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자를 만나기까지 정자에게는 험난한 여정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인간의 정자가 레이스를 시작하는 출발점은 질의 바로 윗부분입니다(오른쪽 그림). 사정 후 몇 분 뒤에 정자는 자궁 경부를 빠져나갑니다. 정자는 자궁 근육 수축에 힘입어 자궁을 지나 나팔관에 도착합니다.
정자가 잠시 쉬었다 가는 이유
나팔관 입구에 도착한 정자는 움직임을 멈추고 숨고르기에 들어갑니다. 나 팔관 입구를 ‘정자 저장소(sperm storage)’라고 부르는 이유입니다. 난자를 찾아가기만도 바쁜 판국에 쉬어 간다니 의외죠?
사실 사정된 정자는 수정할 능력이 없는 무능한(?) 정자입니다. 이 정자들이 정자 저장소에 머무르면서 난자가 어디에 있는지 알아내는 능력과 난자의 여러 막을 뚫을 수 있는 능력을 획득하게 됩니다.
실제로 인간, 소, 말, 또는 돼지의 정자를 나팔관 입구에 있는 세포들과 함께 배양하면 정자의 생식력과 운동력이 더 길게 유지된다는 실험 결과도 있습니다. 흔히 알려진 것처럼 정자들이 사정되자마자 난자에게 전속력으로 돌진하는 게 아니라는 겁니다.
정자 저장소에서 머무르는 동안 정자들은 일정한 시간 간격을 두고 차례로 수정할 능력을 획득합니다.
이 기간 동안 배란이 된다면, 언제든 난자와 수정할 수 있는 정자들이 대기 중인 셈입니다.
나팔관 속 난자 찾는 비결은 ‘온도’
정자가 수정할 수 있는 능력을 획득하는 동안, 배란이 된 난자는 나팔관의 한쪽 끝에서 자궁 쪽으로 이동합니다. 그리고 난자는 나팔관의 중간 부분에서 정자와 만납니다. 정자 저장소에서 정자와 난자가 만나는 위치까지는 2~3cm가량 됩니다.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 의문점이 생깁니다. 정자 저장소에 있던 정자는 난자의 위치를 어떻게 알고 헤엄쳐가는 걸까요. 무작위로 방향을 고르는 거라면 나팔관 안쪽과 자궁을 선택할 확률이 50대 50인데 말입니다. 위성위치확인시스템(GPS)도 없이 나팔관의 안쪽과 바깥쪽을 구분하는 비결이 궁금해집니다.
난자로 향하는 정자의 직관적인 움직임은 세 가지기작으로 설명할 수 있습니다. 그 중 하나가 ‘주열성(thermotaxis)’입니다. 주열성은 서로 다른 온도를 감지하고 온도가 높은 쪽 또는 낮은 쪽으로 움직이는 특성입니다. 자궁 가까이 위치한 정자 저장소의 온도는 약 34.7도인 반면, 난자가 위치한 나팔관 중간 부분의 온도는 약 36.3도입니다. 수정할 능력이 생긴 정자는 온도가 높은 곳을 향해 헤엄치는 특성이 있기 때문에 나팔관 안쪽으로 움직입니다.
정자가 고작 1.6도 차이를 감지할 수 있고, 더 따뜻한 곳으로 움직이는 이유는 정확히 밝혀지지 않았습니다. 과학자들은 정자의 주열성에 대해 더 알아보기 위해 실험실에서 정자의 움직임을 연구할 수 있는 방법을 고안했는데요. 한 예로 마이클 에이슨바흐 이스라엘 와이즈만연구소 생화학부 교수팀의 정자 실험을 소개합니다.doi:10.1371/journal.pone.0041915
에이슨바흐 교수팀은 긴 관에 정자를 넣고 한쪽 끝은 상대적으로 차갑게, 다른 한쪽 끝은 상대적으로 따뜻하게 한 후 정자들의 움직임을 관찰했습니다. 그 결과, 양 끝의 온도차가 0.5도만 나도 정자가 이를 분간해 온도가 더 높은 쪽으로 움직인다는 사실이 확인됐습니다. 관의 길이를 감안하면 1mm당 0.014도 차이를 구별할 수 있다는 뜻입니다.
에이슨바흐 교수는 또 다른 실험에서 정자가 어쩌다 실수로 온도가 낮은 쪽으로 이동하는 경우, 이동 속도를 늦추고 이동 방향을 약간씩 바꿔 결국 온도가 높은 쪽으로 머리가 향하게 한다는 사실을 알아냈습니다(왼쪽 그림).doi:10.1093/humrep/dev002
몸길이가 눈금자의 1mm도 채 되지 않는 정자가 우리는 쉽게 구별할 수 없는 미세한 온도차를 감지할 수 있다는 게 신기할 따름입니다.
