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보통난이도 | 아시안 게놈 분석
지난해 12월 국제학술지 ‘네이처’에 아시아의 64개 국가, 219개 민족, 1739명의 유전자를 분석한 연구 결과가 게재됐다. 현재까지 아시아인을 대상으로 한 가장 광범위한 유전자 분석으로 ‘아시아 최초의 종합 유전자 지도’로 불리고 있다. 이 연구 결과가 아시아인들에게, 또 우리에게 어떤 변화를 가져올지 ‘게놈아시아 100K’ 프로젝트를 주도한 김혜림 싱가포르 난양공대 교수에게 들었다.
2016년 난양공대에서 인간 게놈(유전체)에 관한 연구를 함께 해온 스테판 슈스터 교수로부터 ‘게놈아시아 100K (GenomeAsia 100K)’ 프로젝트를 함께 시작해보자는 제안을 받았을 때 나도 모르게 가슴이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집단 유전학(Population Genetics)을 연구하는 과학자로서 10만 명이나 되는 아시아인의 게놈 데이터를 분석할 수 있다는 것은 꿈만 같은 이야기였기 때문이다.
인간 게놈 연구의 원조는 1990년에 시작된 ‘인간 게놈 프로젝트(HGP·Human Genome Project)’다. 당시 HGP는 인간의 게놈 서열을 처음으로 분석했는데, 총 13년에 걸쳐 당시 3조 원에 이르는 대규모 예산이 투입됐다.
이를 통해 게놈 분석 기술이 급성장했고, 그 결과 30년이 지난 지금 한 사람의 게놈 데이터를 생산하고 결과를 분석하는 데 불과 하루면 충분하게 됐다. 비용도 100만 원이 채 들지 않는다.
게놈 분석에 드는 비용은 점점 낮아지고 있어서 많은 나라가 자국민의 유전정보를 분석하기 위해 집단 게놈 프로젝트를 실행하고 있다. 국민의 게놈을 분석해 유전자 표준을 도출해내는 것이다. 대표적으로 영국은 이미 2018년 12월 10만 명의 게놈 데이터를 생산한 데 이어, 최근에는 이 게놈 데이터를 활용해 태어나는 모든 신생아의 유전병을 검사할 계획이라고 발표하기도 했다.
219개 민족, 총 1739명 게놈 데이터 분석
필자는 한국에서 태어나 대학을 다니고, 일본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뒤 미국을 거쳐 2014년 난양공대에 왔다. 싱가포르 생활을 시작하면서 가장 놀란 점은 아시아 인종의 다양성이었다. 미국에서도 다양한 인종을 접했지만, 아시아인이라고 하면 대부분 외형으로는 구분이 어려운 중국, 일본, 한국인이었다.
하지만 동남아시아에서 접한 인종의 다양성은 차원이 달랐다. 아시아가 유전적으로 얼마나 다양성이 높은지, 그리고 그동안 인류 유전학에서 아시아가 얼마나 소외됐는지 새삼 깨달았다.
작년에 발표된 보고에 의하면, 지금까지 발표된 유전 질환 관련 연구에 포함된 아시아인의 비율은 10% 정도밖에 되지 않으며, 대부분이 유럽인을 대상으로 한 연구였음이 밝혀졌다(위 그림). doi: 10.1016/j.cell.2019.02.048
특정 민족이나 집단을 대상으로 진행한 유전 질환이나 약물 개발 연구를 다른 민족에게 적용하면 재현되지 않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이는 인간 게놈에 개인 혹은 민족 간의 차이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필자는 아시아인의 게놈을 분석해 민족 간에 어떤 차이가 있는지, 또 각 민족은 어떤 유전적 특성이 있는지에 관한 연구가 시급하다고 생각하던 터였다.
게놈아시아 100K 프로젝트는 인류의 반을 차지하고 있는 아시아의 가능한 모든 민족으로부터 총 10만 명의 게놈 데이터를 생산해 데이터베이스를 구축하고, 이를 연구자들과 공유하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다.
