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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5년부터 1979년까지, 불과 4년 만에 100만 명이 넘는 캄보디아인들이 숨졌다. ‘킬링필드’라고 불리는 끔찍한 학살은 30여 년 전에 끝났지만, 남겨진 상처는 아직 캄보디아 사회 전체에 남아있다. 특히 과학자들의 피해가 커, 캄보디아의 과학은 아직까지 불모지나 다름없다.

이곳에 과학의 싹을 틔우기 위해 서강대는 2010년부터 미래창조과학부의 지원을 받아 매년 프놈펜왕립대를 찾아가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다. 과학동아도 지난 2월 서강대 봉사단과 함께 프놈펜에 다녀왔다.




 
캄보디아 아이들이 가장 먼저 부패를 배우는 곳은 교실입니다. 촌지를 건네지 않으면 선생님에게 무시 당하기 일쑤고, 시험을 앞두고는 촌지를 낸 학생만 따로 불러 족집게 과외를 해 주기도 합니다. 돈을 받고 시험 문제를 파는 것도 흔하고요. 사정이 이렇다보니, 캄보디아에서 활동하는 비정부기구(NGO)들이 가장 신경을 많이 쓰는 것이 교육의 정상화예요. 그 문제를 해결할 실마리는 캄보디아 최고의 대학인 프놈펜왕립대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킬링필드와 내전이 끝난 뒤 평화로운 시대에 태어난 아이들이 학교를 다니기 시작하며, 캄보디아에서
는 학생들의 숫자가 눈에 띄게 늘고 있습니다. 반면 아이들을 가르칠 고등교육을 받은 선생님의 숫자는 절대적으로 부족해요. 특히 과학과 수학 같은 이공계 과목 교사가 부족합니다. 캄보디아에서 그런 고등교육을 할 수 있는 곳은 프놈펜왕립대가 거의 유일하다시피 합니다. 때문에 많은 프놈펜왕립대 학생들이 졸업 후 학교 선생님이 되는 길을 택합니다.

하지만 프놈펜왕립대의 환경은 열악하기 그지없습니다. 제가 방문한 2월은 캄보디아에서도 비교적 시원한 계절이지만, 낮 최고 기온이 30℃를 웃돕니다. 학생들은 불도 제대로 들어오지 않는 오래된 강의실에서, 삐걱거리는 의자에 빼곡히 앉아 몸을 부딪치며 강의를 듣습니다. 에어컨은 언감생심입니다. 한국에서 보기 힘든 재래식 화장실과 파리가 날리는 학생 식당은 덤입니다(저는 되도록이면 숙소에서 볼일(?)을 해결했습니다).

무엇보다 캄보디아 최고의 수재들이 제대로 된 대학 교육을 받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 가장 큰 문제입니다. 프놈펜왕립대에 재직 중인 교수 중에 박사 학위를 가진 이들의 비율은 10%도 되지 않습니다. 교수들 대부분이 석사 학위뿐이라 수준이 한참 떨어집니다. 실험 시설은 전무하다시피 합니다.

때문에 정현식 서강대 물리학과 교수가 처음 방문했을 때, 캄보디아 측에서 가장 먼저 요청한 것은 캄
보디아 교수들이 가르칠 수 없는 고급 과학과목을 개설해달라는 것이었습니다. 그 후 서강대 봉사단은 2010년부터 해마다 물리, 수학, 생물, 화학 등의 고급과목을 몇 주에 걸쳐 가르치고 있습니다. 올해도 ‘다변수함수’, ‘양자역학’, ‘태양전지’, ‘유기화학’, ‘식물생명과학’, ‘분자생물학’, ‘3D 프린터를 이용한 화학장비 제작 실습’ 등의 수업이 진행됐습니다. 각 학과에서 선별된 뛰어난 학생들이 이 수업에 참여합니다.

반응은 상상 이상입니다. 몇 해 전에 수업을 들었던 학생들까지 찾아와, 교수님들에게 같이 점심을 먹자고 졸라댈 정도입니다. 편지를 쓰는 와중에 또 학생들이 임경수 수학과 교수를 찾아왔네요. 오늘의 메뉴는 얼마 전에 생긴 도미O 피자라네요. 연한 하늘빛 교복 셔츠를 입은 학생들의 아이 같은 미소를 보면, 저도 기분이 좋아집니다. 한편으로는 아직까지 이들을 괴롭히고 있는 이 나라의 어두운 역사가 원망스러워집니다. 내일은 어둠의 세상에 처음 발을 디뎠던 아레스 루이스 수녀님을 만나 당시의 이야기를 들어보려고 합니다.

 
한국은 저와 인연이 매우 깊은 곳입니다. 이곳 캄보디아에 오기 전에 부산의 한 병원에서 일한 적이 있거든요. 지금도 저의 자매들이 한국에서 일하고 있답니다. 제 소개가 늦었네요. 저는 아레스 루이스라고 합니다. 미국 뉴욕교구의 예수회 수녀로, 1991년에 캄보디아에 왔습니다. 킬링필드 이후에도, 캄보디아에서는 ‘포스트 킬링필드’라는 베트남과의 전쟁과 내전이 이어졌습니다. 이 과정에서 목숨을 잃은 이가 역시 수십만 명입니다. 국제사회의 중재로 1991년에야 겨우 내전이 멈췄습니다. 제가 이곳에 온 것도 바로 그때입니다.

