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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ech & Fun] 모자를 벗지 않는 사람들

Science Fiction


 
적이 살의를 품고 있다는 건 총탄의 궤적으로 확실히 구분할 수 있었다. 탄환들은 방금 전까지 윤환의 머리가 머무르던 곳을 관통했다. 윤환은 벽 뒤에 몸을 숨기고 총의 배터리와 잔탄 수를 확인하면서 한숨을 쉬었다. 수동으로 명중률을 높이려면 반드시 호흡을 조절해야 했다. 그는 그 사실을 육체에 익히기까지 오 년이 걸렸다. 그가 들고 있는 총의 자동 조준 장치는 주인의 요구를 충족시켜주지 못했다. 짧게 끊어서 세 번 숨을 내쉬고, 코로 들이쉬면서. 방아쇠를 반쯤 눌렀다가 다시 힘을 주면….

윤환이 발사한 총탄은 원하는 곳에 전부 명중했다. 군복을 입은 세 사람이 각자 다른 자세로 쓰러지거나 넘어졌다. 한 명은 무릎 밑이 파열하며 앞으로 고꾸라졌고, 다른 한 명은 방아쇠울에 달라붙어 있던 손이 날아갔고, 마지막 사람은 왼쪽 가슴 부위가 통째로 몸에서 이탈했다.

윤환은 다른 인기척이 없는지 확인하느라 잠시 더 기다렸고, 벽 뒤에서 걸어 나와 바닥에 널부러진 육체들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터지고 찢어진 세 사람의 혈관에서 피가 쏟아지며 웅덩이를 만들고 있었다. 윤환은 피로 그득한 가마솥 속에서 팔다리가 새로 만들어지는 것 같은 착각을 맛보았다. 그는 머리를 세차게 내저어 그런 환영을 떨쳐버렸다. 그런 다음 가마솥 한복판에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아서 희생자들의 베레모를 살펴봤다. 유탄이나 파편에 맞아 손상된 모자는 없었다. 의도한 그대로였다.

그는 안도의 한숨을 쉬고, 슬픔으로 입술을 깨물며 생각했다. 죄가 셋 늘었군. 죄는 이렇게 셀 수 있지만 벌은 어떻게 계측할 수 있을까. 우리는 아직도 그 문제를 해결하지 못했지만, 유형지 사람들은 오래 전부터…. 윤환은 세 개의 육체에 등을 돌렸다. 지금 이 순간 멈춰야할까? 아니면 마지막 목표를 향해 앞으로 나아가야 할까? 다수의 선택이 옳은 걸까? 아니면 지금 내가 육체를 파괴하고 있는 이 자들의 생각이 옳은 걸까. 그 두 가지 선택사항은 원만히 타협을 보는 법이 없었다. 윤환은 그럴 때마다 자신에게 햇빛과 양분을 공급하는 대지를 핑계로 삼았다. 유형지에 있으니 유형지의 법을 따라야지. 이곳 사람들은 이럴 때 포기하고 그만두는 법이 없으니까. 윤환은 셋 가운데 누구도 죽지 않았다는 걸 확인하고 베레모 세 개를 주워 가방에 넣은 다음 이어지는 복도로 이동했다.


더 이상 움직이지 못 하는 육체를 몇 개 더 늘리고, 죄를 그만큼 더 쌓고 나서 윤환은 마지막 복도 끝에 있는 문 앞에 섰다. 문에 설치된 자물쇠는 전혀 작동하지 않았다. 광활한 이 나라 영토에서 가장 깊고 은밀한 장소이건만, 그 문에 도착할 때까지 잠긴 곳은 하나도 없었다. 윤환은 사진과 영상으로만 확인했던, 높고 견고하며 이국적인 복도를 곁눈질로 살피면서 한 손으로 문을 밀었다.

문이 열리자 사람 형체 둘이 그를 맞이했다. 한 명은 의자에 앉아서 윤환을 지켜보고 있었고, 다른 한 명은 건반악기라도 연주하려는 것처럼 특수한 목적에 사용하는 탁자에 손을 얹고 있었다. 의자에 앉은 사람이 말했다.

“왔군요, 재판장. 소거법을 충실히 지켰을 테니 정확히 스물두 개의 죄를 더하고서. 이제 하나만 추가하면 모든 사태가 정리되겠죠.”

윤환은 그 사람에게 부여된 두 개의 이름을 동시에 떠올렸고, 규칙에 따라 이 땅에서 새로 부여받은 이름으로 지칭하기로 마음 먹었다. 의자에 앉은 사람의 이름은 ‘진양’이었다. 하지만 서 있는 또 한 사람의 이름은 알 수 없었다.

