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라이브러리









[Origin] 기체 방울 속에 우주와 블랙홀을 재현하다

90여 년 전 한 무명 과학자가 신비로운 물리 현상을 예견했다. 극저온까지 냉각시키면 물질을 이루는 모든 입자가 양자역학적으로 동일한 상태가 되는 보스-아인슈타인 응축체다. 단순히 흥미로운 현상이라고만 여겼던 보스-아인슈타인 응축체가, 최근 물리학의 미해결 문제를 해결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


1925년, 인도 출신의 물리학자 사티엔드라 나트 보스가 논문을 한 편 작성했다. 당시 기술로는 만들 수 없는, 상상과 방정식 속에 존재하는 신비로운 물질에 대한 것이었다. 그는 논문을 왕립학회에 제출했지만 거절 당했고, 다시 알베르트 아인슈타인에게 보냈다. 신의 한 수란 이런 것일까. 아인슈타인은 논문의 진가를 한눈에 알아보고는 직접 독일어로 번역해 ‘물리학저널’에 게재할 수 있도록 주선해 줬다. 그렇게 세상에 나온 이론이 바로 보스-아인슈타인 응축이다.


스스로 역류하는 신비로운 유체?
보스-아인슈타인 응축은 보존(boson)으로 분류되는 입자로 이뤄진 기체를 절대 0도에 가깝게 냉각시켰을 때 새로운 물질 상이 나타나는 현상이다(보존은 양자 역학적 성질에 따른 입자의 한 분류로, 스핀이 정수인 입자다. 반정수의 스핀을 갖는 입자는 페르미온이라고 부른다).

이런 현상의 대표적인 예가 초유체다. 보통의 물질로 이뤄진 기체를 냉각시키면 얼어붙어 고체가 되지만, 양성자 2개와 중성자 2개로 이뤄진 핵을 갖는 헬륨(헬륨-4) 기체는 극저온까지 냉각시켜도 액체 상태로 머문다. 그러다가 영하 271℃(2.2K) 이하로 냉각시키면 점성이 0인 매우 특이한 유체가 된다. 점성이 0이기 때문에 지구 표준 중력에서 밀봉하지 않은 열린 용기에 보관하면, 모세관현상에 의해 열린 구멍을 따라 유체가 바깥으로 기어(?)나온다. 아무런 힘을 주지 않았는데 스스로 역류하는 셈이다!

보스-아인슈타인 응축은 ‘입자의 파동성’으로 설명할 수 있다. 양자역학의 관점에서 입자들은 파동의 성질도 갖는데, 이를 물질파라고 한다. 온도가 낮아질수록 물질파의 파장은 길어지고, 온도가 극도로 낮아지면 물질파의 파장이 입자 사이의 거리를 넘어서면서 물질파들이 중첩되기 시작한다. 그러다 어느 순간 입자들은 하나의 파동처럼 행동하고, 초유체 같은 특이한 성질이 나타난다(138쪽 그림 참조).

예견은 일찌감치 했지만 이 특이한 상태를 실제로 만들기까지는 70년이 걸렸다. 최초의 보스-아인슈타인 응축체는 1995년 미국 국립표준연구소(NIST) 산하 항공물리공동연구소(JILA)의 에릭 코넬과 칼 와이먼이 만들었다. 이들은 2000개 가량의 루비듐 원자로 이뤄진 기체를 레이저냉각(1997년 노벨 물리학상)과 자기증발냉각 기술로 170nK(나노켈빈, 1nK은 10억 분의 1K)까지 냉각시켜 보스-아인슈타인 응축체의 특성을 관찰하는 데 성공했다. 네 달 뒤 미국 매사추세츠공대(MIT) 볼프강 케테를레도 나트륨 원자를 냉각시켜 보스-아인슈타인 응축체를 얻었다. 이 공로로 세 사람은 2001년 노벨 물리학상을 받았다.
 초유체 상태인 액체 헬륨이 컵 안쪽의 벽을 타고 올라 바깥쪽으로 흘러 내리고 있다(노란 화살표).
컵이 완전히 빌 때까지 이런 움직임이 계속된다.