저는 이곳에서 대학 교육을 재건하라는 임무를 받았어요. 내전 기간 동안 문을 닫았던 이 대학에는 단 36명의 학생이 남아 있었고, 전국에 수소문해 이들을 가르칠만한 교수를 겨우 두 명을 찾았죠. 독재자 폴 포트와 그를 따르던 크메르 루즈는 지식인들을 무차별적으로 잡아다 고문하고 살해했습니다. 지식인 같이 보인다는 이유로 안경을 쓴 사람을 잡아가기도 했습니다.

이런 불모지에 지금과 같은 학교를 세운 데에는 다른 나라들의 도움이 무척 컸습니다. 1994년에 처음으로 학생 한 명이 일본으로 박사학위를 따러 떠난 데 이어, 미국, 프랑스, 호주 등이 차례로 우리 학생들을 받아줬습니다. 최근에는 서강대로도 우수한 학생들이 떠나고 있습니다. 이들의 도움이 없었다면 가난한 캄보디아 학생들이 유학을 떠나는 것은 불가능했을 것입니다.

프놈펜왕립대 학생 중 약 70%는 프놈펜 이외의 지방에서 올라오고, 지방에서 온 학생 대부분은 매우 가난합니다. 부모는 뒷바라지를 위해 전 재산과 마찬가지인 가축을 팔기도 합니다. 정부에서 지원하는 교육비는 학생 한 명당 불과 연간 10만 원 정도입니다. 점차 지원을 늘릴 예정이지만 아직까지 외부의 도움 없이 온전히 학교를 운영하기는 어렵습니다.

요즘 저는 도서관을 세우는 데 힘을 쏟고 있습니다. 제가 이곳에 와서 처음 가르친 학생들이 이제는 각 학과를 책임지는 교수가 됐는데요. 빠르게 성장하는 학생들의 수준을 따라가기에는 실력이 부족합니다. 답답한 학생들이 향하는 곳이 결국은 도서관입니다. 도서관에 있는 책도 상당수는 외국에서 보내준 책입니다. 한국에서 책을 보내주셔도 좋지만 너무 오래된 책은 사양입니다. 그런 책은 이곳에도 충분하거든요.

저를 찾아온 기자님이 고향이 그립지 않냐고 물었는데, 저의 고향은 이곳입니다. 제가 있는 곳이 저의 고향이지요. 별일이 없다면 앞으로도 계속 이곳에 있을 거예요. 작년에는 1994년에 처음 일본으로 유학을 떠났던 학생이, 40대의 젊은 나이에 총장이 됐어요. 이곳에 온 이래 가장 기쁜 순간이었습니다. 앞으로 할 일은 제가 뿌린 씨앗들이 성장하는 것을 지켜보고 응원하는 것입니다. 이 학교는 앞으로 많은 것이 변할 겁니다. 여러분의 도움으로, 변화의 바람은 작은 곳에서 불어올 것입니다. 욱 온 노롱 생물학과 학과장을 만나 변화의 바람이 실어 온 이야기를 들어보시죠.


저는 프놈펜왕립대 생물학과장 욱 온 노롱입니다. 자연과학대 소속인 생물학과에는 18명의 교수가 있고, 2명이 해외에서 박사학위를 받았습니다. 반면 학생은 700명이나 돼 모든 교수들이 과중한 업무에 시달리고 있습니다. 우리 학과 학생 98%는 프놈펜 이외의 지방에서 왔는데요. 가난한 지방 학생들이 상대적으로 학비가 싼 생물학과를 선호합니다. 농작물을 보고 자랐기 때문에 학생들이 식물에 관심이 많습니다. 이번에도 이병하 생명과학과 교수님에게 식물생명과학 강의를 개설해달라고 부탁했습니다.

우리 학생들은 실험에도 관심이 많습니다. 요즘은 주로 식물과 동물의 개체를 분류하고 해부학적인 특징을 공부합니다. 학생들은 분류학과 해부학 시간에 배운 내용을 토대로 현장 답사를 가거나, 실험실에서 식물을 키우면서 직접 체험하는 것을 아주 좋아합니다. 일년에 한 번씩은 학교의 지원으로 프놈펜에서 다섯 시간 정도 떨어진 정글에 찾아가곤 합니다. 우리 학과에서 가장 큰 행사죠.

