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뎀베는 모니터 너머로 흔들리는 것을 보다가 멀미가 나서 고개를 돌렸다. 질끈 감았다가 뜬 눈에 시력이 돌아오며 창문 너머로 하늘색 바탕에 연분홍빛 얼룩이 들어간 짙은 녹색 구체가 보였다. 행성 A9813e, 이 항성계의 제5행성이자 유일하게 골디락스 존에 있는 행성. 모니터의 오른쪽 구석에는 다른 모습의 행성이 있었다. 짙은 파란색 바탕에 연분홍빛 얼룩이 있는 샛노란 행성. 하지만 대륙의 모습과 크기, 질량, 궤도는 동일했다. 그리고 이름도. A9813e. 30년 만에 돌아온 이 행성은 완전히 달라진 모습이었다. 어떻게 그렇게 짧은 시간에 극적으로 변했을까?
다시 화면으로 고개를 돌렸다. 시투아의 헬멧에서 전해오는 영상이 실시간 중계되고 있었다. 영상으로 보면 우주에서 보이던 짙은 녹음은 울창한 정글이 아니라 화산재처럼 땅을 뒤덮고 있는 이끼 같은 식물이었다. 화면과 함께 소리도 생생히 전해져 오고 있었다. 밀폐복에서 나는 공기순환음, 헐떡거리는 시투아의 숨소리, 걸을 때마다 발 아래에서 나는 우지직하며 부서지는 소리.
“아무래도 썩은 나뭇가지 같은 게 잔디 밑에 있는 것 같습니다.”
“파보게.”
“정말요?” 시투아의 얼굴이 구겨지는 소리가 나는 것 같았다. 구시렁거리면서도 허리춤에 있던 도구 막대를 꺼내 펴고 땅을 파기 시작했다. 곧 소리의 정체가 드러났다.
“이거 숯 같은데요? 나뭇가지가 타버린.”
분석기에 넣고 가던 길 가게. 얼마나 남았나?”
“30분 정도 더 가면 될 것 같습니다. 그런데 헬멧을 꼭 써야 하나요? 대기 센서는 완벽하게 안전하다고 나온다고요. 거추장스러운 밀폐복만 벗으면 금방 갈 텐데요?”
“출발하기 전에 설명 못 들었나? 센서가 못 잡아내는 위험도 존재할 수 있네. 자네 자신을 위한 거니 잔말 말고 그대로 써.” 짜증이 났다. 시투아에게 짜증이 난 게 아니었다, 거짓말을 해야 하는 자신에게 짜증이 났다. 행성의 공기는 인간에게 아무런 해도 없었다. 시투아의 몸에 있는 박테리아, 바이러스, 곰팡이류가 이 행성에 어떤 해를 끼칠지가 더 걱정이었던 것이다. 때 늦은 걱정이었을지 모르겠지만. 물론 탐사대에서 몰래 떨어져나와 혼자 탐사를 하는 시투아가 걱정되기도 했다.
“아누슈 교수님 말투하고 닮아간다는 거 아세요?” 물리학과의 아누슈 교수와 그는 과학부 장관 자리를 놓고 경쟁하던 사이였다. 뎀베는 걱정했던 마음을 반 정도 무르기로 했다.
“그렇겠지.”
“그거 아십니까? 아누슈 교수님하고 쓰고 있는 논문이 엄청나게 중요하다는 거?”
“알큐비어 버스트 얘기 말인가? 자네가 지겹도록 떠들었잖나.”
“네, 그거요. 기억하시네요. 원래 알큐비어 드라이브를 사용하면 선수 토러스에 성간물질이 축적되었다가 정지하면서 공간을 다시 펴는 순간에 앞쪽으로 방사되게 돼 있죠. 지금 바루나 호는 그걸 에너지로 재활용하면서 연료 효율을 올리고 있고요.” 헉헉대면서도 쉴 새 없이 떠드는 걸 보면 아직 덜 힘든 것 같았다. “그런데 그게 이상하더란 말입니다.”
“뭐가 말인가?”
“숫자가 안 맞아요. 누가 장부를 조작한 것처럼요. 우주선의 총질량이 이론의 예측보다 훨씬 빨리 줄어들고 있어요. 제가 지금 여기서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란 말입니다.”
뎀베는 불만을 들어줄 마음이 없었다. 그리고 제자의 부전공(아누슈 교수는 아마 외계 생물학 쪽을 부전공이라고 부르겠지만)에 대한 얘기도 듣고 싶지 않았다.
“도착했나?”
“아직입니다 장관님.” 목소리에 불만이 가득했다.
“교수라고 부르게.”
“네, 교수님.”
뎀베는 장관이란 직함보다는 본업인 교수라 불리는 걸 좋아했다, 과학부 장관 자리는 그저 임시직일 뿐 돌아갈 자리는 교수라고 언제나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그걸 제일 잘 알고 있는 시투아는 영문도 모를 일로 자기를 부려먹는 은사에게 이 정도의 심술은 부려도 된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인류 최초의 항성 간 우주선 바루나 호는 알큐비어 드라이브를 사용해 초광속 여행을 실현했고 최초로 다른 항성계에 도달하는 데 성공했다. 뎀베는 상대적 양자이론이 전공은 아니었지만, 이 거대한 배에서 생산되는 막대한 에너지의 대부분이 공간을 접고 펴는 데 사용된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진행 방향의 공간은 접고 뒤에 있는 공간은 펴서 광속한계의 법칙을 어기지 않고 광속을 능가하는 속도를 얻을 수 있었던 것이다. 광속한계는 빛의 속도로 가속하려면 무한의 에너지가 필요하다는 것인데 알큐비어 드라이브는 공간을 줄이고 늘리기 때문에 가속이라는 개념이 존재하지 않았다. 바루나 호는 가만히 정지해 있고 우주가 뒤로 흘러가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인류가 불을 발명한 이래 이제까지 생산해온 모든 에너지를 다 합친 것보다 훨씬 많은 에너지가 필요했다. 그래서 기나긴 세월 동안 거대한 태양광 발전소에서 에너지를 모아 반물질의 형태로 축적했고 반물질 저장소를 감싸는 거대한 선체를 건조하기 위해 소행성 수십 개를 녹였다. 이 과정에 백 년이 넘는 세월이 흘렀다. 건조에 참여한 수많은 과학자와 기술자와 그들의 후손들은 콜로니를 만들어 모여 살았고 거기서 다시 과학자와 기술자가 태어났고 결국 지금 바루나 호의 시민이 되었다. 그들은 다시 돌아오지 못할지도 모르는 길고 긴 여행을 떠나며 가족과 친지와 친구를 떠나야 할 필요가 없었다. 그들 모두와 함께 떠날 수 있었으니까.
