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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요기사] [보드게임 × 식물학] 광합성, 숲 속이 '평화롭다'는 착각은 버릴 것

평화로운 겉모습에 속아선 안된다. 숲 속은 빛을 더 차지하려는 나무들 사이의 치열한 전투가 벌어지는 전쟁터다. 보드게임 ‘광합성’을 플레이하는 당신은
이 전쟁을 나무의 시선에서 실감할 수 있다. 숲 속 작은 공터에 떨어진 씨앗이 아름드리 나무가 되기까지 매 순간이 경쟁의 연속이다. 광합성 게임은 이 과정을 농업 전문가인 필자도 고개를 끄덕일 만큼 잘 구현해 뒀다.

 

 

편집자 주


과학이 ‘한 스푼’ 들어간 보드게임을 하다 보면 과학기술로 세상을 바꾸는 경험을 간접적으로 해볼 수 있습니다. 자타공인 ‘보드게임 덕후’인 과학자의 생생한 설명을 통해 과학과 게임이 절묘하게 교차하는 보드게임들을 살펴보겠습니다. 책상 위에서 펼쳐지는 과학, 함께 즐겨보시죠.

 

보드게임 커뮤니티에는 누가 처음 이야기했는지는 아무도 모르지만, 들었을 때 모두가 고개를 끄덕이는 격언이 몇 있다. 그 중 꽤나 흥미로운 것이 ‘식물이 테마인 게임은 의 상하기 좋다’는 것이다. 식물 테마의 보드게임은 대부분 그림이 화려해 눈길을 끌거나, 초록빛으로 물든 게임의 구성물들이 아름다워 보인다. 왠지 유유자적 식물을 가꾸며 ‘힐링’할 수 있을 것 같은데 심상치 않은 격언이 따르는 이유는 무엇일까?

 

보드게임 ‘광합성’은 2017년 이탈리아의 보드게임 디자이너 얄마르 핵이 출시한 식물 테마의 추상전략 보드게임이다. 추상전략 보드게임은 운에 의한 영향을 최소화하는 한편 전략적 요소를 강조하는 보드게임의 한 갈래다. 대부분의 사람에게 가장 친숙한 보드게임의 구성물은 역시 카드나 주사위일 것이다. 카드를 섞어 한 장을 뽑거나 주사위를 던지면 게임에는 플레이어가 통제할 수 없는 임의성이 생긴다. 앞으로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모른다는 점에서 재미 요소가 추가되지만, 대신 미래를 알 수 없으니 치밀하게 전략을 세우는 데 방해가 된다.

 

추상전략 게임에서는 이런 임의성을 최대한 제거하고 플레이어의 수 싸움을 강조하는 특징이 있다. 추상전략 게임의 게임판 위에는 숨겨진 정보가 없다. 그래서 상대방이 무슨 행동을 하는지 모두 확인하고 나만의 전략을 세울 수 있다. 추상전략에 속하는 대표격인 보드게임으로는 누구나 잘 아는 체스와 바둑이 있다. 이런 게임에서는 빠른 수 계산과 판세를 읽는 능력, 상대방을 이기기 위한 전략이 가장 중요한 덕목이다.

 

이런 특성 때문인지 추상전략 게임을 중간에 두고 인간과 인공지능(AI)이 대결한 적이 여러 차례 있었다. 광합성 게임도 추상전략 장르에 속하기 때문에 치열한 수 싸움이 벌어질 가능성이 다분하다. 내가 승리하기 위해 선택하고 수행한 행동이 상대방에게는 해가 되는 일이 자주 일어난다.

 

많은 식물 테마의 게임이 추상전략 장르에 속하는 것은 자연에선 식물 사이에 실제로 격심한 경쟁이 존재하고, 그런 경쟁을 게임 속으로 옮기는 데 추상전략 장르의 특징이 잘 맞아떨어졌기 때문이다. 광합성 게임도 식물 사이에 일어나는 빛에너지 쟁탈전을 멋지게 묘사해 냈고, 여러 보드게임 플레이어들에게 테마를 살리면서 좋은 게임성을 지녔다는 평가를 받았다. 그러나 게임의 화려한 외형에 속아 시작했다가 플레이어 사이의 치열한 경쟁에 놀라고 실망했다는 원성도 끊이지 않는다. 식물이 테마인 게임은 의 상하기 좋다는 격언의 훌륭한 예시인 셈이다.

