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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달의 책] 공백과 예상을 뛰어넘는 한국의 판타지

크리처스 2 신라괴물해적전: 장인편 下

크리처스 2 신라괴물해적전: 장인편 下

곽재식·정은경 지음│안병현 그림 아르테│144쪽│1만 3000원

 

경주에 가서 분황사의 모전석탑을 마냥 바라본 날이 있었다. 돌을 깎아서 벽돌을 쌓은 전탑을 모방했던 신라 사람들의 노고가 아직도 그 돌덩이 위의 선들로 고스란히 남아 있다는 사실이 새삼 경이로웠다.

 

그런가 하면 그 시절을 상기시키는 것이 단지 어렴풋한 흔적뿐이어서, 이런 탑까지 만들어냈던 사람들의 삶의 하루하루를 지금 떠올리기에는 현재와 과거 사이의 공백이 너무 크다는 사실도 절감했다. 그 신라의 서라벌 시절에 이 땅에 살았던 사람들이 어떤 이들이었는지 파악할 단서가 지금 우리에게 너무나 부족하기 때문이다. 신라 시대 평범한 사람들의 삶을 가장 잘 보여주는 기록인 신라민정문서가 이미 아주 오래전에 한반도를 벗어나 일본 왕실의 유물창고에 깊이 보관돼 있다는 사실까지 생각해 보면 이런 한계는 더 크게 다가오기도 한다.

 

하지만 단점이 있으면 장점도 있는 법. 이 해적 이야기야말로, 지금 한국에 남은 신라의 흔적이 얼마나 또렷해질 수 있는지 보여준다. 유물과 기록의 공백을 뛰어넘는 상상력을 이 흥미진진한 모험에서 확인할 수 있다.

 

신라 시대에 덕담가를 꿈꾼 주인공 소년 소소생, 신뢰가 있어야 사기도 가능하다고 뻔뻔스레 내세우는 해적 철불가의 모험은 신라에 대한 그동안의 딱딱한 고정관념을 완전히 벗어났다. 특히 이 작품의 중심에 있는 것이 단순히 재물을 뺏고 뺏기는 해적과 소년의 탐험만은 아니라는 사실도 이야기를 읽어나가는 흥미를 더한다.

 

이 작품의 한복판에서는 거대 생명체인 장인(長人, 한자 그대로 길다란 인간)과 소소생, 철불가 사이의 의외의 교감과 소동이 펼쳐진다. 생각해 보면 장인과 같은 괴생명체와 주인공이 싸우거나 누군가를 구출해 내는 식의 전래동화는 어릴 때 읽었던 기억이 있다. 하지만 이 작품처럼 체구가 사람의 몇 배나 되는 ‘괴물’과 주인공이 서로 마음을 나누는 이야기는 보지 못했던 것 같다.

 

게다가 이 장인과 소소생, 철불가의 관계는 뻔한 감동이나 교훈을 강요하지도 않는다. 장인처럼 낯선 존재를 대하는 사람들의 태도는 늘 비슷하다는 사실을 독자 스스로 돌아보게 할 뿐이다.

 

이 이야기는 한국형 판타지라고 부르기에 적절하지만, 단지 우리에게 익숙한 한국 역사가 배경이어서만은 아니다. 등장인물들이 처한 상황, 그들의 반응과 같은 핵심 요소들이 지금 한국에 사는 사람들에게 친근하게 다가오는 까닭에 가장 한국적인 판타지라고 말할 수 있다.

 

그렇다고 이야기가 식상하다는 의미는 전혀 아니다. 작가가 지금 독자에게 말하는 정서와 상황의 의미가 아주 선명하게 보이는 덕분에 지금 한국의 청소년들이야말로 이 모험의 물결에 가장 신나게 올라탈 수 있을 것이다.

 

 

이 책의 방점은 ‘보이지 않아도’보다는 ‘존재하고 있습니다’에 찍혀 있다. 나와 세계를 연결하고 있지만 내 눈에는 잘 보이지 않는 여러 존재의 의미와 가치를 다시금 생각하게 만드는 글들이 이 책에 모여 있어서다.

 

방 안에 먼지가 있어도 커튼 사이로 빛이 들기 전엔 그 존재를 알지 못한다. 이런 티끌은 당장 눈에 보이지 않아도 큰 의미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여기서 저자는 이 먼지를 비추는 빛과 그 빛이 스며든 틈새로 시선을 옮긴다. 그는 눈에 보이는 티끌보다 더 작은 입자들이 존재해야만 우리가 빛을 볼 수 있음을 상기한다. 보이지 않는 입자들이 있기에 빛과 먼지를 함께 볼 수 있음을 되새기는 이 사유를 따라가다 보면, 보이지 않는 것들의 존재와 인간의 삶이 떨어질 수 없음을 자연스레 받아들이게 된다.

 

눈에 보이지 않는 존재들이 눈에 보이는 나와 깊은 관계를 맺는다는 성찰은 마치 문학 작품의 한 구절처럼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저자의 설명 방식은 매우 과학적이다. 그는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워했다”라는 윤동주의 시구에서 외부의 작은 자극에 얼마나 크게 반응하는지 측정하는 통계물리학의 감수율(susceptibility)을 떠올리고, 사회의 작은 변화에도 민감하게 반응하는 개인들이 모여서 역사의 흐름이 바뀐다는 통찰에 이른다.

 

과학 중에서도 물리학은 입자, 힘의 상호작용처럼 눈에 보이지 않지만 세계를 구성하는 물질과 역학관계를 탐구한다. 모든 물질을 이루는 원자, 입자와 반입자의 생성-소멸이 반복되는 진공처럼 이전엔 보이지 않던 존재를 물리학의 렌즈가 포착하는 경우가 많았다.

 

저자는 이 렌즈로 우리가 놓친 일상의 의미를 읽는다. 원점과 좌표가 멀어지면 상관관계는 낮아진다는 사실에서, 이젠 원점에서 멀어진 사람이 아직도 원점을 기준으로 현재 좌표를 읽는 것이 바로 ‘꼰대’라고 말할 때 이 책은 물리학의 렌즈로 한국 사회의 입자를 관찰한 셈이다.

 

 

2023년 01월 과학동아 정보

  • 라헌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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