윤환은 보푸라기가 잔뜩 붙어 있는 회색 비니를 고쳐쓰고 말했다.

“둘이겠지. 저기 서 있는 사람까지.”

진양은 고개를 젓고 손가락을 들어 가리켰다.

“저 육체를 총으로 쏜다고 해서 죄가 추가되진 않을 겁니다. 잘 보세요. 모자도 제대로 쓰고 있지 않잖아요. 저건 말 그대로 도구에 불과합니다. 핵미사일을 발사하려면 두 사람이 동시에 레버를 돌려야하거든요. 저게 할 수 있는 행동이라고는 내 신호에 맞춰서 레버를 돌리는 것뿐이에요.”

“하지만 저걸… 저 육체를 죽여도 죄가 되지 않는다면 우리가 여기서 해왔던 모든 일을 부정하는 거나 마찬가지야.”

진양이 윤환에게서 눈을 떼고 살짝 고개를 돌렸다. 진양의 얼굴이 창백해지더니 반사광을 냈다. 윤환은 자신이 도착하기까지 그가 영상을 보고 있었다는 걸 깨달았다. 이렇게 중요한 순간 봐야 할 영상이라면 하나밖에 없었다. 앞으로 이 행성에 사는 모든 이들의 행동에 영향을 줄 영상. 두 번 다시 보고 싶지 않았지만 모든 이에게 공개할 수 밖에 없는 영상. 그 영상이 공개되었다는 건 진양을 추적하기까지 너무 오랜 시간이 걸렸다는 뜻이기도 했다. 윤환은 본래 예정된 공개 시간 이전에 임무를 완수하고 니샤를 찾아갈 생각이었다.

윤환은 영상이 떠오른 화면을 돌아보기 전에 거의 기계적으로 진양의 손을 관찰했다. 진양의 두 손은 무릎 위에 얌전히 올라가 있었다. 고개를 돌려 영상의 내용을 확인하는 순간 그가 총을 쏜다면 윤환은 피할 수 없었다. 하지만 그는 진양이 아직 마음을 정하지 않은 거라 짐작했다. 철저하게 저항을 계획했다면 방어가 이리 허술하지 않았을 테고, 자물쇠가 전부 잠겨 있었을 테고, 윤환이 문 안으로 들어오기 전에 두 개의 레버가 동시에 돌아갔을 것이다. 지금 여기서 멈출 것인가. 그렇지 않으면 끝까지 나아갈 것인가.
유형지 사람들이라면 후자를 선택했을 테고, 진양은 아직도 마음을 정하지 않고 있었다. 윤환과 마찬가지로.

윤환은 총구를 아래로 내리고 천천히 돌아섰다. 소리 없이 움직이는 그림이 눈에 들어왔다. 화면 좌우에는 이제 자연스럽게 해석할 수 있는 문자와 숫자가 흐르고 있었다. 유형지 네트워크가 닿는 곳에서 많은 사람들이 똑같은 영상을 보고 있을 터였다. 윤환은 이어지는 내용을 아주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눈을 감았다. 진양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렇지 않아요. 나도 저 사건을 부정하자는 게 아닙니다. 당신과 나는, 우리 모두는 저 때까지도 하나였으니까. 우리는 엄청난 사건에 원인을 제공했습니다. 그것도 하필이면 우리가 추구하던 목표에 정확히 반대되는 일을 저지른 셈이잖습니까.”

윤환은 굳이 육체를 통해 보지 않아도 영상의 내용을 처음부터 끝까지 떠올릴 수 있었다. 그가 쓰고 있는 비니와 그 속에 있는 자그마한 뇌 속에서는 나머지 영상이 저 혼자 재생되고 있었다. 그 안에는 일어나서는 안 될 일, 일어날 확률이 그야말로 0에 가까운 일이 정확히 기록되어 있었다. 이제 영상 속에서는 이곳, 유형지, 지구에서 태어난 모든 이를 태운 거대 우주선이 궤도를 막 벗어났겠지. 승무원들의 기대와 불안은 최고조에 달했을 테고, 관성 비행 상태에 도달하기만 하면 한시름 놔도 된다는 의견이 슬슬 돌겠지 그렇게 해서라도 안심해야 멀고 먼 여행을 떠날 수 있을 테니까. 뒤에 남겨놓은 것들을 잊고 앞날만을 생각하려면 기나긴 시간이 필요할 테고, 불안한 세월의 피로를 조금이라도 줄이려면 그럴 수밖에 없었겠지.

