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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라딘’의 파란 피부 지니는 청색증 환자?

 

미국 로드아일랜드주 프로비던스 지역. 한 25세 여성이 호흡 곤란을 일으켜 응급실에 실려 왔다. 의료진은 혈중 산소포화도를 확인하기 위해 황급히 채혈부터 진행했다. 이때 피를 뽑던 의료진은 놀라지 않을 수 없었는데. 그의 피가…, 파랬다.

 

인간의 피는 빨갛다. SF영화에서 종종 지구 밖 외계 종족의 피가 초록색이나 파란색으로 묘사되는 경우가 있기는 하지만, 지구인의 피는 영화에서든 현실에서든 늘 붉다. 그렇다면 이 환자는 설마 외계인?

 

파란 피의 환자를 진료한 오티스 워렌, 벤자민 블랙우드 미리암병원 응급의학과 전문의들은 의학계 최고의 저널로 꼽히는 ‘뉴잉글랜드저널오브메디신(NEJM)’ 9월 19일자에 ‘후천적 메트헤모글로빈혈증(Acquired Methemoglobinemia)’이라는 제목으로 이 환자의 증상과 혈액 색깔에 대한 분석 결과를 발표했다. doi: 10.1056/NEJMicm1816026 


정상인은 분당 평균 12~20회 호흡하고, 혈중 산소포화도가 95% 이상이다. 그런데 이 환자의 호흡은 분당 평균 22회로 정상인보다 빨랐고, 혈중 산소포화도는 88%까지 떨어진 상태였다. 혈중 산소포화도가 90% 아래로 떨어지면 저산소증으로 호흡이 곤란해져 위험하다. 의료진은 급히 산소를 공급했지만 혈중 산소포화도는 올라가지 않았다. 


원인을 찾던 의료진은 환자의 혈액 내 메트헤모글로빈 농도가 44%라는 사실을 발견했다. 혈중 메트헤모글로빈의 농도가 비정상적으로 높아 몸에 산소가 원활하게 공급되지 않는 메트헤모글로빈혈증이었던 것이다. 피 색깔이 파랗게 변한 이유도 이 때문이었다.

 

 

메트헤모글로빈 농도가 피와 피부색 결정 

 


적혈구에는 헤모글로빈이 들어있는데, 헤모글로빈 속의 철(Fe) 이온이 산소와 결합해 혈관(정확히는 동맥)을 타고 우리 몸 구석구석에 산소를 공급한다. 철이 산소와 결합하면 산화철(FeO)이 되는데, 이 산화철 때문에 피가 벌겋게 보인다(체내 노폐물인 이산화탄소를 수거해 심장으로 운반하는 정맥피는 검붉다). 


헤모글로빈 속 철의 99%는 2가 철 이온(Fe2+)이다. 나머지 1%는 3가 철 이온(Fe3+) 형태로 존재하는데, 이러한 헤모글로빈을 메트헤모글로빈이라고 한다. 메트헤모글로빈은 산소 운반 능력이 없다.  


정상인의 혈액에서는 메트헤모글로빈의 농도가 1% 이내다. 메트헤모글로빈의 농도가 이보다 높아지면 메트헤모글로빈혈증이 생길 수 있다. 혈중 메트헤모글로빈의 농도가 10% 이상이면 영화 ‘알라딘’에 나오는 램프의 요정 지니처럼 피부가 파래지는 청색증이 나타나고, 30% 이상이면 호흡이 가빠지다가 현기증을 일으키며, 50% 이상인 상태가 지속되면 의식을 잃거나 최악의 경우 사망할 수 있다. 
미리암병원 응급실에 실려 온 환자의 혈중 메트헤모글로빈 농도는 44%였다. 메트헤모글로빈 농도가 너무 높아 피부가 파랗게 변했고, 혈액까지 파랗게 변한 것이다. 논문에 따르면 이런 증상을 유발한 원인은 환자가 치통 때문에 복용한 진통제였다. 


진통제에는 국소마취제로 사용되는 벤조카인이라는 성분이 들어있었다. 벤조카인이 메트헤모글로빈혈증을 유발할 위험이 있다는 사실은 이미 알려져 있다. 2018년 5월 미국식품의약국(FDA)은 24개월 미만 유아에게는 벤조카인이 함유된 약제 처방을 금지했다.  


국내에서도 청색증을 동반한 메트헤모글로빈혈증이 발생한 사례가 있다. 2007년 ‘대한내과학회지’에 게재된 논문에 따르면 35세 여성이 미용실에서 헤나 머리염색 시술 후 갑작스럽게 호흡 곤란과 청색증이 나타났고 경기 성남 분당제생병원 응급실에 실려 왔다. 


헤나는 인도, 네팔 등에서 자라는 열대성 식물인 로소니아 이너미스의 잎을 말린 가루로 만든 염색제다. 당시 의료진은 헤나 제품에 파라페닐렌디아민(paraphenylenediamine)이라는 성분이 들어있었고, 이 성분이 메트헤모글로빈혈증을 유발한 것으로 추정했다.   


메트헤모글로빈혈증은 약이나 제품에 포함된 성분이 체내에서 부작용을 일으켜 후천적으로 발생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지만, 체내 효소 결핍이나 혈색소 이상 등 선천적으로 청색증이 나타나는 경우도 있다. 