바루나 호의 목적은 아주 단순했다. 인류의 생존을 위한 우주 탐사. 지구가 멸망하더라도 소행성대나 화성, 금성에 있는 식민지에서 살아남을 수 있었다. 하지만 태양계 자체가 멸망한다면 어찌 될까? 유일한 답은 다른 항성계를 찾아 개척하는 것뿐이었다. 하지만 어떻게 찾겠는가? 고성능 우주망원경으로 이미 수많은 거주 가능 행성들을 찾아냈지만 결국 직접 가서 탐사를 해보지 않으면 어떤 환경인지 알 수가 없었다.
지구에서 146.3광년 떨어진 A9813e처럼 말이다. 망원경으로 관측한 A9813e는 완벽한 후보였지만 30년 전 도착해서 보니 테라포밍할 수 없는 곳이었다. 대기 조성은 완벽했지만 토착 생물이 문제였다. 노란색 식물들이 행성 전역에서 쉴 새 없이 독성 포자를 뿜어대고 있었던 것이다. 물론 나노머신으로 해독을 하거나 아예 멸종시키는 방법도 있었다. 하지만 최소 수천 년에서 최대 수백만 년이 걸릴 수도 있었고 최악의 경우 실패할 수도 있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실패할 확률이 압도적으로 높았다. 기간이 길어지면 길어질수록 토착 생물들이 진화하여 테라포밍에 저항하고 결국 원상태로 돌아가리라는 것이 시뮬레이션 결과였다. 하지만 이곳을 떠난 가장 결정적인 원인은 이곳에 동물이 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아직 무척추 생물과 척추 생물의 중간 정도였지만 뚜렷한 진화의 증거가 보였다. 만약 이곳을 지구화시켜 버린다면 결과적으로 저 생물들이 언젠가 지적 생명체로 진화할 가능성을 막아버리는 결과가 올 것이었다. 다른 후보가 없는 것도 아니고 굳이 그런 비윤리적 결정을 하면서까지 집착할 필요가 없었다. 이후 30여 년 동안 약 400여 개의 골디락스 존 행성을 탐사했다. 그 중 80여 개 정도에 산소와 물이 있어 거주 가능했다. 그리고 그들 모두가 비슷한 문제를 가지고 있었다.
“교수님 다 왔습니다. 뭘 하면 되죠?”
“근처에 있는 바위가 하나 열릴 걸세.” 뎀베가 바위가 열리도록 암호 주파수를 보냈다.
“찾았습니다. 한 10m 정도 더 가야겠네요.” 화면에 열려 있는 바위가 나타났다.
“안에 바이오젤팩이 있을걸세. 거기 모든 센서데이터가 다 담겨있어. 그걸 가지고 오게.”
시투아가 바위 안에서 커넥터 여러 개에 매달린 푸르스름한 젤로 가득 찬 비닐 주머니를 빼냈다.
“이제 돌아가겠습니다.”
“알겠네. 그리고 탐사대 누구에게도 젤팩을 보여줘선 안 되네. 알겠나?”
“네입, 장관님.”
사실 저런 건방진 태도 때문에 수제자로 삼았었다. 그는 고분고분한 사람을 싫어했다, 반론을 하고 반격을 하고 어떻게든 자신이 틀렸음을 증명하려 드는 젊은이가 좋았다. 설사 상대가 저명한 외계 생물학자이자 과학부 장관이라도 아무 상관 없이 말이다. 하지만 지금은 무례를 받아줄 만한 여유가 없었다.
시투아가 지금 들고 있는 젤팩에는 그들이 떠나있던 30여 년간의 측정데이터가 가득 차 있었다. 공기 조성의 변화와 온도변화 같은 기본적인 것부터 광범위한 파장의 전자파, 중력파와 뉴트리노 까지. 법적으로 테라포밍을 포기한 행성의 생태계는 절대 간섭하지 않고 최소한의 비침습적인 탐사만을 할 수 있었는데 바위로 위장한 측정장치는 그 기준에서 벗어나 있었다. 때문에 비밀리에 회수하는 것이었다.
뎀베는 반대로 장이 꼬일 것 같은 압박감을 느꼈다. 들킬까 봐 두려워서가 아니었다. 불법 조사로 인해 이 행성이 멸망했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기 때문이었다.
돌아올 시간까지 가만히 앉아서 다른 일에 집중할까 생각해봤지만, 도무지 참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사무실을 박차고 나가 항구로 향했다. 비서가 뒤에서 뭐라고 말했다.
“뭐라고 했나?”
“세상에…. 아누슈 박사님이 방금 사고로 돌아가셨다고 합니다.”
“무슨 사고?”
“실험실에서 독성물질이 유출되었다고 하는데요.”
사고라는 것이 흔치는 않지만 일어나지 않는 일은 아니었다. 하지만 아는 사람이 사고로 죽는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시투아가 꽤 충격을 받을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를 생각할 때가 아니었다. 사고는 사고고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었다. 다만 시투아에게 어떻게 전해야 할지는 걱정되었다.
과학부 청사 건물을 나와 근처에 있는 리프트로 향했다. 리프트는 도넛형 콜로니의 벽을 기어 다니며 사람과 물자를 실어날랐다. 이런 콜로니가 세 개 있었는데 서로 완전히 분리되어 있었고 직경도 크기도 면적도 모두 달랐다. 원래 우주선의 일부로 지어진 것이 아니라 각각 다른 우주 콜로니를 억지로 연결했기 때문이었다. 대량의 반물질과 마이크로 블랙홀을 저장하는 데 거대한 선체가 필요했는데, 그 겉껍질로 콜로니를 사용한 것이었다. 선수 쪽부터 각각 마이아, 라룬다, 라레스라는 이름이 붙여져 있던 이들 콜로니들은 그 때문에 직경도 달랐다. 원래라면 회전속도를 달리해서 지구 중력과 비슷한 중력을 유지했겠지만, 지금은 우주선의 일부가 되어 축에 고정되어 있었기 때문에 조금씩 다른 중력을 가지게 되었다.
더 멀리서 보면 축이 이어진 거대한 도넛 3개의 앞뒤로 훨씬 거대한 도넛형 물체가 자리 잡고 있었다. 그것이 알큐비어 드라이브였다.
리프트에서 내린 뎀베는 시투아를 불러냈다. 하지만 대답이 없었다. 이미 입항예정 시간이 지났기 때문에 학교로 돌아갔나 하고 생각하고 돌아서려는 순간 시투아의 메일이 들어왔다.
[교수님 아무래도 못 돌아갈 것 같습니다. 자료는 지금 전송합니다. 엄마 아빠에게 사랑한다고 꼭 전해주세요.]
시투아의 목소리는 차분함을 가장하고 있었지만 미처 억누르지 못한 공포로 갈라져 있었다.
항구 쪽이 어수선해졌다. 긴급 출동 표시가 모니터에 뜨면서 구조선이 날아오르는 모습이 보였다.