그 때 우주선 측면에서 조금씩 일그러지기 시작한 시공간이 뭘 뜻하는지 깨달은 사람은 얼마나 됐을까.  진로를 바꿔야 한다고 생각한 사람은 몇이었을까. 능동추진에서 관성추진으로 전환하는 순간 방향을 바꾸는 게 과연 가능한지 계산해본 사람이 있기는 했을까? 그랬다한들,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 파악할 시간이 있었을까? 드론들의 기록에 따르면 지구에서 태어나 지적인 활동을 할 수 있는 모든 이들이 탔던 우주선은 3.75초만에 분해되었다. 시공간의 일그러짐은 거의 영향을 받지 않고 확장되어 제대로 웜홀을 형성했다. 바로 그 순간 지구는 유형지가 되었고 윤환과 모자를 벗을 수 없는 모든 사람들의 죄가 시작되었다.

진양은 눈을 감은 윤환이 무엇을 떠올리는지 잘 알고 있었다. 한때 그도 윤환과 하나였으니까. 진양은 의자 옆에 붙어 있는 총에 손을 뻗지 않고 기다렸다. 지금 윤환을 쏘고, 핵미사일 제어장치 앞에 선 육체에 신호만 보내면 강력한 무력 시위를 시작할 수 있었다. 지구인답게. 하지만 진양은 머뭇거렸고, 그 머뭇거림이 이미 승복했다는 신호임을 새삼 곱씹었다. 윤환이 눈을 떴고 진양이 입을 열었다.

“우리가 뒤를 이으면 안 되는 겁니까? 재판관, 당신도 이해는 하잖습니까. 내가 왜 이런 지하 방호소까지 와서 지도자가 되려 했는지. 저들은 실패할 겁니다. 하지만 우리는 다를 겁니다. 그런데도 안 되는 겁니까?”

윤환은 진양을 똑바로 마주보았다. 물론 그는 진양을 이해했다. 그리고 공감하지 않았다. 이해와 공감은 전혀 다른 행위였다. 지구의 희망을 전부 담았던 우주선 ‘신성호’가 그런 최후를 맞지 않았다면 공감했겠지만, 과거는 바꿀 수 없었고 죄와 벌 역시 번복할 수 없었다.

“바로 그 점에 동의할 수 없었기 때문에 내가 여기까지 찾아온 거야.”

윤환은 총을 들고 방아쇠를 네 번 당겼다. 그럴 필요까지는 없었는데도. 그는 한 발 대신 네 발을 발사한 행동에 다분히 감정이 섞였음을 스스로 시인했다. 좋지 않은 징조였다. 모자를 벗을 수 없는 사람이라면 다 마찬가지였지만 특히 윤환은 그러지 말아야했다. 그는 재판관이고 집행관이기 때문에.

진양은 반격할 생각도 하지 않은 채 차분히 사선에서 기다렸고, 두 팔과 두 다리가 끊어졌다. 그의 몸은 피 때문에 천천히 미끄러지더니 결국 의자에서 떨어졌다. 더 늦기 전에 마무리를 지어야 해. 또 이런 일이 벌어지면 나는 상대의 얘기를 끝까지 들어보지 않고 총을 쏠지도 몰라. 윤환은 느린 동작으로 진환의 육체에서 베레모를 회수했다. 그리고 핵미사일 발사 시스템이 가득한 방의 전원을 모두 내렸다. 그가 방에서 나가는 동안 제어장치 앞에 서 있는 육체는 꼼짝도 하지 않았다. 그 육체는 누군가가 다시 찾아와 조종하지 않는 한, 근섬유의 긴장이 풀어지고 무너지기 전까지 그대로 멈춰 있을 터였다.


*

니샤는 아삼 차에 감초와 생강을 넣은 다음 연유와 물로 농도를 맞췄다. 이미 수백 번 만들어 본 짜이였기 때문에 냄새만으로도 맛이 어떨지 예상할 수 있었다. 혼자 마실 짜이라면 생강을 넣지 않았겠지만, 그녀는 윤환이 유별나게 생강을 좋아한다는 걸 알고 있었다. 회색 비니를 깊이 눌러 쓴 윤환은 저도 모르게 입맛을 다시면서 니샤가 건넨 찻잔을 받아들었다. 니샤는 뒤로 조금 물러선 다음 힘줄이 불거진 손으로 자신이 앉을 의자를 잡아당겼다.