 

 

광합성의 게임판. 실제 숲의 다양한 요소들을 영리하게 구현했다. 계절과 시간에 따라 태양의 위치가 달라지는 것처럼, 보드게임 ‘광합성’에서도 매 라운드마다 ❶태양조각의 위치를 바꿔가며 햇살이 들어오는 방향을 바꾼다. 지금 상태에서는 게임판 10시 방향에서 햇살이 비춘다. 4시 방향의 ❷나무들은 앞에 있는 나무에 가려 광합성을 제대로 하지 못한다. 게임판 가운데로 갈수록 ❸비옥도를 나타내는 나뭇잎의 갯수가 많다. 대신 햇빛이 잘 들어오지 않는다는 점을 고려해 ❹씨앗 토큰을 올려둬야 한다. 

 

과학    세상에서 가장 효율적인 광합성 공장, 식물

 

 

동물과 식물의 가장 큰 차이점은 역시 식물만이 광합성을 할 수 있다는 점이다. 현재까지 지구상의 동물 중 스스로 광합성을 하는 경우는 발견된 적이 없다. 반대로 식물은 진화의 오랜 역사를 거치며 효율적인 광합성을 위한 여러 전략을 시험해 왔다. 식물을 가만 들여다보고 있자면, 일종의 광합성 기계나 공장 같은 느낌까지도 든다.

 

식물에는 빛에너지를 효율적으로 수확할 수 있는 여러 구조가 있다. 식물세포 속 엽록체는 광합성이 이뤄지는 핵심적인 세포소기관이다. 엽록체는 마치 집에서 위성 TV 방송을 보기 위해 설치하는 오목한 안테나처럼 여러 방향에서 쏟아져 들어오는 빛에너지를 한 곳에 모으기 최적화된 구조다. 엽록체에는 표면적을 넓혀 빛에너지를 최대한 많이 모으기 위한 구조, ‘그라나’가 있다. 그라나는 엽록체 안쪽 막이 구불구불 휘어 여러 층 쌓인 구조다. 그라나를 형성하는 한 층은 틸라코이드라고 부르는데, 틸라코이드 표면에는 빛 에너지를 수확할 수 있는 엽록소 등의 색소가 배치돼 있다.

 

험난한 환경을 견디기 위해 퇴화한 잎 대신 줄기로 광합성을 하는 선인장 같은 종류를 제외하고, 대부분의 식물은 잎을 이용해 광합성을 한다. 잎은 빛에너지를 받아 저장하는 데 최적화된 구조다. 쌍떡잎 식물의 잎을 세로로 잘라 단면을 살펴보면 엽록체를 잔뜩 가진 세포가 빼곡하게 들어찬 책상조직(palisade)이 눈에 띈다. 책상조직이 치밀하게 세포로 가득 차 있는 이유는 잎에 쏟아진 빛에너지를 놓치지 않고 최대한 수확하기 위한 것이다.

 

책상조직 아래쪽에는 세포가 얼기설기 나열된 해면조직(spongy)이 있어 엉성한 틈 사이로 잎 바깥의 이산화탄소가 통과해 들어온다. 이산화탄소는 나중에 엽록체 안에서 결합돼 포도당을 만드는 재료가 된다. 식물은 이산화탄소로 포도당을 만드는 과정에서 빛에너지를 저장한다.

 

포도당은 식물 안에서 여러 용도로 쓰인다. 줄줄이 이어진 포도당은 세포벽을 형성하는 셀룰로오스가 돼 식물의 몸집을 키우는 데 일조한다. 남은 포도당은 뿌리나 줄기 등 식물의 특정 부위로 이동해 전분이나 다당류의 형태로 쌓이기도 한다. 사람들은 이렇게 전분이 쌓인 식물 부위를 수확해 요리에 쓴다. 땅속 덩이줄기에 전분을 쌓은 식물로는 감자가 있고, 과일을 따 먹는 사과나 배 등은 열매에 다당류의 형태로 저장한 사례들이다.

 

그러나 식물이 살아가는 자연 환경이 광합성을 하는 데 항상 좋기만 한 것은 아니다. 숲 속에서 새로 싹튼 식물은 먼저 자리잡은 식물의 그림자 속에서 미약한 빛에너지만 겨우 얻을 수 있을 뿐이다. 이때 작은 식물은 자신이 처한 환경을 빛의 색깔로 확인한다. 위쪽에서 다른 식물이 광합성에 유리한 파장의 빛을 잔뜩 흡수하면, 아래쪽으로는 초록색이나 원적색의 빛만 남아 내려오게 된다. 이런 색깔의 빛이 많으면 식물은 음지회피반응(shade avoidance response)을 통해 줄기를 최대한 길게 늘이는 데 집중한다. 그늘진 곳에서 식물을 키우면 비실비실하고 길쭉하게 자라는 이유가 바로 이 때문이다. 

