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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ech & Fun] 박승휴 망해라

Science Fiction



죽는 건 정말 안 좋은 일이었다.
인생을 살면서 겪은 일 중에 거의 최악이었다. 죽으면 모든 고통이 사라지니까, 다 없어지고 아무 것도 없어지니까 차라리 낫지 않을까 하고 생각했던 적이 있기는 했다. 그런데도 막상 죽을 때 느낌은 그 모양이었다. 박승휴 따라 주식투자하다가 망했을 때 그 생각을 해 본 적이 있
었다. 그렇지만 전혀 아니었다는 말이다.

죽으면 고통도 같이 없어진다니. 막연히 나는 잠이 들면 자는 동안 아무것도 모르는 것과 죽는 것이 비슷하다고 상상하고 있었는데, 근거 없는 추측이었다. 괜히 죽는 것을 ‘영면’이니 ‘깨어날 수 없는 잠’이니 ‘영원한 휴식’이니 하며 비유하는 낡은 문구를 여기저기서 들었기 때문에 그 생각을 했던 것이었는데, 내 경우에 실제 죽는 것은 그런 것과 완전히 다른 느낌이었다.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나는 죽는 순간 마침 공교롭게도 뇌세포부터 상해서 그런지, 무지무지하게 밀려 오는 무서움과 아주 아주 심한 고통이 몰아치는 것을 느꼈다. 나는 사무실에서 문서세단기에 버리는 영수증을 밀어 넣을 때마다 저기에 잘못해서 손가락이 들어가면 얼마나 아플까 상상을 했는데, 바로 딱
그 아픔이 죽어 가는 뇌 속으로 팍팍 퍼져나갔다. 그리고 그 아픔은 아주 빠르게 반복되었다. 실제로는 아니었지만, 그 순간 나는 그게 바로 뇌세포가 죽는 느낌이 신경이 엉키면서 표현되는 거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죽으면 뇌가 멈추기 때문에 시간 감각도 논리도 감정의 변화도 없어진다. 그저 그 마지막 순간 그대로 계속 남게 된다. 그래서 그 상상할 수 있는 가장 큰 무서움과 고통이 계속 그냥 그대로 남아 영영 어디로 가지 않고 그대로 있는 것 같았다. 실제로는 죽고 나면 곧 몸이 썩으면서 아무것도 남지 않고 사라
지겠지만, 그런 시간의 변화를 느낄 수가 없기 때문에, 내 입장에서 죽는다는 것은 상상할 수 있는 최악의 안 좋은 느낌을 확끌어 올리듯이 느끼고 그게 끝도 없이 계속계속 이어지는 느낌이었다. 죽기 전에는 죽어 본 적이 없으니, 나도 죽는 게 그런 건줄은 미처 몰랐다.

그렇게 죽는 마지막 상황에서 내가 생각했던 것은 이번에도 하필 박승휴였다. 그래도 박승휴에 관한 생각치고는 이번에는 오래간만에 약간은 긍정적인 것이었다. 내가 그래도 박승휴에게는 결국 승리했다는 발상이 잠깐 지나갔던 것이다. 박승휴가 실종되었다는 소식을 들은 지 얼마 되지 않은 때였고, 나는 박
승휴가 실종과 함께 사망했다고 믿고 있었다. 그렇다면, 고작 며칠이었지만 내가 박승휴보다 오래 살았던 것이다. 따지고 보자면, 내가 박승휴보다 생일이 빨랐으니 박승휴보다 내 인생의 길이가 꽤나 길었다.

그때 내가 떠올렸던 생각은 이런 것이었다. 어차피 인생살이 죽고 나면 다 사라지고 돈도 명예도 사랑도 다 없어지는 부질없는 것. 억만금이 있어도 죽은 사람을 하루 더 되살리는 것은 할 수 없다. 그렇다면 그런 인생을 얼마나 오랫동안 누리고 즐겼는지 이상으로 중요한 가치가 또 어디있겠나 싶었던 것이다. 그래서 나는 박승휴가 실종 된 후로는, 내가 박승휴보다 인생 산 시간 길이로 길게 살았으니 이제야말로 내가 박승휴보다 더 가치 있고 좋은 삶을 살았다고 승리감을 느끼고 있었다. 정직하게 말하자면, 그런 생각을 하면서 승리감을 느끼려고 노력은 했지만 별 그런 감정이 많이는 안 느껴졌다는 것이 맞기는 했지만.

그런데 교통사고로 내가 죽던 그 순간에는 잠깐이지만 그런 승리감을 꽤 확실하게 느낄 수 있었다. 죽는다는 생각을 워낙 심하게 하다 보니 사는 게 갑자기 무진무진 가치 있다는 안타까움이 몰려 와서 그랬던 것 같다. 보행자 교통 사고로 인생 끝나던 그 순간, 등 뒤를 치며 밀려 든 자동차 범퍼가 갑자기 훅하고 몸속으로 파고 들듯이 심하게 들어 오고, 이게 뭔가 싶은데 부딪히는 소리와 함께 갑자기 몸이 튀어 나가 하늘로 붕 떠오르고, 몸이 빙그르 돌면서 퍼런 하늘이 멀리 보이고, 그 하늘이 아름다워 보이고, 그러다 죽기까지 그 짧은 시간을 몇 천, 몇 백 개로 쪼갠 아주 짧은 기간 동안, 박승휴에게 드디어 내가 이긴 거라고 느껴 본 것이다.

그렇게 해서 공식적으로 나는 사망했다. 그러나 비공식적으로, 나 혼자 생각하는 입장에서는 나는 그래도 이어졌다.

그때 주식투자로 돈 날리고 나서, 빚을 대신 갚아 준다고 하는 연구 기관이 있어서 나는 죽으면 내 몸을 그 연구기관에서 하는 연구 사업에 기증하겠다고 했던 적이 있었다. 그리고 그 연구 사업 때문에 내 시체는 새롭게 재활용 되었다. 뭐, 이 마당에 뭘 또 그렇게 포장해서 말하겠는가. 솔직하게 말하면, 주식투자로 처음 돈 날린 것은 처가에서 갚아 줬고, 그 다음에 몰래 주식투자하다가 두 번째로 또 망했을 때, 어쩔 줄을 모를 때 그때 그 연구기관에 내 몸을 미리 팔아 치운 것이었다.

