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구팬들 사이에서 때 아닌 과학 논쟁이 붙었다. 논쟁의 주인공은 두산 베어스의 외야수 김재환이다. 김재환은 지난 2011년 도핑테스트에서 금지 약물을 복용한 것이 적발돼 징계를 받았다. 그런데 올해 김재환이 대활약을 하면서 다시금 이야기가 도마에 오른 것. 논란의 핵심은 5년 전 약물이, 아직까지 효과가 있냐는 것이다.
김재환은 2011년 10월에 열린 파나마 야구월드컵에 참가했다. 국가대표로 뽑힌 그는 대회를 앞둔 9월 국내에서 도핑 검사를 받았고, 대회가 끝난 10월 말에 금지약물 복용 사실이 드러났다. 김재환이 복용한 약물은 스테로이드의 일종인 ‘1-테스토스테론’이다. 한국야구위원회(KBO)는 김재환에게 다음 시즌 1군 경기 10경기 출장 정지의 징계를 내렸다(규정이 강화돼 현재는 60경기 이상 출장 정지 처분을 받는다).
금지 약물 논란에도 불구하고 지난해까지 김재환은 무명의 선수였다. 데뷔 첫해인 2008년에는 21번밖에 타석에 들어서지 못했고, 타율도 1할4푼3리에 불과했다. 2009년과 2010년은 군복무를 하며 2군 무대에
서 뛰어난 성적을 보였지만 이듬해인 2011년에는 1군에서 타율 1할8푼5리, 홈런은 단 두개뿐이었다. 약물문제가 불거진 뒤에도 3년 동안 1군에서 들어선 타석수가 300타석이 채 되지 않았다(보통 프로야구 주전 선수는 1년 동안 400타석 이상 기회를 받는다). 부진한 성적 덕분(?)에 팬들은 그에게 별 관심이 없었다. 약물을 사용한 것으로 밝혀졌을 때도 말이다.
그런데 올해 김재환이 완전히 달라졌다. 개막 후 현재까지(8월 12일 기준) 337타석에 들어서서 25개의 홈런을 때려냈고, 타율은 3할2푼9리나 된다. 게다가 승부를 가르는 결정적인 홈런이 많아 야구팬들의 관심을 한 몸에받고 있다. 5년 전에 사용했던 부적절한 약물이야기도 다시금 고개를 들고 있다. 문제를 주장하는 이들은 5년 전 약물이 지금도 영향을 미치고 있다고 주장을 하며, 반대하는 이들은 5년 전 사건이 현재의 성적과 연관이 없다고 옹호하고 있다.
스테로이드가 정말로 홈런을 증가시킬까?
스테로이드는 탄소원자 17개가 4개의 고리를 이루는 화학 물질을 모두 일컫는 단어다. 스테로이드라도 고리 구조 옆에 어떤 화합물이 결합하느냐에 따라 기능이 천차만별이다. 네번째 고리에 카르복시기(-COOH)가 붙은 코르티코스테로이드(오른쪽 그림 아래)는 염증을 억제하는 효과가 뛰어나 피부치료제, 감기약 등에 널리 쓰인다.
김재환이 복용한 1-테스토스테론은 동화작용 스테로이드의 한 종류다. 동화작용은 몸속에서 지방을 태우고 근육을 합성해 전체적인 대사율을 높인다. 체내에서도 고환에서 테스토스테론이 합성된다. 몸속에서 합성되는 테스토스테론은 첫 번째 탄소 고리의 4-5번 결합이 이중결합인데, 1-테스토스테론은 첫 번째 탄소 고리의 1-2번째 결합이 이중결합이다. 김재환의 몸속에서 검출된 스테로이드는 외부에서 온 것이 분명한 금지약물의 성분이다.
이처럼 스테로이드가 근력을 비약적으로 늘리는 것은 확실하지만 아직까지 개별 종목과 스테로이드의 효과를 직접적으로 살펴본 연구는 없다. 대신 스테로이드를 사용한 혹은 사용한 것으로 의심되는 선수의 성적을 분석한 사례는 많다. 가장 대표적인 야구다.
미국 메이저리그(MLB)는 1990년대 중반부터 경쟁적으로 홈런 타자가 나타난다. 단일 시즌 홈런 신기록을 두고 경쟁을 펼친 마크 맥과이어와 새미 소사를 필두로, MLB 역사상 가장 많은 홈런을 친 타자들이 연거푸 등장한다. 1998년 이전에 60홈런을 기록한 선수는 단 두 명(베이브 루스(60개, 1927년), 로저 매리스(61개, 1961년))이었지만, 1998~2006년 사이에는 맥과이어, 소사, 배리 본즈가 합쳐 여섯 번이나 60홈런을 기록했다. 45홈런 이상을 친 슬러거도 리그 전체적으로 급증했다. 아무것도 모르던 야구팬들은 새로운 슬러 거들의 탄생에 환호했지만 현재는 모두 금지 약물을 사용한 것으로 드러났다.
스테로이드의 효과를 보다 정확히 알아내기 위해 배트 스피드와 홈런 등의 상관관계를 이론적으로 연구하는 이들도 있다. 미국 터프츠대 물리천문학과 로저 토빈 교수의 계산에 따르면 근육량이 10% 증가하면 타자가 배트를 휘두르는 스피드는 약 5% 증가한다(Am. J. Phys. 76 (1), January 2008). 만약 배트의 스위트 스팟(sweet spot, 배트와 공이 충돌할 때 운동에너지가 가장 잘 보존되는 이상적인 위치. 보통 홈런은 이 부위에 정확히 공이 맞았을 때 나온다)에 부딪혀 야구공이 탄성운동을 한다고 가정하면, 배트스피드가 5% 증가하면 타구의 속도는 4% 증가한다. 초기 속도가 4% 증가하면 타구의 비거리가 늘어나 홈런은 최대 두 배 증가할 수 있다.
