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셉션’, ‘인터스텔라’ 등 걸출한 SF영화들로 국내에서만 3315만 관객을 동원한 거장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이 돌아왔습니다. 8월 15일에 개봉하는 영화 ‘오펜하이머’는 원자폭탄 개발에 주도적인 역할을 한 천재 과학자 줄리어스 로버트 오펜하이머의 전기를 다루고 있습니다.
※ 편집자 주
사이언스 픽션(SF), 즉 과학적 사실을 배경으로 펼쳐지는 영화를 ‘과학덕후’의 시선으로 뜯어봅니다. 볼거리가 넘쳐나는 시대, 바쁜 과학덕후들을 위해 준비한 연재에 많은 관심 바랍니다.
오펜하이머는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미국의 원자폭탄 개발 프로젝트인 ‘맨해튼 프로젝트’를 이끈 인물입니다. 그는 원자폭탄이 전쟁을 끝내고 평화를 가져올 것이라 믿었지만, 안타깝게도 원자폭탄은 또 다른 참상의 서막이 됐습니다. 1945년 일본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떨어진 핵폭탄으로 일본이 항복해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났지만, 이후 과도한 무기 개발 경쟁은 또 다른 전쟁의 시작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한 오펜하이머는 수소폭탄 개발을 반대하기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미국 정부는 수소폭탄 개발 프로젝트에서 그를 철저히 배제하고 결국 수소폭탄 개발에 성공합니다.
원자폭탄과 수소폭탄의 가장 큰 차이점
원자폭탄 개발은 주도적으로 이끌었던 오펜하이머가 수소폭탄 개발은 그토록 반대한 이유는 무엇일까요. 원자폭탄과 수소폭탄은 폭발력의 기본 단위부터 다르기 때문입니다.
원자폭탄은 핵분열 반응을 이용합니다. 핵분열 반응은 방사성 동위원소가 안정적인 상태로 가기 위해 분열하는 과정입니다. 원자는 양성자, 중성자, 전자로 이뤄져 있는데, 양성자와 전자의 수는 같지만 중성자의 수는 다른 원소를 동위원소라 합니다. 이중 상태가 불안정해 방사선을 방출하며 붕괴해 더 안정한 원소로 바뀌는 동위원소를 방사성 동위원소라 하죠.
원자폭탄에 사용되는 우라늄-235, 플루토늄-239가 대표적인 방사성 동위원소입니다. 원자폭탄은 자연계 우라늄 중에서 0.7% 밖에 없는 우라늄-235를 90% 이상으로 농축해 만듭니다. 고농도 우라늄-235에 중성자를 충돌시키면 바륨, 크립톤, 스트론튬, 제논과 같은 작고 가벼운 원자핵 2개로 분열되고, 중성자를 내놓는데요, 이 과정이 분열 반응입니다. 방사성 동위원소는 분열 후 질량이 미세하게 줄어들고 줄어든 질량만큼 에너지가 발생합니다. 바로 아인슈타인의 특수상대성이론에 등장하는 ‘E=mc’이라는 식에 따른 결과입니다.
이 반응에서 나온 중성자들은 각각 주변의 우라늄-235 원자핵들과 다시 충돌하며 핵분열 반응을 일으킵니다. 이 반응에서 발생한 중성자는 또다시 주변의 우라늄-235 원자핵과 핵분열 반응을 일으키겠죠? 이런 연쇄반응이 엄청난 폭발력의 원자폭탄을 만들어내는 겁니다.
그럼 수소폭탄은 어떨까요? 수소폭탄은 핵분열과는 반대로 핵융합을 하며 에너지를 발산하는 폭탄입니다. 수소는 양성자와 전자 각각 1개로 이뤄져 있습니다. 여기에 중성자가 1개 더해지면 ‘중수소’, 중성자가 2개 더해지면 ‘삼중수소’가 됩니다. 수소폭탄은 중수소와 삼중수소가 합쳐져 헬륨이 되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에너지를 이용합니다. 핵분열과 마찬가지로 이 과정에서 하나의 중성자가 발생해 연쇄반응을 일으킵니다.
그럼 왜 핵융합 반응이 핵분열 반응에 비해 큰 에너지를 발생시키는 걸까요? 원자의 결합에너지를 핵자(양성자와 중성자) 수로 나눈 값인 ‘핵자당 결합에너지’ 때문인데요. 자연계에 존재하는 원소들 중 핵자당 결합에너지가 가장 큰 원소는 철(Fe)입니다. 가장 안정적인 핵종이죠. 때문에 다른 원소들도 철에 가까운 핵자당 결합에너지를 갖고자 합니다. 철보다 핵자의 수가 많은 원소는 분열을 하려고 하고, 핵자 수가 적은 원소는 융합을 하려고 하죠.
핵분열 반응을 대표하는 우라늄과 핵융합을 대표하는 수소를 비교해보면 핵자당 결합에너지에서 큰 차이를 보입니다. 수소가 헬륨이 되면 핵자당 결합에너지가 크게 증가하게 되는데요. 그만큼 질량 손실이 크게 발생하고, 방출하는 에너지도 커지게 됩니다. 다만 핵융합 반응을 일으키려면 그만큼 고온과 고압의 환경을 제공해야 하기 때문에 수소폭탄에는 작은 원자폭탄이 들어갑니다. 원자폭탄이 터지면서 발생하는 열과 압력이 수소 핵융합 반응의 방아쇠가 되는 것이죠.
