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티타임 속 과학 이야기5

물리학자는 찻잔 속에서도 유체역학을 본다. 원두를 갈 때 물을 한 스푼 넣으면 왠지 커피가 더 맛있게 느껴진다거나, 찻잔 속 찻잎의 움직임이 시간에 따라 달라지는 현상 모두 과학자들에겐 훌륭한 연구대상이다. 소중한 카페인 충전 시간일 뿐만 아니라 연구대상까지(?) 돼 버린 티타임 속 과학 이야기를 소개한다.

 

01 커피 그라인더 속 천둥번개

 

“커피 한잔 마시고 나니 논문이 나왔다는 사실이 웃기죠?”

 

조슈아 멘데즈 하퍼 당시 미국 오리건대 지구과학과 연구원(현 미국 포틀랜드주립대 전기컴퓨터공학과 교수)이 보도자료를 통해 말한 그대로다. 하퍼 연구원은 화산에서 발생하는 번개 등 전기현상에 대해 연구하는 화산학자다. 그와 크리스토퍼 헨든 오리건대 화학과 교수가 함께 2024년 1월 3일 발표한 연구 결과는 커피를 갈 때 발생하는 마찰대전 현상을 다룬다. 화학과 화산학, 사뭇 다른 두 연구분야가 만난 곳은 다름 아닌 커피였던 것. doi: 10.1016/j.matt.2023.11.005

 

헨든 교수의 연구팀에는 ‘커피 연구실’이라는 별명이 있다. 말 그대로 커피를 주제로 다양한 연구를 하는 이곳에서는 주기적으로 다른 분야의 연구원들을 초대한 커피 모임을 연다. 이 자리에 참여한 하퍼 연구원은 커피를 갈 때 그라인더 속에서 정전기가 발생하는 모습을 보며 화산활동에서 발견되는 번개를 떠올렸다. 화산활동이 벌어질 때 마그마는 작은 입자 여러 개로 쪼개진 다음 서로 마찰하며 마찰전기를 만든다. 입자에 대전된 전하량이 충분히 축적되면, 번개가 발생한다.

비슷한 현상이 커피 그라인더 속에서도 일어난다. 분쇄된 커피 입자들이 서로 부딪히며 마찰전기를 만들었다는 것이 연구팀의 설명이다. 그 결과 전하를 띤 커피 가루가 서로 뭉치거나 밀어내면, 커피를 추출할 때 고루 추출되지 않는 악영향이 생긴다. ‘커피 그라인더 속 천둥번개’를 방지하기 위해선 어떻게 해야 할까. 연구팀이 낸 해답은 의외로 간단하다. 커피 콩을 갈기 전에 물을 한 숟갈 넣는 것. 커피 콩의 수분함량이 높을수록 마찰전기가 덜 발생하기 때문이다.

 

02 화학공학자는 커피 속에서 공장을 본다

 

 

“유동층이 뭔지 모르겠다고요? 커피 내려 본 적 있죠?”

 

화학공학을 전공한 기자가 대학시절 조교에게 실제로 들은 말이다. 커피를 내리는 과정은 아주 완벽한 화학공정의 예시다. 액체(=물)를 흘려보내 원료로부터(=커피가루) 화학물질(=카페인 등)을 추출하기 때문이다. 조교가 설명하려던 ‘유동층’도 마찬가지다. 유동층은 작은 고체 알갱이들이 마치 유체처럼 움직이는 지점을 말한다. 커피를 내릴 때 물과 혼합된 커피가루가 마치 유체처럼 움직이는 것 또한 유동층의 일종이다.

 

커피 내리는 과정을 수리물리학 모델을 이용해 분석한 연구도 있다. 아일랜드 리머릭대 합성 및 고체상태 약학 연구센터 연구팀은 커피를 내리는 과정 속에서 커피가루 사이를 이동하는 유체의 흐름에 따라 커피가 얼마나 균일하게 추출되는지 실험과 컴퓨터 모델링을 통해 분석했다. 연구팀은 “분석 결과, 커피 입자의 크기, 커피 추출 방식 등에 따라 커피의 농도가 달라 기존 브루잉 컨트롤 차트에는 한계가 존재함이 드러났다”면서 “이번 연구를 통해 찾은 수리물리학 모델은 커피뿐만 아니라 다양한 추출 또는 여과 시스템에서 활용할 수 있을 것”이라고 설명했다. doi: 10.1371/journal.pone.0219906

03 반도체 공정에 활용되는 커피 링 효과

 

커피를 흘린 흔적을 유심히 살펴본 과학자들도 있다. 커피 흘린 자국을 잘 살펴보면, 자국 가장자리가 중간보다 색이 더 짙다는 걸 발견할 수 있다. 과학자들은 이 현상에 ‘커피 링 효과(Coffee ring effect)’라는 이름을 붙였다. 커피 속 수분이 증발하며 남는 이 자국을 이해하기 위해선 마랑고니 흐름이란 개념을 알아야 한다.

 

마랑고니 흐름은 액체의 표면장력에 의해 생긴다. 판 위에 떨어진 물방울의 모양을 떠올려보자. 물은 표면장력이 강한 액체라, 물방울은 반구 형태를 이룬다. 이때 물은 가장자리부터 증발하는데, 그러면서 반구 형태를 유지하기 위해 물 분자와 그 속의 불순물까지도 물방울 가장자리로 향하는 흐름이 생겨난다. 이를 마랑고니 흐름이라고 부른다.

