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성변측후단자(星變測候單子)’. 어렵게 들리지만 한자를 풀이하면 ‘하늘의 변화를 기록한 공문서’라는 뜻이다. 성변측후단자는 조선 시대의 관청이었던 관상감에서 쓴 천문 현상 보고서다. 핼리 혜성 관측 기록까지 남아 서양에서도 관심을 가지는 성변측후단자가 최근 한국을 대표해서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 등재를 추진 중이라는 소식이 전해졌다. 성변측후단자는 어떤 기록이며, 어떤 가치가 있을까. 삼국시대부터 이어진 한민족의 천문 관측 역사를 상징하는 유산인 성변측후단자의 의의를,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등재추진위원장인 이형목 서울대 물리천문학부 교수가 직접 설명한다.
과학적 데이터 활용의 원점, 천문학
서양에서 시작해 전 인류의 삶을 바꾼 과학혁명은 천체의 운행을 보다 객관적으로 이해하려는 노력에서 비롯됐다. 우주의 중심이 지구라고 믿었던 고대의 우주관을 거부한 니콜라우스 코페르니쿠스는 우주의 중심을 지구가 아닌 태양으로 삼으면 해와 달, 그리고 다섯 행성의 운동을 더 단순하게 설명할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곧 이어 갈릴레오 갈릴레이는 작은 망원경으로 하늘엔 지구가 아닌 다른 천체를 중심으로 도는 천체가 있다는 사실을 알아내, 지구도 궤도 운동을 한다는 확신을 가졌다. 이런 인식 변화는 자연계를 지배하는 보편적인 법칙을 찾기 위한 새로운 과학적 방법을 도입하도록 자극했다. 이 과학적 방법론의 혁신이 폭발적인 지식의 팽창을 가져온 과학혁명의 시작이다.
현대의 과학자는 실험과 관측으로 데이터를 축적하고 이를 분석해서 새로운 발견이나 지식의 확장에 기여한다. 현대 과학은 데이터가 최대한 객관적으로 수집돼야 하며, 연구가 완료된 후에도 일정 기간 보관해 추후 검증에 대비해야 한다는 일반적 원칙을 따른다.
이렇듯 데이터의 수집, 분석, 보관은 현대 과학의 가장 중요한 과보고서정이지만, 근대 과학혁명 이전엔 이런 흔적을 찾기 어렵다. 천문학을 데이터 축적의 예외적 사례로 볼 수 있는 이유다. 특히 우리가 사용하는 달력은 매우 간단해 보이지만, 장기간 축적된 관측 데이터와 동서양을 넘나드는 지식의 결정체다.
예컨대 조선 세종 시기에 간행한 달력 ‘칠정산 내·외편’ 중 외편은 1년의 길이를 365일로 하되 128년당 31일의 윤일을 둔다고 돼 있다. 이를 바탕으로 1태양년의 길이를 계산하면 365.242188일이다. 이 수치는 정밀한 현대 기기로 관측해서 정한 1년의 길이와 불과 1초 정도밖에 차이가 나지 않는다. 칠정산은 태양과 달의 운행뿐 아니라 수성, 금성, 화성, 목성, 토성의 회합 주기 등 다양한 상수가 정확한 수치로 기재돼 있다. 칠정산을 비롯환 수많은 역법에 이런 정밀 데이터가 담긴 것이다.
고대 동양의 왕조들이 달력의 중요성 때문에 달력의 제작 근거가 되는 천체 관측에 힘을 기울였다는 사실은 여러 사료에서 확인이 가능하다. 한국 경주의 첨성대는 현재 실존하는 가장 오래된 천문대로 알려져 있다. 고려 시대에도 개성에 첨성대가 있었고, 조선에 들어선 간의라는 기구로 천체를 관측하기 위한 간의대를 축조했다는 여러 차례의 기록과 그 잔해의 일부가 남아 있다. 이런 천문 관측 시설뿐 아니라, 천문 관측 업무를 담당하는 관청은 기록으로 남은 것만 해도 고려 중기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조선도 고려 때의 관측 기관인 서운관을 같은 이름으로 유지하다가, 세조 때에 관상감으로 이름만 바꿨다.
