡률에 미세한 차이가 관측되기 시작했습니다. 일정한 신체적 형태처럼요. 팽창의 원인으로 지목되던 암흑 에너지는 더 이상 진지하게 다뤄지지 않습니다. 팽창 가속이 정지하다시피 했기 때문입니다. 우주 상수는 다시 고전 우주론에서 다루던 개념으로 돌아갔습니다. 불변의 법칙이라 여겼던 빛의 속도도 관측 영역에 따라 미묘한 편차가 나타납니다. 지금껏 우리가 쌓아온 세계관이 흔들리는 대혼돈이 잇달아 발견되는 중입니다. 이 모든 것은 기존의 우주론으론 설명할 수 없는 부분들입니다.”
    “좀 어려운데 결론이 뭔가요? 인터넷 기사는 글이 길면 아무도 클릭을 안 한단 말이에요. 쉽게 얘기해줘요! 3줄 요약!” 어느 게으른 기자가 오른손을 들고 묻자 신 팀장은 대답했습니다.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우리가 사는 우주는 어떤 생명체입니다. 무슨 생명체인진 아직 모릅니다. 천문학계에선 우주란 생물의 팽창이 사춘기에 접어들어 일단락됐다고 보고 있습니다. 이른바 질풍노도의 시기란 것이죠.”
    신소민 팀장은 뿔테 안경을 쓴 30대 무렵의 여성에게 마이크를 넘겼습니다. 레냐 박사는 마이크를 후후 불어 테스트한 뒤 자기 소개를 시작했습니다. “우주 심리학자 레냐 쿠미에가입니다. 본업은 뇌 과학인데 이번에 우주 심리학이란 분야의 발족을 계기로, 천문학과 심리학의 초기 융합을 추진중입니다. 우선 이 자료를 봐주세요.” 발표회장 스크린에 두 개의 사진이 나란히 떴습니다.
    “두 사진은 모두 우주거대구조의 모습입니다. 왼쪽 사진은 5년 전, 오른쪽 사진은 두 달 전 기준으로 업 데이트된 최신 지도입니다. 보시다시피 단 5년 만에 우주의 지도가 굉장히 많이 바뀌었습니다. 현재 우리가 관측 가능한 우주의 영역은, 우주란 생물의 ‘뇌’에 해당된다고 여겨집니다. 결정적으로 우주 팽창이 정지한 후 천체의 각종 전자기파의 파장이 요동치는 현상이 자주 관측되는 게 특기할 만한데, 우주 심리학계에서 해당 데이터를 광범위하게 수집해 파악한 결과, n-gram 모델에 들어맞는 실제 언어일 확률이 굉장히 높다고 판단됩니다. 천체의 각종 전파들은 우주란 생물의 뇌파와 신경전달물질일 가능성이 매우 높습니다.”
    “우주가 살아있다는 소리도 황당한데 지금 전 세계에 이걸 속보로 내보낼 만한 이유가 있나요?” 청중의 질문에 레냐 박사는 드디어 우리의 무시무시한 현실을 스크린에 올렸습니다. 그녀는 사진을 하나 더 띄웠는데 둘은 같은 사진이라 할 순 없었지만 대충 봐도 비슷한 구석이 많았습니다.
    “지금 보여드리는 사진은 인간의 뇌를 MRI로 촬영한 것입니다. 보시다시피 현재 격변한 우주와 많은 면에서 흡사한 점을 보여줍니다. 보십시오. 관측 가능한 우주의 이 모습이 생물의 뇌라고 간주한다면, 지금 가리키는 이 부분이 해마와 전두엽에 해당합니다. 보시다시피 크기가 상당히 수축되었습니다.” 사람들은 숨죽여 그녀의 다음 말을 기다렸습니다. “현재 비교한 인간의 뇌 사진은 우울증 환자의 것입니다. 우라노스 이론이 사실이라고 가정한다면 현재 우리 우주는 우울증에 걸린 상태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충격적인 발표에 발표회장이 떠들썩해졌습니다. “현재까지의 관측 결과를 종합하면 우주라는 생명체는 온갖 감정이 휘몰아치는 질풍노도의 시기를 보내다 심각한 우울증에 걸린 상태입니다. 우주에서 급격히 증가한 각종 이상 현상들은 이 감정 활동의 부산물일 것입니다.”
    “저기요 박사님, 이게 그렇게 심각합니까? 전 지구의 방송 채널을 독점 중계해 속보로 내보낼 정도의 가치가 있어요? 우주가 우울증이든 분노조절장애든 이딴 방송, 고양이 브이로그 시청률만큼도 안 나온다구요.” 레냐 박사님은 한숨을 쉬며 대답했습니다.
    “야, 이 한심아! 중증 우울증에 걸린 우주가 당장 오늘밤이라도 밧줄에 목 매달고 자살하면 그 안에서 빌붙어사는 우린 어떻게 될 것 같아? 우린 무능해! 멸망을 눈앞에 두고 아무것도 못 해!” 발표회장이 비명으로 가득 찹니다. 이 발표는 인류의 존속이 걸린 속보였던 거죠. “뭐, 저쪽 세상에 밧줄이란 게 있다면 말이지.”
    프레스석의 플래시가 연달아 터지는 모습이 눈이 부셔 잠시 화면이 온통 하얗게 되었다 돌아옵니다. 우주의 시작도 이렇지 않았을까 생각하면 묘한 기분입니다.
    “우주의 우울증을 치료하지 못하면 곧 우주의 종말입니다. 우주의 죽음이란 대사건이 벌어지면 은하계의 티끌보다 작은 우리들은 땅에 머리 박고 기다리는 것 말고 뭘 할 수 있겠습니까? 인류의 운명은 우주의 변덕에 달렸습니다. 종말은 1만 년 뒤에 찾아올 수도, 5분 뒤일 수도 있습니다. 대책을 세워야 합니다. 지금 당장!”