미국은 결국 1954년 태평양 중앙에 있는 비키니 환초에서 수소폭탄 실험을 진행했습니다. 그 위력은 15Mt(메가톤은 TNT 폭약 100만 t의 위력)에 달했습니다. 원자폭탄 리틀보이가 15kt(킬로톤은 TNT 폭약 1000t의 위력), 팻맨이 21kt이었던 것에 비하면 어마어마한 폭발력이었습니다.
만약 서울에 원자폭탄이 떨어진다면
생각만으로도 끔찍하지만, 만약 100kt 규모의 핵폭탄이 서울에 떨어진다면 어떻게 될까요. 알렉스 웰러스타인 미국 스티븐스 공대 교수가 개발한 핵무기 시뮬레이션 프로그램의 결과에 따르면 낙하 지점으로부터 약 5.46km 근방까지는 창문이 깨지는 정도의 피해를 입고 3.9km 안에 있는 사람들은 3도 화상을 입을 정도로 심각한 부상이 발생할 수 있습니다.
더 심각한 건 버섯 구름에서 내리는 ‘죽음의 검은 비’입니다. 핵폭발 시 버섯 모양의 거대한 구름이 형성되는데요. 여기에는 방사능에 오염된 먼지인 방사능 낙진이 잔뜩 포함돼 있습니다. 히로시마 폭발 당시 “폭발 다음날 검은 비가 내렸다”는 증언이 다수 나왔는데요. 이 낙진에 노출되면 DNA가 손상돼 암에 걸릴 가능성이 커지는 문제가 발생합니다.
시뮬레이션에 따르면 100kt 규모의 핵폭탄이 서울에 떨어졌을 때 만들어지는 버섯 구름의 머리 직경은 10.4km, 고도는 11.8km입니다. 히로시마 때보다 훨씬 더 높고 큰 버섯 구름이 생기게 되는 것이죠.
▲ 영화 ‘오펜하이머’는 컬러와 흑백으로 촬영했으며, IMAX 흑백 필름으로 찍은 최초의 영화이다.
최초의 ‘인공태양’은 언제쯤
핵융합 기술은 무기의 관점에서는 두렵지만, 에너지 발전의 측면에서는 매우 이롭습니다. 영화 ‘아이언맨’에서 토니 스타크의 가슴에 있는 아크 리액터는 초소형 핵융합로입니다. 우리나라를 포함해 세계 여러 나라들은 핵융합 반응을 이용한 원자력 발전소를 만들기 위해 활발히 연구 중입니다. 핵융합에 사용되는 중수소, 삼중수소는 바닷물에서 쉽게 얻을 수 있고, 폭발 위험이 적기 때문에 차세대 에너지원으로 주목받고 있죠.
우리나라의 경우 ‘초전도핵융합연구장치(KSTAR)’에서 핵융합 전력 생산을 연구하고 있습니다. 한국핵융합에너지연구원은 올해 6월 핵융합 발전 실증로 설계에 착수해 2035년까지 마칠 계획입니다. 2050년대에는 상용화하는 것이 목표입니다.
핵융합이 일어나려면 1억캜 이상의 플라즈마가 반드시 필요한데, 플라즈마를 만드는 방식은 ‘토카막형’과 ‘레이저형’으로 나뉩니다. KSTAR를 포함한 많은 수의 핵융합 연구장치들은 도넛 모양 핵융합 장치에 자기장으로 플라즈마를 가두는 토카막 방식을 이용합니다. 구현하기가 상대적으로 수월하기도 하거니와, 레이저 방식은 수소폭탄을 제조하는 방식과 유사해 국제적으로 따가운 눈총을 받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레이저 방식은 수소를 압축해 넣은 작은 구슬에 레이저 광선을 집중시켜 온도를 1억℃까지 올려 핵융합 반응을 유도합니다. 지난해 12월 미국의 로렌스 리버모어 국립 연구소는 국립점화시설(NIF)에서 192개의 레이저 빔으로 투입한 에너지보다 출력되는 에너지가 더 많은 ‘순에너지’를 처음으로 얻어냈습니다. 학계에서는 이번 결과로 레이저 방식의 핵융합 연구가 탄력을 받게 될 거라 예측했습니다.
끔찍한 핵무기를 개발했지만 핵무기의 위험성을 누구보다 알리려 했던 오펜하이머. 그의 삶은 과학을 다루는 과학자의 윤리 의식과 사회적 책임이 얼마나 무거운지를 여실히 보여줍니다. 과학기술 수준이 곧 국가 경쟁력이 된 지금, 이 영화가 던지는 메시지를 우리는 무겁게 받아들여야 할 겁니다.
최지원
과학동아와 한국경제신문을 거쳐 현재 동아일보에서 과학기자로 활동하고 있다. 과학동아의 열혈 독자다. jwchoi@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