어떻게 셔틀이 추락할 수가 있을까. 어떻게 이론물리학자가 실험실 사고로 죽을 수 있을까. 두 번의 장례식에 참석하면서 슬픔과 침통함만큼 무거운 혼란스러움이 가슴 속을 쥐어짜는 느낌이었다. 공식적으로 시투아는 뎀베 대신에 행성으로 탐사를 간 것이었다. 원래라면 외계생물학과 학과장인 뎀베가 직접 갔었어야 했다. 과학부 장관이었기 때문에 자리를 비울 수 없었고 시투아가 대신 간 것이었다. 그리고 대신 죽었다. 다른 탐사대원 142명의 목숨에도 과학부 장관으로서 책임감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시투아의 죽음은 머리가 아닌 가슴 깊은 곳을 찌르고 있었다. 그리고 고통 속에서 정말 이 두 사건이 사고일까 하는 의구심이 고개를 들고 있었다. 사제지간이 한 날 한 시에 죽을 확률은 얼마나 될까?
뎀베는 시투아의 사물을 챙기기 위해 집무실 대신 대학 연구실로 돌아왔다. 연구실뿐만 아니라 학교 전체가 장례식 후 추모행사에 참석하느라 거의 비어있었다. 뎀베는 그 자리를 견딜 수가 없었다. 그런데 모니터 하나가 홀로 불을 밝히고 있었다. 다가가 보니 누군가가 외부접속으로 서버의 자료를 검색하고 있었다. 직접 해킹이 불가능해지자 누군가 물리적으로 컴퓨터에 연결하는 브릿지를 설치한 것 같았다. 아니나 다를까 데이터 커넥터에 껌 같은 것이 붙어있었다. 그가 손가락으로 긁어내자 데이터 액세스가 멈췄다.
연구실로 돌아온 뎀베는 그들이 뭘 빼내 가려고 했는지를 살폈다. 로그를 보니 시투아의 연구기록과 천체물리학과의 사라스트로 교수의 연구 결과를 건드리다가 중간에 끊겼다고 나와 있었다. 그리고 아누슈 교수의 연구자료는 통째로 삭제되어 있었다. 대체 누가 이론물리학 연구자료를 삭제한단 말인가?
뎀베는 연구실로 돌아가 메일함을 열었다. 메일에는 52기가쿼드짜리 자료가 들어있었다. 시투아에게서 온 마지막 메일이었다. 시투아는 겁에 질렸으면서도 연구자료를 지키기 위해 자료를 전송한 것이었다. 뎀베는 자랑스러움과 죄책감에 가슴이 죄어왔다. 그런데 자료 목록에는 바이오젤팩의 관측자료만 있었던 것이 아니었다. 시투아가 아누슈 교수와 함께 연구하던 알큐비어 버스트에 대한 연구자료도 같이 있었다. 시투아는 자신의 연구도 지키려했던 것이다.
뎀베는 먼저 자신의 메일함과 서버에 보호조치를 내리고 외부 접속을 봉쇄했다. 과학부 장관으로서 할 수 있는 최소한의 권력이었다. 그리고 침투당한 서버의 자료도 같이 보호막 아래에 옮긴 후 삭제된 아누슈 박사의 자료를 복구할 수 있는지 알아보았다. 컴퓨터학과는 기묘하게 기술분과와 과학분과 사이에 걸쳐있기 때문에 양대 세력의 완충지대 역할을 하고 있었는데, 이 경우에 그들을 완전히 믿어도 될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들이 아니고서야 껌처럼 생긴 해킹장치를 누가 개발할 수 있을까?
뎀베는 장관 권한으로 메인프레임의 점유율을 99%까지 끌어온 다음 바이오젤팩에 들어있는 행성 자료를 분석하도록 돌렸다.
시투아와 아누슈 박사의 죽음이 정말로 우연일까. 삭제된 연구자료는 또 무슨 관계가 있는 것일까. 어떤 연관성이 존재한다면 그걸 혼자 찾는 것은 불가능했다. 누군가가 필요했다. 생물학부 건물을 나온 뎀베는 작은 정원을 사이에 두고 건너편에 있는 물리학부 건물로 향했다.
건물 내에는 쓸모없는 자신감에 빠진 학부생들이 몇 있을 뿐이었다. 이리저리 둘러보며 지친 표정의 대학원생을 찾다가 결국 양손에 무언가를 잔뜩 묻히고 다니는 학생을 발견했다.
“저기 미안한데 물리학부인가요?”
학생은 깜짝 놀란 얼굴로 대답했다.
“네, 장관님.”
“어느 교실 소속이죠?”
“사라스트로 교수님 소속이었습니다.”
“아주 잘 됐군요. 사라스트로 교수님의 연구에 관해서 물어볼 게 있는데 잠시 시간 있어요?”
학생은 다소 미심쩍은 얼굴로 승낙했다. 아마 과학부 장관에게 안 된다고 말하긴 어려웠으리라. 이비라는 이름의 이 학생은 뎀베를 연구실로 안내했다.
“정확히 그 분의 연구가 뭐였죠?”
“레서 노바였습니다.” 이비는 말을 아끼는 것처럼 보였다.
“조금 더 자세히 설명해봐요.”
“간단히 말해서 항성이 아주 작은 폭발을 일으키는 걸 말합니다. 슈퍼 노바 정도는 아니지만 플레어보다는 훨씬 강한 폭발이죠. 지구에서 관측된 바는 없고 바루나 호에서만 관측됐어요. 그래서 잘 알려진 현상은 아니죠.”
뎀베도 처음 들어보는 현상이었다.
“그 폭발이 얼마나 강력한 거죠?”
“꽤 강력해요, 태양계였다면 지구의 전리층이 벗겨지고 더 강한 거면 대기권까지 다 날아갈 정도?”
“그런데 그게 바루나에서만 관측되었다는 거군요.”
“네. 사실 사라스트로 박사님의 이론은 바루나 자체가 레서 노바를 일으킨다는 거였어요. 그래서 항행역학 쪽하고 양자역학하고 협업할 예정이었는데….”
“그럼 A9813e의 극단적인 환경변화도 레서 노바와 관련 있는 걸까요?”
“그건 잘 모르겠어요. 행성의 변화에 대한 데이터가 없어서.”
뎀베는 옆에 있는 컴퓨터로 서버에 접속해 분석작업이 어디까지 왔는지 살폈다. 거의 끝나가고 있었다.
“이걸 좀 봐줄래요?” 뎀베는 아직 분석작업이 덜 끝난 자신의 자료 대신에 이비가 알 만한 시투아의 연구 자료를 보여줬다.
이비는 한참 들여다보더니 얼굴이 울상이 되었다.
“사라스트로 박사님이 이걸 보셨어야 했는데.”
“뭐죠?”
뎀베는 시투아의 사물을 챙기기 위해 집무실 대신 대학 연구실로 돌아왔다. 연구실뿐만 아니라 학교 전체가 장례식 후 추모행사에 참석하느라 거의 비어있었다. 뎀베는 그 자리를 견딜 수가 없었다. 그런데 모니터 하나가 홀로 불을 밝히고 있었다. 다가가 보니 누군가가 외부접속으로 서버의 자료를 검색하고 있었다. 직접 해킹이 불가능해지자 누군가 물리적으로 컴퓨터에 연결하는 브릿지를 설치한 것 같았다. 아니나 다를까 데이터 커넥터에 껌 같은 것이 붙어있었다. 그가 손가락으로 긁어내자 데이터 액세스가 멈췄다.