 

길어진 식물이 다른 식물보다 위로 올라와 비로소 빛에너지를 충분히 받을 수 있게 되면 정상적으로 잎이나 줄기를 두껍게 만드는 시간을 갖는다. 물론 이렇게 승리를 쟁취한 식물 아래엔 빛을 받지 못하는 또다른 식물이 있다. 자연의 세계란 냉혹한 법이니까.

 

▲남윤중

다른 보드게임에 비해 컴포넌트(주사위, 카드, 타일 등 보드게임의 구성요소)가 단순한 것이 추상전략 게임의 특징이다. 보드게임 ‘광합성’도 태양 순환 토큰이나 승점 토큰 등 단순한 ➀토큰들과 ➁나무 모양 컴포넌트, ➂씨앗 토큰 등으로 이뤄져 단순하다. 대신 입체적으로 조립이 가능하고, 섬세한 일러스트가 그려진 점이 독특하다. 나무 컴포넌트를 살펴보면 작은 동물이 그려져 있다.

 

게임    움직이는 태양과 빛에너지 쟁탈전

 

 

광합성 게임에서 여러분은 서로 다른 네 가지 종류의 나무 중 하나를 선택하게 된다. 나무의 생김새나 씨앗의 모양은 전부 다르지만, 게임 속에서 종류에 따른 능력 차이는 없다. 모두 공평한 상태에서 숲 속의 공터라는 전쟁터에 뛰어들게 된다. 게임판인 숲속 공터는 육각형 모양인데, 가운데로 갈수록 토양이 비옥하다. 게임을 시작하면, 플레이어들은 가장자리 칸에 작은 나무를 2개씩 배치하게 된다. 게임판 한쪽에는 빛이 쏟아지는 방향을 알 수 있도록 태양을 상징하는 조각을 둔다.

 

게임에서 사용되는 나무는 씨앗, 작은 나무, 중간 나무, 큰 나무로 네 단계를 거쳐 성장한다. 나무가 성장하려면 빛에너지가 필요하다. 광합성 게임 속 한 라운드는 빛에너지를 모으는 광합성 단계와 빛에너지를 사용하는 생명 주기 단계로 나뉘어 있다. 광합성 단계는 태양의 방향에 따라 빛에너지를 모으는 단계로, 작은 나무는 1포인트, 중간 나무는 2포인트, 큰 나무는 3포인트의 빛에너지를 모은다. 플레이어들은 각자 게임판에 배치한 나무가 생산한 빛에너지를 모두 더해 개인 게임판에 표기해 둔다.

 

이 게임이 재미있어지는 건 이 다음 단계부터다. 태양 방향을 바라볼 때, 내 나무 앞에 다른 나무가 있다면 내 나무에 그림자가 드리워진다. 작은 나무는 태양 방향 반대편으로 1칸, 중간 나무는 2칸, 큰 나무는 3칸만큼 그림자를 만든다. 내 나무가 앞에 위치한 나무보다 크기가 크다면 그림자를 무시할 수 있다. 하지만 크기가 같거나 작다면 그림자 때문에 빛에너지를 얻을 수 없다. 본격적으로 나무가 성장하는 게임 중반에 다다르면, 상대방의 나무 때문에 빛에너지 빈곤에 시달리기 십상이다.

 

다행스럽게도 태양의 방향은 한 자리에 고정되어 있지 않고 계속해서 변한다. 태양 조각은 육각형 게임판의 가장자리를 따라 한 라운드마다 1/6씩 시계 방향으로 이동한다. 이번 라운드에는 내 나무가 상대방 나무 그늘 속에서 괴로웠지만, 몇 라운드가 지나면 상대방의 나무가 반대로 내 나무의 그림자에 가려질 가능성도 있는 것이다. 광합성 게임의 전략은 빙글빙글 도는 태양 위치를 미리 예측해 빛에너지를 최대한 수확할 수 있는 자리에 내 나무를 배치하고 큰 나무를 만드는 것이 핵심이다.

 

광합성 단계를 거치며 빛에너지를 잔뜩 수확했다면 다음으로 빛에너지를 소비하는 생명 주기 단계를 거친다. 빛에너지 1포인트를 사용하면 나무 크기에 따라 주변으로 씨앗을 뿌릴 수 있다. 작은 나무는 옆 1칸에만 씨앗을 뿌릴 수 있지만, 큰 나무는 3칸 떨어진 곳에도 씨앗을 뿌릴 수 있다. 씨앗은 빛에너지 1포인트를 사용해 작은 나무로 성장할 수 있고, 작은 나무는 2포인트를 사용해 중간 나무로 성장할 수 있다. 다 자란 큰 나무는 빛에너지 4포인트를 사용해 생명 주기를 종료하고 위치한 자리에 해당하는 점수 토큰을 얻을 수 있다.

