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월 7일 찾은 속초 영랑호 산책로와 맞닿은 언덕에는 무릎 높이 정도로 자란 묘목이 듬성듬성 심겨 있었다. 마치 사막 위에 자란 것처럼 나무는 메마른 땅 위로 작은 가지를 뻗어내고 있었다. 이곳은 불과 수년 전만 해도 산책로를 둘러싼 아름드리 소나무 숲이 호수와 어우러진 경치에 관광객들이 몰리던 곳이었다. 하지만 이제 그 모습은 없다. 2019년 4월 강원 고성에서 시작해 속초까지 덮친 산불 때문이다. 당시 산불은 약 12시간 만에 약 1200ha(헥타르·1ha는 1만 m2), 축구장 1700개 넓이에 이르는 숲을 태웠다.
산불이 이렇게 번진 데에는 강풍과 함께 기후변화로 인한 가뭄의 영향이 컸다. 예전 같았으면 이따금 내렸을 눈과 비에 젖은 땅이 불길이 퍼지는 것을 막았겠지만, 이제는 기후변화로 인해 강수량이 여름 장마철에 집중돼 겨울과 봄철에는 어김없이 가뭄이 든다. 여기에 강풍이 더해지면 산불은 더 크고 사납게 타오른다. 기상청에 따르면 2020년 여름철 강수량은 이전 10년 대비 154.8%를 기록했다. 하지만 겨울과 봄 강수량은 각각 50.6%와 72.9%로 오히려 감소했다. 여름철로 강수가 집중됐고, 겨울과 봄철 가뭄은 심해진 것이다. 동시에 산불도 증가했다. 산림청에 따르면 같은 기간 산불 발생 건수는 131%, 피해 면적은 261%로 늘었다.
산책로를 따라 드문드문 자리한 밭에서도 가뭄의 심각성을 느낄 수 있었다. 인근에서 밭을 일구던 한영순 씨는 “해가 갈수록 가뭄이 심해져 최근에는 봄철 작물 수확에 대한 기대가 거의 없다”며 “올해도 마찬가지겠지만, 소일거리 삼아 나왔다”고 말했다. 한 씨가 밭의 흙을 한 움큼 쥐었다가 놓자 마치 백사장 모래처럼 흩날렸다. 한눈에 봐도 오랜 가뭄으로 바싹 말라 있었다.
이곳을 순찰하던 한 산불감시원은 “최근 산불 위험이 커져 관광객의 출입을 제한하고 있다”며 “아직 작지만, 이렇게 자라는 데 2년이 꼬박 걸렸다. 또다시 산불이 난다면 그간의 노력이 모두 헛수고가 될 수 있다”고 말했다.
전문가들은 불에 완전히 탄 숲이 자연적으로 원래 모습을 되찾기까지 20년 이상 걸릴 것으로 보고 있다. 생태계까지 회복되려면 그보다 훨씬 오랜 시간이 필요하다. 속초시청 관계자는 “속초의 자연환경을 산불 이전의 모습으로 돌리기 위해 꾸준히 관리하고 보호할 것”이라고 말했다.
산불이 빼앗아 간 것은 숲 생태계뿐만이 아니다. 영랑호 인근 주택가에서는 여전히 화재의 흔적을 담은 건물을 심심치 않게 찾아볼 수 있다. 이곳을 삶의 터전으로 삼던 주민 중 일부는 산불에 등 떠밀려 떠나 여전히 돌아오지 못하고 있다. 기후변화가 지나간 곳에 남은 것은 황량한 숲과 삶의 흔적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