연구실로 돌아온 뎀베는 그들이 뭘 빼내 가려고 했는지를 살폈다. 로그를 보니 시투아의 연구기록과 천체물리학과의 사라스트로 교수의 연구 결과를 건드리다가 중간에 끊겼다고 나와 있었다. 그리고 아누슈 교수의 연구자료는 통째로 삭제되어 있었다. 대체 누가 이론물리학 연구자료를 삭제한단 말인가?
뎀베는 연구실로 돌아가 메일함을 열었다. 메일에는 52기가쿼드짜리 자료가 들어있었다. 시투아에게서 온 마지막 메일이었다. 시투아는 겁에 질렸으면서도 연구자료를 지키기 위해 자료를 전송한 것이었다. 뎀베는 자랑스러움과 죄책감에 가슴이 죄어왔다. 그런데 자료 목록에는 바이오젤팩의 관측자료만 있었던 것이 아니었다. 시투아가 아누슈 교수와 함께 연구하던 알큐비어 버스트에 대한 연구자료도 같이 있었다. 시투아는 자신의 연구도 지키려했던 것이다.
뎀베는 먼저 자신의 메일함과 서버에 보호조치를 내리고 외부 접속을 봉쇄했다. 과학부 장관으로서 할 수 있는 최소한의 권력이었다. 그리고 침투당한 서버의 자료도 같이 보호막 아래에 옮긴 후 삭제된 아누슈 박사의 자료를 복구할 수 있는지 알아보았다. 컴퓨터학과는 기묘하게 기술분과와 과학분과 사이에 걸쳐있기 때문에 양대 세력의 완충지대 역할을 하고 있었는데, 이 경우에 그들을 완전히 믿어도 될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들이 아니고서야 껌처럼 생긴 해킹장치를 누가 개발할 수 있을까?
뎀베는 장관 권한으로 메인프레임의 점유율을 99%까지 끌어온 다음 바이오젤팩에 들어있는 행성 자료를 분석하도록 돌렸다.
시투아와 아누슈 박사의 죽음이 정말로 우연일까. 삭제된 연구자료는 또 무슨 관계가 있는 것일까. 어떤 연관성이 존재한다면 그걸 혼자 찾는 것은 불가능했다. 누군가가 필요했다. 생물학부 건물을 나온 뎀베는 작은 정원을 사이에 두고 건너편에 있는 물리학부 건물로 향했다.
건물 내에는 쓸모없는 자신감에 빠진 학부생들이 몇 있을 뿐이었다. 이리저리 둘러보며 지친 표정의 대학원생을 찾다가 결국 양손에 무언가를 잔뜩 묻히고 다니는 학생을 발견했다.
“저기 미안한데 물리학부인가요?”
학생은 깜짝 놀란 얼굴로 대답했다.
“네, 장관님.”
“어느 교실 소속이죠?”
“사라스트로 교수님 소속이었습니다.”
“아주 잘 됐군요. 사라스트로 교수님의 연구에 관해서 물어볼 게 있는데 잠시 시간 있어요?”
학생은 다소 미심쩍은 얼굴로 승낙했다. 아마 과학부 장관에게 안 된다고 말하긴 어려웠으리라. 이비라는 이름의 이 학생은 뎀베를 연구실로 안내했다.
“정확히 그 분의 연구가 뭐였죠?”
“레서 노바였습니다.” 이비는 말을 아끼는 것처럼 보였다.
“조금 더 자세히 설명해봐요.”
“간단히 말해서 항성이 아주 작은 폭발을 일으키는 걸 말합니다. 슈퍼 노바 정도는 아니지만 플레어보다는 훨씬 강한 폭발이죠. 지구에서 관측된 바는 없고 바루나 호에서만 관측됐어요. 그래서 잘 알려진 현상은 아니죠.”
뎀베도 처음 들어보는 현상이었다.
“그 폭발이 얼마나 강력한 거죠?”
“꽤 강력해요, 태양계였다면 지구의 전리층이 벗겨지고 더 강한 거면 대기권까지 다 날아갈 정도?”
“그런데 그게 바루나에서만 관측되었다는 거군요.”
“네. 사실 사라스트로 박사님의 이론은 바루나 자체가 레서 노바를 일으킨다는 거였어요. 그래서 항행역학 쪽하고 양자역학하고 협업할 예정이었는데….”
“그럼 A9813e의 극단적인 환경변화도 레서 노바와 관련 있는 걸까요?”
“그건 잘 모르겠어요. 행성의 변화에 대한 데이터가 없어서.”
뎀베는 옆에 있는 컴퓨터로 서버에 접속해 분석작업이 어디까지 왔는지 살폈다. 거의 끝나가고 있었다.
“이걸 좀 봐줄래요?” 뎀베는 아직 분석작업이 덜 끝난 자신의 자료 대신에 이비가 알 만한 시투아의 연구 자료를 보여줬다.
이비는 한참 들여다보더니 얼굴이 울상이 되었다.
“사라스트로 박사님이 이걸 보셨어야 했는데.”
“뭐죠?”

“저희 쪽에서는 레서 노바의 발생 원인은 모르고 있었어요. 그저 막연하게 바루나 호의 알큐비어 드라이브와 관련이 있다는 추측만 하고 있었죠. 이 자료에 따르면 바루나 호가 초광속 항행을 하면 선수 부분에 성간물질이 축적되고 도착 즉시 풀린 공간에서 막대한 양의 입자가 방사된다고 해요. 그런데 이걸 텅 빈 공간이 아닌 항성에 쏟아부으면….” 이비는 여기서 망설였다.
“아직 입증되지 않은 이론이라도 괜찮으니 말해봐요.”
“시뮬레이션을 돌려봐야겠지만 알큐비어 드라이브가 레서 노바의 원인이 틀림없다고 생각해요. 세상에…. 우리가 이 행성을 멸망시킨 건가요?”
뎀베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때 자료 분석을 마쳤다는 신호가 떴고 뎀베는 결과를 띄웠다.
노란색 행성이 나타났다. 바루나 호가 도착하고 뎀베가 젊은 석사과정 시절 ‘바위’를 설치한 직후의 영상이었다. 타임라인은 바루나 호가 떠나고 나서 한 달 후까지 아무 변화가 없었다. 행성시로 39일이 되던 날 항성 A9813이 강렬한 입자 방사를 시작했다. 행성의 전리층이 단번에 파괴되었고 이후 수년에 걸쳐 노란색 생명체들이 사멸해갔다. 그리고 생명체들이 전멸한 것으로 보이자 행성의 그림자에 있던 탐사위성이 무언가를 지상에 떨어뜨렸다.