 

광합성 게임은 실제로 자연에서 나무가 싹트고 성장하며 빛에너지를 저장하는 과정을 점수를 이용해 추상적으로 묘사한다. 플레이어는 태양이 게임판 주변을 3바퀴 돌 때까지 열심히 나무를 키워야 한다. 최종적으로 점수가 가장 높은 플레이어가 우승을 차지한다. 모든 과정을 거치는 동안 빛에너지를 가장 효율적으로 사용한 사람이 승자가 될 가능성이 높다. 실제 숲 속에서는 그늘에 놓여 있어도 빛에너지를 잘 모을 수 있는 활엽수가 최종적인 승자가 되곤 한다. 그러나 게임에서 나무의 종류 마다 서로 다른 능력을 부여했다면 게임이 너무 복잡해질 것이다. 식물이 숲 속에서 자리 잡는 과정에 집중해보면, 광합성 게임은 자연 속에서의 경쟁을 멋지게 게임판 안으로 옮긴 수작으로 평가할 수 있다.

  

▲GIB
실제 숲 속 나무들도 한정된 햇빛과 양분 등 자원을 나눠 사용하기 위해 치열하게 경쟁하고 있다. 숲에 간다면 하늘을 올려다보자.
한 조각의 햇빛이라도 더 차지하고자 잎을 뻗는 나무들을 볼 수 있다.

 

팁    게임은 게임일 뿐 싸우지 말자

 

 

치밀한 수 싸움을 거쳐 게임의 막바지에 다다른 플레이어들은 그림자를 드리우는 상대방의 나무를 보며 화를 내기도 한다. “저 나무만 없었어도! 내 나무가 빛에너지를 3포인트나 생산할 수 있었는데!” 같은 이야기가 오가는 상황을 겪을 것이다. 게임 도중에 쌓인 감정이 폭발해 싸움이 날 수 있다. 이를 막기 위해 광합성 게임에는 평화를 위한 규칙이 몇 가지 있다.

 

먼저 각 플레이어는 개인판 위에 놓인 씨앗이나 나무를 직접 게임판에 가져다 놓을 수 없다. 개인판에 있는 씨앗이나 나무는 먼저 왼쪽에 쓰여진 숫자만큼의 빛에너지를 지불하고 개인판 밖으로 꺼내 사용 가능한 상태로 만들어야 한다. 그 후에야 게임판에 씨앗이나 나무를 올려놓을 수 있다. 

 

다음으로 씨앗 뿌리기나 나무의 성장은 한 라운드 동안 여러 차례 이뤄질 수 없다. 식물이 씨앗을 만들어 뿌리거나, 몸집을 키우는 데에는 시간이 많이 필요하다. 빛에너지가 넉넉하다고 해서 작은 나무가 한 번에 5포인트를 지불해 큰 나무가 되거나, 씨앗이 한 번에 10포인트를 지불해 생명 주기를 종료하는 일은 금지돼 있다. 나무의 성장은 한 라운드에 한 단계만 일어날 수 있다.

 

이러한 세세한 규칙들을 놓치면 누군가 부당하게 큰 나무를 갖게 되는 상황이 종종 만들어진다. 싸움이 나는 것을 막기 위해서 여러분은 게임을 하는 동안 규칙에 세밀하게 관심을 가지는 편이 좋다. 극심한 경쟁 탓에 과열된 분위기를 완화하기 위해 디자이너가 준비한 선물이 있다. 여러분이 가진 나무나 개인 게임판을 자세히 살펴보면 귀여운 숲 속 친구들을 만나볼 수 있을 것이다. 귀여움으로 서로에게 쌓인 분노를 식혀보자.

 

숲 속 나무들의 치열한 생존 경쟁을 간접적으로나마 경험해 볼 수 있는 광합성 보드게임은 여러분의 전략과 수 계산을 테스트하는데 적합한 게임이다. 현실에서 생존을 걸고 승부를 펼치기에는 부담이 크지만, 게임판 위에서는 얼마든지 가능하다. 광합성 보드게임에서 생존을 건 승부의 세계로 뛰어들어 보자. 

 

정대호
연암대 스마트원예계열 교수로 서울대에서 농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현재 식물 광합성 모델링 연구를 수행하고 있다. jdhenv@yonam.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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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9월 과학동아 정보

  • 정대호 연암대 스마트원예계열 교수
  • 에디터

    김소연
  • 디자인

    이형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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