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초로 둘러싸인 잔잔한 바다가 하늘과 연결된 곳, 미크로네시아 축(chuuk) 주의 웨노섬에 한국해양과학기술원(KIOST) 태평양해양과학기지(KSORC)가 있다.
적도와 가까운 열대 바다에 자리 잡은 대한민국 해양과학기지에 지난 8월 고등학생과 대학생 6명으로 이뤄진 ‘장영실주니어연구단’이 나타났다. 이들의 8박 9일을 동행 취재했다.
장영실주니어연구단, 바다에 흠뻑 빠지다
장영실주니어연구단은 해양생물부터 기후까지 다양한 분야에 관심이 많은 미래 해양과학도들이다. 과학동아와 한국해양과학기술원(KIOST)이 올해 6월 서류와 면접을 통해 선발했다. 한국에서 괌으로, 괌에서 다시 웨노섬으로 16시간이나 걸린 고된 여정에도 바다를 앞에 둔 연구단의 눈빛은 반짝 거렸다.
첫날에는 기지에 대한 설명과 주의사항을 듣고, 기지 구석구석을 둘러보는 시간을 가졌다. 기지에서는 다양한 열대 생물을 직접 기르고, 배양하고 있었다. 생물을 보호하는 방법은 물론 이런 생물들이 가진 유용한 성분을 연구 중이라고. 실제로 기지 연구원들은 바이오디젤 생산에 유용한 미세조류와 열대 생물 유래 생리활성물질을 100여 종 이상 찾아냈다.
이튿날부터는 본격적으로 바다로 향했다. 스노클링 이론을 듣고 실습을 한 뒤, 기지에서 배를 타고 10여 분을 달려 무인도인 오사쿠라 근방에서 스노클링을 시작했다. 환초에 둘러싸여 있어 바다는 더없이 잔잔했다. 물속에서 형형색색의 산호초와 물고기들이 연구단을 맞이했다. 특히 물고기들이 얼굴을 정면으로 빤히 바라보는 모습은 마치 ‘너 뭐니?’라며 서식지에 들이닥친 이방인을 경계하는 듯 했다.
김충곤 KIOST 생태기반연구센터 책임연구원은 “영역에 민감한 물고기들이 실제로 그렇게 물어보는 것일 수 있다”며 “최근에 태풍으로 산호초가 많이 망가졌는데, 산호초는 전체 바다 면적의 0.5%를 차지하고 있지만 적어도 90% 이상의 해양생물종들이 산호초와 연계돼 서식하고 있을 정도로 중요하다”고 설명했다. 지금도 충분히 아름다운데, 태풍 피해를 입기 전에는 이보다 더 아름다웠다고.
매일이 바다와 함께였다. 최영웅 기지대장은 연구단에게 조금이라도 더 자주, 더 많이 바다를 탐구하게 했다. 괴상한 모양의 뿌리와 씨앗이 인상적인 맹그로브 숲 탐방, 산호초의 보호막인 잘피밭 관찰 등 과학적인 탐험도 계속됐다. 최 기지대장은 “육지에서 내려오는 흙이나 오염을 맹그로브가 1차로, 잘피밭이 2차로 걸러줘깨끗하고 투명한 바다에서만 살 수 있는 산호를 보호한다”고 말했다. 잘피밭에서는 물고기가 망을 보고 가재가 굴을 파며 하나의 굴에서 서로 공생하는 모습을 눈앞에서 목격했다. 수심 10~20m에서 이뤄진 스노클링에서는 화이트팁리프상어와 돌고래를 만났다. 돌고래는 아주 잠깐 동안 물위로 나왔다 들어가는 바람에 연구단 대부분이 보지 못했다. 돌고래의 등지느러미를 목격한 기자는 부러움을 샀다. 섬의 원주민들과 똑같은 방식으로 그물을 쳐 놓고 물을 첨벙거리며 물고기들을 그물 쪽으로 몰아 잡는 체험도 했다. 밤에는 밤하늘 가득 뜬 별과 은하수, 별똥별을 보며 이야기를 나눴다. 깜깜한 밤바다에 별처럼 반짝이는 야광충도 만났다.
➊ 해삼을 해부한 뒤 해삼 내부에 사는 미생물을 배지로 옮기고 있다.
➋ 연구단이 바다에서 거대한 해삼을 발견해 관찰하고 있다.
➌ 맹그로브 숲을 탐험하며 염분이 빠져나와 짠맛이 나는 맹그로브 잎의 표면을 맛보기도 했다.
바다 탐험의 대미는 생태계 보존이 가장 잘 된 펜룩섬으로 떠나는 탐험이었다. 그런데 날씨가 심상치 않았다. 오전부터 부슬부슬 내리기 시작한 비는 더 거세졌고, 멈출 줄 몰랐다. 결국 펜룩섬 일정은 취소됐다. 하지만 간절한 마음이 전해진 걸까. 점심을 먹고 나자 비가 그쳤다. 날씨는 아직 흐렸고 시간도 많이 지체됐지만 지금이라도 펜룩섬으로 떠나자는 최 기지대장의 말에 모두 환호했다.