     

    2. 한국 강원도 원주시의 어느 아파트

     

     “권우희 양, 우주의 운명이 촌각에 달렸습니다. 당신의 힘이 필요합니다.” 며칠 전 인터넷 방송의 속보에서 본 두 학자가 제 방문을 열고 나타났습니다. 엄마가 타준 현미 녹차 한 잔씩을 든 채로. 이 만화 같은 상황을 제 돌머리로 이해하려 노력했지만 쉽지 않았습니다.
    “엄마! 내 방문 함부로 열지 말랬잖아!”
    “이 기지배가 어디 박사님들한테! 그리고 엄마가 방문은 닫아도 창문은 조금이라도 열고 있으랬지! 방 꼬라지가 이게 뭐야! 하루 종일 게임만 해도 컵라면 용기는 제때 버리랬잖아! 그리고 여기 뭐 이리 어두워!”
    대낮에도 커튼을 쳐 어두컴컴하고 환기가 안 된 제 방. 엉망진창으로 널브러진 이불엔 먹다 만 초코칩 부스러기가 붙어 있습니다. 컵라면 용기를 제때 버리진 않았지만 여기저기 흩어놓진 않고 대견히도 차곡차곡 쌓아놨습니다. 이 혼돈이 가득한 어둠의 공간에서 컴퓨터 모니터의 환한 불빛만 항성처럼 돋보입니다.
    “두… 두 분, 인터넷 방송에서 봤어요. 제가요, 제가요오, 지금 일일 퀘스트도 못 돌았고 내일부터는 미라클 모닝 챌린지도 할 거고요. 10년… 아니 20년 안에 일자리도 꼭 구할 거예요. 제발 잡아가지 마세요.” 상황 정리를 못해 아무말 대잔치를 벌이는 저를 보고 엄마가 문턱에서 쿡쿡 소리 죽여 웃었습니다.
    “엄마! 이거 프라이버시 침해야! 문 닫고 나가!”
    “다른 사람한테는 말도 제대로 못 붙이면서 엄마한테는 지 할 말을 다 하고 산단 말야. 으이구!” 그제서야 방문이 닫히면서 엄마의 모습이 사라졌습니다. 문틈으로 “일자리를 10년 뒤에? 그땐 36살인데 후우...” 하는 푸념과 함께.
    “전 대학교도 중퇴하고 친구도 없고 알바도 다 잘리고 집에 틀어박혀서 하루에 18시간씩 게임하고 애니만 보는 인생 실패자예요. 우울증도 심하고 맨날 모니터만 보다가 시력도 나빠졌어요. 이거 몰래 카메라 같은 거죠? 제가 ‘네! 제 한몸 바쳐 우주를 구하겠습니다’라고 하면 숨어 있던 카메라가 나와서 놀릴 거죠? 다 알아요. 전 안 속아요.”
    “우울증! 바로 그겁니다! 레냐 박사님의 연구팀이 전 지구의 우울증 환자의 뇌 사진을 긁어모아 비교한 뒤 현재 우주 지도와 가장 흡사한 뇌를 발견했습니다. 그게 중증 우울증 환자, 권우희 양의 뇌였습니다.”
    “그럼 절 가지고 뭘 할 건데요? 혹시 해부할 거예요? 딱히 오래 살고 싶은 건 아니지만 아프게 죽는 건 싫어요!”
    “무슨 무서운 소릴! 중요한 표본인 우희 양을 왜 해부해요. 우리 우주의 우울증을 치료하기 위해 권우희 양의 다양한 데이터를 참조해서 연구에 사용할 겁니다. 그리고 해부한다고 해도 그런 거 다 전신 마취하고 하니까, 안 아파요, 안 아파.” 이 사람 매드 사이언티스트였습니다. 말끔하게 생겨선.
    “그리고 우주에도 가게 될 겁니다. 우주로 나가서 우주적 우울증을 치료하기 위한 설비 같은 걸 건설하려고 계획중입니다. 그때도 따라가서 우희 양의 뇌 데이터를 비롯한 각종 정보 등을 현장에서 제공하게 될 겁니다. 우희 양은 우주선 안에 앉아서 가끔 CT 촬영 같은 거 하다가 지구로 돌아오면 됩니다.”