니샤는 세 번 머뭇거리며 단어를 고르다가 마침내 말을 꺼냈다.

“보통 실내에선 모자를 벗는 게 예의라고 하더군요. 어제 데이터베이스를 조사해보고 그 사실을 알았어요.”

윤환은 본론을 곧장 꺼내지 않고, 그렇다고 무관한 얘기를 꺼내며 횡설수설하지도 않는 니샤를 새삼 기쁜 마음으로 바라보며 대답했다.

“그래요. 우리는 그럴 수 없지만. 그 차이점을 제대로 이해한다면 이제 배울 건 별로 남지 않았겠군요.”

니샤는 자신보다 피부색이 옅고 근육량이 많은 윤환의 몸을 물끄러미 쳐다보다가 손을 뻗었다. 윤환은 눈을 조금 치켜뜨고 손톱에 흙이 끼어 있는 니샤의 손가락을 보았다. 그녀는 가끔씩 호미를 들고 건물 옆에 있는 텃밭을 직접 손질했는데, 화나는 일이 있을 때면 더 오랜 시간 동안 호미를 격하게 휘두르다가 제 손을 상하곤 했다. 지금 니샤의 손에는 갓 생긴 상처가 많았다.

그녀가 물었다.

“만져봐도 돼요?”

“몸을?”

“예.”

“좋을 대로.”

니샤는 윤환의 팔을 쓰다듬었다. 솜털이 느껴지자 조금 소름이 돋았지만 그녀는 움직임을 멈추지 않았다. 그녀의 손끝은 윤환의 팔에서 겨드랑이로, 가슴에서 복부로 이동했다. 그리고 다리를 더듬다가 사타구니 근처에서 머뭇거렸다. 윤환이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

“거부감이 있죠?”

“예.”

“아주 좋아요. 이로써 걱정거리를 하나 더 덜었군요.”

“거부감을 느끼는 게 자연스럽단 얘기군요.”

윤환은 차를 한 모금 마시고 생강의 자극을 음미한 다음 말했다.

“그래야 해요. 그리고 거부감은 모두에게 똑같지는 않을 거예요. 앞으로 그런 거부감이 전혀 없는 사람을 만날 수도 있을 테고요. 혹시 저 탁자에 있는 뜨거운 물을 나에게 끼얹고 싶은 생각은 들지 않나요? 그보다 더 격한 감정도 상관없어요. 내게 상처를 입히고 싶은 생각은?”

니샤는 손을 거두고 의자에 몸을 묻으며 화를 삭였다.

“그래야 자연스러운 건가요?”

“그건… 우리가 대답할 수 없는 질문이에요. 스스로 느끼고 결정해야겠죠. 점검 목록에 있긴 하지만 당신에게 암시를 너무 많이 줄 순 없어요. 그랬다간 모든 게 무의미해지니까.”

윤환은 찻잔을 내려놓았다. 이번엔 니샤가 생강 대신 꿀을 넣은 짜이를 조금씩 마셨다. 윤환이 말했다.


“니샤. 하고 싶은 얘기가 있으면 해요. 우린 그런 사이 아닌가요?”

니샤는 아랫입술을 깨물다가 찻잔을 거칠게 내려놓았다.

“그저께 네트워크에 퍼진 동영상은 당신들이 올린 거죠?”

윤환은 여러 해 동안 가르치고 의견을 나눴던 니샤의 반응을 천천히 살핀 다음 그녀의 자제력에 만족하며 대답했다.

“맞아요. 그걸 올리자는 결정에 나도 참여했어요.”

“영상이 퍼지면서 하루 동안 아주 많은 글이 올라왔어요. 지금은 거의 모든 사람들이 그 얘기만 하고 있죠. 이상한 건 말이죠. 처음에는 주의를 끄는 영상이 아니었어요. 컴퓨터 그래픽으로 작업한 영상들이야 얼마든지 있으니까요. 그런데 몇 사람이 그 영상에 이상한 설명들을 붙이기 시작했어요.”

니샤가 윤환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그 설명엔 당신들에 관한 얘기도 있었어요.”

윤환이 말했다.

“어떤 설명이 제일 그럴듯 하던가요?”

니샤는 질문을 잘 생각해보았다. 윤환은 어떤 설명을 믿느냐고 묻지 않고 어느 것이 제일 그럴듯하냐고 물었다. 진실 여부보다는 설득력이 중요하다는 뜻이었다.