“저게 뭐죠?” 이비가 물었다.
“나도 모르겠군요.” 하지만 뎀베는 짐작 가는 바가 있었다. 아마 지구 생명체의 DNA 씨앗일 것이었다. 자료에는 시투아가 채취한 나뭇가지와 이끼의 분석자료도 있었다, 나뭇가지는 처음 보는 구성이었지만 이끼는 지구의 DNA를 가지고 있었다.
“우리가 멸망시킨 거군요.” 이비는 망연자실한 표정이었다.
“이비, 더 많은 증거와 이론적 뒷받침이 필요할 것 같군요. 항행역학과하고 양자역학과에 연락해줄래요?”
“알겠습니다. 장관님.” 대답한 이비는 밖으로 나갔다.
뎀베는 컴퓨터 화면을 다시 불러내 논문작성기를 켰다. 아무래도 직접 작성할 시간이 없을 것 같다는 예감 때문이었다. 그리고 예감이 정확했다는 것을 알게 되는 데 10분도 걸리지 않았다.
문이 열리고 이비와 다른 사람들이 들어왔다. 그리고 8명째에 선장이 들어섰다.
“이렇게 뵙게 되어서 아쉽군요. 장관님.”
이비는 두려움에 찬 눈빛으로 뎀베에게 도움을 청하고 있었다. 뒤로 수갑을 찬 것 같았다.
“저도 그렇네요. 선장님.” 아트리아 선장은 이 배의 지도자이자 모든 것을 결정하는 최종결정자이며 유사시에는 백만 명이 넘는 시민들의 생사여탈권을 지닌 권력자였다. 선거로 뽑히긴 하지만 인구 비율상 기술자가 더 많아서 과학자가 뽑히는 경우는 없었다.
“아누슈 박사의 연구 때문이군요. 대체 그 연구가 뭐가 중요하다는 거죠? 왜 숨기는 겁니까?”
“결국 우리가 멸망하리라는 거죠. 불행하게도 연료가 다 되어가고 있습니다.”
“언젠가 일어날 일 아니었던가요? 당연한 걸 왜 지금 깨달은 척 하는 겁니까?”
“우리 예상보다 훨씬 빠르게 소모되고 있어요. 원래 500년 이상을 버틸 수 있을 것으로 생각했죠. 우리가 틀렸던 겁니다.”
“얼마나 남았죠?”
“얼마나 긴 항행을 하는지에 달렸지만 이대로라면 앞으로 30년. 그 이후에는 그곳이 어디든지 영원히 떠나지 못하게 될 겁니다.”
“그래서 이 행성을 멸망시킨 겁니까?”
“맞습니다. 그래서 지구화도 시도했고요.”
“그런데 아십니까? 당신들의 계획은 실패했어요. 이곳에서 인류는 살아남지 못합니다.” 뎀베는 시뮬레이션 결과를 불러내 보여줬다. 선장은 눈앞에 뜬 스크린을 뚫어져라 살폈다.
“과학자로서의 명예를 걸고 말하지만, 그 결과는 사실입니다. 조작할 시간도 없었고요. 사실 시투아가 행성 표면에 내려갔다 온 것도 그 시뮬레이션에 필요한 자료를 모으기 위해서였습니다.”
“잠깐. 이건 꽤 장기간의 자료잖아요. 어떻게 이걸 손에 넣었죠?”
“당신네 위성에서 빼낸 건 아니니 걱정하지 마세요, 그런 파쇠 덩어리보다 훨씬 정교한 기구를 행성 표면에 심어놨으니까요. 직접 보시죠, 생물학 전공자가 아닐지는 몰라도 기초 정도는 배웠겠죠, 어려운 것이 아니니 이해하기 쉬울겁니다.”
선장의 얼굴엔 의혹이 가득했다.
“잘 모르시겠다고요? 이쪽에 있는 그래프를 보죠. 토양 샘플, 정확히는 탄화된 나무에서 발견된 겁니다. 보시다시피 토착 생명체는 멸종하지 않았어요. 지금 이 순간에도 맹렬한 속도로 재생하고 있죠. 지금 이 행성은 지구 생명체와 토착 생명체가 전쟁을 벌이고 있습니다. 이곳에 우리가 들어간다면 어찌 될까요. 과연 우리 같은 작고 연약한 존재가 그 전쟁에서 살아남을 수 있을까요?”
“상관 없습니다.”
“상관이 없다니요. 한쪽 생명체가 완전한 승리를 이루든지 아니면 어떤 평형상태에 도달하기까지 우리는 이 행성에서 살지 못합니다. 생각해보세요, 어느 순간에 멀쩡한 공기가 갑자기 독성으로 바뀔지 모르는데 그곳에서 살 수 있을까요?”
선장은 무표정했다. 뎀베는 불안해졌다. 뭔가 잘못 짚었나?
“다시 말씀드리죠, 상관없습니다.”
“네?”
“어차피 우린 어딘가에 식민지를 지으려고 떠난 게 아니었으니까요.”
“그럼 뭐를 위해서 여기까지 오고 그 기나긴 세월을 여행한 거죠?”
“설마 우리 쪽에 당신 같은 생물학자가 없으리라 생각한 것 아니시겠죠?”
“그게 무슨….” 뎀베는 또 한 번 바보 같은 짓을 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럼 당신들도 이미….”
“네, 알고 있었습니다. 어느 강도로 해야 하는지에 대한 데이터가 필요했던 것뿐이죠. 여기도 그냥 실험재료였을 뿐이랍니다.”
“인류 역사상 최강의 대량학살 무기를 만들어놓고 그냥 실험재료라뇨. 지금 장난합니까? 이 행성은 장차 문명을 이룰 가능성이 있었다고요!”
선장은 무표정하게 노려보았다.
“질문하나 하죠, 어차피 안 될 걸 알면서 대체 왜 이런 무기를 만든 거죠?”
“어느 정도의 알큐비어 버스트를 가해야 정확히 행성 표면을 날려버리면서도 다시 인간이 거주할 수 있는 행성으로 만들 수 있을까를 알아내야 했으니까요.”
“아무 소용없다고 내가 말했지 않습니까. 어디를 가더라도….” 뎀베는 무언가를 깨닫고 말을 멈췄다. 어느 곳을 가더라도 이 행성처럼 원주 생명체가 되살아날 것이고 테라포밍은 불가능했다. 이 방법을 쓸 수 있는 곳은 이 드넓은 우주에서 단 한 곳뿐이었다.
“아직 입증되지 않은 이론이라도 괜찮으니 말해봐요.”
“시뮬레이션을 돌려봐야겠지만 알큐비어 드라이브가 레서 노바의 원인이 틀림없다고 생각해요. 세상에…. 우리가 이 행성을 멸망시킨 건가요?”
뎀베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때 자료 분석을 마쳤다는 신호가 떴고 뎀베는 결과를 띄웠다.