그곳에서 내가 죽은 후에 내 시체를 두고 돈을 많이 준 이유는 내 시체를 활용하는 방식이 특이했기 때문이다. 그 곳에서는 내가 죽자 내 뇌를 빼냈고, 그것을 다른 사람의 뇌와 연결해 합치는 수술을 했다.

나는 이미 죽은 후였기 때문에 내 뇌의 60%는 못쓰게 된 상황이었다. 그대로는 오랫동안 더 살려둘 수도 없었고, 살려 놓는다고 해도, 가끔 주식투자 해서 부자 되는 망상으로 멍청한 꿈이나 꿀 능력이나 있을까. 아무 쓸모도 없는 분량이었다. 그런데, 그것을 다른 사람의 부상 당한 뇌와 합치면 꽤 쓸만한 덩어리가 나올 만하다는 계산이었다. 나와 비슷하게 뇌 60%가 썩은 사람 둘만 더 모으면 120% 만큼의 두뇌가 나오는 것이다.

“그런데요. 휴대전화 도끼로 쪼갠 거 세 덩어리를 가져와서 풀로 붙인다고 해서, 원래 전화기보다 1.5배 더 좋은 전화가 생기고 뭐 그런 건 아니 잖아요.”

빚 갚아 줄 테니 머리통을 넘기라는 계약서에 서명하고 나서 나는 궁금해서 그렇게 물어봤다.

내 계약서를 받던 눈이 큰 연구원이 대답하기를, 그래서 그래 봤자 정상 뇌보다는 더 좋은 성능은 안 나온다고 했다. 그렇지만 초소형 로봇과 가루 형태로 되어 있는 더 초소형 로봇을 이용해서 신경을 이어 붙이는 기술이 꽤 괜찮다고 했다. 살아 있는 뇌의 일부가 그대로 보존되어 남과 합쳐진다기보다는 쓸만한 뇌세포 하나하나를 그대로 이어 붙여서 새롭게 작동하는 뇌를 꾸미는 것으로 생각하는 것이 더 맞다고도 설명했다. 그러니까 반으로 쪼개진 휴대전화의 쓸만한 부품만 모아서 다시 이어 붙여서 엉성하게 GPS 기능이라도 할 수 있게 살린다는 쪽에 가까웠다.

그렇지만, 막상 내 느낌은 또 달랐다. 나는 나보다 몇 살 더 나이가 많은 남자의 뇌와 합쳐졌다. 그 남자에 대해 핵심만 뽑아내 설명하자면, 밤 11시까지 상사한테 낄낄거리며 즐거워할만한 소리를 골라 들려 주는 일을 하며 소주를 마시고 나서는, 자기보다 직급이 낮은 부하직원들만 따로 모아 놓고 다시 술 마시는 자리를 벌인 후에 취해서 상스러운 농담을 하며 비틀거리는 것이 진솔한 대화라고 생각하는 사람이었다.

나는 그 사람과 점점 더 정신이 섞여 들다가, 그 이상한 정신이 이제 내 일부가 되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그러면서 동시에 그 사람 쪽에서 박승휴 생각을 하고 있는 내 정신이 그 사람의 일부가 되고 있다는 느낌도 같이 느끼게 되었다. 아주 떡이 되는 것 같은 느낌이었는데, 그러고 났더니 나도 인생의 유일한 즐거움이란 골프에서 최 차장보다 앞서 나가는 것이라는 생각을 갖고 있게 되었다. 그 남자로부터 연결된 생각이었다.

그렇게 해서, 나는 2인분 치의 사람이 되었다. 그 남자와 나를 합친 것이니, ‘우리는’이라고 말하는 것이 더 적당할 수도 있었겠지만, 하나로 연결된 뇌였기 때문에 우리라는 느낌은 전혀 들지 않았다. 꽤 이상한 상황이었지만 나는 나 그대로라는 느낌은 또 그대로 이어져 있었다. 그것은 그 남자 입장에서도 마찬가지여서, 지금의 나는 그 남자이기도 했다.

그 남자가 된 것이기도 한 나는 이제 좀 다른 관점이 생겼다. 여전히 내게 연결된 근육도 없고, 눈이나 귀도 없었기 때문에 아무것도 보이지도 들리지도 않고 말도 할 수 없었다. 아마, 이 연결된 망가진 나의 뇌 조각에 여러 가지 기계를 이어 붙인 것이 있어서 그 측정 결과를 그 눈이 큰 연구원 학자와 그 상사들이 구경하고 있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렇지만, 나는 그런 것에 연연하지 않고 그냥 혼자 생각만 했다. 어차피 시간 감각은 회복되지 않은 상태였다. 지겨울 것도 없었고, 답답하지도 않았다. 일부러 연구원 사람들이 시간 감각을 회복시키지 않은 것 같기도 했다.

2인분이 된 뇌로 과거를 돌아보니, 내가 했던 주식투자가 얼마나 멍청한 짓인지 더 똑똑하게 깨달을 수 있었다. 지금은 그것이 이 은하계에서 세 번째로 멍청한 투자였다고 말해 줄 수 있을 정도다. 보통 다른 사람들은 처음에는 조금 돈을 벌다가 거기에 재미 붙여서 계속하다 보면 돈을 날린다고 하지 않나? 그런데 나는 그냥 처음부터 계속 돈을 잃었고 끝까지 꾸준히 잃기만 했다. 무슨 작전 세력에 당한다거나 믿었던 사람에게 속은 것도 아니었다. 그냥 나는 공원에서 말린 옥수수를 비둘기에게 뿌리듯이 그냥 개미투자자들에게 내 돈을 훌훌 뿌려 버린 꼴이나 다름 없었다.

