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자컴퓨터를 현실화하는 일은 결코 쉽지 않다. 양자컴퓨터는 0과 1중 어느 하나로 확정되지 않는 정보를 가진 ‘큐비트’로 정보를 처리하는데, 지금까지 개발된 양자컴퓨터의 성능은 수십 큐비트 수준에 머물러 있다. 게다가 정보를 처리하거나 통신하는 과정에서 일어나는 정보 손실을 정량화하는 ‘신뢰도’를 정확히 측정할 방법도 없다.
기초과학연구원(IBS) 강상관계 물질 연구단팀은 이를 극복할 수 있는 ‘양자 거리’ 측정법을 세계 최초로 고안해냈다. 양자 거리는 두 양자 상태의 차이를 나타낸다. 두 양자 상태의 파동함수가 같으면 양자 거리가 0, 파동함수가 직교(서로 수직으로 교차)하면 양자 거리가 1이다. 정보처리 과정에서 양자 거리가 변하면 신뢰도가 떨어지기 때문에 양자 거리는 양자컴퓨터의 신뢰도를 판단하는 중요한 기준이 된다.
역사적으로 소외된 양자 거리 연구
원자의 구조를 이야기할 때 사람들은 흔히 양전하를 띤 양성자 주변을 전자들이 원형 궤도로 돌고 있는 모습을 떠올린다. 그러나 양자역학에서 전자는 그리 단순하게 운동하지 않는다. 전자는 파동의 형태로 넓은 공간에 퍼져서 존재한다. 따라서 전자의 상태를 파악하려면 전자의 파동함수 모양부터 알아야 한다.
전자의 파동함수를 운동량과 그에 따른 에너지로 3차원 좌표에 표시하면 고깔, 고리, 구와 같은 다양한 입체 구조를 나타낸다. 이 입체 구조는 다시 곡률과 양자 거리 두 가지 특성으로 정의할 수 있으며 이들은 고체 물질의 물성을 결정한다.
파동함수의 곡률은 이 개념을 1980년 처음 제시한 영국의 수학물리학자 마이클 베리의 이름을 따서 ‘베리 곡률’이라고 불리며 지금까지 활발히 연구돼왔다. IBS 강상관계 물질 연구단에서 양자 거리 측정 연구를 이끈 양범정 서울대 물리천문학부 교수는 “베리 곡률은 전기 분극이나 홀 효과(Hall effect) 등 물질의 일부 물성에 직접적인 영향을 준다”며 “베리 곡률과 물질의 물성 사이의 관계는 수학적으로 깔끔하게 확립돼 있다”고 설명했다.
이와 대조적으로 양자 거리와 관련된 연구는 많지 않다. 과학자들은 양자 거리가 고체의 물성을 결정하는 데 기여할 것이라 추측하면서도, 양자 거리를 측정할 방법이 없다고 생각해왔다.
에너지 퍼짐 현상에서 아이디어를 얻다
양 교수팀은 고체의 에너지띠에 주목했다. 고체의 에너지띠란 물질 내에 존재하는 수많은 전자의 파동함수가 지니는 운동량과 에너지 사이의 관계를 말한다. 운동량에 상관없이 에너지가 일정하면 ‘평평한 에너지띠’, 운동량에 따라 에너지가 변하면 ‘곡선 에너지띠’라고 부른다. 일반적으로 고체는 수많은 에너지띠들이 복잡하게 얽혀있다.
이 중 양 교수팀의 눈길을 끈 건 평평한 에너지띠와 곡선 에너지띠가 만나는 구조였다. 많은 고체가 이 구조를 지니고 있었다. 선행 연구에 따르면 평평한 에너지띠와 곡선 에너지띠가 만나는 점에서의 파동함수는 평평한 에너지띠의 성질을 좌우했다. 이는 곧 평평한 에너지띠의 특징을 알아내면 우리가 모르고 있던 파동함수의 특성도 알아낼 수 있다는 뜻이다.
양 교수팀은 평평한 에너지띠를 갖는 고체에 수직으로 자기장을 거는 상황을 시뮬레이션 했다. 그 결과, 운동량에 상관없이 에너지가 일정한 평평한 에너지띠를 갖는 전자의 에너지 준위가 여러 영역으로 퍼지는 현상을 발견했다.
이때 퍼지는 정도를 결정하는 것이 바로 양자 거리였다. 양자 거리가 0인 물질에서는 에너지 퍼짐이 없었으며, 양자 거리가 큰 물질일수록 에너지 퍼짐 정도가 컸다. 이번 연구는 국제학술지 ‘네이처’ 8월 5일자에 실렸다. doi: 10.1038/s41586-020-2540-1
전자의 에너지 준위 퍼짐 현상은 실험적으로도 관측 가능하다. 이는 곧 양자 거리를 실험을 통해 측정할 수 있다는 뜻이다. 양 교수는 “현실 세계에 완벽히 평평한 에너지띠는 존재하지 않고, 에너지 퍼짐 정도의 차이도 아주 미세하다”며 “양자 거리를 실제로 측정하기 위해서는 평평한 에너지띠에 가까운 에너지띠 구조를 가진 물질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연구팀은 변형된 구조의 그래핀이나 카고메 격자 물질 등을 그 후보로 꼽았다. 판 구조인 그래핀은 시뮬레이션에서 가정한 2차원 고체와 유사하고, 그래핀을 구성하는 탄소 원자는 에너지 퍼짐 정도로 양자 거리를 유추하는 계산에서 오차가 발생할 확률이 적다.
“양자 거리, 실험으로 측정해낼 것”
에너지 퍼짐 현상 연구가 양자 거리 연구로 이어질 것이라는 건 연구팀 중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다. 기존 이론에 따르면 평평한 에너지띠를 가진 고체에 자기장을 걸어도 운동량에 따른 에너지 준위 변화가 없는 평평한 에너지띠를 계속 유지해야 했다. 이를 뒤집는 결과였기에, 연구팀은 에너지 퍼짐 현상을 발견하곤 더욱 엄밀하게 이론 검증을 했다.
양 교수는 “이론 물리학자들은 자신이 계산한 결과가 맞는지 확신하기 위해 여러 방법으로 증명 과정을 거친다”며 “시뮬레이션 결과를 기하학적인 관점에서 이해하려고 시도하는 과정에서 양자 거리로 설명할 수 있음을 알게 됐다”고 말했다.
연구팀은 앞으로 양자 거리를 측정할 수 있는 고체, 즉 평평한 에너지띠에 가까운 고체를 찾아내 양자 거리를 실험으로 측정할 계획이다. 양 교수는 “양자컴퓨터의 신뢰도를 정량화할 수 있도록 양자 거리를 측정할 수 있는 물질을 제시하고 실험으로 이어질 수 있도록 노력할 것”이라고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