노란색 행성이 나타났다. 바루나 호가 도착하고 뎀베가 젊은 석사과정 시절 ‘바위’를 설치한 직후의 영상이었다. 타임라인은 바루나 호가 떠나고 나서 한 달 후까지 아무 변화가 없었다. 행성시로 39일이 되던 날 항성 A9813이 강렬한 입자 방사를 시작했다. 행성의 전리층이 단번에 파괴되었고 이후 수년에 걸쳐 노란색 생명체들이 사멸해갔다. 그리고 생명체들이 전멸한 것으로 보이자 행성의 그림자에 있던 탐사위성이 무언가를 지상에 떨어뜨렸다.
“저게 뭐죠?” 이비가 물었다.
“나도 모르겠군요.” 하지만 뎀베는 짐작 가는 바가 있었다. 아마 지구 생명체의 DNA 씨앗일 것이었다. 자료에는 시투아가 채취한 나뭇가지와 이끼의 분석자료도 있었다, 나뭇가지는 처음 보는 구성이었지만 이끼는 지구의 DNA를 가지고 있었다.
“우리가 멸망시킨 거군요.” 이비는 망연자실한 표정이었다.
“이비, 더 많은 증거와 이론적 뒷받침이 필요할 것 같군요. 항행역학과하고 양자역학과에 연락해줄래요?”
“알겠습니다. 장관님.” 대답한 이비는 밖으로 나갔다.
뎀베는 컴퓨터 화면을 다시 불러내 논문작성기를 켰다. 아무래도 직접 작성할 시간이 없을 것 같다는 예감 때문이었다. 그리고 예감이 정확했다는 것을 알게 되는 데 10분도 걸리지 않았다.
문이 열리고 이비와 다른 사람들이 들어왔다. 그리고 8명째에 선장이 들어섰다.
“이렇게 뵙게 되어서 아쉽군요. 장관님.”
이비는 두려움에 찬 눈빛으로 뎀베에게 도움을 청하고 있었다. 뒤로 수갑을 찬 것 같았다.
“저도 그렇네요. 선장님.” 아트리아 선장은 이 배의 지도자이자 모든 것을 결정하는 최종결정자이며 유사시에는 백만 명이 넘는 시민들의 생사여탈권을 지닌 권력자였다. 선거로 뽑히긴 하지만 인구 비율상 기술자가 더 많아서 과학자가 뽑히는 경우는 없었다.
“아누슈 박사의 연구 때문이군요. 대체 그 연구가 뭐가 중요하다는 거죠? 왜 숨기는 겁니까?”
“결국 우리가 멸망하리라는 거죠. 불행하게도 연료가 다 되어가고 있습니다.”
“언젠가 일어날 일 아니었던가요? 당연한 걸 왜 지금 깨달은 척 하는 겁니까?”
“우리 예상보다 훨씬 빠르게 소모되고 있어요. 원래 500년 이상을 버틸 수 있을 것으로 생각했죠. 우리가 틀렸던 겁니다.”
“얼마나 남았죠?”
“얼마나 긴 항행을 하는지에 달렸지만 이대로라면 앞으로 30년. 그 이후에는 그곳이 어디든지 영원히 떠나지 못하게 될 겁니다.”
“그래서 이 행성을 멸망시킨 겁니까?”
“맞습니다. 그래서 지구화도 시도했고요.”
“그런데 아십니까? 당신들의 계획은 실패했어요. 이곳에서 인류는 살아남지 못합니다.” 뎀베는 시뮬레이션 결과를 불러내 보여줬다. 선장은 눈앞에 뜬 스크린을 뚫어져라 살폈다.
“과학자로서의 명예를 걸고 말하지만, 그 결과는 사실입니다. 조작할 시간도 없었고요. 사실 시투아가 행성 표면에 내려갔다 온 것도 그 시뮬레이션에 필요한 자료를 모으기 위해서였습니다.”
“잠깐. 이건 꽤 장기간의 자료잖아요. 어떻게 이걸 손에 넣었죠?”
“당신네 위성에서 빼낸 건 아니니 걱정하지 마세요, 그런 파쇠 덩어리보다 훨씬 정교한 기구를 행성 표면에 심어놨으니까요. 직접 보시죠, 생물학 전공자가 아닐지는 몰라도 기초 정도는 배웠겠죠, 어려운 것이 아니니 이해하기 쉬울겁니다.”
선장의 얼굴엔 의혹이 가득했다.
“잘 모르시겠다고요? 이쪽에 있는 그래프를 보죠. 토양 샘플, 정확히는 탄화된 나무에서 발견된 겁니다. 보시다시피 토착 생명체는 멸종하지 않았어요. 지금 이 순간에도 맹렬한 속도로 재생하고 있죠. 지금 이 행성은 지구 생명체와 토착 생명체가 전쟁을 벌이고 있습니다. 이곳에 우리가 들어간다면 어찌 될까요. 과연 우리 같은 작고 연약한 존재가 그 전쟁에서 살아남을 수 있을까요?”
“상관 없습니다.”
“상관이 없다니요. 한쪽 생명체가 완전한 승리를 이루든지 아니면 어떤 평형상태에 도달하기까지 우리는 이 행성에서 살지 못합니다. 생각해보세요, 어느 순간에 멀쩡한 공기가 갑자기 독성으로 바뀔지 모르는데 그곳에서 살 수 있을까요?”
선장은 무표정했다. 뎀베는 불안해졌다. 뭔가 잘못 짚었나?
“다시 말씀드리죠, 상관없습니다.”
“네?”
“어차피 우린 어딘가에 식민지를 지으려고 떠난 게 아니었으니까요.”
“그럼 뭐를 위해서 여기까지 오고 그 기나긴 세월을 여행한 거죠?”
“설마 우리 쪽에 당신 같은 생물학자가 없으리라 생각한 것 아니시겠죠?”
“그게 무슨….” 뎀베는 또 한 번 바보 같은 짓을 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럼 당신들도 이미….”
“네, 알고 있었습니다. 어느 강도로 해야 하는지에 대한 데이터가 필요했던 것뿐이죠. 여기도 그냥 실험재료였을 뿐이랍니다.”
“인류 역사상 최강의 대량학살 무기를 만들어놓고 그냥 실험재료라뇨. 지금 장난합니까? 이 행성은 장차 문명을 이룰 가능성이 있었다고요!”
선장은 무표정하게 노려보았다.
“질문하나 하죠, 어차피 안 될 걸 알면서 대체 왜 이런 무기를 만든 거죠?”
“어느 정도의 알큐비어 버스트를 가해야 정확히 행성 표면을 날려버리면서도 다시 인간이 거주할 수 있는 행성으로 만들 수 있을까를 알아내야 했으니까요.”
“아무 소용없다고 내가 말했지 않습니까. 어디를 가더라도….” 뎀베는 무언가를 깨닫고 말을 멈췄다. 어느 곳을 가더라도 이 행성처럼 원주 생명체가 되살아날 것이고 테라포밍은 불가능했다. 이 방법을 쓸 수 있는 곳은 이 드넓은 우주에서 단 한 곳뿐이었다.