커피의 경우에도 마랑고니 흐름이 관찰된다. 커피 속에는 물뿐만 아니라 커피가루도 함께 포함돼 있으니, 물이 가장자리로 향할 때 커피가루도 함께 이동한다. 그 결과 가장자리에 커피가루가 쌓인 모습의 자국이 남는 것이다.

 

물과 함께 혼합된 가루가 물방울이 마르면서 가장자리부터 표면에 달라붙는 커피 링 효과는 다양한 산업 분야에서 활용된다. 나노입자를 아주 얇은 막 형태로 씌우는 반도체 공정이나 코팅 공정 등이 대표적 사례다.

 

04 아인슈타인이 이런 연구도? 찻잎 패러독스

 

디스코 팡팡을 떠올려보자. 빙글빙글 돌아가는 원반 위 사람들은 모두 원 가장자리로 쏠린다. 원 바깥으로 향하는 관성력인 원심력 때문이다. 이번엔 찻잔을 떠올려보자. 찻잎이 동동 떠 있는 찻잔에 숟가락을 넣고 휘휘 저으면 찻잎은 어디로 이동할까?

 

위 질문에 ‘디스코 팡팡 속 사람들처럼 찻잔 벽에 붙는다’는 답을 떠올렸다면 당신은 틀렸다. 찻잎은 오히려 찻잔 가운데로 몰린다. 이 문제가 바로 수십년 간 과학자들을 괴롭힌 ‘찻잎 패러독스’다. 찻잎 패러독스에 대한 완전한 해답을 처음 제시한 건 알버트 아인슈타인이다. 아인슈타인은 1926년 한 편의 논문을 통해 찻잎 패러독스가 찻잔과 차 사이의 마찰력 때문에 발생한다는 사실을 밝혔다. doi: 10.1007/BF01510300

아인슈타인의 설명은 이렇다. 찻잔 속 차를 휘저으면 처음에는 구심력에 따라 유체가 찻잔 가장자리 쪽으로 흘러 찻잔 바닥으로 내려간다. 그런데 찻잔 바닥에 가까워질수록 유체의 흐름이 느려진다. 유체가 찻잔과 만나며 생기는 마찰력 때문이다. 느려진 유체의 흐름은 찻잔 가운데에서 다시 위로 향한다. 그 결과 찻잎이 찻잔 가운데에 몰린다.
 

‘이런 걸 왜 굳이 논문까지 낼 만큼 연구한담?’이란 생각은 금물. 찻잎 패러독스는 오늘날 혈액에서 적혈구를 분리하는 과정에도 활용된다. 혈액을 확대해 살펴보면 적혈구가 혈장 위를 동동 떠다니는 모습이다. 마치 찻잎이 떠다니듯! 따라서 혈액을 휘휘 저어 적혈구가 혈액이 담긴 원통 한가운데에 몰리도록 하면 적혈구를 쉽게 분리할 수 있다. 차 한 잔도 허투루 보지 않아야 하는 이유가 여기 있다.

 

05 서울대 연구팀이 밝힌 ‘조용히 차 따르는 법’

 

찻주전자로 차를 따를 때, 물소리를 최대한 작게 내려면 물줄기는 두껍게, 주전자는 가능한 찻잔과 가깝게 하는 게 좋다. 김호영 서울대 기계공학부 교수팀은 물을 따르는 소리를 실험적으로 분석한 연구 결과를 2023년 12월 21일 국제학술지 ‘피지컬 리뷰 플루이즈’에 발표했다. doi: 10.1103/PhysRevFluids.8.L122002

 

연구팀은 물로 가득 찬 지름 10cm의 원통에 굵기가 서로 다른 물줄기를 흘려보냈다. 그리고 수중마이크를 이용해 이때 발생하는 소리를 측정하고, 카메라로 물이 떨어질 때 원통 내부의 거품과 유체의 흐름을 촬영했다. 그 결과, 물 속으로 떨어지는 물줄기가 갈라질수록 물이 떨어지는 소리가 더 크다는 사실을 밝혔다. 물소리는 물줄기가 가늘수록 더 컸다.

 

연구팀은 물을 따를 때 발생하는 소리 크기 차이가 물줄기가 만드는 공기방울의 크기에 따라 달라진다고 설명했다. 물 속에서 공기방울이 더 많이 발생할수록 소리가 더 크다는 뜻이다. 김 교수는 미국의 언론사와의 인터뷰에서 “물줄기를 얇게 유지하며, 조심스럽게 부어서 차를 조용히 내주려는 시도를 하는데, 이는 별로 성공적인 접근법이 아닐 수 있다”고 설명했다.

 

물의 온도 또한 물소리에 따라 바뀐다. 물소리가 크면 공기방울과 더 많이 섞인다는 뜻이므로, 물소리가 클수록 차가 더 잘 식는다고 해석할 수 있다. 뜨거운 음료를 잘 마시지 못한다면, 차를 내오는 점원에게 차를 요란스럽게 따라 달라고 요청해보는 건 어떨까. 과학이 티타임에 이렇게 이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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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02월 과학동아 정보

  • 김소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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