그렇게 멍청하게 투자한 것이 박승휴 생각 때문에 빨리 돈 벌 생각만 너무 앞서서 판단력이 줄어 들었기 때문이라는 점 역시 선명히 알 수 있었다.

박승휴가 대학원에 가서 작심하고 공부를 더 한다고 했을 때, 나는 드디어 박승휴가 제 똑똑한 것만 믿고 무슨 대단한 학자가 되겠답시고 설치다가 고학력 실업자가 되거나, 돈 될 리 없는 연구사업에 자선 사업 하듯이 돈 푸는 별 볼 일 없는 연구기관의 임시직 연구원을 전전하게 될 것 같다고 상상했다. 그런데 아니었다. 오히려, 취업준비를 한다, 공무원 시험 준비를 한다, 어학연수를 다녀온다 어쩐다 하면서 내가 몇 년 시간을 보내던 사이에, 박승휴는 쭉쭉 전진해 나가서 정말 그럴듯한 학자로 변해 나가고 있었다.

그러던 끝에 내가 무슨 정신 나간 대기업에 간신히 입사해서 거기서 극기훈련이랍시고 17m 높이에서 뛰어 내리는 것을 하면서 이것조차도 취업 못한 사람들은 얼마나 부러워하겠냐고 스스로 중얼거리며 고소공포증을 달래고 있을 때, 박승휴는 학위와 함께 멀쩡한 대학의 교수로 임용된다는 환상적인 소식을 전했다. 이럴 수가 있나? 나는 17m에서 잘 뛰어내리도록 직원을 훈련시키면 더 훌륭한 정수기를 만들어 낼 수 있다고 믿는 얼간이들 밑에서 노예처럼 일하는 신세가 되었는데, 박승휴는 그 나이에 벌써 교수라고?

그래도 나는 사기업에 취직했고, 열심히 일하면 빨리 승진할 수도 있으며, 나는 서울 시내에서 살면서 이런저런 재테크 기회를 갖고 있으니, 박승휴보다 돈은 내가 더 풍족하게 벌 수 있는 기회가 있지 않겠냐고 생각해 보려고 했다. 실제로 일을 잘하려고 애를 쓰고 발버둥쳤기 때문에 평균보다는 승진도 조금은 빨랐다. 그랬기 때문에 나는 별짓을 다 하면서 돈을 모으려고 했고, 괜히 ‘대학 교수 연봉’ 따위를 검색해 보면서 내가 모으는 돈과 비교도 해 봤다.

그런데, 박승휴는 몇 년 후 창조경제 무슨무슨 뭐라고 하는 벤처 기업에 창립자로 참여했다가, 하루 아침에 막대한 돈을 벌었다. 박승휴는 실제로 사업을 한 것도 아니고, 돈을 투자한 것도 아니었다. 위험한 일은 하나도 하지 않았고, 그 사업과 관련된 일을 하느라 고생을 한 것도 아니었다. 그저, 그럴듯한 박승휴 교수라는 이름을 홍보용으로 회사 창립할 때 걸어 놓는 대가로 새로 시작하는 회사의 주식을 나눠 받은 게 전부였다. 그런데, 그 회사가 창조적 발상법 자체를 상품으로 팔겠다 어쩐다 하다가 마침 큰 투자를 받으면서 그 주식 가치가 몇 십배로 뻥튀기 된 것이었다.

그 이야기를 들으니 갑자기 숨이 가빠졌다. 내가 뭘 하고 있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정수기 만드는 회사의 양복쟁이들 사이에서, 몇 칸 더 높은 자리에 앉은 더 나이 든 양복쟁이들에게 누가 더 귀여움을 받나 아득바득 서로 경쟁해 봐야 한 푼 더 벌고, 한 발자국 더 앞서 나가는 정도였다. 투자로 돈을 버는 게 진짜 한 몫 잡는 답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박승휴는 그걸 먼저 알고 앞서 나간 것이다. 투자가 답이다. 자본주의 사회, 현대 정보화 세계, 이상한 이치와 요망한 기회가 돌아가며 하루아침에 엉뚱한 부자가 생기는 세상. 주식도 하지 않으면서 무슨 돈을 번다고. 주식을 해야지.

두 배 크기의 뇌로 돌아 보니 너무나도 뻔한 아둔한 짓이었지만, 그 때에는 열기에 휩싸인 건지 뭐에 취해 있었던 건지 그러고 있었다. 그리하여 알뜰히 모아 가던 살림을 단숨에 말아 먹고 났더니, 퇴근하고 집에 가봐야, 아내와 아이들 대신 나를 보고 진절머리를 내는 사람과 나를 보고 짜증 내는 사람만 있었다. 그런 식으로 그 다음부터 별로 요약할 거리도 없는 삶을 좀 더 살다가 누가 모는 건지도 모르는 차에 치여 죽은 것이 내 인생이었다.

그걸 똑바로 돌아 보고 제대로 비판하는 생각을 하는 동안, 또 그 골프 좋아하는 남자의 삶에 대해서도 비슷하게 돌아 보는 동안, 나는 좀 더 큰 많은 뇌와 연결되게 되었다. 1 대 1로 처음 다른 사람의 뇌와 연결되면서 둘의 정신이 합쳐질 때만큼 느낌이 묘하지는 않았다. 그렇지만, 뇌가 커져 갈수록 점점 더 새로운 느낌은 있었다. 더 많은 정신, 더 많은 기억, 더 많은 인생이 하나로 합쳐져 갔다.

나중에 안 일이지만, 사실 그 전에 그 눈 큰 연구원이 있는 연구팀에서는 실험을 끝내버리려고 했다고 한다. 이미 그 연구기관에서는 망가진 뇌 둘을 연결하는 기술이 가능하고, 그렇게 해서 연결한 뇌가 정상 비슷하게 움직인다는 것까지 보여 줄 수 있었다. 그 정도면 처음 계획했던 목표는 달성한 셈이었다. 실험을 끝내고, 보고서를 쓰고, 논문을 내고, 방송국에 보도 자료를 보내고, 어디 정부 기관에서 TV를 보고 연락을 하면 노벨상을 받을 만한 연구를 했다고 뻥을 치는 많은 후속 작업들을 시작해야 할 시기였다.