    “싫어요.”
    “물론 그만한 대가를 지불할 겁니다. 범우주적인 스케일로 진행되는 인류를 구하기 위한 일입니다. 못해도 몇 억원의 수당이 지급될 거예요.”
    “그런다고 제 인생이 달라지나요? 돈이 생기면 친구도 생길지도 모르겠죠. 그런 게 진짜 친구인지는 모르겠지만. 왜 굳이 그렇게 열심히 살아야 하나요. 우주도 멀쩡하고 세상이 번영할 때, 제 인생은 뭐가 달랐나요. 사람은 언젠가 다 죽어요. 과학자가 그걸 모르세요?”
    “자, 자, 그렇게 부정적으로만 생각하지 마시고, 이 기회에 새출발한다 생각하세요. 성공하면 인류를 구한 영웅 중 하나가 되어 만인의 존경을 받을 겁니다.”
    “기껏해야 실험실의 개구리 표본 같은 거잖아요. 제가 인생에 되는 일 아무것도 없이 우울증에 걸려 이 지경이 될 때까진 아무도 관심 없었어요. 하지만 우주는 우울증에 걸리니 다들 극진히 신경써주네요.” 당황한 신소민 팀장님은 저를 진정시키려 진땀을 뺐습니다. 같이 온 레냐 박사님이라는 사람은 구석에서 대화를 지켜보기만 했습니다. 
    “이제 저 일퀘 해야 돼요.” 검지로 방문을 가리켰습니다. 이만 가달라는 뜻입니다. 풀이 죽은 신소민 팀장님이 문손잡이를 잡자마자, 그때까지 가만 있던 레냐 박사님이 잔뜩 화가 난 표정으로 제 멱살을 잡으며 책장으로 밀어붙였습니다. 책장에 어지럽게 방치한 여러 규격의 충전 케이블이 떨어져 제 머리에 마구 엉켰습니다. 노발대발 성난 목소리. 제가 전혀 모르는 분노한 외국어가 들려옵니다. 생각해보니 발표회장 방송은 자막이 달려 있었습니다. 제가 그녀의 말을 알아듣지 못한 것처럼, 이 사람은 한국어를 못하나 봅니다. 그래서 잠자코 가만 있었던건지. 하지만 제가 나가달라고 하는 분위기까지 이해하지 못할 리 없었습니다.
    “저기… 이분 지금 뭐라고 하시는 거예요?”
    “폴란드어라 저도 몰라요. 레냐 박사님 진정하세요!” 그녀는 정신없이 화를 내며 제 눈앞에 스마트폰을 펼쳐 사진 하나를 보여줬습니다. 무심코 성난 눈매를 봤더니 울며 화를 냅니다. 사진 속엔 레냐 박사님의 가족으로 보이는 사람들이 서 있습니다. 모두 4명, 울타리 쳐진 가을 밀밭에서 환하게 웃는 어른과 아이들의 모습. 그녀의 남편과 아들딸로 보입니다. 레냐 박사님이 우울증에 걸린 우주를 치료하려는 목적엔 세상을 구한다는 거창한 대의명분뿐 아니라 자신의 소중한 사람들을 구하려는 목적도 있었겠죠.
    사진 속 열 살 남짓 되어보이는 딸의 키가 아들보다 조금 더 큽니다. 남동생의 머리를 손바닥으로 눌러 밀가루 반죽처럼 찌그러뜨려 좀 더 좋은 카메라 앵글을 차지하기 위해 노력하는 누나를 보니 친남매가 틀림 없습니다. 
    “갈게요. 가면 되잖아요.” 절 움켜쥔 성난 손아귀가 풀리고 폴란드어로 고맙단 말이 돌아옵니다. 폴란드어는 한마디도 모르지만 신기하게도 이해가 됐습니다. 그날 밤 올려다본 밤하늘은 어둡기만 했습니다. 제가 저 거대한 검은색 속 어딘가로 가게 된다고 합니다. 늘 방 안에서 어둡게 살아서 어둠이 두렵지 않은 것만큼은 참 다행입니다.

