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세대 전만 해도 우리나라에서 감귤류라면 겨울철 귤과 유자가 전부였다. 오렌지는 주스로나 접할 수 있었다. 그런데 요즘 마트에는 사시사철 오렌지와 그레이프프루트(자몽)가 쌓여있고, 요리나 칵테일에 들어가는 레몬과 라임도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언제부터인가 제주도에서도 한라봉, 천혜향, 레드향 같은 고급스런(?) 감귤류가 나온다. 이 많은 감귤 패밀리는 다 어디서 온 것일까.
종류가 많은 것 같아도 감귤류는 생김새(구조)나 맛, 향에서 공통되는 특징이 있다. 다들 귤속(Citrus)에 속하는 식물이니 어찌 보면 당연하다. 그렇다면 이들 감귤류의 족보는 어떻게 되는 걸까.
흥미롭게도 이 질문에 대해 감귤류 전문가들 사이에도 의견이 엇갈리고 있다. 다만 만다린(mandarin)과 포멜로(pomelo 또는 pummelo), 시트론(citron) 등 세 원종에서 다양한 감귤류가 나왔을 것이라고만 의견을 모았다. 여기에 금귤(kumquat)과 파페다(papeda)라는 두 원종이 더해져 감귤류는 더 다채로워졌다.
만다린은 귤이 속한 감귤류다. 크기가 작고 껍질이 얇고 잘 벗겨져 먹기 편하다. 포멜로는 감귤류 가운데 가장 크고 껍질이 두꺼운데, 대체로 맛은 싱겁다. 시트론은 향이 강하지만 과육은 상당히 신 감귤류다. 금귤은 작은 감귤류로 한때 ‘낑깡’으로 불리며 인기가 있었는데, 요즘은 잘 안 보인다. 파페다는 열대 아시아를 원산지로 하는 감귤류로 맛이 워낙 시어 과육 그대로 먹기는 어렵다.
재밌는 건 감귤류 가운데 생산량이 가장 많은 스위트 오렌59지(sweet orange·우리가 마트에서 보는 오렌지)조차 그 정확한 기원은 미스터리라는 사실이다. 심지어 감귤류의 원산지가 동남아시아가 아니라 호주라고 주장하는 학자들도 있다. 다행히 최근 수년 사이 감귤류의 게놈이 해독되면서 감귤 패밀리의 ‘족보’가 서서히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귤은 사람으로 치면 아시아인이나 유럽인
감귤류 게놈에 대한 본격적인 연구 결과는 2014년 국제 학술지 ‘네이처 바이오테크놀로지’ 6월호에 발표됐다.doi:10.1038/nbt.2906 알버트 우 미국 에너지부 조인트게놈연구소 박사팀을 비롯한 다국적 공동연구팀은 만다린 네 종류와 포멜로 두 종류, 오렌지 두 종류의 게놈을 해독해 비교분석했다. 오렌지가 만다린과 포멜로의 교잡종인 것은 확실하므로, 그 구체적인 족보를 따져보겠다는 취지였다.
그 결과 만다린과 포멜로 두 종은 160만~320만 년 전 한 조상에서 갈라진 것으로 확인됐다. 그리고 뜻밖에도 게놈을 분석한 만다린 네 종류가 모두 순종이 아닌 것으로 드러났다. 연구팀은 네 종류 가운데 아시아에서 널리 재배하는 폰칸(Ponkan) 만다린과 주로 미국에서 재배하는 머코트(Murcott) 만다린이 순종 만다린일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포멜로 유전자가 섞여 있었다. 만다린이 호모 사피엔스이고 포멜로가 네안데르탈인이라면, 이들 네 종류는 네안데르탈인의 피가 섞인 호모 사피엔스, 즉 아시아인이나 유럽인인 셈이다.
그럼에도 연구팀은 순종 만다린이 어딘가에 있거나 있었다고 주장했다. 오렌지의 하나인 광귤(sour orange 또는 bitter orange, 과육이 매우 시지만 향이 뛰어나 향료로 널리 쓰인다)의 게놈을 분석해보면 포멜로의 기여도가 딱 절반이기 때문이다. 광귤의 엽록체 게놈은 포멜로 유형으로 밝혀져 광귤은 포멜로 암술에 순종 만다린의 꽃가루가 수분해 나온 잡종으로 밝혀졌다. 엽록체는 난자에만 존재하기 때문이다.