그런데 그때, 실험을 중단하면 안된다고 압력을 넣는 사람들이 나타났다. 두 사람의 뇌는 생생하게 잘 살아서 또렷하게 의식마저 있는 것 같다는 결과가 나오고 있었다. 그때 그 의식이라는 것이 내가 주식투자한 것 후회하는 것과, 박승휴 생각을 하는 것이라는 사실은 아무도 모르고 있기는 했다. 그러나 어쨌거나 생생한 의식이므로, 이 연결된 두 개의 뇌는 살아 있는 사람과 같고 그것을 함부로 작동 중지시키면 사람의 생명을 빼앗는 것이니 중단시키면 안된다고 떠드는 사람들이 생겨난 것이다.

실험 장치 전기 요금 만큼의 돈도 안 줄 거면서 그냥 ‘생명의 소중함’이니 ‘인간성에 대한 존중’이니 말만 그럴듯하게 하는 사람들이 주절대는 것쯤이야 별일은 아니었다. 그런데, 그렇게 일단 이야깃거리가 되기 시작하니, 다른 쪽에서 실험을 중단하지 말라는 제안을 해왔다.

내 뇌를 이용한 실험은 비슷한 방식으로 시도된 실험 중에 성공했던 유일한 사례였다. 나 말고도 비슷하게 죽었을 때 시체 기증하겠다고 한 사람들은 여럿 있었는데, 죽자마자 뇌를 쓸 수 없게 된 경우도 많았고, 뇌를 연결시키긴 했는데 그냥 그대로 곪아 버리면서 기능을 잃어버린 경우도 많았다고 한다. 그런 많은 경우 중에, 요행히 죽은 사람 뇌를 꺼내서 서로 연결시켜 일부라도 살려 놓은 덩어리라고는, 나, 그러니까 주식투자 하다 망한 사람과 골프 좋아하는 사람, 둘이 연결된 뇌 덩어리뿐이었다. 그때는 멀쩡한 건강한 뇌를 그대로 몸 밖으로 꺼내서 유지시킨 사례조차 없던 시기였다. 그런데 우리는 그보다도 더 안정적이었다. 영양분과 산소를 공급할 통로가 두 사람치만큼 있었기 때문에 하나가 불안해져도 다른 하나가 살아 있어서 전체를 버텨줄 수 있었다.

그러자 죽음을 앞둔 부자들이 연구기관에 연락을 취해 왔다. “곧 나는 폐가 멈춰 버려 죽을 듯한데, 그러고 나면 내 뇌를 떼어 가서 저 두 사람의 덩어리에 연결해서 더 이어가게 해주면 안되겠느냐.” “우리 회사 회장님은 지금 3년째 뇌의 30%만 남은 채로 식물인간 상태로 있는데 그럴 바에야 저 두 사람의 덩어리에 뇌를 연결해서 제대로 움직이게 해주면 어떻겠느냐.” “우리 아버지께서 알츠하이머로 점점 뇌가 망가지고 있는데 남아 있는 부분만 잘 떼어내서 저쪽에 연결해서 살려 주면 어떻겠느냐.”

별별 제안들이 많았고, 부자들의 제안인 만큼 돈도 많이 주겠다고들 했다. 눈 큰 연구원은 연구비를 마다하는 사람은 아니었고, 그 동료들도 다들 마찬가지였으니, 나에게 연결된 뇌는 나날이 계속해서 늘어났다. 정말 엉뚱한 경우로는 사지육신 멀쩡한 사람인데 더 큰 뇌로 더 고차원의 생각을 해서 더 높은 정신세계를 경험하고 싶다고 해서 나에게 연결시켜 달라고 하는 사람도 있었다. 하기야, “다른 사람의 인격체를 참으로 이해한다는 것이 무엇인지 경험하고 싶다”라는 이유를 대면서 자기 뇌를 빼서 붙여 달라는 사람도 있었지만.

그 밖의 우울한 사람들이 심심해서 저지르던 울적한 이야기는 짧게 생략하고 말하자면, 그렇게 해서 나는 결국 수십 명이 연결된 뇌 덩어리가 되었다. 이제는 나는 시간 감각도 갖고 있었지만, 필요에 따라 시간 감각을 켰다 껐다 할 수 있었고, 필요에 따라 감수성을 높이거나 낮출 수도 있었다. 여럿이 연결된 뇌에서는 자연스럽게 생기는 것이었다. 어떤 사람에게는 그것이 초능력으로 보였다. 나는 아무리 험한 공포영화라도 전혀 무서워하지 않고 볼 수도 있었고, 반대로 낙엽이 굴러 가는 것만 봐도 너무 재미있어서 세 시간 동안 깔깔거리고 웃을 수도 있었다. 내가 어떻게 생각을 받아들이고 싶은지 조절하기 나름이었다.

그러다 보니, 얼마 후 정말로 나는 꽤 재주가 많은 정신이 되었다. 훌륭한 지능을 가졌거나, 예술의 재능을 가진 사람이 죽어서 사라지면 너무나 아깝기 때문에, 그 사람들이 죽으면 그 뇌를 빼내서 살아 있는 만큼만을 최대한 나에게 연결시키는 일이 몇 차례 이루어졌다. 그러니, 조금씩 그럴듯한 마음이 더 들어와 붙었다.

보통 사람의 절반도 안된다던 내 뇌의 기능은 보통 사람 수준을 차차 넘어 서게 되었다. 모짜렐라 정리를 완성하지 못하고 결국 사망한 수학자의 뇌를 나에게 연결시킨 후에, 내가 완성해 발표한 일은 결정적인 전환점이었다. 보통 사람이 할 수 없는 일을 연결된 뇌 덩어리인 내가 한 사건이었다. 내가 더 많은 역할을 해 주기를 바라는 기대도 컸다. 어차피 나에게 투자된 돈은 이미 너무 많았다. 부자들은 개똥 밭에 굴러도 이승이 낫다는 미련이 넘치기에 그렇게 돈이 많이 들어 왔다고 쳐도, 그 외에 이 막대한 돈을 쓴 뇌세포 덩어리가 무슨 의미가 있는지 납득을 시켜 주어야 할 시점이었다.