     

    3. 제1 라그랑주 점(L1), 우울 분광기 건설 현장

     

    전 우주 쓰레기입니다. 우주에 도착하니 인간 쓰레기를 넘어 우주의 쓰레기가 된 기분이 듭니다. 이곳에 오니 망한 인생이란 실감이 곱절로 다가옵니다. 오직 저만 대학교를 중퇴한 백수였고 주변 모든 사람이 박사거나 전문직이거나 둘 다입니다. 저만 빼고 모두 영어로 말을 합니다. 저기 계신 레냐 박사님처럼요. 심지어 제 전담 통역사인 준오 오빠마저 영어, 폴란드어, 한국어 3개 국어를 하는 능력자입니다.
    신소민 팀장님과 레냐 박사님이 그토록 간청했기에, 이곳에 오면 행여 제가 뭔가 중요한 사람이 되나 싶었더니 개뿔… 이곳에서 저만큼 무능하고 하는 일 없는 사람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이곳에서 제 일과는 일어나서 우주식을 먹고 지뢰찾기나 카드놀이를 하다 뉴스를 좀 둘러본 뒤 다시 자는 생활의 반복. 일이란 건 주기적으로 의무실에 가는 것뿐인데, 과학자들이 CT나 MRI 따위로 제 뇌를 스캔한 뇌 사진을 제공해 우울증에 걸렸다는 우주의 지도와 비교한 뒤, 우주까지 따라온 전문 심리 상담사와 상담을 한 후 보고서가 작성됩니다.
    이제 그만 집에 가고 싶습니다. 돌아간다고 딱히 밝은 미래가 기다리고 있진 않지만... 지구에서 30년 가까이 살아가며 제가 이룬 것은 아무것도 없었죠. 그래도 이곳에서 돈을 꽤 벌었으니 집에 가서 게임을 켜고 지금껏 한 번도 못해본 수준의 과금을 지르고 싶습니다.
    “레냐 박사님이 ‘팍실 먹을 시간이다, 우희야’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준오 오빠의 목소리. 얼굴을 창문에 바짝 붙인 채 바깥의 공사 현장을 멍하니 바라보느라 뒤에 레냐 박사님과 준오 오빠가 다가온 줄도 몰랐습니다. 
    “저 파란색 별이 지구인 거죠?” 레냐 박사님은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지구는 제가 있을 때나 없을 때나 아무 차이가 없네요.”
    [인간은 작아. 하지만 지구를 가득 채운 생명은 인간이 눈으로 볼 수 없을 정도로 작은 원핵 생물 하나에서 시작됐지. 그리고 좀 웃고 다녀.]
    “저도 우울증 환자예요. 그래서 여기 있잖아요. 우울증 환자에게 웃으라고요?”
    [이 기지를 건설하는데 전 세계에서 막대한 예산이 투입되었고 지구의 이목이 쏠려 있어. 이 현장이 실시간으로 지구에 방송되는 거 알잖아.]
    지금 이곳은 우주선 내부의 카메라와 지구 궤도의 위성, 그리고 세계 각지의 천문대가 실시간 관측 중입니다. 그만큼 중요하고, 돈도 많이 들었고 전 인류의 기대를 짊어지고 있습니다. 창밖에선 유영줄을 달고 조심조심 오가는 작업자들이 보입니다. 여러 기계가 서서히 얽혀 한 덩어리가 되고 있습니다.
    [우울 분광기를 보고 있어?]
    “여기 온 지 반년이 되었는데도 저게 뭔질 몰라요. 우리 모두 저걸 만들기 위해 온 것 같은데.”