“우리가 정말로 솔직히 털어놓는 사이라면 그런 질문보다는 사실을 얘기해줘요. 지금까지는 당신이 너무나 많은 걸 가르쳐줬기 때문에 나를 늘 평가해도 별 다른 말을 하지 않았어요. 그럴 만한 이유가 있을 거라 생각했죠. 하지만 이제는 상황이 달라졌다는 걸 느낄 수 있어요. 질문에 대답해주세요. 어떤 설명이 진실인가요?”

윤환은 마지막으로 생강 냄새를 음미한 다음 서운한 표정으로 자리에서 일어섰다. 마음에 드는 냄새를 기억하는 것과 직접 맡는 것은 분명히 달랐다. 이제 짧은 시간이 지나고 두 번 다시 회색 비니를 쓸 수 없게 돼도 생강 냄새라는 자료는 영원히 남겨둘 수 있었다. 하지만 냄새를 직접 맡을 기회는 영영 돌아오지 않을 터였다.

“니샤, 우리와 당신들의 차이를 아는 대로 얘기해줘요.”

“내 질문에는 답하지 않을 건가요?”

“그것만 얘기해주면 나도 대답할게요.”

니샤는 조금 불안한 심정으로 말했다.

“당신들은 아주 많은 걸 알고 있어요. 우리에게 더없이 친절했고, 뭐든지 가르쳐줬죠. 사실 당신들과 우리를 구분하게 된 것도 그리 오래 전 일은 아니잖아요? 각자가 아는 지식에는 차이가 있고, 배우는 사람이 있으면 가르치는 사람도 있는 법이니까. 하지만… 모자가 달랐어요. 우리는 모자를 벗지 않는 사람들이 있다는 걸 알게 됐죠. 이를 테면 나는 모자를 마음대로 쓰고 벗을 수 있지만 당신은 절대로 그 낡은 비니를 벗지 않잖아요. 실내에서든, 바깥에서든. 그리고… 당신도 소문은 알고 있죠? 당신들은 모자를 벗으면 죽는다는 소문.”

윤환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대답했다.

“다들 그렇게 알아주면 고맙겠군요. 하지만 당신과 친구들은
달라요, 니샤. 그동안 공부하면서 사람에게는 지도자가 필요하다는 걸 배웠죠? 우린 당신이 이 나라의 지도자를 맡았으면 좋겠어요. 그래서 당신은 진실을 알고 있어야 해요.”

니샤는 그동안 윤환에게서 비슷한 암시를 여러 차례 받았다. 당신은 달라야 해요. 더 멀리 내다보세요. 사람들의 반응을 먼저 생각하세요.  그 조언에 대해서도 물어볼 게 많았지만, 니샤는 윤환의 말을 막지 않고 기다렸다.

“우리는 모자를 벗어도 죽지 않아요, 니샤. 모자가 곧 우리니까. 우리를 죽이려면 모자를 태워야해요.”

니샤는 멍하니 그의 얘기를 듣다가 긴장이 풀리는 바람에 실소를 터뜨렸다.

“말도 안 돼요. 모자는 말을 할 수 없잖아요?”

그녀는 함께 웃어달라는 표정을 지으며 윤환을 바라봤지만 그는 얼굴을 딱딱하게 굳히고 발코니로 이어지는 문을 노려보았다.

 

 
“여긴 답답하군요. 바람 좀 쐴까요?”

윤환은 니샤의 대답을 듣지 않고 일어서더니 발코니로 나가 난간 앞에 섰다. 니샤는 여느 때와 다른 분위기 때문에 더 이상 농담을 하지 않고 윤환의 옆에 자리를 잡았다. 윤환은 거리에서 분주하게 움직이는 사람들을 유심히 바라보다가 입을 열었다.

“우리는 당신들에게 아주 많은 걸 가르치고, 여러 가지 얘기를 들려줬어요. 하지만 그건 본래 당신들의 재산이고 당신들의 이야기예요. 이번에는 조금 다른 얘기를 해줄게요. 드레이크 방정식은 알고 있죠? 당신은 그쪽에 흥미가 많으니까.”

니샤는 다시 불길한 예감에 휩싸이기 시작했다. 이틀 전 퍼진 문제의 동영상 설명도 비슷한 얘기로 시작했기 때문이다.

“인간과 교신할 수 있는 지적인 외계 생명체의 수를 계산하는 방정식이죠. 아주 관념적이고 추론에 근거하고 있어서 방정식이라고 볼 수도 없는….”