조선 공식 일일 천문 보고서, 성변측후단자
조선 시대의 관상감은 천문 현상뿐 아니라 기상 현상도 담당한 관청으로, 오늘날의 천문 및 기상 관측소가 그렇듯 24시간 운영 체계를 갖추고 있었다. 더욱 놀라운 사실은 관상감이 이렇게 하늘의 변화를 상시 관측하며 기록한 ‘성변측후단자’가 일부나마 현재까지 남아 있다는 것이다. 조선왕조의 공식적인 천문 관측 기록인 성변측후단자는 그 이름에서 볼 수 있듯이, 관상감에서 하늘의 변화를 관측하고 현장에서 기록한 관측 일지다. 성변측후단자는 천문 현상이 새로 나타나면 이 현상을 계속 관찰하며 매일 작성한 ‘일일 보고서’이고, 성변등록은 이 현상이 끝나면 해당 성변측후단자들을 한 권으로 묶은 책이다.
하지만 1910년의 경술국치와 함께 한반도를 점령한 일제는 관상감을 폐쇄하고 인천에 기상관측소를 설치해 1년의 달력과 해와 달의 운행, 일식과 월식, 그 밖의 기상 변동을 담은 역서 편찬 업무만 맡겼다. 관상감에 비해 기상관측소의 역할이 크게 축소됐음에도, 초대 기상관측소장을 지낸 일본의 기상학자 와다 유지는 측우기로 측정해온 조선의 강수 관측 데이터를 이용해 ‘네이처’에 논문을 발표하는 등 조선의 과학 기록 유산에 깊은 관심을 보였다. 또한 와다는 1917년에 간행된 ‘조선고대관측기록조사보고서’에 여덟 권의 ‘성변등록’ 목록을 소개했다.
와다가 기록한 성변등록은 각각 1661년 2월, 1664년 11월~1665년 2월, 1668년 3월, 1695년 11월, 1702년 4월, 1723년 10월, 1759년 4월, 1760년 8월의 기록이다. 그러나 일제 강점기, 해방 후 혼란기, 그리고 한국 전쟁 등을 거치며 성변등록은 대부분 소실됐다. 1978년에야 1723년 10월, 1759년 4월, 1760년 8월의 성변등록이 발견돼 현재 연세대 도서관이 소장 중이다.
다행히 살아남은 이 세 권의 성변등록은 모두 혜성 관측 기록이란 점에서 의의가 크다. 특히 1759년 4월본은 음력 1759년 3월 5일(양력 4월 1일)~3월 29일(양력 4월 25일)의 24일간 매일 혜성의 위치와 모습이 변한 내용을 자세히 관측, 기록했다. 혜성이 나타났던 위치, 시각의 정보까지 종합해 이것이 바로 핼리 혜성이란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핼리 혜성은 영국의 천문학자 에드먼드 핼리가 1682년에 나타난 혜성이 76년 후에 다시 돌아올 것으로 예측해서 널리 알려졌는데, 조선의 관상감이 아주 정밀한 관측으로 이 예측을 검증해낸 것이다.
1917년에 와다 유지가 소개했던 성변등록 여덟 권 중 세 권(1661년 2월, 1664년 11월~1665년 2월, 1668년 3월본)은 원본의 정확한 소재를 현재 알 수 없는 상태다. 하지만 이 원본의 사본은 한국에 전해져서, 한국 기상청이 그 원문과 한글 및 영문 번역을 기상기록집 제3권 ‘관상감이 기록한 17세기의 하늘’로 출간했다. 일본에 있다고만 알려진 그 성변등록들의 원본도 앞으로 누구나 열람할 수 있도록 공개되길 바란다.