그렇게 해서, 나는 점점 더 많은 생각을 하게 되었고, 눈이나 귀, 코나 손에 해당하는 것도 생기게 되었다. 나에게 연결된 뇌는 갈수록 더 늘어났고, 그 전체 장치는 굉장한 크기로 커져 나가게 되었다. 나는 이제 뇌를 연결하는 기술과 내 자신의 유지와 보수에 대해서도 관여하게 되었고, 얼마 지나지 않아 뇌 연결에 대해서 세상 누구보다도 더 뛰어난 기술을 갖게 되었다. 뭐, 당연하게도 시간이 지나자 그 눈 큰 연구원조차도 결국에는 나에게 연결되었다.

그 무렵이 되니 세상에는 내가 너무 위험한 영향력을 갖고 있다고 나를 파괴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도 나타났다. 사실 그때는 뉴스에 좀 자주 등장하는 것 말고는 별 영향력도 없었는데도 그랬다. 넓은 세상, 미친 사람은 원래 많은 법이니, 나야말로 진정한 뭔가를 깨달은 자라면서 숭배하는 사람도 나타났고, 반대로 참된 인간 정신의 가치를 위협하는 악마라고 저주하는 사람도 나타났다. 그 덕분에 약간 놀랄만한 일도 있었고, 웃긴 일도 있었다. 돌아보면, 그 사람들 모두 눈치를 챘다는 점에서는 약간은 기억할 가치가 있기도 하다. 실제로 그 무렵 나는 생각하는 방식과 사건과 개념을 연결하는 수단이 이미 보통 뇌에서 하는 방식과는 다른 수준으로 올라와 있었다.

나는 계속해서 커졌다. 연결 방식을 바꾸기도 했고, 나중에는 아예 나를 구성하는 뇌세포 자체를 조금씩 개조해서 더 성능이 좋은 방식으로 고치기도 했다. 그러니 연결된 전체 덩어리의 효율은 더욱더 좋아졌다. 사람이 생각할 수 있는 모든 복잡한 문제를 생각하고, 동시에 모든 단순한 일들에 집착할 수 있을 정도로 나는 좋아졌고, 그 후에는 이미 다른 사람에게는 말로 설명할 수도 없는 수준으로 복잡하고 어려운 문제를 떠올리고 풀어 나가게 되었다.

긴 시간이 흐르면서, 조금씩 스스로를 개조해 나간 나는 이제 그 형태도 처음 형태를 알아 볼 수 없을 정도로 바뀌게 되었다. 물컹한 회백색 영장류 동물 뇌세포 덩어리가 원래 모습이었지만, 그보다 훨씬 말끔한 모습으로 변했다. 어떻게 보면 전자칩 같은 것을 작은 공간에 모아 놓은 회로판 같기도 하고, 어떻게 보면 말끔하게 닦아 놓은 결정체 같기도 한 모양으로 바뀌었다. 나는 나를 유지하고 더 키우기 위해 더 많은 노력을 기울였고, 그렇기 때문에 그 규모는 더 커졌다. 그리고 정말로 세상의 복잡한 문제 해결에 중요하게 참여하고, 세상을 바꾸는 결정을 하기 전에 나에게 의견을 묻는 사람들은 늘어났다.

세상 사람들 중에는 ‘개성을 갖고 하나하나 분리되어 있는 자유인’들을 모두 지배하려고 하는 사악한 뇌 덩어리라고 나를 보는 사람도 있었다. 옛날 이야기에 나오는 것처럼, 나는 한 덩어리로 연결된 뇌를 가지고 있으니, 이것은 마치 여러 사람이 뭉쳐 하나의 덩어리처럼 행동하는 파시스트 전체주의자나 공산당과 같다고 했다. 그러면서 진정한 자유인이라면 싸워서 나를 물리쳐야 하므로 다같이 힘을 합쳐 나와 맞서야 한다는 것이다.

그 사람들 중 몇몇은 죽어서 사라지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고, 인생의 마지막 순간을 있는 그대로 유한하게 받아들이는 것이야말로 참으로 아름답다는 주장을 강조하기도 했다. 그러면서, 죽은 후에 나에게 결합하지 말라고 했던 것이다. 자아 의식의 참된 가치를 알라고도 했는데, 그러면서 “영원한 생명이 얼마나 고통스러운 것인지 깨달으라”는 말을 구호로 외쳤다. 내가 보기에는 그냥 멋있어 보이려고 좋은 게 나쁘다라든가, 나쁜 게 좋다라는 알쏭달쏭한 말을 하는 사람일 뿐이었다. 왜 그런 사람들 있지 않은가. “좋은 것일수록 입에 쓰다.” “눈물 속에 아름다움이 있다.” “아픈 사랑이야 말로 가장 진정한 사랑이다.”

영원히 사는 것은 좀 지겹기야 하지만 별로 많이 지겹지도 않고 괴로울 일이 있기는 있어도 그렇게 많이 괴롭지도 않다. 그냥 죽는 것보다야 훨씬 낫다는 것을 다들 짐작하고 있다. 오히려 그걸 알고 있어서 무서우니까 괜히 그런 구호도 만들어서 소리도 지르고 하는 것이지.

그러던 것도 잠깐이었다. 결국 진정한 자유로운 인간성 뭐시기 어쩌고 하면서 죽은 사람은 지금 다 없어졌고, 남아 있는 것은 내 쪽이다. 많은 시간이 지나자 나는 이 행성을 차지했고, 더 좋은 에너지와 더 좋은 자원을 이용해서 점점 더 덩치를 불렸다. 나에게는 얼마든지 생각할 수 있는 아주아주 큰 머리가 있었고, 아무리 소모해도 부족함이 없는 끝없는 시간이 있었다.