    [우라노스 이론에 따라서 우주가 어떤 생물이라면 현재 관측 가능한 우주는 우주의 뇌 부분에 해당된다고 여기고 있어. 일단 사람의 우울증 치료 방법을 토대로 세로토닌 재흡수와 전기경련요법을 우주에 접목시킬 수 있는 기계를 건설하는 중이야. 우주의 전자기파가 뇌파에 해당하는 걸로 추정 중인데 저게 완성되면 이 근방부터 시작해서 전자기파를 해석한 뒤 인간의 세로토닌과 노르에피네프린에 해당하는 신호를 가려내, 그 흡수나 발산을 우리가 조절하고 통제할 거야. 전자기파 번역기 시제품도 탑재할 예정인데 우주의 뇌파의 패턴을 해석하고 언어화할 수 있다면 우린 언젠가 우주의 생각을 알거나 대화할 수 있을지도 모르지.]
    “우리 후손들은 이 기계를 완성시키는 것에 얽매여 살아가게 되겠군요. 왜 그렇게까지 해야 하죠.”
    [사람들끼리 쓰잘데없는 전쟁이나 하는 것보단 낫잖아.]
    사춘기에 접어든 것으로 추측되는 우주가 우울증에 걸려 자살할지도 모른다는 관측이 나온 뒤, 지구상의 많은 국가가 갈등과 분쟁을 잠시 봉합하고 가용 자원을 몽땅 우주 심리학 연구에 지원 중입니다. 천문학적 우울증이라는 거대한 질병을 치료하기 위해서라면 사소한 예산 낭비쯤은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있죠. 고작 제 뇌 사진을 현장에서 제공받겠다는 이유로, 우주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 백수를 이곳까지 데려와 막대한 수당을 주며 체류시키고, 저만 전담하는 통역사까지 데리고 온 황당한 짓은 이런 이유에서 가능했습니다. 냉전기 우주 경쟁 이후 인류는 오랜만에 우주에 돈을 펑펑 날리는 중입니다.
    “이제 다들 알잖아요. 우린 우주 구석의 구석의 구석 끝에 사는 미생물이나 다름없는 존재라는 걸. 인간이 적혈구 하나의 운명을 신경쓰던가요. 우주는 우리가 죽든 말든 아무 상관도 안 할 걸요.”
    [그게 다 내려놓고 포기할 이유가 되나? 그리고 적혈구 없으면 사람은 죽어.]
    “우주가 어떤 생명체라면 우리가 맡은 역할은 뭔가요. 인간이 있어도 없어도 이곳 풍경은 변하지 않을 텐데.”
    [아직 몰라. 하지만 우리 몸속에 이유없이 존재하는 건 없어. 그래도 우린 스스로 우주가 생명체라는 유력한 정황을 발견했고 우울증에 걸렸을지도 모른다는 관측에 따라 미력하게나마 그 병을 치료하기 위해 움직이는 중이야. 어쩌면 우리가 우주의 면역 체계나 백혈구일지도 모르지.]
    하지만 이유없이 존재하는 생명이 있습니다. 생명은 누군가의 필요에 의해 발생하는 것이 아닌 우연히 탄생해 우연히 그 자리에 있는 것이니까요. 적합한 생명이 살아남고 그렇지 못한 생명이 도태됩니다. 인간 사회는 더욱 그렇습니다. 사회에서 제가 없어도 된다는 말을 몇 번이나 들으며 살았는지 모릅니다.
    [이곳 L1은 아무나 올 수 있는 곳이 아냐. 지구의 모든 사람들이 우리에게 실날 같은 희망을 걸고 있잖아. 우희도 이곳에서 중요한 사람이야.] 레냐 박사님이 제 얼굴에 어두운 생각이 드러난 걸 알아차린 모양입니다.