보스-아인슈타인 응축체는 그 자체로도 흥미롭지만, 사실 더 중요한 특성이 있다. 자성이 없는 보존 입자들은 접촉 상호작용(입자의 상대 위치나 방향에 관계 없이, 가까운 거리에서 작용하는 척력)이라는 비교적 단순한 상호작용만 한다. 이런 보존 입자들로 이뤄진 보스-아인슈타인 응축체는 입자들 간의 척력으로 안정적으로 지탱된다. 덕분에 상태를 유지하면서 불확정성 원리가 허용하는 한계 안에서 입자들의 위치와 운동량을 정밀하게 조작할 수 있다.

그런데 이런 특성이 이용되는 의외의 응용분야가 있다. 우주 탄생에 관한 인플레이션 이론이나 블랙홀 증발의 원리인 호킹 복사 이론은 그 효과가 매우 미약해 관측이 어려운 현상이다. 이를 확인하려면 매우 깨끗한 환경에서 오로지 원하는 효과만을 관찰해야만 하는데, 놀랍게도 보스-아인슈타인 응축체는 이 목적에 부합하는 가장 이상적인 시스템이 될 수 있다. 게다가 물리학의 난제인 ‘초 플랑크 영역의 문제’(138쪽 박스 참조)를 해결할 실마리도 제공할 수 있다.

보스-아인슈타인 응축은 입자의 파동성으로 설명할 수 있다. 온도가 낮아질수록 물질파의 파장이 길어지면서 파동처럼 행동한다. 서로 중첩되기 시작한다. 그러다 어느 순간 하나의 파동처럼 행동한다.
 

 
보스-아인슈타인 응축체로 인플레이션 구현한다
최근 필자의 연구팀은 온도 0K, 지름 0.01mm 이하의 작은 기체 덩어리를 활용해 인플레이션 이론을 검증하는 방법을 학술지 ‘피지컬 리뷰 레터스’ 3월 30일자에 발표했다(doi:10.1103/PhysRevLett.118.130404). 인플레이션 이론은 우주 탄생 직후 10-36초부터 10-32초까지 우주가 급팽창했다는 이론으로, 1980년대 이전까지 빅뱅이론이 지녔던 여러 문제점을 해결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사실 인플레이션은 자연상수의 60제곱 정도의 팽창을 의미하지만, 실제로 이를 재현하는 건 불가능하다(만약 지름 1nm인 기체 덩어리를 이 배율로 팽창시키면 지름이 100조 km가 될 것이다). 또, 그런 실험을 해야 할 필요도 없다. 수학적 관계를 활용하면 얼마든지 축소판으로 실험할 수 있기 때문이다. 즉, 기체 자체는 느린 속도로 약간만 팽창하지만, 그 안에 형성되는 굽은 시공간(우주)은 매우 크게 팽창을 하는 것처럼 보이게 된다.

필자의 연구팀은 한 방향으로 정렬된 쌍극자로 이뤄진 기체를, 레이저와 자기장을 이용해 납작한 팬케이크 모양으로 가두는 상황을 설정했다. 쌍극자란 전기적 혹은 자기적으로 서로 반대인 두 극이 아주 가까운 거리를 두고 함께 운동하는 입자다. 자석의 경우에서 볼 수 있듯, 입자들이 어떻게 위치하느냐에 따라 인력이나 척력이 작용한다.

과연 이 상황이 어떻게 초 플랑크 영역의 물리학과 연관된다는 걸까. 입자의 에너지와 운동량 사이에는 특정한 관계가 있다. 우리가 일상적으로 보는 느린 입자들의 경우, 에너지 E와 운동량 P 사이의 관계는 E=P2/2m(m은 입자의 질량)이다. 그런데 쌍극자 모멘트를 갖는 기체(크롬, 에르븀, 디스프로슘 등. 단일 원소로서는 가장 큰 자기 쌍극자 모멘트를 가진 원소들로, 보스-아인슈타인 응축체로 만드는 데 성공한 원소들이다)로 만든 보스-아인슈타인 응축체는 다르다. 운동량이 높을 때 한 순간 에너지가 낮아지는 특이한 현상(로톤 극소점)이 나타난다. 그리고 간단한 조작을 통해 에너지가 꺾이는 정도(로톤 극소점의 위치)를 다양하게 조절할 수 있다. 즉, 일상의 물리학을 나타내는 낮은 운동량 영역의 관계는 유지한 채, 초 플랑크 영역의 물리학을 나타내는 높은 운동량 영역의 관계를 변형시키는 것이다.