아시아 내 다양한 인종의 DNA 샘플을 모으기 위해 여러 나라의 수많은 인류학자, 유전학자, 의사들과 소통했다. 그들은 평생 수집해 온 샘플을 이 프로젝트를 위해 기꺼이 보내 줬다. 그중에는 이젠 수백여 명밖에 남지 않은 옹게(Onge), 자라와(Jarawa)인의 샘플이나, 말레이시아와 필리핀에 사는 소수민족들의 샘플도 포함돼 있었다.
이런 데이터의 가치와 연구의 중요성을 인정받아 마침내 3년 만에 첫 성과가 나왔다. 2019년 12월 국제학술지 ‘네이처’에 게재된 논문이 그 결과물이다. doi: 10.1038/s41586-019-1793-z
이번 논문에서는 219개 민족에서 수집한 총 1739명의 게놈 데이터를 분석했다. 그 결과, 유럽인은 하나의 공통 조상 집단을 갖는 데 비해, 아시아인은 10개 이상의 공통 조상 집단이 있다는 결과를 얻을 수 있었다.
물론 모든 인류는 궁극적으로는 아프리카에 존재했던 하나의 공통 조상에서 뻗어 나온 것으로 추정된다. 아프리카를 떠난 일부 집단은 전 세계로 이주해 방대하고 다양한 환경의 아시아에 정착했다. 이 긴 역사의 과정에서 유전적으로 집단이 분화하는 과정을 거쳐 각 집단마다 고유의 유전적 특성을 형성한 결과 다양한 조상 집단을 가지게 됐다.
이는 지금까지는 단순히 ‘아시아인’이라는 하나의 집단으로 정의됐던 사람들이 사실은 10가지가 넘는 이름을 가져야 마땅하다는 뜻이기도 하다. 그동안 인류 유전학이 얼마나 편향적으로 연구됐는지, 그리고 기존에 유럽인을 대상으로 개발된 약물이 전 인류를 대상으로 쓰이고 있다는 사실이 언뜻 무섭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아시아인의 다양성은 컸다.
아시아인의 공통 조상 분석
게놈아시아 100K에서 분석한 아시아인의 게놈 분석 결과(위)와 김혜림 교수와 서울대병원, 마크로젠이 분석한 동북아시아인의 게놈 분석 결과(아래). 각각의 색깔은 서로 다른 공통 조상들을 의미하며, 영역의 넓이는 해당 공통 조상의 비중을 의미한다.
위 그림에서 동북아시아인은 동북아시아에서 유래한 게놈(연두색)과 몽골 유래 게놈(진한 녹색)의 비중이 큰 것을 알 수 있다. 동북아시아인은 다른 아시아인에 비해 상대적으로 일치된 공통 조상을 가지는 셈이다.
다만 아래 그림에서 동북아시아인을 더 세분화해서 보면 한국, 몽골, 중국, 일본인도 제각기 다른 유전체 구성을 갖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인종별, 국가별로 더 세분화된 게놈 분석이 필요한 이유다.
한국인, 와파린 부작용 유전 요인 높아
병원이나 약국에서 약을 처방받을 때 흔히 듣는 질문이 하나 있다.
“약물 알레르기가 있습니까?”
필자가 세상에서 가장 싫어하는 질문이다. 엄밀하게 말해서 그 약을 먹어보기 전까지는 본인이 알레르기 반응이 있을지 없을지 알 수 없다. 누구나 가지고 태어난 유전 변이에 따라서 약물 알레르기 반응을 보일 수 있다. 약물과 그 반응의 정도에 따라 가볍게 지나갈 수도 있지만, 때로는 쇼크가 와서 빨리 제대로 된 처치를 받지 못하는 경우에는 목숨이 위험해질 수도 있다.