한편 스위트 오렌지 역시 만다린과 포멜로가 조상인 건 확실한데 광귤처럼 명쾌하지는 않았다. 즉, 만다린과 포멜로의 기여도가 1대 1이 아니라, 만다린이 약간 더 컸다. 이는 스위트 오렌지가 여러 차례 교배가 일어난 결과물이라는 뜻이다.
그리고 놀랍게도 폰칸 만다린과 스위트 오렌지가 게놈의 약 4분의 3을 공유하는 것으로 드러났다. 연구자들은 스위트 오렌지의 부계가 폰칸 만다린과 가까운 만다린이고, 모계는 포멜로(P)와 만다린(M) 잡종에 다시 포멜로가 교배돼 나온 잡종, 즉 (P×M)×P일 것이라고 추정했다.
감귤, 동남아시아에서 퍼져나가
2014년 논문이 나가고 3년 7개월이 지나 연구자들이 후속 연구결과를 올해 2월 15일자 ‘네이처’에 발표했다. 기존에 게놈 서열이 알려진 감귤류 28가지에 새로 30가지의 게놈을 해독해 감귤류의 가계도를 거의 완성했다.doi:10.1038/nature25447
연구팀은 감귤류의 기원을 중국 남서부의 윈난성과 미얀마, 인도 북동부 히말라야 일대로 추정했다. 여기서 동쪽으로 만다린이, 남쪽으로 포멜로가, 서쪽으로 시트론이 진화했다. 실제로 윈난성에서 800만 년 전 감귤류 화석이 발견되기도 했다.
호주에 자생하는 독특한 감귤류인 호주 라임 세 종류는 게놈 분석 결과 금귤과 가까운 것으로 나타나 호주가 감귤류의 원산지라는 가설을 일축했다. 감귤류 식물은 대략 400만 년 전 호주로 들어간 것으로 보인다.
2014년 연구에서 순종 만다린이 없어 당황했던 연구자들은 이번엔 중국 곳곳에서 만다린을 수집했고, 그 결과 게놈을 해독한 만다린이 28가지나 됐다. 그 중 5가지가 포멜로의 유전자 유입이 없는 순종 만다린으로 확인됐다. 사람으로 치면 네안데르탈인의 피가 섞이지 않은 아프리카인인 셈이다.
연구자들은 순종 만다린을 ‘유형1’로 분류했다. 그리고 게놈에 포멜로의 유전자가 1~10% 섞여 있는 16가지를 ‘유형2’ 만다린으로, 포멜로의 유전자가 12~38% 섞여 있는 7가지를 ‘유형3’ 만다린으로 불렀다. 유형3에 속하는 7가지 가운데 사추마 만다린(Satsuma mandarin)이 보통 귤(온주밀감·사추마 만다린)이라고 불리는 것인데, 포멜로의 기여도가 20% 내외다.
자몽의 아빠는 오렌지, 레몬-라임은 사촌지간
이를 토대로 스위트 오렌지의 게놈을 들여다본 결과 앞서 예측한 대로 순종 만다린과 포멜로의 잡종에서 출발해 여기에 포멜로가 교배되고 다시 유형2 만다린의 유전자가 섞인 결과라는 사실이 확실해졌다. 또 유형2 만다린에 포멜로나 스위트 오렌지의 유전자가 유입되면서 유형3 만다린이 나왔다. 서로 복잡하게 영향을 주고받았다는 말이다.
알려진 대로 그레이프프루트는 포멜로 암술에 스위트 오렌지 꽃가루가 수분해 나온 교잡종으로 확인됐다. 그리고 레몬은 광귤 암술에 시트론 꽃가루가 수분해 나온 교잡종으로 밝혀졌다. 요리나 칵테일에 쓰이는 라임의 경우 시트론과 파페다의 일종인 미크란타(micrantha) 사이에 생긴 자손이다(60p 감귤 패밀리 가계도 참조).
논문에는 나오지 않지만 겨울철 차로 즐겨 마시는 유자는 파페다의 일종이다. 중국에 자생하는 이창파페다(Ichang papeda)와 만다린의 한 종류가 야생에서 자연 교배해 나온 것으로 보이는데, 원산지로 추정되는 중국 중부와 티벳에 지금도 자생하고 있다. 유자는 당나라 때 우리나라와 일본으로 전해졌고, 오늘날 두 나라에서 주로 재배된다.