근육세포는 스테로이드를 기억한다, 아주 오랫동안 지난 5월 스포츠 기록 통계 전문업체인 스포츠투아이가 발표한 자료에 따르면 김재환이 친 타구의 평균 속도는 167.8km다. 이 기록은 리그에서 가장 빠른 것으로, 2~3위권 선수와는 5~10% 정도 차이가 난다. 이게 5년 전에 복용했던 약물의 효과라는 게 비판하는 팬들의 주장이다. 언뜻 이 주장은 설득력이 없어 보인다. 스테로이드는 체내에서 짧게는 몇 주, 길게는 몇달 사이에 모두 분해돼 사라지기 때문이다. 야구팬들 사이에서 극명하게 의견이 엇갈리는 것도 바로 이 부분이다.
스테로이드의 장기적인 효과를 지지하는 이들은 ‘기억 근육’ 가설을 근거로 든다. 노르웨이 오슬로대 크리스티안 군데르슨 교수는 동화작용 스테로이드 계열을 이용해 한 번 근육을 만들면, 장기적으로도 이 효과를 누릴 수 있다는 결과를 2013년 발표했다(doi: 10.1113/jphysiol.2013.264457). 연구팀은 실험용 쥐에게 14일 동안 스테로이드를 투약하고 운동을 시켰다. 그 뒤 3개월 동안 복용을 중단한 뒤, 근육의 단면적이 비슷한 스테로이드를 복용하지 않은 쥐와 함께 6일간 같은 운동을 시켰다. 약물을 쓰지 않은 쥐는 근육 단면적이 거의 증가하지 않은 반면, 약물을 복용했던 쥐는 30% 가까이 늘었다. 실험용 쥐의 수명이 18개월 내외인 것을 감안하면, 전체 수명의 약 15% 정도 동안 스테로이드의 효과가 유지된 것이다. 군데르슨 교수는 이를 바탕으로 한 번 스테로이드를 복용한 인간도 15~20년 동안 그 효과가 지속될 것이라고 예측했다.
장기적인 효과의 원인은 늘어난 세포핵이다. 인간의 근력을 담당하는 골격근육은 한 세포 안에 여러 개의 세포핵을 가지고 있는데, 스테로이드는 단백질을 합성하는 세포핵의 숫자를 늘려 단면적을 늘린다. 위 실험에서도 처음 스테로이드를 복용시키고 운동을 시켰을 때 처음보다 세포핵의 숫자가 66% 증가했다. 문제는 한 번 늘어난 세포핵이 스테로이드를 끊은 뒤에도 여전히 늘어난 숫자대로 남아 있다는 것이다. 인간 골격세포의 수명은 짧게는 10년, 길게는 그 이상이다. 군데르슨 교수는 e메일 인터뷰에서 “늘어난 세포핵은 매우 안정적인 상태이기 때문에 장기적인 효과가 나타난 것”이라고 말했다.
2008년 미국에서 열린 ‘운동 통합생물학 학회’에서 스웨덴 우메오대 안드레스 에릭슨 교수팀도 비슷한 결과를 내놨다. 연구팀에 따르면 스테로이드를 복용했던 역도 선수들은 훈련을 중단한 뒤에도 고강도 운동을 계속하고 있는 선수와 근육의 세포핵 수가 비슷했다. 에릭슨 교수 역시 발표에서 “스테로이드를 한 번 사용하면 사용을 중단한 몇 년 뒤에도 경쟁에서 유리한 고지를 선점할 수 있을 것”이라고 밝혔다.
하지만 아직까지 사람에게서 스테로이드의 효과를 장기적으로 검증한 실험은 전무하다. 군데르슨 교수는 “사람에게서도 스테로이드의 장기적인 효과를 확인하는 실험을 진행 중이지만 아직까지 결과를 얻지는 못했다”고 밝혔다. 야구 국가대표 트레이닝 코치를 맡고 있는 김병곤 트레이너는 “몇 년이 지난 뒤에도 직접적으로 효과가 있다고 주장하는 것은 어렵다”며 “근육을 유지하는 것은 약물 자체의 효과이기보다는 트레이닝의 효과로 볼 수도 있다”고 덧붙였다. 야구팬들 사이에서 뜻밖에 유명세를 치른 군데르슨 교수에게 직접 김재환 사건에 대한 의견을 물었지만 그는 확답을 피했다. 그는 “나의 역할은 개별적인 사안에 대해 의견을 표현하는 것이 아니라, 과학자의 관점에서 실제로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를 밝혀내는 것”이라고 말했다.
현재로서는 약물의 효과 때문에 뒤늦게 맹활약을 펼치고 있다고 주장하기엔 증거가 불충분하다. 열심히 훈련한 선수의 노력의 결과라고 봐야 맞을 것이다. 그렇게 믿고 싶다. 하지만 군데르슨 교수의 실험이 성공해 스테로이드의 장기적인 효과가 사람에게서도 증명된다면 스포츠계에 또 다른 피바람이 불 것으로 예상된다. 세계반도핑기구(WADA)는 현재 도핑 선수에 대한 자격 정지 기간을 최장 4년으로 정하고 있다. 현재는 이 기간이 끝난 뒤에는 다시 대회에 참가할 수 있다. 팬들은 한때의 영웅이 과오를 반성하고 정정당당하게 경쟁을 한다고 믿지만, 스테로이드가 4년 이상 효과가 있다는 게 증명된다면 다시 한번 첨예한 논쟁이 발생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