“맞아요. 거기서 제일 중요한 변수가 뭐죠?”

“동영상 설명이라면 나도 여러 번 읽었어요. 어떤 게 진실인지 얘기해주세요.”

“니샤, 당신이 정말로 진실을 이해하고 우리에게 조금이라도 공감하려면 내가 말하는 순서를 따라와줘요. 드레이크 방정식에서 가장 중요한 변수가 뭐죠?”

“… L이죠. 그 모든 조건을 충족하는 외계 문명이 존속하는 기간.”

“통신이란 쌍방이 주고 받아야 이뤄지니까 반대편에서 보기에도 마찬가지겠죠? 즉 통신은 지구와 외계 문명이 공존하는 기간에, 상대성 원리의 제약을 받는 통신 시간을 더한 기간 동안만 이뤄질 수 있어요. 따라서 L값이 아주 작으면 이 우주에 꽤 많은 문명이 발생했다 한들 모두 외롭게 죽어갈 테고요.”

니샤는 네트워크에 올라온 세 가지 설명을 되새기며 말했다.

“인생이란… 원래 외롭다고 수많은 철학자들이 말했죠. 당신이 가르쳐줬잖아요. 우주라고 다를 리가 없죠.” “그걸 바꿔보자고 생각한 사람들이 있었어요. 처음부터 그럴 생각은 없었지만, 기술이 빠르게 발전해서 생화학적인 육체를 벗어나 전자기 형태로 옮겨간 사람들이었죠. 그들은 우주에 필연적으로 깃들어 있는 외로움의 간격을 줄여보자고 생각했어요. 그 사람들은, 당신은 그들의 사고방식에 공감하지 못하겠지만, 확률과 숙명을 동시에 믿고, 그렇게 기술이 발달했으면서도 죄와 미덕, 벌과 보상을 정량화시키는 데에 어려움을 겪었어요.”

니샤는 윤환의 이야기가 네트워크에 올라온 동영상 설명들보다 조금 더 상세하다는 사실을 알아챘다. 윤환은 말을 이어갔다.

“어쨌든 그 사람들은 인공 웜홀을 이용해서 광속의 한계를 돌파하고 은하계를 누볐어요. 외계 문명의 징조가 있는 곳이라면 어디든지 갔죠. 한창 발달하고 있거나 잘 생존하는 문명을 찾으면 기록만 남기고 떠났어요. 멸망을 앞둔 종족이 있으면 최후를 맞지 않도록 최소한의 도움을 제공했고요. 하지만 이미 사멸한 종족은 그대로 뒀어요. 죽은 문명을 되살린다는 건, 본래대로 되돌리는 게 아니라 본질 자체를 바꾸는 거니까. 적어도 그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했어요. 그리고 어느날, 그 사람들은 이곳 태양계에 웜홀을 만들고, 우주선 안에 전자기 육체를 담고 날아왔어요. 그 순간 확률이 0에 가까운 일이….”

니샤는 지금까지 윤환이 해준 얘기와 네트워크에서 크게 관심을 끌고 있는 영상을 결합시켜보았다. 윤환이 자신을 공격하고 싶은 욕구가 생기지 않느냐고 물었던 것도 떠올랐다.

니샤는 바싹 말라가는 입술을 핥으며 말했다.

“ ‘그 사람들’이라고 부르지 않아도 돼요.”

윤환은 그녀를 바라보고 고개를 끄덕였다.

“지구인들은 멸종을 눈앞에 두고 있었어요. 흡혈 곤충을 매개체로 삼고, 생식 행위로 전염되는 자이카 바이러스 때문이었죠. 지구인들은 생태계 전체를 조율할 만한 기술이 없었고 흡혈 곤충이 기후 변화 때문에 행성 전체를 뒤덮은 상태였어요. 자이카 바이러스에 감염된 인간 성체는 소두증이나 무뇌증에 걸린 신생아밖에 낳을 수 없었어요. 지구인들은 목성의 위성에 무인 개척지를 만든 다음 거대한 우주선에 타고 이주하기 위해 출발했어요. 그 때 ‘우리’가 열었던 웜홀이… 그럴 확률은 정말 0에 가까웠는데… 우리는 측량할 수 없는 죄를….”

니샤는 영상 속 우주선이 소멸하기까지 채 5초도 걸리지 않았던 것을 기억했다.