“지구로 돌아갈 생각이군요.”
“맞아요. 우리는 고향으로 돌아갈 겁니다.”
“수백억이 넘는 태양계 사람들을 모두 죽이러 말입니까?” 문득 지구의 인구가 생각나지 않았다.
“네. 우리가 떠나온 이유를 잊었나요? 지구는 우리 손이 닿지 않더라도 지금쯤 완전히 멸망했을 겁니다, 차라리 깨끗하게 정화해놓고 다시 시작하는 게 나아요. 다행히 이 배에는 백만 명이나 되는 사람이 타고 있어 유전자 풀에는 아무 문제가 없죠, 그건 장관님이 더 잘 아실 테지만요.”
뎀베는 분노로 손이 떨려왔다.
“이제 어떻게 할겁니까? 나도 시투아처럼 죽일 건가요?”
“아뇨, 그렇게는 못 하죠. 제 권한으로 일반 시민을 막을 수는 있어도 당신은 장관이라 법적 보호를 받는답니다. 아마 모르셨겠지만요. 지금 이렇게 대화를 할 수 있는 것도 다 그 때문이라고 해두죠. 전 잔혹한 살인마가 아닙니다. 교수님.”
“사람을 144명이나 죽이고 지구에 사는 모든 사람을 죽이려고 하는데도 살인마가 아니라는 거군요.”
“네. 이 우주에 우리가 살 수 있는 곳은 지구밖에 없습니다. 적어도 현재로서는요. 언젠가 지구화 기술에 혁신적인 발전이 있다면 이곳으로 돌아와 살아갈 수 있을지도 모르죠. 하지만 아직 그 단계에 이르지 못했어요. 메타연구에 따르면 앞으로도 수백 년은 더 걸릴지 모른다고 하더군요. 그만큼 테라포밍이란 게 어려운 거겠죠. 하지만 이미 지구가 있는데 테라포밍이 왜 필요하겠어요. 그저 태양계로 돌아가 리셋만 시키면 됩니다. 이제 어느 강도로 태양에 입자를 쏟아부어야 하는지에 대한 데이터도 얻었고요. 실행하기만 하면 됩니다. 당신만 입 닫고 있어 준다면 아주 순조롭게 진행될 겁니다.”
뎀베는 잠시 생각했다. 그런 현상이 태양계에 일어난다면 단순히 지구의 생태계가 완전히 파괴되는 것이 문제가 아니었다, 적어도 내행성계에 있는 모든 지구 외 식민지도 같이 파멸할 것이었다.
그들을 막을 길은 없어 보였다. 하지만 멸망에 가담하고도 양심의 가책없이 살아갈 수 있을까? 아니 수년 동안 지구로 가는 여행 동안 매 순간 죽어갈 생명을 생각하지 않고 살아갈 수 있을까?
자신이 없었다. 아마 그건 혼자가 아닐 거라고 뎀베는 생각했다.
“못합니다.” 뎀베는 대답했다. 선장은 얼굴이 굳어졌다. 그때 선장의 폰이 울리기 시작했다.
“뭐죠?” 상대방의 소리가 안 들렸기 때문에 정확히 알 수는 없었지만, 얼굴을 보니 심각한 일 같았다.
“잠시 실례하죠.” 아트리아 선장은 급히 밖으로 나갔다.
선장과 함께 경호원 몇 명은 떠났지만 두 명이 남았고 뎀베의 연구실로 데려가 감금했다. 그리고 물리적으로 모든 통신을 끊어버렸다. 하지만 몇 시간이 지나도 아무도 오지 않았고 아무 연락도 없었다.
혹시 그를 잊어버린 것은 아닐까? 답답함과 초조함, 그리고 좌절감이 찾아왔다.
연구실 간이침대에서 자고 있던 뎀베를 깨운 건 이비였다. 그녀의 얼굴은 흥분으로 상기되어 있었다.
“교수님, 교수님! 일어나세요!”
뎀베가 일어나보니 문 앞을 지키고 있던 선장 쪽 사람들은 바닥에 쓰러져있고 몇 명의 젊은이들이 급조한 전기충격기 같은 것을 들고 있었다.
“이게 무슨 일이죠?”
“교수님 논문이 모두에게 알려졌어요, 다들 들고 일어났다고요!”
이비는 흥분과 기쁨을 주체 못 하는 표정이었다. 뎀베는 바깥에서 큰 소리를 듣고 창문을 열었다. 하늘로 뻗어있는 둥근 콜로니 내벽 여기저기에서 연기가 피어오르고 있었고 내부 공기 순환로를 따라 기묘한 막을 만들고 있었다.
뎀베는 이런 일이 일어나리라고는 전혀 예상하지 못하고 있었다. 이비와 학생들은 학교에서 경찰을 쫓아내기 위해서 뛰쳐나갔고 뎀베는 혼자 남겨졌다. 학교 앞 광장에는 ‘지구를 구하자’라고 쓰여 있는 피켓을 든 학생들 수천 명이 모여 구호를 외치고 있었고 경찰 수십 명이 그 앞에서 당혹한 표정으로 가로막고 있었다. 그들은 시위 진압 같은 것은 해본 적이 없었다. 뎀베는 학생들을 이해할 수 있었다, 그들도 마찬가지였던 것이다. 차라리 몰랐다면 모를까, 알고서도 수백억 명이 넘는 사람을 죽여놓고 그 위에서 기꺼이 살고 싶은 사람은 없었다. 적어도 뎀베는 그런 사람은 없다고 생각하고 싶었다.
에필로그
행성 시투아의 궤도를 돌고 있는 마이아에는 이제 많은 사람이 살고 있지 않았다. 처음 바루나에서 떨어져 나왔을 때는 20만 명의 집이었지만 세월이 흐르고 그들의 후손들은 모두 시투아의 환경에 적응하도록 유전자 조작을 받은 뒤 행성으로 내려가 살고 있었고 직경 20km의 우주 콜로니에는 내려가 살 수 없는 순수 지구인 유전자를 가진 노인들만 남아 있었다.
이젠 수천 명밖에 안 남은 그들은 매일 하늘의 구석에서 희미하게 빛나고 있는 별 하나만을 바라보았다. 그들이 바라는 것은 그 별이 영원히 희미하길 바라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들의 바람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어느 날 그 별이 밝게 빛나기 시작했다. 150년 전 태양계에서 떠난 빛이 이 항성계에 도착한 것이었다. 그 빛은 멸망이었고 죽음이었고 절망이었다.
뎀베는 고통에 눈을 감았다. 바루나를 타고 떠난 자들과의 전쟁도 시투아에서 살아남기 위한 투쟁도 모두 이 정도로 큰 고통을 안겨주지 못했다. 그는 늙은 몸을 일으켜 이미 150년 전에 죽었을 수백억의 사람들을 위해 태어나서 처음으로 두 손을 모아 기도했다.
그리고 지금 그 곳에 살고 있을 사람들과 영원히 만나지 않기를 염원했다.
