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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아이덴티티에서 소년 케빈은 나약한 아이였고 어릴 적 학대를 받은 경험이 있다. 무의식의 작용으로 자신을 지켜줄 방어막이 작동한 것일까. 그의 머릿속에서는 활달한 패션디자이너 베리와 당뇨병 환자 제이드, 9살 꼬마 헤드윅, 날카로운 것에 집착하는 여자 패트리샤, 성도착증이 있는 데니스, 짐승처럼 잔인한 비스트 등 24개의 인격이 살고 있다. 인격들끼리 머릿속에서 이야기를 주고받으며 서로의 존재를 알고 있는데, 다른 인격이 몸을 지배할 때 무슨 일을 했는지는 알지 못한다. 또 인격이 달라짐에 따라 제이드일 때는 당뇨를 앓기도 하고 비스트가 지배할 때는 무쇠처럼 신체가 단단해지기도 한다. 이게 과학적으로 가능한 걸까.


다중인격의 본명, 해리성 정체감 장애
‘내가 누구인가?’에 대한 자기인식을 정체성이라고 한다. 간혹 한 사람 속에서 정체성이 분리돼 여러 개가 존재할 수 있는데, 이것이 흔히 다중인격이라 불리는 해리성 정체감 장애다.

영화 속 케빈처럼, 해리성 정체감 장애를 앓는 사람은 장애 이전부터 존재했던 본래의 정체성인 주 정체감과 장애로 인해 생겨난 교체 정체감을 가지고 있다. 보통 기억상실이 동반되기 때문에, 각각의 인격이 나타났을 때는 다른 인격이 한 일을 알지 못한다. 학대나 납치의 경험 등 심리사회적 스트레스에 의해 발생하는 경우가 많으며, 한 인격에서 다른 인격이 되는데 몇 초 정도의 시간이 걸린다.

이런 특성을 이용해 많은 범죄자가 자신을 해리성 정체감 장애라고 주장하며 처벌을 피하려고 시도했다. 실제로 지금까지 발견된 해리성 정체감 장애 환자 대부분이 법을 벗어난 행동을 저질렀다.

지난해 3월 타계한 심리철학자 힐러리 퍼트넘은 1986년에 해리성 정체감 장애 환자의 97%가 아동기에 학대 경험이 있으며, 그중 83%는 성적학대 경험이 있다는 논문을 발표했다.

물론 환자의 어릴 때 기억이 왜곡됐을 수 있고 당시 병원을 찾지 않았다면 객관적인 기록도 없다. 또 신체적이나 성적 학대의 책임이 있는 성인들이 그런 사실을 대부분 부인하고 있어 논란의 여지도 있다. 다만 학대받은 아동이 보통의 아이보다 성장하면서 이 증상을 더 많이 겪고 남아보다 여아에서 3~9배 이상 높게 나타난다.

영화에서 배우 제임스 맥어보이는 말투와 옷 스타일, 표정 등으로 각 인격의 개성을 표현했다.
위쪽부터 시계방향으로 냉혹한 성격의 데니스, 예민한 여성인 패트리샤, 장난끼 가득한 소년 헤드윅.

 

인격이 달라지면 신체적 특징도 바뀌나
영화에서 24번째 인격 비스트는 마치 헐크가 흥분하면 근육이 굵어지듯 칼이나 총알이 소용없을 정도로 신체가 강해진다. 또 데니스의 인격일 때만 초콜릿 알레르기 반응을 보이기도 했다.

영화에 묘사된 신체 변화 중 일부는 실제로도 가능하다. 해리성 정체감 장애 증상에 대한 사례 연구 결과를 보면, 실제로 인격이 변했을 때 알레르기 반응이 나타나기도 했다. 이에 따라 2013년 새로 나온 정신질환 진단 및 통계편람(DSM-5)에서는 해리성 정체감 장애진단 요건에 ‘신체의 운동기능 변화’라는 말이 포함됐다.

하지만 김상욱 대한정신건강의학과의사회 이사(정신과 전문의)는 “신체변화는 충분히 가능한 얘기지만, 총알도 뚫을 수 없는 헐크 같은 극적인 변화는 영화적인 요소로 판단된다”고 설명했다.

신체의 생물학적인 변화가 발생하는 이유는 아직 모른다. 현재는 이 장애가 신경계와 연결된 것으로 보고 있으며, 특히 기억과 관계되는 뇌 속 해마의 신경망이 스트레스에 의해 변했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각각의 인격은 서로를 알고 있을까
23아이덴티티의 주 정체감인 케빈은 1977년 납치와 강간 혐의로 기소됐던 실존 인물 빌리 밀리건의 사례를 토대로 했다. 빌리는 8살 때 양부에게서 성적 학대를 당했고, 20년 뒤 상황에 따라 다른 24개의 정체감을 가지게 됐다고 알려졌다. 빌리에게서 관찰된 교체 정체감은 양부를 죽이는 것이 목표인 에이프릴과 사기꾼 앨런, 3세의 영국 소녀 크리스틴, 예술가 토미 등이었는데, 그는 다른 정체감들을 전혀 모른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영화 속 케빈은 비록 그들이 무슨 일을 하는지는 몰랐지만 다른 인격의 존재는 확실히 알고 있었다. 영화에선 머릿속에 불 켜진 방이 있고 의자에 인격들이 앉아 있으며, 서로가 어떤 성격을 가졌는지 알고 있는 것으로 묘사돼 있다. 그 방에 불빛을 움켜잡는 인격이 신체를 지배한다. 이에 대한 과학적 해석은 현재까지 이뤄지지 않았고, 정신분석학적 설명은 다음과 같다.

심리학자 어네스트 힐가드는 1977년 발표한 ‘분리된 의식:사람의 생각과 행동의 다양한 통제’라는 책에서 지금은 신해리이론이라 불리는 가설을 세웠다. 힐가드는 “한 정체감이 다른 정체감을 인식할 수 있다”며 “각 교체 정체감이 의식 속에서 얇은 수직 장벽을 경계로 늘어서 있어 그 장벽을 벗어나 서로 만날 수 있다”고 설명했다. 한 교체 정체감이 의식을 차지했을때, 다른 정체감이 완전히 억압된 채로 있지 않고 의식 속에서 자유롭게 이동한다는 발상이었다.

데니스가 상담사인 정신과의 플래처 박사를 찾아갔다. 자유분방한 예술가인 베리의
인격이라고 속이려 하는 데니스를 플래처 박사가 의심스럽게 바라보고 있다.

 

불쌍한 케빈, 치료할 수는 없나
우선 생물학적 치료법은 연구된 게 거의 없다. 대신 우울함이나 불안한 감정을 감소시키는 데 사용하는 약물이나 기억을 회복시키는 데 도움을 주는 바르비투르산염, 벤조디아제핀, 로라제팜 등을 처방하기도 한다.

해리성 정체감 장애 치료의 성공 여부는 환자의 노력에 달렸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환자가 기존의 주 정체감을 회복하기 위해 과거의 충격적인 경험과 여러 분리된 감정을 통합하는 노력을 해야 한다.

김상욱 이사는 “혼자서 어렵다면 지속적인 상담이나 최면치료를 통해 여러 분신을 공정하게 마주하고 감정을 처리해 가야 할 것”이라며 “주변 인물들도 정서적 안정감을 갖도록 도와줘야 한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