나팔관은 텅 비어있지 않고 액체로 채워져 있습니다. 이 사실은 1891년 토끼 나팔관 접합 실험을 하던 중 이미 알려졌습니다. 하지만 나팔관 속에 어떤 액체가 채워져 있는지에 대한 연구는 1950년 이후에야 비로소 시작됐습니다.
나팔관을 ‘거슬러’ 올라가는 정자
나팔관을 채우고 있는 액체는 혈장(혈액에서 적혈구, 백혈구와 같은 혈구를 제외한 액체성분)과 나팔관을 이루는 세포들이 만들어 분비한 단백질 등으로 이뤄져 있습니다. 이 액체는 나팔관 밖으로, 즉 자궁 방향으로 흐릅니다. 재밌는 건 이런 흐름이 난자가 있는 위치를 알려주는 힌트가 됩니다. 정자는 액체 흐름을 거슬러 움직이는 경향이 있기 때문입니다.
쥐나 인간의 정자로 실험을 해보면 수정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정자와 그렇지 않은 정자의 움직임에서 큰 차이점이 하나 보입니다. 수정 능력을 가진 정자는 머리부터 꼬리까지를 하나의 축으로 해서 빙글빙글 회전하며 움직입니다. 벽에 못을 박을 때 쓰는 전동드릴처럼요. 이런 움직임은 정자가 나팔관 속 액체의 흐름을 거슬러 나팔관 안쪽으로 헤엄칠 수 있도록 합니다.
작디작은 정자가 액체의 흐름에 휩쓸리기는커녕, 거슬러 올라간다는 게 믿기 힘들죠. 하지만 실험으로 확인된 사실입니다. 용기에 배양 용액을 담고 쥐나 인간의 정자를 넣으면 정자들이 무작위로 움직이는데, 배양 용약을 일정한 방향으로 흐르게 하면 흐름과 반대방향으로 움직이는 정자의 수가 늘어나는 것을 관찰할 수 있습니다(아래 '주변 액체의 흐름과 반대로 움직이는 정자'그림).
doi:10.1016/j.cub.2013.02.007
정자가 고개 흔들며 헤엄치는 이유
정자가 난자를 찾아가는 방법은 또 있습니다. 난자가 보내는 화학적인 신호입니다. 이 신호는 난자 근처까지 아주 가까이 다가가야 받을 수 있습니다. 신호의 존재는 1912년 미국 시카고대 연구팀이 처음으로 알아냈습니다.
프랭크 릴리 시카고대 발생학과 교수는 성게의 난자를 따로 배양한 뒤 그 배양액을 정자가 있는 배양 접시에 몇 방울 주입했습니다. 그랬더니 접시에 듬성듬성 퍼져 있던 성게 정자들이 갑자기 몇 개의 구슬처럼 떼를 지어 모이는 현상이 나타났습니다. 난자에서 정자를 끌어들이는 물질이 분비된다고 추론할 수 있는거죠.doi:10.1126/science.36.929.527 이후 연구를 통해 난자 근처까지 도달한 정자를 난자까지 유인하는 물질은 난자를 둘러싸고 있는 난구세포(cumulus cells)와 성숙한 난자가 만들어낸다는 사실이 밝혀졌습니다.
앞서 수정 능력을 갖게 된 정자는 전동드릴처럼 회전하며 헤엄친다고 했습니다. 재밌는 것은 이때 머리를 양옆으로 세차게 흔드는 움직임도 함께 보입니다. 앞으로 나아가는 데 그다지 도움은 되지 않는 행동입니다.
그런데 난구세포에서 나오는 유인 물질을 감지하고 농도가 점점 높아지는 방향으로 움직일 때는 정자의 이런 ‘테크노 댄스’가 비교적 얌전해집니다. 유인 물질이 정자의 머리 움직임을 억제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다 방향을 잃으면 다시 머리를 세차게 흔들며 헤엄칩니다. 이 다소 과격한 움직임 덕분에 정자는 급회전을 할 수 있고, 유인 물질 농도가 높은 쪽으로 방향을 틀 수 있습니다(아래 '주변 액체의 흐름과 반대로 움직이는 정자'그림).
1950년대에만 해도 저명한 과학자들이 정자와 난자가 만나는 것은 우연이라는 주장을 폈습니다. 그러나 미세한 온도 차이를 알아채고, 주변 액체의 흐름을 감지하고, 어딘가로부터 전해오는 화학적 신호를 받고있는 정자를 보고 있자면, 정자와 난자의 만남만큼 필연도 없지 않을까 생각이 듭니다.
최영은
미국 바드대에서 생물을 전공하고 하버드대에서 발생학 및 재생생물학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외우는 과학이 아닌 질문하는 과학의 즐거움을 나누고 싶어 과학교육에 발을 담그게 됐다. 현재 미국 조지타운대 생물학부에서 유전학, 발생학 등을 가르치며 새로운 대학 과학교육 시스템을 개발하고 있다. yc709@georgetown.edu