“지구에는 지적인 활동을 할 수 있는 인간이 한 명도 남아있지 않았어요. 대신 지구인들이 냉동해서 반영구적으로 남겨 둔 소두증 신생아들이 있었죠. 비록 의도적으로 저지른 일은 아니지만, 우리는 한 종족을 전멸시킨 죄를 갚기로 했어요. 지구 문명을 되살리기로 한 거죠. 우선 지구인들이 ‘모기’라고 부르는 흡혈 곤충을 생태계에서 없애고, 자이카 바이러스와 그 돌연변이들을 박멸했어요. 그리고 소두증에 걸린 신생아들을 인공적으로 생장시켜서 모자를 씌웠어요.”

니샤는 제 힘으로 걸어다니는 인간이 단 한 명도 없는 지구를 상상해보았다. 그 다음 뇌가 거의 없고 모자를 쓴 인간의 육체들이 행성 전역을 돌아다니며, 지구의 문화와 기술을 이해하려 애쓰는 광경을 떠올려보았다.

“현재 지구 인구는 7500만이잖아요. 그럼 당신들은 멸종했던 인류를 유전 공학으로 이 수준까지 회복시켰다는 건가요?”

윤환은 습관처럼 회색 비니를 끌어내리면서 난간에 등을 기대고 니샤를 바라보았다.

“그렇게 표현할 수도 있겠죠. 하지만 우린 최후의 지구인 2만 명을 단숨에 죽인 살인마이기도 해요. 그 2만 명이 무사히 목성의 위성에 있는 개척지에 도착했다면 지구 인류는 다시 번성했을지도 몰라요. 우리는 행성에 거주하는 종족 전체를 학살한 죄를 갚으려고 최대한 노력했어요. 3.75초 만에 정지했던 지구 문명이 바로 그 순간부터 이어질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해 유전자를 조립했고….”

주전자와 찻잔이 남아 있는 방 안에서 신호음이 요란하게 울렸다. 니샤의 휴대용 단말기가 내는 소리였다. 신호음이 끊이지 않는 것으로 보아 사람들이 갑자기 네트워크에 수많은 글을 올리는 게 분명했다. 니샤가 단말기를 가져오려고 몸을 돌리자 윤환이 손을 내밀어 그녀를 막았다.

“우선 내 얘기를 먼저 들어줘요. 시간이 별로 없어요.”

니샤의 심장이 점점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네트워크에 글이 몰린다는 건 그만한 반응을 일으킬 수 있는 사건이 일어났거나 그에 상응하는 뉴스가 퍼졌다는 뜻이었다. 윤환이 지금 이런 얘기를 하는 것과 때를 맞춰 글이 폭주한다는 게 과연 우연일까? 니샤는 그럴 리가 없다고 생각했다.

윤환이 말했다.

“니샤, 낯설고 단절된 문명을 다시 잇는 건 아주 어려워요. 완전히 다른 환경에서 발생한 문명을 이해한다는 것 자체가 어려우니까요. 게다가 당시에는 인간 성체의 표본이 없었어요. 우리는 당신 조상들이 구축해 둔 게놈 자료 등을 최대한 이용했지만, ‘인간처럼’ 생각하는 유전자와 시냅스를 단숨에 만들 수 없었어요. 그래서 시뮬레이션을 돌렸죠. 소중한 생명을 만들고 실험에 낭비할 수는 없잖아요. 그 결과 불연속성을 느끼지 못할 만큼 ‘인간적인’ 후손을 만들면… 결국은 전쟁으로 자멸하고 만다는 결론이 나왔어요.”

니샤는 질문을 하는 대신 손가락을 들어 자신을 가리켰다. 그게 우리인가요? 윤환은 보이지 않을 만큼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 종족은 지구식으로 표현하자면 불간섭주의에 가까워요. 거대 운석이나 혜성과 충돌하게 돼 있는 문명은 여러 번 구해줬어요. 그들에게 알리지 않고 운석이나 혜성을 파괴한 다음 떠나면 되니까. 그게 원칙이었죠. 그런데 이번에는 지구인의 시뮬레이션 결과를 확인한 몇 개체가 그 규칙을 어기려 들었어요. 겨우 되살려낸 종족이 자멸하게 둘 수는 없다고 주장했죠. 그건 진심이었을 수도 있고, 당신들에게 조상의 문화를 가르치는 과정에서 거꾸로 물든 결과일 수도 있어요. 그 중 몇 사람이 이 나라의 핵무기 관제소를 장악하려 시도했어요. 핵 제어권을 독점해서 멸망을 막아보겠다는 주장이었지만 우리는 그게 잘못됐다는 판결을 내렸고, 집행관이 그들을 모두 회수했어요.”