반면에 분자생물학이나 생화학같이 눈에 보이지 않는 기초적인 생명 현상은 교과서로밖에 접할 길이 없었습니다. 실험장비가 워낙 비싸 우리 예산으로는 장만할 수가 없어요. 이런 것을 가르쳐줄 교수도 없었고요. 하지만 서강대에서 만들어 준 실험실이 들어서면서 조금씩 바뀌어 가고 있습니다. 우리 학생들도 처음으로 피펫을 잡아보고, DNA를 다룰 수 있게 됐습니다. 이번에는 고학년 학생들을 대상으로 정광환 생명과학과 교수가 박테리아 형질 전환 실험을 하는데요. 흥미로운 주제기 때문에 저도 꼭 참관할 예정입니다.

현재는 우리 학과 학생 대부분이 졸업 후 교사가 됩니다. 앞으로는 학생들이 더 다양한 분야에서 일할 수 있게 도울 겁니다. 특히 더 공부를 하고 싶은 학생들을 위해 학과에 제대로 된 연구 프로그램을 만들고 싶습니다. 꿈은 크지만, 당장은 우리가 할 수 있는 일부터 먼저 하려고 합니다. 최근에 시작한 종다양성 보존 프로그램이 좋은 예입니다. 원래는 식물 채집을 주로 했는데, NGO들과의 협력을 통해 도마뱀, 나비, 거미 등 다양한 종을 발굴하고 있습니다. 학생들이 해외로 공부하러 가는 것도 적극 도울 겁니다. 서강대 생명과학과에만 우리 학과 졸업생 서너 명이 석박사과정을 하고 있는데, 이들이 돌아와 후배들을 가르치길 고대하고 있습니다.

안녕하세요. 저는 프놈펜왕립대 물리학과 2학년 놈 살림입니다. 제 오른쪽은 카트 다빈과음 스레이치입니다. 저희는 지금 임채호 물리학과 교수님이 강의하는 양자역학 수업을 듣고 있습니다. 이 자전거는 다빈이 통학할 때 이용하는 거예요. 저희 모두 이렇게 자전거를 타고 집과 학교를 오갑니다. 사진 뒤를 자세히 보시면, 주차장에 세워진 수많은 자전거와 오토바이를 보실 수 있을 거예요.

저희는 모두 프놈펜 이외의 지역에서 올라와 있습니다. 다빈만 이모와 같이 살고, 나머지 둘은 친구들과 자취를 합니다. 방값을 포함한 생활비는 한 달에 대략 100달러(12만 원) 정도예요. 친구들 대부분은 생활비를 아끼기 위해 점심 식사를 집에서 해요. 오전 수업이 마칠 때쯤 학교 정문 앞에 서 계시면, 수천 명의 학생들이 자전거와 오토바이를 타고 집으로 돌아가는 모습을 보실 수 있답니다. 때문에 점심시간도 2시간 정도로 긴 편입니다. 저희 아빠는 공무원이고 어머니는 선생님입니다. 집안 사정이 괜찮은 편이지만, 과외 같은 아르바이트를 하며 생활비를 보태고 있습니다. 저도 어머니를 따라 졸업 후에는 선생님이 되고 싶습니다.

물리학이 너무 재밌어서 더 공부를 하고 싶다는 생각도 들지만, 사랑하는 가족과 더 이상 떨어져 지내고 싶지 않아요. 해외에 나가서 혼자 지내는 것도 매우 두렵고요. 친구들도 모두 비슷한 생각이에요. 남자친구는 당연히 없어요. 캄보디아는 매우 보수적인 나라예요. 이성 친구와 교제를 하는 것은 부모님께 꼭 허락을 받아야 합니다. 아직까지는 학생이라 부모님께서 허락하시지 않을 거예요. 부모님의 반대를 무릅쓰고 누군가를 만나고 싶진 않아요.

한국에서는 여학생들이 물리학을 기피한다는 이야기를 들었는데, 저희는 그렇지 않아요. 저희 과의 남녀 비율은 거의 반반이고, 지금 듣고 있는 양자역학 수업은 오히려 여학생이 더 많습니다. 물리학과는 자연과학대 전체에서도 가장 인기가 많은 학과예요. 화학과와 수학과가 그 다음입니다.

교수님의 수업은 이곳의 수업과 접근법이 꽤 다른 것 같습니다. 완전히 새로운 내용이에요. 난이도도 적당해서 너무 어렵지도 않습니다. 다만 영어에 자신이 없어서, 교수님께 질문을 하기가 힘들어요. 말하는 것은 물론이고 영어로 무언가를 쓰는 것도 서툴답니다. 다행히 서강대에서 물리학을 공부하고 있는 캄보디아 조교님이 오셔서 많은 도움을 주고 있답니다.

한국은 언젠가 한 번은 꼭 가보고 싶은 나라랍니다. 한국 드라마 ‘별에서 온 그대’를 재밌게 봤거든요. 기자님이 저희 사진이 실린 잡지를 보내주겠다고 약속했는데, 어떻게 나올지 걱정입니다. 사진을 찍는 게 아직 익숙지 않거든요. 그럼 프놈펜에서 과학동아를 손꼽아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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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04월 과학동아 정보

  • 캄보디아 프놈펜 = 송준섭 기자
  • 사진

    캄보디아 프놈펜 = 송준섭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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