자, 이제 모든 준비가 끝났다. 다양한 초기 조건에서 시작한 기체 덩어리가 팽창(인플레이션)을 겪은 뒤, 그 과정에서 나타난 새로운 파동(입자)의 분포가 어떻게 달라지는지 컴퓨터 시뮬레이션으로 분석했다. 초 플랑크 영역의 물리학이 달라짐에 따라 인플레이션 이후 현재 우주의 은하 분포가 바뀌는지 조사한 셈이다. 만약 초 플랑크 영역의 물리학이 일상적인 물리학과 별다른 차이가 없다면 인플레이션 이후 물질분포는 현재 우주에서 나타나는 규모 불변성(프랙탈 같은 자기 유사성)을 나타낼 것이다.

분석 결과, 초기 조건에 따라 새로운 파동의 분포가 달라졌다. 즉, 초 플랑크 영역의 물리학이 바뀜에 따라 현재 우주의 규모 불변성에도 관측 가능한 변화가 나타났다. 이전까지는 초 플랑크 영역의 물리학이 현재 우주에 영향을 주는지 명확하지 않았다. 이번 연구 결과를 통해, 관측으로 얻은 은하 분포의 통계적 성질을 이용해 초 플랑크 영역의 물리학을 역으로 찾아 나갈 수 있다는 확신을 얻게 된 것이다.


기체 방울 속에 우주와 블랙홀을 생성하다
보스-아인슈타인 응축체를 이용해 물리학의 여러 미해결 문제를 탐구하려는 시도가 최근 더욱 활발해지고 있다. 2012년 프랑스 찰스 패브리 연구소 연구팀은 보스-아인슈타인 응축체를 이용해 호킹 복사를 설명하는 ‘동적 카시미르 효과’를 확인했고(doi:10.1103/PhysRevLett.109.220401), 2013년 미국 시카고대 물리학과 쳉친 교수팀은 극저온 양자 기체를 이용해 ‘샤카로프 진동(우주배경복사에서 나타나는 특별한 피크)’을 확인했다(doi:10.1126/science.1237557). 가까운 미래에 인플레이션 이론을 검증하는 실험도 이뤄질 것으로 보인다. 인류는 뛰어난 상상력을 바탕으로 기체 방울 속에 우주와 블랙홀을 생성해 마지막 난제에 조금씩 다가서고 있다.


우베 피셔(Uwe R. Fischer)_uwerfi@gmail.com
독일인 이론물리학자. 2009년부터 서울대에 재직 중이다. 독일 튀빙겐대에서 박사학위와 조교수 자격을 받았다. 핀란드 헬싱키대, 미국 일리노이대 어바나-샴페인, 오스트리아 인스부르크대에서 박사 후 연구원을 지냈다. 지난 1000년 동안의 음악을 매우 사랑한다.

최석영_
seokyeong.choe@gmail.com
서울대 물리천문학부 박사과정 연구생. 미국 항공우주국(NASA)에 가고 싶어 물리학을 택했다. 물리와 수학을 복수전공했고, 주말에는 중고등학생들에게 물리를 가르치고 있다. 걷기, 그림 그리기, 글쓰기를 좋아한다. 고양이를 많이 그려 넣은 물리 교재를 쓰는 것이 꿈이다.

이 기사의 내용이 궁금하신가요?

기사 전문을 보시려면500(500원)이 필요합니다.

2017년 06월 과학동아 정보

  • 우베 피셔(서울대 물리천문학부 교수), 최석영(박사과정 연구원)
  • 에디터

    우아영

🎓️ 진로 추천

  • 물리학
  • 천문학
  • 화학·화학공학
이 기사를 읽은 분이 본
다른 인기기사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