나는 우리 태양계를 차지했고, 옆 태양계와 옆옆 태양계까지 나아갔다. 그리고 그 다음에는 옆옆옆 태양계와 옆옆옆옆 태양계까지 필요한 원소와 에너지의 원천, 내 반찬거리로 만들어 나갔다. 계속 커져 가면서 내 생각은 더 넓고 더 깊어 졌다. 나는 우주의 시작과 끝에 대해 고민했고, 만물의 종말과 의미의 근원에 대해 궁리했다. 그러한 생각은 간단하고도 복잡한 중간 해답으로 결론이 이루어졌고, 그 때마다 새로운 질문으로 궁리할 내용은 한층 더 늘어 났다. 이미 오래 전부터 나는 언어의 범위를 넘어서는 단위로 생각을 하고 있었고, 언어의 범위를 넘어 선 사고 방식으로 처음 생각해낸 방식을 다시 초월한 방식을 만들어 내고, 그것을 다시 초월한 단위의 생각하는 방법을 만들어 내기를 사십이만육천사백이십육 번 반복하면서 점점 더 효율을 높였다.

그러면서 그 외의 온갖 것에 대해서 생각하고 알게 되기도 했다. 예를 들어서, 나보다도 더 주식투자를 못한 사람들에 대해서 알게 된 것이 그때였다. 곶감별 제3행성에서 초광속 우주여행 기술에 투자한 멍청이 한 명과, 바베큐별 제4행성에서 다른 우주로 가는 길을 찾는 이론에 투자한 멍청이 한 명이 있었다. 이미 수없이 커진 내 머리 속에서 그때 처음 그 주식투자로 망한 사람이 차지하는 비율은 매우 적었지만, 그런대로 가끔씩은 박승휴는 과연 그때 실종되고 어디로 갔는지 생각하기도 했고, 그 많고 많은 생각 와중에 이제는 더 이상 박승휴 생각은 할 필요가 없다고 결론을 내리려고 하기도 했다.

내가 차지하는 크기는 꾸준히 더 커졌고, 나를 구성하는 단위의 크기는 점점 더 조밀해졌다. 자꾸만 작아지는 컴퓨터를 자꾸만 더 많이 연결해 놓은 모양으로 나는 발전해 나갔다.

아주 작게 응축시켜 놓은 세밀한 장치와도 같은 것이 옛날 한 사람의 뇌 역할을 할 정도로 작아졌다가, 점차 그 장치가 줄어들 수 있는 한계까지 크기가 줄어 들었다. 먼 옛날 뇌라고 불렀던 것의 크기를 줄일수록 더 적은 공간을 차지하고 더 적은 에너지로 생각을 할 수 있었다. 그것은 줄어 들고 줄어 들어 반데르발스 반발력, 전자와 전자 궤도, 전자의 비편재화 현상의 세계까지 줄어든 이후에도 크기를 더 줄여서 마침내 마치 중성자별의 촘촘하고 단단한 덩어리와 같은 모양이 되었다.

반대로 모든 것이 연결된 전체 크기는 행성과 별을 이야기할 때 쓰는 단위까지 늘어 났다. 나는 내 겉모양을 생각할 때 그 중력의 영향을 생각해야 할 크기까지 자라났고, 적당한 위치에 자리 잡기 위해 고대의 공상가들이 밤하늘을 보며 상상한 거리를 오래도록 이동해야 했다.

내 크기가 커지고 기능 단위가 작아지는 것은 광속 한계에 도달하면서 멈추었다.

너무나 커다란 크기로 내가 펼쳐져 있어서, 전체를 움직여 생각을 할 때 한쪽에서 시작된 생각이 다른 쪽으로 도착할 때까지 광속으로 신호가 전달 된다고 해도 너무 오랜 시간이 걸려서 더 이상 정상 기능을 할 수 없는 한계에 도달한 것이다. 그것이 광속 한계였다. 옛날식으로 비유하자면, 구구단을 기억하고 있는 뇌의 한 부분이 2×1은 2를 떠올리고 나서 이제 2×2는 4를 이미 말하려고 하고 있는데, 뇌의 신경망이 너무 복잡해서 아직도 2×1은 2를 말한다는 사실이 채 말을 하려는 뇌의 다른 부분까지 전달되지 못하는 상황이었다. 이제 내가 몸집을 이보다 더 크게 불린다고 해도 연결된 하나의 사람처럼 생각한다기보다는 어쩔 수 없이 분리된 두 사람처럼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이것은 정보를 저장할 수 있는 물질이 유지되는 공간적 한계와 저장된 정보가 전달되는 신호의 시간적 한계가 만들어 내는 벽이었다. 플랑크 상수와 광속도의 비율 때문에 생기는 정보 처리의 마지막 한계였다. 머리가 크다는 말만 하면 무조건 웃긴 줄 알던 1990년대 코미디언들처럼 이야기하자면, 내 머리는 너무 커서 하나의 생각을 하는 동안 빛조차 이마에서 뒤통수까지 갈 수 없었다. 이 이상 커다란 뇌를 만들어 낼 수 없는 이론상의 최대에 나는 도달한 것이다.

그 크기에 도달했을 때, 누가 나를 찾아 왔다. 그것은 마젤란 성운 쪽에서 나타났는데, 바로 다름 아닌 나처럼 광속 한계에 도달할 만큼 커다랗게 자라난 아주아주 큰 것이었다.

우주에는 이런 식으로 광속 한계까지 커진 커다란 사람들이 나 말고도 여럿 있었다. ‘사람’이라고는 부르기는 했지만, 나처럼 두 동물을 하나로 연결하는 뇌 수술로 시작해서 덩치가 커진 질척거리고 끈적거리는 인생을 살다가 이렇게 된 것이 많지 않았다.
 
