따뜻한 우유에 에스프레소를 붓는다. 에스프레소를 붓는 속도는 초속 0.2m보다 빠르게, 잔이 놓인 책상에 절대 진동이 있어서는 안 된다. 외부 열도 완벽히 차단한다. ‘라테’ 한 잔 만드는 데 뭘 그리 요란이냐고 누군가는 말할지 모른다. 하지만 그 한 잔에 담긴 의미는 결코 가볍지 않다.
[라테] 밀도와 온도가 이뤄낸 층 분리 기술
2016년 미국 프린스턴대에 박사후연구원으로 재직할 때였다. 연구팀에 e메일이 하나 도착했다. 밥 프랑크하우저라는 미국 오리건 주 포틀랜드의 퇴직한 엔지니어가 보낸 라테 사진이었다. 처음엔 평범한 라테처럼 보였다. 하지만 자세히 보니 라테에는 색깔이 조금씩 다른 층이 촘촘히 형성돼 있었다. 연구팀을 이끌던 하워드 스톤 교수는 해맑게 웃으며 말했다. “얼마 전까지 위스키를 공부했으니, 이제 라테를 연구해보자.”
층이 분리된 라테를 만들기 위해서는 두 가지 조건이 필요했다. ‘따뜻한’ 우유에 에스프레소를 ‘힘차게’ 부어 줄 것. 우리는 밀도가 높은 우유에 밀도가 낮은 에스프레소를 일정 수준 이상의 관성을 갖도록 부어주면 저절로 층이 생긴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그 층은 몇 시간 동안 유지됐다.
우리는 현상을 좀 더 명확하게 파악할 필요가 있었다. 우유와 커피라는 복잡한 물질 대신 소금물을 사용해 우유가 가진 밀도의 효과를 재현했다. 즉 밀도가 높은 소금물에 파란색 색소를 탄 물을 부으면서 ‘레이어드 라테’를 만들었다. 그리고는 소금물의 온도와 물을 붓는 속도를 달리하면서 층이 만들어지는 모습과 이때 내부의 유체 움직임을 관측했다. 이를 ‘유동장 가시화’ 기법이라고 한다. 우리는 이를 토대로 층이 분리된 라떼의 수학 모델을 구하고, 컴퓨터 시뮬레이션을 통해 생성 메커니즘을 규명했다. 연구결과는 ‘네이처 커뮤니케이션스’ 2017년 12월 12일자에 실렸다.
doi:10.1038/s41467-017-01852-2
레이어드 라테의 생성 원리는 ‘이중 확산 대류(double diffusive convection)’ 현상이다. 섬세한 라테 층은 에스프레소와 우유의 밀도 차에 의한 확산 현상과, 온도에 따른 우유 자체의 확산 현상이 복합적으로 이뤄낸 결과물이다.
밀도차에 의한 확산 현상은 이해하기가 쉽다. 밀도가 낮은 커피를 밀도가 높은 우유 속에 과감하게 부으면 관성력에 의해 어느 정도까지는 하강하다가 멈춘다. 결과적으로 라테가 높이에 따라 연속적인 농도차를 갖게 된다.
재밌는 점은 라테가 식으면서 우유의 밀도가 부분별로 달라진다는 점이다. 유리잔에 가까운 우유는 식어서 밀도가 높고, 가운데 부분은 따뜻해 밀도가 낮다. 그 결과 가장자리 우유는 하강하고 가운데 부분 우유는 가장자리로 이동하는 순환 대류가 생긴다. 이런 대류는 커피와 우유가 섞이는 꽤 두꺼운 경계층 내에서 여러 개가 생길 수 있다.
기계공학자의 눈에는 이것이 아름다워 보이는 것을 넘어 놀랍다. 층 여러 개를 한꺼번에 분리하는 것이 기술적으로 간단한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칵테일에 층을 만들 때 서로 다른 밀도를 가진 액체를 하나씩 조심스럽게 쌓는 것처럼, 현재의 공정에서는 한 가지 물질을 붓고 굳힌 뒤, 다른 물질을 붓고 굳히는 작업을 반복한다. 제작 효율이 떨어진다.
그러나 레이어드 라테의 원리를 이용하면 층층이 경도(hardness)가 다른 재료를 한 번에 만들 수 있다. 우리팀은 앞선 소금물 실험에 액체를 젤처럼 굳히는 아가로스 젤을 첨가해봤다. 그 결과 아가로스 젤의 농도가 각기 다른 여러 개의 젤 층이 저절로 만들어졌다. 이는 산업현장에서 연성소재로 층을 만들거나, 역으로 층 생김을 방지하는 데 활용할 수 있다.
[위스키] 코팅 기술에 쓰이는 마랑고니 효과
기계공학자의 눈에는 위스키도 특별하다. 위스키가 마른 자국은 일반 음료의 그것과는 완전히 다른 모습이다. 간단히 커피와 비교해보자.
커피를 마시다보면 칠칠치 못하게 몇 방울 책상에 떨어뜨리게 된다. 몇 분 뒤 그 자리에는 링 모양 자국, 일명 ‘커피 링’이 생긴다. 물은 기학학적 특징에 의해 가장자리의 증발속도가 빠르다. 상대적인 증발속도 차이에 의해 커피가 마르는 동안 녹아 있는 커피입자들이 가장자리에 몰린다.