한라봉과 천혜향은 일본 교배 품종
유형2 만다린은 다양한 품종이 어떻게 나왔는지를 기록한 문헌이 거의 없지만, 유형3 만다린의 몇몇은 20세기 들어 원예 학자들이 교배를 통해 만든 것이라 계보가 잘 정리돼 있다. 이번 연구결과는 물론 이를 잘 뒷받침한다.
두 논문을 읽으며 필자는 문득 한라봉과 천혜향의 족보가 궁금해져 알아봤는데, 실망스럽게도 둘 다 우리나라에서 만든 게 아니었다. 한라봉은 1972년 일본에서 키요미(kiyomi·淸見) 만다린과 폰칸 만다린을 교배해 만든 품종이다. 폰칸은 2014년 논문에서 분석한 유형2 만다린이다. 키요미 만다린은 2018년 논문에서 유형3으로 분류됐다. 게놈을 분석한 28가지 만다린 가운데 포멜로의 기여도가 38%로 가장 높다.
알고 보니 키요미는 굉장히 유명한 품종으로 1949년 일본에서 귤(온주밀감)과 스위트 오렌지를 교배해 얻은 만다린이다. 포멜로의 기여도가 높은 이유다. 그 뒤 키요미를 기본으로 해서 다양한 품종이 나왔는데, 그 가운데 하나가 폰칸과 교배해 얻은 데코폰(Dekopon)으로, 1990년대 우리나라에 들여오면서 한라봉이라는 한국식 이름을 붙였다.
천혜향 역시 1984년 일본에서 개발한 품종이다. 키요미를 앙코르(Encore) 만다린과 교배하고 이를 다시 머코트 만다린(유형3)과 교배해 얻은 품종으로 일본 이름은 세토카(Setoka)다. 따라서 한라봉과 천혜향 둘 다 키요미의 자손들이고, 유형3 만다린으로 분류될 것이다.
감귤류 성공의 숨은 공신 포멜로
올해 2월 ‘네이처’ 논문에서 저자들은 오늘날 만다린을 비롯한 여러 감귤류가 사람들의 사랑을 받으며 널리 재배되는 데 포멜로의 공이 컸다고 주장했다. 즉 과실이 작고 시큼한 순종 만다린이 포멜로와 만나 크기가 커지고 달콤새콤한 과일이 된 것이다. 오늘날 과수로 성공한 만다린 품종 대다수는 순종 만다린과 포멜로의 잡종이 그 뒤 여러 차례 만다린과 교배해 나온 것으로 여전히 포멜로의 영향력이 남아 있다. 스위트 오렌지와 그레이프프루트에 대한 기여는 말할 것도 없고, 레몬도 엄마가 광귤이므로 외할머니가 포멜로다.
필자는 그레이프프루트를 좋아해서 가끔 사다 먹는데, 지난해 기후가 안 좋았는지 요즘은 맛이 예전만 못했다. 그런데 얼마 전 마트에서 전형적인 그레이프프루트보다 좀 더 크고 과피가 옅은 노란색인 과일이 있어 살펴보니 그레이프프루트라고 적혀 있어서 하나 사봤다(약간 더 비쌌다). 잘라보니 과피가 꽤 두껍고 과육색도 옅어서 ‘이건 아니다’ 싶었는데, 막상 먹어보니 향이 뛰어나고 단맛과 신맛과 쓴맛이 잘 조화된 부드러운 그레이프프루트 맛이었다.
그 뒤 종종 이 그레이프프루트를 사 먹는데 논문과 관련 자료를 읽다 보니 이게 포멜로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포멜로가 이렇게 맛있을 것 같지는 않다. 자료를 좀 더 살펴보니 그레이프프루트를 포멜로와 교배해 얻은 오로블랑코(Oroblanco)와 멜로골드(Melogold)라는 그레이프프루트 품종이 있다. 아마도 이 그레이프프루트가 그런 종류가 아닐까. 마트에 가서 확인해보니 ‘멜로골드 그레이프프루트’였다!
강석기_kangsukki@gmail.com
서울대 화학과와 동대학원을 졸업했다. LG생활건강연구소에서 연구원으로 근무했으며, 2000~2012년 동아사이언스에서 기자로 일했다. 2012년 9월부터 프리랜서 작가로 지내고 있다. 지은 책으로 ‘강석기의 과학카페(1~5권)’ ‘늑대는 어떻게 개가 되었나’가 있고, 옮긴 책으로 ‘반물질’ ‘가슴이야기’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