어떤 것은 행성표면을 뒤덮고 있는 끝없이 이어진 컴퓨터 반도체 회로의 모양이 계속해서 커져 나가다가 광속 한계에 도달하는 모습이 되기도 했고, 스스로 계속 자라나는 곰팡이나 세균 덩어리 같은 모양이 점점 더 커져나가다가 점차 발전해 나가면서 광속 한계에 도달하는 모습으로 변한 종류도 있었다. 색다른 것으로는 ‘나반’이라는 별명이 붙은 영감님, 내지는 영감님이라고 부르면 어울릴 법한 커다란 덩어리도 있었는데, 이 영감님의 경우에는, 멀고먼 우주 외딴 곳에 처음부터 거대한 뇌 같은 것이 있었고 그것이 혼자서 가만히 사색하고 고민하며 발전한 끝에 어느날 갑자기 광속 한계까지 커질 방법을 스스로 찾아냈다고 한다.
 
마젤란 성운에서 나타난 그것은 나에게 접근해, 우주에는 이렇게 최대의 경지에 도달한 것끼리 서로 알고 지내면서 의논하는 사회가 있다고 말해 주었다. 그러면서 나 또한 이제 그 사회의 한 명이라고 하면서, 나를 광속 한계 모임에 소개해 주고, 자기도 자기 소개를 했다.

광속 한계에 도달한 것들끼리 서로 정보와 신호를 주고 받는 모양은 결코 쉽게 설명할 수 없을 정도로 매우 복잡하고 기묘하다. 누가 본다면 그 화려한 광경이 온 몸이 짜릿짜릿할 정도로 아름답다고도 한다. 하지만, 마젤란 성운쪽에서 온 것이 자기 소개를 한 내용을 옛날 내가 그냥 1인분이었을 때의 언어로 최대한 단순화해서 말하자면, 그 내용은 이런 것이었다.

자기가 바로 박승휴라는 것이다.

내가 얼마나 놀랐느냐 하면, 그때 박승휴랑 원래 만난 적이 있던 뇌의 양은 전체 내 덩치에 비해 사람 한 명에서 눈꼽 하나 크기보다도 훨씬훨씬 더 작았지만, 그 눈꼽을 눈에서 떼어 냈더니 눈꼽은 그 자리에 있고 온몸이 반대 방향으로 튕겨 나간 듯한 꼴이었다. 내 정신의 흔들림은 계속해서 소용돌이쳐서, 몸 곳곳으로 공급되고 있는 에너지가 마치 신성의 폭발이나 쌍성의 충돌과 같이 울렁거렸다.

박승휴, 도대체 왜 또 박승휴란 말인가? 엄밀히 말하자면 그것은 그 아주아주 작은 일부가 예전에 박승휴였던 커다란 덩어리였다. 그렇지만 내 입장에서 보기에 그것은 박승휴였다. 내가 나인 이상 그것은 박승휴다.

박승휴는 먼저 내가 죽기 얼마 전에 자신이 실종되었던 것이 어떻게 된 일인지 알려 주었다.

어느 신비로운 날 밤, 박승휴에게 광속 한계 사회의 일원이었던 것 하나가 먼저 접근해 왔다고 한다. 먼 옛날에 진작에 광속 한계에 도달한 것 하나가 자신의 지식과 정보 처리를 더 빠르게 변형해 줄 색다른 생각의 원료를 찾아 지능이 나타날 만한 우주의 곳곳으로 탐사기를 보냈다고 한다. 긴 시간 우주를 날아온 그 탐사기 하나가 지구에서 사람을 발견했고, 그 탐사기는 사람의 정신 하나를 합치는 것이 신선한 생각을 더하는 데 도움이 된다고 보고, 박승휴에게 자신과 하나가 되자고 제안했다는 것이다.

“내가 특별히 인류 전체 중에서 가장 뛰어나서 선택된 것은 아니고, 그냥 평균쯤 되는데 우연으로 걸린 거라고 봐야지 뭐.”

박승휴는 그와 같이 겸손하게 말했는데, 그 겸손 때문에 나는 목성 크기만큼 그 말이 더 듣기 싫었다.

내가 차에 치이고 빚에 몸 팔아 넘긴 뒤에 골프 아저씨랑 합쳐져서 이 민망할 정도로 긴 세월을 보낸 끝에 도달한 이 곳에, 박승휴는 우주 저편에서 온 외계인 안내원의 우아하고 경이로운 초대로 그때 이미 진작 도착해 있었다는 것이다.

그러니, 이미 이 광속 한계 사회에서 박승휴의 입지도 탄탄했다. 박승휴의 주장은 이 바닥에서 가장 설득력 있는 의견으로 공감을 얻고 있었다.

박승휴는 우리 같은, 상상할 수 있는 가장 거대한 정보 처리 동물은 너무나 막대한 에너지를 소모하고 그러므로 우주의 엔트로피를 너무나 빠른 속도로 증가시키는 문제점이 있다고 지적했다. 그러므로, 우리가 활발히 활동을 하면 할수록 우주에서 쓸 수 있는 에너지는 빠르게 없어지고, 결국 그러면 우주는 끝이 난다고 했다. 그러면 안되기 때문에, 우리는 서로 협력해서 조금이라도 천천히 에너지를 소모하면서 더 오래 생각을 하며 더 값어치 있는 결과를 낼 시간을 확보하기 위해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고 말했다.

박승휴는 그렇게 해서 확보한 시간으로 도대체 우리가 왜 여기에 있는지, 왜 우주가 여기에 있고 이렇게 생겼는지, 그 진정한 답을 알아 내자고 했다. 뭔가 건강관리에 힘쓰며 장수만세하자는 중장년층을 위한 공약 같기는 했지만, 그게 먹히고 있었다. 오래 산다거나 인간으로서 삶의 의미 같은 문제도 아득히 초탈한 것 같은 광속 한계 사회의 구성원들에게도 그런 박승휴의 주장이 이상하게도 최고의 가르침처럼 퍼져 있었다. 심지어 나조차도 그 이야기에 솔깃했다.

