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9년 개봉해 엄청난 흥행을 했던 영화 ‘매트릭스’에서는 아이들이 인공자궁과 같은 인큐베이터에서 배양돼 자라는 장면이 나옵니다. 당시에는 공상과학 정도로만 여겨졌지만, 오늘날 생명과학 기술 수준이라면 충분히 현실이 되고도 남을 일이죠. 실험실에서 배아와 조직을 배양할 수 있고 인공배아나 인공장기를 만드는 기술도 나날이 발전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지난 1월호부터 우리는 인간의 몸 밖에서 배아를 착상・분화시키는 기술, 장기를 만들고 조립하는 연구에 대해 얘기했습니다. 그 대미를 장식할 이번 글에서는 체외 수정된 인간배아와 인공자궁의 조합을 넘어서, 인공으로 합성된 배아와 인공자궁 조합의 가능성을 알아보고자 합니다.
진정한 인공배아의 조건
직전 5월호에서 소개한 어셈블로이드는 여러 종류의 조직을 엮어 만든, 조직간 상호작용과 기능을 이해하기에 좋은 모델입니다. 하지만 다양한 조직이 자연스럽게 생성된 것이 아니고 강제로 붙여 놓은 모델이라는 점에서 한계가 있었습니다. 우리 몸속의 세포는 꽤 유연해서 자신의 본업(?)이 아니어도 자신을 필요로 하는 역할이 있다면 어느 정도 변환이 가능합니다. 예를 들어 필자는 앞으로도 계속 생명과학을 연구하고 싶지만, 세상에 저희 가족만 남게 된다면 살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집을 짓고 밭을 갈 겁니다. 하지만 그렇게 만든 집이 목수나 건설사가 지은 집보다 안락할 수는 없습니다.
이처럼 자연스러운 발생 과정을 거친 조직과 강제로 엮어 만든 조직의 차이는 존재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는 조금 더 이른 시기의 배아에서 자연스러운 배아 발달을 유도할 모델이 필요하다는 것을 뜻합니다. 수정란이 세포분열한 배반포를 모사한 ‘블라스토이드’(2월호)와, 자궁 착상 직후의 세포를 모방한 ‘가스트룰로이드’(3월호)는 조직의 모양 및 기능적인 분화가 정교하지 않아 실제 배아 발달을 흉내 내기엔 부족한 점이 많습니다.
다음 세대는 인공배아를 제작해 낼 겁니다. 진정한 인공배아가 되려면, 그것이 세포의 자연스러운 상호작용을 통해 조직을 만들고, 나아가 다양한 조직의 상호작용을 통해 기관을 만들어 내도록 하는 게 관건입니다. 현재로선 블라스토이드와 가스트룰로이드에서 자연스러운 세포, 조직 간의 상호작용을 유도하는 것이 바로 인공배아 제작의 첫걸음이 될 것이라 예상합니다.
인공배아를 만드는 연구는 2018년 시작된 이래 빠른 속도로 진행되고 있습니다. 2023년 4월, 중국과학원 연구팀은 원숭이의 인공배아를 만들어 대리모 원숭이에게 착상시키는 것까지 성공했습니다. doi: 10.1016/j.stem.2023.03.009 영장류의 인공배아를 연구하는 것은 인간의 인공배아를 연구하는 것에 비해 윤리적으로 자유롭기에 가능했던 거죠. 지금 같은 발전 속도라면 조만간 전 세계가 깜짝 놀랄 만한 연구 성과가 나올지도 모르겠습니다.
난자, 정자 없이도 인공배아 만들어
2022년 8월, 이스라엘 와이즈만연구소 연구팀은 쥐 줄기세포를 뭉친 후 회전 배양기 등을 이용해 심장이 뛰는 쥐 배아를 만들어냈습니다. doi: 10.1016/j.cell.2022.07.028 연구팀은 난자도, 정자도 없이 줄기세포만으로 인공배아를 만들었습니다. 이렇게 만들어진 결과물은 블라스토이드도 가스트룰로이드도 아닌 ‘ETX복합체’였습니다. ETX는 배아줄기세포(Embryonic stem cell)-영양막줄기세포(Trophoblast stem cell)-원시내배엽 유래세포(XEN cell・PrE derivatives)의 합성어입니다.
블라스토이드와 오가노이드를 포함한 대부분의 체외배양 모델은 세포를 임의로 배치해 조합하기보다는 줄기세포가 스스로 자리 잡고 분화하게 하는 ‘자기 조직화(self-organization)’를 유도합니다. 인위적으로 조립된 배아모델은 불안정해 붕괴할 위험이 크기 때문에 자기 조직화를 통해 최대한 안정적인 구조를 얻기 위함입니다.