천문학사와 과학사의 지평을 넓힐 성변측후단자
조선 후기의 천문학자이자 관상감의 관원이었던 성주덕은 19세기 초 편찬한 ‘서운관지’에 서운관(관상감)의 조직과 업무, 각종 제도, 연혁 등을 체계적으로 기록했다. 관상감이 세워지고 긴 시간이 흐른 후에 간행된 책이지만, 관상감의 체계, 역할, 관측 절차가 이 책에 기술된 것과 크게 다르진 않았을 것이다. 성변등록을 구성하는 성변측후단자는 모두 서운관지의 규정에 따라 작성돼 기록 방식이 서로 거의 같고, 중간중간 조선 관상감의 직인도 찍혀서 조선 조정의 공식 문서임을 알 수 있다. 이렇게 문자와 그림으로 세밀히 기록된 천문 현상의 관측은 과학적 정밀함을 갖춰서 현대의 천문학 연구에도 활용할 수 있다. 아울러 천문학자들이 관측한 현장 기록물이므로 틀린 부분에 대한 수정 흔적까지 그대로 남아 있어서, 전 세계 과학계에서도 유례가 드문 자료다.
관측 및 기록의 목적까지 현대 천문학자의 연구와 완전히 같진 않으나, 성변측후단자에 과학자로서 정밀성과 객관성을 유지하려는 노력이 담겼다는 사실은 분명하다. 예를 들어 여러 사람이 동시에 관측에 참여해 개인의 편차를 줄였고, 관측자 교체로 인한 편향을 막기 위해 전날 관측자중 적어도 한 명이 다음날도 관측에 참여하도록 하는 규정도 있었다. 이러한 규정이 철저히 지켜졌다는 사실도 매일 기록된 관측자 명단에서 확인할 수 있다.
기록물의 종류는 크게 국가 차원에서 편찬한 역사서, 기록물과 민간에서 통용된 기록물이나 개인 저작물로 나눌 수 있다. 국가 편찬의 사서는 양식이 정제된 완결성을 지니므로 초고의 흔적을 찾기 어렵다. 그러나 성변등록은 천문 현상을 현장에서 관측하며 기록하는 과정에서 오류 등을 수정한 흔적까지 고치지 않고 책자로 묶었다. 따라서 성변등록은 국가 편찬 기록물로서의 완결성과 1차 사료(초고)로서의 원형이 결합한 고유성을 지닌 기록물이라고 볼 수 있다. 한국에 남아 있는 천문이나 자연현상에 관한 수많은 기록 중 대부분은 해당 현상 이후에 편찬된 역사서인 삼국사기, 고려사, 조선왕조실록에 실렸다. 이런 사서 기록 중 천문 현상은 전문 지식을 지닌 사람이 밤을 새워가며 관측해야만 알 수 있는 것들이다. 따라서 이 중 조선왕조실록에 남은 천문 현상 기록의 원형이라고 할 수 있는, 그 천문 현상을 발생 당시에 관상감의 천문학자들이 관측하고 기록한 결과물인 성변측후단자의 존재는 과학적, 역사적으로 큰 행운이다. 1759년의 헬리 혜성과 같은 과거의 천문 현상 기록을 후대의 천문학 자료로 활용할 수도 있어서다.
최근 국내의 천문학계, 우주과학계, 그리고 정보 관련 학계 인사들이 모여 성변측후단자를 더욱 잘 보존하고 그 가치를 전 세계에 알리기 위해 세계기록유산등재추진위원회를 결성했다. 성변측후단자에 대한 학술적 연구, 추가 자료 수집 등의 활동을 지속한 결과, 2024년 12월에 마침내 1차 관문인 국가유산청 심사 신청서를 제출했다. 국가유산청은 신청된 여러 기록을 면밀히 검토한 후, 한국의 세계기록유산 등재 후보를 선정해 유네스코(UNESCO) 사무국에 본심사를 위한 신청서를 제출할 예정이다.
이번에도 한국의 가치 있는 기록물들이 세계기록유산 등재를 신청한 만큼, 심사 결과를 예측하긴 어렵다. 하지만 성변측후단자가 빠른 시일 내에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돼, 한국의 유서 깊은 과학사가 전 세계에 널리 알려지길 기대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