    “잘 알아요. 제가 없어도 저 기계 만드는 데 아무 지장 없잖아요. 여기서 하는 일이란 뇌 사진 찍고 창밖을 보며 멍 때리는 것뿐이잖아요. 제 우울한 뇌 사진이 우주와 비슷한 건 순전히 우연이에요. 제 뇌 사진이 현장에서 도움이 될지도 몰라 일단 끌고 온 것뿐이잖아요. 제 뇌 사진이 지난 1년간 우주 우울증 해결에 도움이 된 게 있나요?”
    [과학자들은 모든 가능성에 대비해야 해. 좋게 생각해. 여기서 돈도 많이 벌었고 지구로 돌아가면 더 나은 삶을 살 기회가 주어질 테니까. 우희는 꿈이 뭐야? 하고 싶은 게 있었을 거 아냐.]
    “돌아가신 아빠처럼 일러스트레이터가 되고 싶었는데 그림에 소질이 없었어요. 재수해서 겨우 입학한 미대는 1학년을 마치고 그만뒀고요. 그저 평범하게 잘 살고 싶었는데 그것도 너무 어렵기만 했고. 어떻게 살아가야 할 지 모르겠어요. 여기서 얼마쯤 돈을 모아가도 언젠가는 다시 살아가기 위해 돈을 벌어야 할 텐데. 전 아무 것도 잘하는 게 없어요. 세상엔 있으나마나한 생명이란 것도 있어요.”
    [심리학엔 터널 시야라는 게 있는데 넌 지금 터널 속에 갇혀 있어. 터널 끝의 빛이 유일한 해결책인줄 알고 걷지만 터널 끝에는 또 다른 넓은 세상이 있을 뿐이야. 우선 터널 밖으로 나가야 해.]
    “만약 언젠가 우주와 소통할 수 있게 된다 쳐요. 우주가 꺼낸 첫마디가 더는 살기 싫다면서 자살하고 싶다면 어떻게 할 건가요?”
    [그게 우주 심리학에서 다루는 중요 과제 중 하나야. 만약 우주와 이야기할 수 있게 되면 우주를 슬프게 한 원인이 무엇인지 우리가 어떻게 해결할 수 있을지 고민해야 하니까. 우주를 생물이라고 간주하면 과학자들은 현재 팽창이 정지한 것을 잠정적으로 우주의 생물학적 성장이 완료된 것으로 판단 중이니까, 우울증에 걸린 청소년들의 사례를 수집하며 여러 가설을 수립하고 시뮬레이션을 해보고 있지.]
    “아, 진짜 너무 오만해요.”
    [왜? 우주에 비해 우리가 너무 작아서?]
    “네! 그야말로 우주잖아요. 우주적인 고민을 해결해요? 우린 기껏해야 지구를 뜨겁게 만들지 않기 위해 에어컨을 켜느니 마느니, 원자력 발전소를 짓느니 마느니로 고민해대는 하찮은 생물이에요. 행성은 커녕 자그마한 도시 하나의 유기견 문제조차 해결 못하면서 언젠가 우주를 상대로 죽지 말라고 훈수를 두겠다니. 우린 너무 인간답네요. 온 세상이 인간을 위해 만들어진 줄 알아요.”
    [과학자들이 그 정도도 예상 못 했을 것 같아? 오만이 아니라 현실적인 거야. 우리가 우주를 살리겠다는 건 우주를 위해서기에 앞서 근본적으로 인류가 살아남기 위해서라고. 그리고 지금까지 우리가 아는 한 세상의 지성체는 인류 말고 아무도 없어. 우린 보잘것없는 생물이 맞아. 하지만 지구에서 우주선을 쏠 수 있는 생물은 우리뿐이라고.]
    “분리수거장 세균들도 우리보단 행복할 거예요. 우린 우주가 언제 자살할지 몰라 벌벌 떨고 있지만 언젠가 그 최후의 날이란 게 찾아오면 다른 모든 생물이 아무것도 모른 채 평온하고 의연히 소멸을 맞이할 때, 오직 인간만 울고불고 소리지르며 죽기 싫다고 난리를 칠테니.”