“맞아요. 우리는 고향으로 돌아갈 겁니다.”
“수백억이 넘는 태양계 사람들을 모두 죽이러 말입니까?” 문득 지구의 인구가 생각나지 않았다.
“네. 우리가 떠나온 이유를 잊었나요? 지구는 우리 손이 닿지 않더라도 지금쯤 완전히 멸망했을 겁니다, 차라리 깨끗하게 정화해놓고 다시 시작하는 게 나아요. 다행히 이 배에는 백만 명이나 되는 사람이 타고 있어 유전자 풀에는 아무 문제가 없죠, 그건 장관님이 더 잘 아실 테지만요.”
뎀베는 분노로 손이 떨려왔다.
“이제 어떻게 할겁니까? 나도 시투아처럼 죽일 건가요?”
“아뇨, 그렇게는 못 하죠. 제 권한으로 일반 시민을 막을 수는 있어도 당신은 장관이라 법적 보호를 받는답니다. 아마 모르셨겠지만요. 지금 이렇게 대화를 할 수 있는 것도 다 그 때문이라고 해두죠. 전 잔혹한 살인마가 아닙니다. 교수님.”
“사람을 144명이나 죽이고 지구에 사는 모든 사람을 죽이려고 하는데도 살인마가 아니라는 거군요.”
“네. 이 우주에 우리가 살 수 있는 곳은 지구밖에 없습니다. 적어도 현재로서는요. 언젠가 지구화 기술에 혁신적인 발전이 있다면 이곳으로 돌아와 살아갈 수 있을지도 모르죠. 하지만 아직 그 단계에 이르지 못했어요. 메타연구에 따르면 앞으로도 수백 년은 더 걸릴지 모른다고 하더군요. 그만큼 테라포밍이란 게 어려운 거겠죠. 하지만 이미 지구가 있는데 테라포밍이 왜 필요하겠어요. 그저 태양계로 돌아가 리셋만 시키면 됩니다. 이제 어느 강도로 태양에 입자를 쏟아부어야 하는지에 대한 데이터도 얻었고요. 실행하기만 하면 됩니다. 당신만 입 닫고 있어 준다면 아주 순조롭게 진행될 겁니다.”
뎀베는 잠시 생각했다. 그런 현상이 태양계에 일어난다면 단순히 지구의 생태계가 완전히 파괴되는 것이 문제가 아니었다, 적어도 내행성계에 있는 모든 지구 외 식민지도 같이 파멸할 것이었다.
그들을 막을 길은 없어 보였다. 하지만 멸망에 가담하고도 양심의 가책없이 살아갈 수 있을까? 아니 수년 동안 지구로 가는 여행 동안 매 순간 죽어갈 생명을 생각하지 않고 살아갈 수 있을까?
자신이 없었다. 아마 그건 혼자가 아닐 거라고 뎀베는 생각했다.
“못합니다.” 뎀베는 대답했다. 선장은 얼굴이 굳어졌다. 그때 선장의 폰이 울리기 시작했다.
“뭐죠?” 상대방의 소리가 안 들렸기 때문에 정확히 알 수는 없었지만, 얼굴을 보니 심각한 일 같았다.
“잠시 실례하죠.” 아트리아 선장은 급히 밖으로 나갔다.
선장과 함께 경호원 몇 명은 떠났지만 두 명이 남았고 뎀베의 연구실로 데려가 감금했다. 그리고 물리적으로 모든 통신을 끊어버렸다. 하지만 몇 시간이 지나도 아무도 오지 않았고 아무 연락도 없었다.
혹시 그를 잊어버린 것은 아닐까? 답답함과 초조함, 그리고 좌절감이 찾아왔다.
연구실 간이침대에서 자고 있던 뎀베를 깨운 건 이비였다. 그녀의 얼굴은 흥분으로 상기되어 있었다.
“교수님, 교수님! 일어나세요!”
뎀베가 일어나보니 문 앞을 지키고 있던 선장 쪽 사람들은 바닥에 쓰러져있고 몇 명의 젊은이들이 급조한 전기충격기 같은 것을 들고 있었다.
“이게 무슨 일이죠?”
“교수님 논문이 모두에게 알려졌어요, 다들 들고 일어났다고요!”
이비는 흥분과 기쁨을 주체 못 하는 표정이었다. 뎀베는 바깥에서 큰 소리를 듣고 창문을 열었다. 하늘로 뻗어있는 둥근 콜로니 내벽 여기저기에서 연기가 피어오르고 있었고 내부 공기 순환로를 따라 기묘한 막을 만들고 있었다.
뎀베는 이런 일이 일어나리라고는 전혀 예상하지 못하고 있었다. 이비와 학생들은 학교에서 경찰을 쫓아내기 위해서 뛰쳐나갔고 뎀베는 혼자 남겨졌다. 학교 앞 광장에는 ‘지구를 구하자’라고 쓰여 있는 피켓을 든 학생들 수천 명이 모여 구호를 외치고 있었고 경찰 수십 명이 그 앞에서 당혹한 표정으로 가로막고 있었다. 그들은 시위 진압 같은 것은 해본 적이 없었다. 뎀베는 학생들을 이해할 수 있었다, 그들도 마찬가지였던 것이다. 차라리 몰랐다면 모를까, 알고서도 수백억 명이 넘는 사람을 죽여놓고 그 위에서 기꺼이 살고 싶은 사람은 없었다. 적어도 뎀베는 그런 사람은 없다고 생각하고 싶었다.
에필로그
행성 시투아의 궤도를 돌고 있는 마이아에는 이제 많은 사람이 살고 있지 않았다. 처음 바루나에서 떨어져 나왔을 때는 20만 명의 집이었지만 세월이 흐르고 그들의 후손들은 모두 시투아의 환경에 적응하도록 유전자 조작을 받은 뒤 행성으로 내려가 살고 있었고 직경 20km의 우주 콜로니에는 내려가 살 수 없는 순수 지구인 유전자를 가진 노인들만 남아 있었다.
이젠 수천 명밖에 안 남은 그들은 매일 하늘의 구석에서 희미하게 빛나고 있는 별 하나만을 바라보았다. 그들이 바라는 것은 그 별이 영원히 희미하길 바라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들의 바람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어느 날 그 별이 밝게 빛나기 시작했다. 150년 전 태양계에서 떠난 빛이 이 항성계에 도착한 것이었다. 그 빛은 멸망이었고 죽음이었고 절망이었다.
뎀베는 고통에 눈을 감았다. 바루나를 타고 떠난 자들과의 전쟁도 시투아에서 살아남기 위한 투쟁도 모두 이 정도로 큰 고통을 안겨주지 못했다. 그는 늙은 몸을 일으켜 이미 150년 전에 죽었을 수백억의 사람들을 위해 태어나서 처음으로 두 손을 모아 기도했다.
그리고 지금 그 곳에 살고 있을 사람들과 영원히 만나지 않기를 염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