반면 위스키는 균일한 퇴적 모양을 남긴다. 필자가 속한 연구팀은 유리판에 3mm 지름의 위스키를 떨어뜨린 뒤 위스키가 어떻게 마르는지 현미경으로 실시간 관찰했다. 그 결과 위스키에 들어있던 에탄올, 계면활성제, 폴리머 등의 성분이 액적의 증발 패턴을 바꿔, 입자가 가장자리에 모이지 않도록 막는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위스키가 균일한 퇴적물을 생성하는 이유를 밝힌 셈이다. 연구결과는 2016년 2월 ‘피지컬 리뷰 레터스’에 실렸다. doi: 10.1103/PhysRevLett.116.124501
위스키가 남긴 자국이 균일한 이유는 위스키에 에탄올뿐 아니라 계면활성제, 폴리머 등 다양한 성분이 섞여 있기 때문이다. 위스키를 오크통에서 오랜 시간 숙성시키는 동안 수십 가지가 넘는 풍미 물질이 위스키에 섞이거나 위스키 안에서 만들어진다.
이런 성분들 가운데 에탄올과 계면활성제는 ‘마랑고니 효과(Marangoni Effects)’를 일으킨다. 마랑고니 효과는 액체의 계면을 따라 국부적으로 표면장력의 크기가 변하는 현상이다. 에탄올의 표면장력은 물의 3분의 1수준이다. 따라서 에탄올과 물의 비율, 계면활성제의 농도에 따라 표면장력의 크기가 달라진다.
또한 위스키 속 폴리머 입자들은 위스키가 마르는 동안 유리판 표면에 카펫처럼 고르게 깔린다. 이것은 위스키에 부유하는 입자들을 바닥에 잘 붙게 도와준다. 결과적으로 위스키 액적이 증발하는 동안 알코올과 계면활성제에 의해 내부 물질을 혼합하는 유동 패턴이 만들어지고, 입자들은 바닥의 카펫 구조에 의해 균일하게 붙게 된다.
이런 특성은 재료를 코팅하는 기술에 적용할 수 있다. 액체를 분사한 뒤 얼룩 없이 균일하게 말리는 기술은 코팅 기술의 핵심이다. 가깝게는 잉크젯 프린팅 기술에서부터, 더 나아가서는 미세한 전극을 코팅하거나, OLED(유기발광다이오드)와 같은 재료를 균일한 패턴으로 코팅하는 데에도 위스키의 원리를 응용할 수 있다.
[와인] 약물 전달에는 ‘와인의 눈물’
마랑고니 효과는 사실 ‘와인의 눈물’로 잘 알려져 있다. 와인을 마실 때 우리는 보통 둥근 잔을 이용해 ‘스월링(와인을 마실 때 잔을 빙그르르 돌리는 행위)’을 한다. 와인의 고유한 향을 잔의 중심에 모으기 위해서다.
그런데 이때 시각적으로도 흥미로운 현상이 생긴다. 잔의 표면을 따라 와인이 눈물처럼 흘러내린다! 표면장력이 물보다 작은 와인이(와인도 에탄올이 섞인 술이다) 잔의 벽을 적시는 동안 에탄올이 증발하고, 그 결과 와인의 표면장력이 높아져 자국을 내며 흘러내리는 것이다.
더 자세히 보면 흘러내린 와인은 잔에 담겨 있던 와인에 닿는 순간 다시 벽을 타고 올라간다. 이유는 역시 표면장력. 흘러내린 와인의 표면장력이 담겨 있던 와인의 표면장력보다 크기 때문에 벽을 타고 올라가고, 연속해서 보면 왈츠를 추듯 이곳저곳을 이동한다(동영상 참조). 이런 현상을 통틀어 ‘와인의 눈물’이라고 부른다.
와인에 들어있는 에탄올과 물은 완전히 섞이는 물질이다. 섞인 상태로도 잘 공존한다. 그러나 두 물질이 만나는 계면에서는 마랑고니 혼합 효과와 같은 매우 복잡한 난류 혼합 현상이 일어난다. 이런 현상은 19세기에 처음 발견됐지만 오랫동안 그 이유가 밝혀지지 않았다. 필자는 스톤 교수팀과 함께 와인과 같은 알코올이 물과 만날 때 섞이는 현상에 대한 정량적인 연구를 수행해 ‘네이처 피직스’ 에 2017년 7월 발표했다. doi:10.1038/nphys4214
이와 같은 알코올과 물 계면에서 발생하는 물리적 현상은 다양한 곳에 응용할 수 있다. 한 예로 표면 세척에 이 원리를 적용할 수 있다. 물이 묻은 접시에 후춧가루를 쏟았다고 가정해보자. 작은 가루를 일일이 걷어내려면 시간과 노력이 많이 든다. 그런데 여기에 알코올을 한 방울만 떨어뜨리면 후춧가루가 일제히 접시 가장자리로 퍼진다. 표면장력이 약한 알코올 쪽에서 표면장력이 강한 물 쪽으로 입자들이 끌려가기 때문이다.
같은 원리를 분무 형태의 약물에도 적용할 수 있다. 현재 대부분의 분무형 약제는 계면활성제를 포함하고 있다. 인체의 내벽은 점도가 높아서 약물을 구석구석 퍼뜨리기 위해서는 표면장력을 낮추는 계면활성 성분이 필수다.
문제는 이것을 장기간 복용하면 나노미터(nm·1nm는 10억 분의 1m) 크기의 계면활성제 물질이 체내에 쌓일 수 있다. 심장에 축적되면 심장의 정상 작동을 방해해 혈류 이상을 야기할 수 있다. 여기에 표면장력은 낮추고, 일정 시간 뒤 증발돼 사라지는 알코올을 대신 사용하면 어떨까. 간단한 아이디어지만 누가 알겠는가. 한 잔의 와인에 담긴 과학이 환자들의 오랜 고통을 덜어주게 될지 모른다.
김형수_hshk@kaist.ac.kr
네덜란드 델프트공대에서 박사학위를 받고, 이후 미국 프린스턴대에서 박사후연구원으로 근무했다. 현재는 KAIST 기계공학과 조교수로 재직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