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베르트 아인슈타인에 이어 20세기 최고의 물리학자로 꼽히는 리처드 파인만은 1959년 미국 캘리포니아 공대에서 열린 미국물리학회 연차 총회에서 ‘바닥에는 풍부한 공간이 존재한다(There’s Plenty of Room at the Bottom)’라는 주제로 강연을 했습니다. 아직까지도 많은 물리학자들에게 거론되는 이 유명한 강연에서 그는 이런 질문을 던졌죠. “인간은 얼마나 작은 기계를 만들 수 있을 것인가?”
놀랍게도 아주 작은 생물의 생체 내에서도 기계적인 운동이 일어납니다. 박테리아의 편모는 머리카락 지름의 500분의 1에 해당하는 12~19nm(나노미터· 1nm는 10억 분의 1m)로 매우 작지만 마치 모터처럼 작동합니다. 편모의 회전운동으로 박테리아는 앞으로 나아갈 수 있죠. 인간은 이보다 더 작은 분자의 영역에서 기계적 움직임을 구현하는 데 도전했습니다. ‘분자기계(molecular machine)’라는 이름으로 말이죠.
분자기계의 시초 ‘캐터네인’
20세기 중반 많은 화학자들이 기존에는 보고되지 않은 화학구조를 합성하기 위해 다양한 시도를 했습니다. 그러던 중 1983년 장 피에르 소바주 프랑스 스트라스부르그대 교수팀은 우연한 기회에 고리형 분자 2개를 연결해 하나의 체인을 만드는 데 성공했습니다. 연구팀은 이 분자에 사슬을 뜻하는 라틴어 카테나(Catena)를 붙여 ‘캐터네인(Catenane)’이라고 이름 지었습니다.
소바주 교수는 원래 광화학을 연구하던 화학자였습니다. 광화학은 금속과 유기 물질로 이뤄진 분자 구조를 이용해, 빛 에너지를 화학 에너지로 바꾸는 과정을 연구하는 학문인데요. 다양한 분자 구조를 연구하던 중 고리형 분자와 반원 모양의 분자가 구리 금속 이온을 중심으로 하나의 복합체를 형성하는 사실을 확인 했습니다. 소바주 교수는 반원 모양의 분자를 고리형 분자로 만들어 낸 뒤, 복합체에서 구리 이온을 제거하는 방식으로 캐터네인을 합성했습니다.
대부분의 분자들은 분자를 이루는 원자 사이의 화학결합, 즉 공유결합, 이온결합 등에 의해 연결됩니다. 하지만 캐터네인은 고리의 사슬 모양과 같은 특수한 분자 구조에 의해 형성되는, 기계결합으로 연결됩니다. 이런 기계결합을 갖는 분자는 거시 세계에서의 기계적 운동을 분자 세계에서 구현할 수 있습니다. 실제로 소바주 교수팀은 1994년 고리 분자의 기계적인 회전 운동을 정교하게 제어할 수 있는 캐터네인 구조를 만들어 내는 데 성공했습니다. 최초의 분자기계가 탄생한 것입니다.
분자기계의 실용성 증명한 ‘로탁세인’
고리형 분자들의 연결이 아닌 고리와 축이 연결된 분자기계도 개발됐습니다. 프레이저 스토더트 미국 노스웨스턴대 교수는 1991년 얇고 긴 분자에 고리가 꿰어있는 형태의 ‘로탁세인(Rotaxane)’을 개발해 ‘미국화학회지(JACS)’에 발표했습니다.
스토더트 교수팀은 긴 축 모양의 분자와 반원 모양 분자의 정전기적 인력을 이용해 이 둘을 결합했습니다. 축 분자에는 전자(-)가 풍부한 특정 부분이 있습니다. 양전하(+)로 대전된 반원 모양 분자를 가까이 대면 정전기적 인력에 의해 서로 결합하게 됩니다. 그리고 난 뒤 캐터네인을 합성한 방식과 동일하게 반원 분자를 고리 분자로 만들어 로탁세인을 합성했습니다.
이는 마치 셔틀버스와 비슷한데요. 셔틀버스는 일정한 구간을 정기적으로 이동하며, 정해진 정류장에만 섭니다. 로탁세인에서는 고리 분자가 셔틀버스가 되고 축 분자에서 전자가 풍부한 두 곳이 정류장이 됩니다. 로탁세인에 열을 가하면 셔틀버스(고리 분자)는 두 정류장(축 분자)에 무작위로 위치하게 됩니다.
인공근육부터 분자 메모리까지
연구팀은 여기서 더 나아가 정류장에 선택성을 부여했습니다. 양전하로 대전된 고리 분자는 항상 축 안에서 전자가 가장 풍부한 곳에 위치하는데요. 정류장의 전자 밀도를 조절할 수 있다면 고리 분자를 원하는 정류장에만 서있게 할 수 있는 것이죠.