약을 먹기 전에 알레르기가 있는지 알 수 있는 궁극적인 방법은, 모든 사람의 게놈을 해독해 알레르기를 유발하는 유전적 요인이 있는지 미리 알아보는 것이다. 약물 알레르기 반응을 유발하지만 아직 밝혀지지 않은 유전자가 있을 수도 있다는 점까지 고려하면 그조차도 완벽한 방법은 아니지만, 적어도 알려진 유전자에 관해서는 예방할 수 있다.
필자는 모든 사람이 자신의 게놈 정보를 알게 되는 날이 머지않은 미래에 가능할 것이라고 믿고 있다. 하지만 인류의 모든 사람이 본인의 게놈을 해독하기에는 그 비용이 만만치 않고, 그 많은 데이터를 처리하기에는 여러모로 아직은 조금 이르다고 생각한다. 그날이 올 때까지 게놈아시아 100K의 데이터베이스를 토대로 게놈 데이터에서 발견된 유전 변이의 빈도를 집단별로 공개해 민족마다 유전적 특성을 예측할 수 있도록 이바지할 계획이다.
예를 들어, 게놈아시아 100K 데이터를 분석한 결과 한국, 일본, 중국인은 와파린 부작용을 일으키는 유전 요인의 빈도가 다른 민족에 비해서 높았다. 현재 널리 사용되고 있는 와파린이라는 항응고제에 유전적 요인으로 부작용이 나타나는 사람은 출혈이 지속된다.
와파린의 경우 약물 효과를 측정하는 방법이 비교적 정확해 부작용을 쉽게 인지할 수 있는 편이지만, 자칫 그렇지 못한 경우는 위험할 수 있다. 유전자 변이의 빈도에 근거한 예측이기 때문에 한국, 일본 중국인 중 실제로 많은 사람이 부작용을 일으킬 가능성이 크다고 단정 지을 수는 없으나, 최소한 의사들이 약물을 처방할 때 조금 더 주의를 기울일 수는 있다.
게놈아시아 100K 프로젝트는 끝나지 않았다. 지금도 전 세계 많은 연구자의 노력으로 진행되고 있다. 특히 쉽게 만날 수 없는 부족들을 찾아 떠나는 힘든 여정을 통해 어렵게 수집한 샘플을 제공해준 많은 인류학자, 유전학자, 의사들의 공헌이 지대하다. 물론 연구를 위해 기꺼이 본인의 혈액이나 타액 샘플을 제공해준 이들에게도 이번 기회를 통해 감사하다는 말을 전한다.
그리고 개인적으로 뿌듯하게 생각하는 것은, 필자는 싱가포르에 있는 대학에서 연구하고 있지만, 한국 기업인 마크로젠과 서울대 등 한국 연구진과 협업을 하고 있으며, 그들과 함께 한국인을 포함한 아시아인에 관한 연구를 하고 있다는 점이다. 말 그대로 아시아인의, 아시아인에 의한, 아시아인을 위한 연구다.
오늘 아침, 세 살 딸 아이가 난생처음으로 자기 손으로 옷에 단추를 하나 채워서 함께 손뼉을 치며 기뻐했다. 게놈아시아 100K 프로젝트도 필자의 딸처럼 이제 겨우 첫 단추를 끼웠을 뿐이다. 아시아인 게놈 연구가 좀 더 관심을 받고 확장될 수 있도록 노력하겠다고 다시 한번 다짐한다.
김혜림
싱가포르 난양공대 교수로 재직 중이며, 인간 게놈 데이터를 이용한 집단 유전학을 연구하고 있다. 게놈에 남겨진 변화의 흔적을 찾아 인간의 진화 과정과 역사를 추적한다. 과거의 역사가 현재 인류의 유전적 특성을 결정짓기 때문이다. 본인을 ‘조상 찾기의 달인’으로 표현한다. HLKIM@ntu.edu.s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