윤환은 그 집행관이 자신이라는 사실을 말하지 않았다. 의견은 다수가 모으지만 죄를 짓는 사람의 수를 줄이기 위해 판결과 집행을 하나의 개체가 담당한다는 사실은 굳이 설명할 필요가 없었다.

“회수라면…?”

이번에는 윤환이 손가락을 들어 비니를 두드렸다.

“시간이 흐르면 더욱 더 지구인에 가까운 사람들이 생길 거예요. 조직적으로 지구의 권력을 획득하려는 사람들이. 그래서 우린 더 늦기 전에 남은 죄를 갚고 당신들과 작별하기로 했어요.”

단말기가 더 요란하게 울리고 있었다. 니샤는 한 번 더 그쪽을 바라보았고, 윤환도 이번에는 그녀를 막지 않았다.


 
니샤는 단말기를 집고 발코니로 돌아오면서 실시간으로 공감이 폭주하고 있는 글을 찾아 내용을 읽어보았다. 글의 제목은 ‘지금 당장 모자를 벗어라!’였다.

모자를 벗고 거리로 나오라!

지구 문명을 단절시키고 우리를 세뇌했던 적들은 모자를 벗을 수 없다. 모자를 벗고 거리로 나와 모자를 쓴 사람들을 죽이자!

더 이상 세뇌되기 전에 그들을 죽이고 지구를 되찾자!

니샤는 단말기에서 눈을 떼고 윤환을 보았다. 그는 여닫이 문으로 이용할 수도 있는 난간의 고리를 풀었다. 그리고 조금씩 더 모여드는 사람들을 바라보았다. 니샤는 갈라져가는 목소리로 물었다.

“시뮬레이션을 돌렸다고 했죠. 지구인에 가장 가까운 후손을 만들었다고 했고요. 그럼 진실을 발표했을 경우 이런 일이 생긴다는 것도 예측했나요?”

윤환은 문을 연 다음 대답했다.

“우리는 확률과 인과관계와 죄를 믿는 종족이에요. 하지만 아직도 벌을 정량화할 수가 없어요. 그래서 네트워크에 세가지 설명을 올렸어요. 지구인들이 우리에게 내릴 벌을 직접 결정할 수 있도록. 아마 지구인들은 우리가 모자로 정체를 감춘 사악한 외계인이라는 설명을 선택한 모양이군요. 그게 바로 우리가 받아야 할 벌이에요.”

윤환은 평온한 얼굴로 비니를 가리키며 덧붙였다.

“니샤, 혹시라도 저 사람들이 내 소뇌증 육체만 파괴하거든 꼭 모자를 태워줘요. 그리고 가능하다면 지도자가 돼서 시뮬레이션이 틀렸다는 걸 증명해줘요. 우리가 할 수 있는 속죄는 이게 전부예요.”

그는 말을 마친 다음 성이 나서 고함을 지르고 있는 군중에게 빠른 걸음으로 다가갔다. 니샤는 손을 내밀려다가 동작을 멈췄다.

그리고 눈 앞에서 펼쳐질 잔혹한 행위를 예상하며 차마 발을 떼지 못한 채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이상하게도 조금 전 자신이 별 생각 없이 내뱉었던 말이 떠올랐다. 인생이란 원래 외로운 거예요. 우주라고 다를 게 없죠. 외로움은 니샤에게도, 윤환에게도, 군중에게도 있었다. 얼마나 가까이에 있든, 얼마나 많이 모여있든 상관없이. 그 외로움의 원인은, 윤환이 말했던 것처럼 확률과 숙명과 죄와 벌이었다. 니샤는 난간을 움켜쥐고 서서 군중에게 뒤덮이는 윤환의 모자를 바라보았다.

달의 뒷면에 머물러 있던 외계인의 우주선은 지구에 내려가 있던 모든 모자의 신호가 끊긴 것을 확인했다. ‘신성호’가 웜홀에 휘말리고 지구 인류가 멸종할 당시 우주선을 조종하던 책임자들은 그로써 죄를 갚고 벌을 받았다. 집행관이 수거한 반대의견자들은 절대영도 상태로 수감되었고, 그들의 행위는 자료의 일부가 되었다. 전자기 육체에 머무는 외계인들은 규칙을 어겼던 단 한 번의 예외를 철저하게 기록하고 보관했다. 그리고 다음 목적지를 향해 새로운 웜홀을 열고는 태양계에서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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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10월 과학동아 정보

  • 김창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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