스토더트 교수팀은 두 곳 중 한 곳의 정류장을 산·염기 조건에 따라 전자의 밀도가 달라지는 물질로 바꿨습니다. 기존의 정류장을 A, 새로운 물질을 도입한 정류장을 B라고 해보겠습니다. 만일 산성 조건에서는 A, 염기성 조건에서는 B의 전자 밀도가 더 높다면, 전자가 풍부한 곳을 선호하는 고리 분자는 산성 조건에서는 정류장 A에, 염기성 조건에서는 B에 위치하게 됩니다. 즉, 원하는 대로 스위치를 껐다 켜는 것처럼, 고리 분자의 위치를 결정할 수 있는 것이죠.
사용자의 의도에 따라 위아래로 움직일 수 있는 아주 작은 크기의 로탁세인은 응용 범위가 아주 넓습니다. 그 중에서도 소바주 교수팀은 이 구조를 활용해 분자 수준에서 인공 근육을 구현했습니다.
근육은 수축과 이완을 반복하고 이를 통해 우리 몸이 움직입니다. 근육에는 미오신 단백질로 만들어진 굵은 필라멘트와 액틴 단백질로 구성된 필라멘트가 서로 교차돼 있습니다. 이 두 필라멘트가 서로 밀어내거나(이완) 잡아당기는(수축) 과정을 통해 근육이 움직입니다. 소바주 교수팀은 이를 모방해 평행하게 연결된 두 개의 로탁세인 분자가 특정한 화학적 환경에서 서로 잡아당기거나 밀어낼 수 있도록 설계했습니다.
로탁세인은 컴퓨터 메모리에도 활용할 수 있습니다. 컴퓨터에서 데이터는 0 또는 1로 저장됩니다. 스토더트 교수와 짐 히스 미국 로스앤젤레스 캘리포니아대(UCLA) 교수 공동연구팀은 기존의 로탁세인 분자 스위치 연구를 기반으로 메모리 칩을 개발해 2007년 ‘네이처’에 발표했습니다.
원리는 간단합니다. 로탁세인에 전압을 가하면 고리분자의 위치가 변하고, 그에 따른 저항 값의 변화를 0과 1로 구현할 수 있습니다. 눈에도 보이지 않을 만큼 작은 로탁세인 한 개가 기존의 메모리를 구성하던 트랜지스터와 커패시터의 역할을 대신한 것입니다. 로탁세인 메모리 칩을 이용하면 1cm2 면적에 1000억 비트를 저장할 수 있어, 동일한 크기의 반도체 칩과 비교해 볼 때 100배 이상 많은 정보를 저장할 수 있습니다.
도르래 원리 적용해 전지 성능 개선
로탁세인은 분자기계 연구의 터닝포인트가 됐습니다. 그 전에는 학문적으로만 의미가 있던 분자기계가 실생활에도 적용될 수 있다는 것을 증명해 보인 분자였기 때문입니다. 로탁세인이 발표된 이후 분자기계에 대한 학계의 관심이 높아진 것은 물론이고, 이를 활용한 새로운 분자기계가 탄생하기도 했습니다.
분자 도르래가 바로 그것인데요. 2001년 코조 이토 일본 도쿄대 교수는 축 분자 한 개에 여러 고리 분자가 꿰어져 있는 ‘폴리로탁세인(Polyrotaxane)’을 합성해 국제 학술지 ‘어드밴스드 머티리얼스’에 발표했습니다. 폴리로탁세인은 꿰어진 여러 고리 분자 중 일부가 다른 고분자와 공유결합으로 고정되고, 나머지 고리 분자들은 자유롭게 움직이게 되는데요. 고정된 고리 분자가 마치 도르래와 같은 역할을 하게 됩니다.
힘을 고르게 분산시켜 무거운 물체도 적은 힘으로 쉽게 들어올릴 수 있는 도르래처럼, 분자 도르래 역시 축 분자에 가해지는 힘을 효과적으로 낮춰 구조가 안정적으로 유지될 수 있도록 도와줍니다.
최근 필자가 속한 최장욱 서울대 화학생물공학부 교수팀에서는 주로 전기자동차의 전지로 사용되는 리튬이온전지에 분자 도르래를 적용해 전지의 성능을 획기적으로 개선시켰습니다.
현재 리튬이온전지의 음극은 흑연인데요. 흑연 대신 실리콘을 사용하면 약 5배 이상 많은 리튬이온을 저장할 수 있지만, 충전과 방전 과정에서 부피 변화가 너무 크다는 단점이 있습니다. 연구팀은 부피 변화 중에 발생하는 장력을 분자 도르래를 이용해 고르게 분산시켜, 실리콘 음극 전지를 안정화 시켰습니다.
이처럼 분자기계는 재료공학, 기계공학, 의료공학 등 수많은 분야에 큰 변화를 가져올 수 있습니다. 노벨위원회는 이 가치를 인정해 2016년 분자기계 분야에서 기념비적인 논문을 쓴 세 연구자(소바주 교수, 스토더트 교수, 페링하 교수)를 노벨화학상의 주인공으로 선정했습니다.
최성훈_ sunghunchoi1985@gmail.com
서울대 멀티스케일에너지과학기술연구실의 박사후연구원으로 재직 중이다. 리튬이온전지의 고용량 음극인 실리콘을 연구하고 있다. 실리콘 음극에 로탁세인과 같은 분자기계를 적용해 성능을 높이는 연구를 진행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