1820년대 미국 켄터키주에 거주하던 마틴 푸가트 일가는 메트헤모글로빈을 헤모글로빈으로 바꾸는 효소인 디아포라아제(diaphorase) 계열의 효소 결핍이었다. 상염색체의 열성 유전자가 원인이었다. 


그 결과 푸가트 자손들의 피부는 파랬다. 두 사람이 결혼해서 낳은 자녀 7명 중 4명은 파란 피부였다. 이후 대를 이어 계속 파란 피부의 자녀가 태어났고, 파란 피부는 약 150년 동안 후대에 유전됐다. 1964년 ‘미국의사협회지 내과학(JAMA Internal Medicine)’에는 디아포라아제 결핍으로 선천적으로 파란 피부를 가지고 태어난 푸가트 가문을 연구한 논문이 실리기도 했다.

 

 

황과 헤모글로빈 결합하면 피가 녹색 

 


녹색 피가 만들어지는 경우도 있다. 2005년 10월 캐나다의 한 42세 남성이 앉은 자세로 잠들었다가 ‘구획증후군’이 발생해 세인트폴 병원을 찾았다. 


우리 몸은 여러 근육이 한 덩어리를 이뤄 ‘구획’을 형성하고 있는데, 구획에 압력이 높아지면 동맥을 압박하게 되고, 그 결과 혈액이 원활하게 공급되지 않아 구획증후군이 발생한다. 구획증후군이 생기면 근육을 비롯한 여러 조직이 4~8시간 내에 괴사하고, 이로 인해 팔 또는 다리 근육이 붓고 통증이 심해진다. 10대 시절 ‘국민여동생’으로 불린 배우 문근영 씨가 이 질환을 앓은 것으로 알려졌다. 


의료진은 수술을 결정하고, 수술 전 혈관의 압력을 낮추기 위해 피를 뽑았다. 그 순간 환자 몸에서는 짙은 녹색 피가 나왔다. 황(S)이 헤모글로빈에 결합한 설프헤모글로빈(Sulfhemoglobin) 때문이었다. 


몸속에 황이 다량으로 들어오면 황화수소(H2S)가 만들어지기 쉬운데, 이 황화수소가 혈액의 헤모글로빈과 결합해 설프헤모글로빈을 생성한다. 설프헤모글로빈의 농도가 높아지면 피가 짙은 녹색으로 변한다. 


환자는 황 성분의 설파닐아미드(Sulfanilamide) 가 포함된 ‘수마트립탄’이라는 두통약을 복용한 것으로 확인됐다. 2007년 의학학술지 ‘랜싯’에는 이 환자의 사례를 포함해 설프헤모글로빈혈증(Sulfhemoglobinemia)을 다룬 논문이 실렸다. doi: 10.1016/S0140-6736(07)60918-0

 

 

혈액이 무색인 척추동물  


사람뿐만 아니라 개, 고양이, 소 등 대부분의 척추동물의 피도 빨갛다. 그런데 동물 중에는 다른 색의 피가 흐르는 경우가 있다. 한호재 서울대 수의대 교수는 “단백질의 구조에 따라 동물의 피 색깔은 다양하게 나타난다”고 설명했다. 산소를 운반하는 성분에 따라 피 색깔이 달라진다는 것이다. 


바닷속 무척추동물 중에는 헤모글로빈 대신 헤메리트린(Hemerythrin)이 산소를 운반하는 종이 있는데, 헤메리트린 속 철은 산소와 결합하지 않았을 때는 무색이지만 산소와 결합하면 보라색을 띤다. 개맛과 같은 완족동물이 대표적이다.


거머리와 같은 환형동물 중 일부는 혈액 속 클로로크루오린(Chlorocruorin)을 이용해 산소를 운반한다. 클로로크루오린에 산소가 결합하면 녹색을 띠기 때문에 혈액도 녹색으로 보인다. 
한편 프라시노하이마(Prasinohaema·그리스어로 ‘녹색 피’라는 뜻)라는 이름을 가진 도마뱀은 다른 척추동물처럼 헤모글로빈을 가지고 있지만, 혈액 속에 녹색을 띠는 빌리베르딘(Biliverdin)이라는 색소가 상당량 들어있어 피가 녹색으로 보인다. 


문어나 오징어 같은 연체동물과 거미, 투구게 같은 일부 절지동물의 혈구에는 헤모글로빈 대신 헤모시아닌(hemocyanin)이 있다. 헤모글로빈에 철이 들어있다면, 헤모시아닌에는 구리가 들어있다. 구리에 산소가 결합해 산화구리가 되면 파란색을 띠고, 피도 파란색으로 보인다. 헤모시아닌은 저온에서 효율이 떨어지는 헤모글로빈보다 효율적으로 산소를 운반할 수 있다. 그래서 바다와 같은 저온의 환경에서 사는 생물에게 유리하다.  


혈액이 무색인 동물도 있다. 남극에 서식하는 점무늬빙어의 혈액에는 적혈구와 산소를 운반하는 색소가 없다.  점무늬 빙어는 대신 혈장으로 산소를 운반한다. 그래서 점무늬빙어의 혈액은 색이 없다. 


극지연구소 연구진은 남극 바다에는 산소가 많이 녹아 있어 체내로 산소를 운반하는 헤모글로빈이 굳이 필요없어 사라지는 형태로 진화했다고 국제학술지 ‘네이처 생태와 진화’  2월 26일자에 밝혔다. doi: 10.1038/s41559-019-081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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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12월 과학동아 정보

  • 조혜인 기자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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