    [그 난잡한 소음과 비명마저 아름답지 않니? 생물은 살아남기 위해 발버둥치는 존재니까. 오만한 게 아냐. 망망대해에서 내려앉을 나무토막 하나를 찾기 위해 죽을 때까지 날갯짓을 하는 나비는 오만한 게 아냐. 그건 나름대로 현실을 찾아가는 아름다움이야.]
    “우주적인 고민이잖아요. 우주 밖에 뭐가 있는지 어떻게 알고 도와요. 우리에겐 상상조차 불가능한 신들의 세계나 마찬가지일 텐데.”
    [재밌잖아. 이 우주 바깥에 다른 세상이 존재할 가능성이 생겼다는 게. 지금 우리는 일찍이 겪어본 적 없는 위기에 처했지만 그 와중에도 새롭게 탐구할 영역이 생겨나 신난 과학자들도 한가득이야. 우주의 바깥이 존재한다면 어떤 세상일까. 그곳에도 식물이나 테마파크가 있을까? 비가 내리고 무지개가 뜰까? 이 모든 것은 인간의 얄팍한 경험에서 비롯된 추정일 뿐이지만 언젠가 다가가 바라보고 만져보고 확인해보면 그만인 것을. 만 년이 걸릴지 백만 년이 걸릴지 모르지만 우린 살아만 있으면 분명히 우주와 세계를 이해할 수 있을 거야. 우리는 죽더라도, 죽어서도 호기심을 내려놓지 못해.]
    우주가 중증 우울증에 걸린 것 같다는 연구가 발표됐던 날, 그날 밤 바로 우주가 자살하는 사태는 벌어지지 않았습니다. 탄생부터 성장기가 끝날 때까지 138억 년 걸렸다는 어마무시한 스케일의 생물입니다. 자살을 결심하고 실행에 옮겨도 수십만 년은 걸리지 않겠어요. 아니면 우주를 매달 밧줄이 없는 건지. 이 넓은 우주에서 태어나 살아가는 의미를 찾지만, 저는 그게 뭔지 도저히 모르겠습니다. 제가 살아 있거나 죽는 것이 이 커다란 우주에서 무슨 차이가 있을까요. 그런 잡상에 빠진 동안 레냐 박사님의 한마디가 들렸습니다.
    [우주는 텅 빈 공간에 불과한 거야. 사랑하는 사람이 없다면 말야.] 박사님은 제게 상자 하나를 건네주곤 일정이 있다며 멀어져갔습니다. 놀고 먹는 저와는 달리 이곳에서 할 일이 많은 사람입니다.
    창밖에선 차가운 검정 도화지를 배경으로 사람들이 분주히 오가며 뚝딱거리는 그림이 눈에 들어옵니다. 모두 언제 닥칠지 모를 파멸을 막기 위해 열심이지만 제 자리는 도화지 바깥인 듯합니다. 상자를 열어보니 우주에서도 먹을 수 있는 마카롱 몇 개와 ‘해피 버스데이 우희’라 적힌 카드가 있습니다. 저조차 잊고 있던 제 27번째 생일날, 지금쯤 원주시는 장마가 한창이겠군요. 

     


     유나무

    생활 도중 틈틈이 글을 쓰는 웹디자이너. 살아 생전에 다른 별에서 인류가 살아가는 모습과 가장 좋아하는 만화책인 ‘수혹성 연대기’가 애니메이션으로 만들어지는 것을 보고 싶습니다.

    이 기사의 내용이 궁금하신가요?

    기사 전문을 보시려면500(500원)이 필요합니다.

    2025년 6월 과학동아 정보

    • 유나무 작가
    이 기사를 읽은 분이 본
    다른 인기기사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