ETX 복합체 역시도 자기 조직화로 만들어졌습니다. 하지만 ETX 복합체는 초기 배아 구조를 그대로 모방하지 못했다는 치명적인 단점이 있습니다. 착상 전 배반포는 영양막줄기세포가 실제 배아가 될 배아줄기세포와 원시내배엽을 둥글게 감싸 보호하며 자궁 착상과 태반 제작을 유도하는데 반해, ETX 복합체는 배아줄기세포와 영양막줄기세포가 나란히 붙어있고 그 외부를 원시내배엽이 둘러싸고 있어 자궁 착상 및 태반 형성이 불가능합니다. ETX 복합체의 본래 제작 목표가 초기 배아를 모델링하는 것이었다는 점을 감안하면 모순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럼에도 이스라엘 연구팀은 이런 ETX 복합체를 심장과 체절을 가진 쥐 배아로 발달시킴으로써, 자연스러운 초기 배아 발달 과정을 생략하고도 생명체를 제작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보여줬습니다.
인공자궁, 착상 실험하기엔 충분한 수준
2018년 쥐 블라스토이드를 최초로 제작한 니콜라 리브롱 연구소팀을 비롯해 여러 생명공학 연구팀은 2021년 인간 블라스토이드를 만드는 데에도 성공했습니다. 하지만 인간 블라스토이드가 자궁에 제대로 착상하는지 시험하기 위해 인간을 대리모로 사용하는 것은 윤리적으로 불가능하기에, 과학자들은 인간 자궁내막 오가노이드를 활용하고자 했습니다.
인간 자궁내막 오가노이드는 2017년 처음 만들어졌습니다. 이후 무수한 발전 끝에 오늘날엔 자궁내막의 10여 가지 세포 유형 중 필수적인 두세 가지 유형의 세포를 몸 밖에서 배양할 수 있게 됐습니다. 이렇게 만든 인간 자궁내막 오가노이드로 배아를 오랜 시간 배양할 수는 없지만, 인간 블라스토이드가 자궁에 잘 착상할 수 있는지 실험하기엔 충분한 수준입니다. 실제로 인간 블라스토이드가 착상을 마친 인간 자궁내막 오가노이드는 임신이 성공한 것처럼 임신테스트기에 양성 반응을 보이기도 했습니다. 이것이 더욱 발전하면 가까운 미래에는 인공자궁이 만들어질 수도 있지 않을까요?
인간을 만들 수 있는 세상이 온다면
1978년, 시험관 아기 탄생은 신의 영역으로 여겨진 생명의 탄생에 과학을 개입시켰습니다. 여기서 한 단계 나아가 인공 생명체를 합성한다는 것은 과학계에 큰 메시지를 던질 뿐만 아니라 종교와 철학의 영역에까지 영향을 줄 수 있습니다. 인간의 문화는 종교와 철학을 통해 발전하므로, 인공생명체를 합성하는 것이 가능해졌을 때 인류가 어떤 문화와 사고방식을 가지게 될지 기대가 됩니다. 기술의 발전에 따른 생명윤리적 문제에 대한 논의도 반드시 이뤄져야 하겠습니다.
블라스토이드 연구는 기본적으로 착상 전후 배아 발달에 관한 학문입니다. 불임, 난임으로 고통받는 많은 사람들에게 착상의 효율을 높이고, 태아의 안전한 발달을 돕는 등 많은 부분에서 도움을 줄 수 있을 것으로 예상됩니다. 오가노이드 기술 역시도 손상된 조직을 재생시키고 환자 맞춤형 항암 치료를 가능케 하는 등 의학 제반에 큰 영향을 끼칠 겁니다.
물론 이 모든 것은 예상과 바람일 뿐 결정된 건 없습니다. 생명 탄생의 비밀을 밝혀내는 꿈을 현실로 만들어 낼 수 있는 원동력은 미래세대의 관심과 노력에 달려 있습니다. 현세대가 아직 이루지 못한 그 꿈을 그들 손으로 꼭 이룰 수 있길 바라며, ‘실험실에서 온 생명체’ 연재를 마칩니다.
※ 편집자 주
이번 호를 마지막으로 ‘실험실에서 온 생명체’ 연재를 마칩니다. 애독해 주신 독자 여러분께 감사드립니다.
성진우
서울대 생명과학부에서 포유류 임신 시 유선줄기세포 발달과 유방암을 연구해 박사학위를 받았다. 이후 오스트리아 분자생명공학연구소(IMBA)에서 줄기세포를 이용한 포유류 배아의 인공 제작 및 합성을 연구하고 있다. jinwoo.seong@imba.oeaw.ac.at / sjw11071@gmail.com
염민규
서울대 생명과학부에서 성체줄기세포와 대장암을 연구해 박사학위를 받고, 영국 케임브리지대 줄기세포연구소에서 유전학적 생쥐 모델과 수학적 모델링을 접목해 줄기세포 간의 경쟁 과정을 연구했다. 현재는 KAIST 의과학대학원에서 줄기세포 조절 이상에 의해 발생하는 질병에 대해 연구하고 있다. minkyu.yum@kaist.ac.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