최 기지대장은 “바다를 가까이 보고 느끼는 것은 바다를 연구하는 사람에게 아주 중요하다”며 “미래 해양학자를 꿈꾸는 연구단에게 기지에서의 경험이 좋은 동기 부여의 기회가 되길 바란다”고 말했다.
해삼 해부하고 미생물 배양까지
기지에서는 생물을 직접 관찰하는 일에만 그치지 않고 실험도 진행했다. 성게나 해삼 같은 저서 생물과 알록달록한 열대 물고기를 해부하고, 플랑크톤도 채집해 관찰했다. 또 저서 생물의 기관에 사는 미생물을 배양하며 해양연구원들이 하는 일을 직접 체험했다.
바다에서 만난 모든 해양 생물의 이름을 척척 알려 주며 ‘해양 생물 마니아’로 통하던 최윤형 군(전북대 사대부고 3학년)은 어른 팔뚝만큼 큰 해삼을 해부하며 진땀을 흘렸다. 그러면서도 “연구단에 3년 동안 계속 도전해 결국 합류하게 됐다”며 “벌써 해양생물학자가 된 것처럼 지금 이 순간이 너무 행복하다”고 말했다.
해양 과학자들과 함께하는 세미나와 멘토링도 이어졌다. 해양 생물의 DNA를 분석해 생물 다양성을 연구하는 김충곤 책임연구원은 “예전에는 생물 종 하나에 대한 정보를 찾기 위해 아주 많은 시간이 필요했지만 DNA 분석을 이용하면 시간을 단축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나한나 KIOST 해양순환·기후연구센터 연구원은 해양 물리학에 대해 소개하며 “해양물리학은 바닷물이 어디에서 흘러오고 어디로 흘러가며, 흐르는 도중에 어떠한 변화가 일어나는지 밝히는 학문”이라며 “이에 따라 기후는 물론 생태계에도 많은 변화가 일어난다”고 말했다. 나 연구원은 또 “어릴 적 과학자라는 꿈에서 해양 물리학자가 되기까지 선택의 연속이었다”며 “연구단은 아직 무한한 가능성이 있는 만큼 두려움 없이 매 순간에 집중하다보면 꿈을 이룰 수 있을 것”이라고 조언했다.
이재영 군(대전 과학고 2학년)은 “지구과학의 여러 분야 중에 어떤 것을 전공해야 할지 고민 중이었는데, 멘토링을 받고 나니 해양 물리 쪽으로 마음이 기울었다”며 “꼭 나한나 박사님과 함께 일하고 싶다”며 포부를 밝혔다.
박소원 씨(부산대 2학년)는 “자신의 연구 분야에 대한 애정과 자부심을 가지고 있는 박사님들의 모습을 보니 나 또한 그런 사람이 되고 싶다”며 “먼 훗날 꼭 이곳을 다시 방문할 수 있도록 훌륭한 연구자로 성장하겠다”고 말했다.
“고등학교 통틀어 최고의 경험”
연구단은 등대와 세이비어 스쿨도 방문했다. 이곳은 전쟁의 아픔을 간직하고 있는 곳이다. 축 주는 1914년 일본 점령 하에서 수많은 사람이 학살당했다. 축에 강제 징용됐던 한국인도 3000여 명에 이른다. 등대는 축으로 들어오는 배를 감시했던 곳이며, 세이비어 스쿨은 일본군이 통신사령부로 사용하던 건물을 학교로 개조한 곳이다.
전쟁의 흔적은 고스란히 남아 있었지만 웨노섬에서 만난 어린이와 학생들의 표정은 더 없이 밝았다. 특히 세이비어 스쿨 3학년에 재학 중인 한국인 박원정 양은 더욱 그랬다. 해맑은 웃음과 재치 있는 입담으로 학교를 소개했다. “이곳 친구들은 경제적으로 넉넉하진 않지만 입시 걱정 없이 마음껏 뛰어논다”며 자랑도 덧붙였다. 그렇다고 공부를 전혀 하지 않는 건 아니다. 세이비어 스쿨은 미크로네시아 연방 대통령을 3명이나 배출한 명문으로 꼽힌다. 박 양과 연구단은 메신저 아이디를 주고받으며 한국에서 만나자고 약속했다.
노소정 양(한양대 사대부고 2학년)은 “장영실주니어연구단 활동이 고등학교를 통틀어 최고의 경험이 될 것 같다”며 “이곳 친구들처럼 늘 긍정적인 생각을 하고, 무엇이든 열심히 하면 이후에 빛을 발할 수 있다는 박사님의 말씀도 꼭 기억하겠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