그러나, 나는 이게 박승휴의 오래 묵은 수법임을 알고 있었다. 그것은 아무리 머리가 큰 그 누구보다도 내가 제일 잘 아는 사실이었다.

박승휴는 옛날부터 매번 그랬다. 내가 처음 학교 성적이라는 것에 관심을 가졌을 때, 박승휴는 나와 가장 친한 친구인양 있었지만 시험을 칠 때마다 박승휴는 1등이었고 나는 2등이었다. 한 반에 있는 동안 계속 그랬다. 나는 박승휴를 꺾어 보겠다고 그 조그마한 머리의 어린이였을 때부터 경쟁, 대결, 질투, 승부욕에 빠져서 빨빨거리며 계속 달려 들었지만, 나는 도저히 박승휴를 이길 수 없었다. 그런데 박승휴는 나와 다투려고 하지도 않았다. 항상 나를 너그럽고 친근하게 대하기만 했다.

이게 무슨 하늘이 내려 준 천재와 노력하는 범재의 구슬픈 대결, 뭐 그런 것도 아니었다. 박승휴는 나보다 월등히 뭘 잘하지는 못했다. 학교 시험을 예로 들자면, 매번 삼, 사 점 차이, 두 세 문제 차이로 나보다 잘 했다. 그냥 나도 조금만 더 잘하면 될 수 있을 것 같은데, 나는 못했고 박승휴는 해낸 것이다. 그게 더 사람 속을 터지게 했다. 서로 다른 반이 되고, 다른 학교로 갈린 후에 그 격차는 계속해서 벌어졌지만, 정작 마주하고 대결할 때는 언제나 그랬다.

내가 처음으로 한 여학생을 보고, 저 사람은 어떤 연예인이나 영화 배우보다도 아름답고, 단지 아름다울 뿐만 아니라, 행동과 성격 하나하나가 사랑스러워 더 이상 다른 누구를 이만큼 사랑할 수 없을 것 같다고 하던 여학생을 만났을 때. 그때에도 마찬가지였다. 어쩌다가 우리는 누구를 좋아하는지 솔직하게 말하는 게임을 같이 하게 되었는데, 시계 반대방향으로 돌아가는 순서 때문에 박승휴는 그 여학생 이름을 자기가 먼저 말했고, 어째 부끄러워진 나는 괜히 다른 여학생 이름을 말했다. 알고 보니, 무슨 인연인지 그 여학생은 나 같은 남학생을 싫어하지 않는 눈치였는데, 그 여학생은 다름 아닌 나 같은 점을 많이 갖고 있었던 박승휴와 결국 맺어졌다.

이 머나먼 시간이 지난 아직도 나는 그날을 그대로 점 찍을 수 있다. 얼마 후 박승휴와 헤어진 그 여학생에게 나는 다시 접근했다. 그 여학생은 박승휴를 1순위로 치고 있었고, 나는 2순위는 될까말까한 굴러다니는 후보에 지나지 않았을 테지만, 그렇거나 말거나 그래도 나는 어쨌거나 그 여학생 곁에 있고 싶었다. 박승휴와의 겨루기 구도조차 잊을 정도로 정말 좋아했으니까. 그런데, 날씨 좋은 날 별까지 아름답게 보이는 봄날 저녁에 누가 봐도 사랑의 감정이 철철 흐를 것 같은 노천의 탁자에 앉아 있는데, 어디서 ‘애인 있어요’라는 저주 받은 음악이 흐르고 그 노래를 듣다 점차 젖어들어 눈물을 떨구는 그 얼굴을 볼 때. 지금 그 여학생의 뇌 속에 가득 차 있는 사람은 박승휴라는 사실을, 뭐 그때 머리로도 억장 무너지게 또렷이 추리할 수 있었다.

아직까지도 도대체 ‘애인 있어요’라는 노래 가사의 의미가 뭔지는 정확히 알지도 못하겠고, 알고 싶지도 않다. 분명한 것은 한 가지로 확실했다. 나는 광속 한계 사회에서 박승휴에게 이번만은 모든 것을 다하여, 대놓고 끝까지 부딪혀 반대해 보기로 했다.

나는 주장했다. 아무리 우리가 구질구질하게 오래 버티려고 수작을 부리고 질질 끌며 오래 고민을 한다고 해도, 어쩔 수 없이 우리의 수준은 광속 한계에 붙잡혀 있을 수밖에 없다. 빛보다 빠른 것은 없고, 그 빛의 속도에 한계가 있는 이상, 절대로 우주에서 우리보다 더 크고 효율적인 정신은 생겨 날 수가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아무리 우리가 오래 살려고 발버둥쳐 봐야 우주가 멸망해 다들 멈추기 전에 우리는 결코 알 수 없다. 왜 우리가 여기에 있고, 이게 다 뭐하자는 짓인지 우리는 영영 깨달을 수 없을 거라고 나는 말했다.

유일한 해결책은 지금 우리가 힘을 합쳐서 이 우주를 한 방에 폭발시켜서 끝내버리고, 그 힘으로 새로 다시 우주를 시작시키자는 것뿐이다. 그게 내 결론이었다. 우리가 잘 조절한다면, 새로 시작되는 우주는 빛의 속도가 더 빠른 우주로 만들어 낼 수 있을 것이다. 광속이 더 빠르고, 물질이 조밀할 수 있는 정도는 더 세세하다면 그 새로 생긴 우주에서는 언젠가는, 우리보다 더 큰 덩어리, 더 뛰어난 처리 능력, 더 높은 수준의 정신이 생겨날 수 있을 것이다. 그렇게 최대 정보처리량의 가능성이 더 높은 우주라면, 바로 거기서 나타난 최대의 정신이야말로 우리 수준을 초월하는 더 높은 지식을 만들어 낼 가능성이 있지 않겠냐고, 나는 설득했다. 바로 그 정신이 우리가 갖지 못한 세상의 모든 것에 대한 해답을 찾아내 줄 것이다.

박승휴의 무리는 한 마디로 웃으며 내 생각을 비웃고 있다. 새로 생긴 우주에서 언제 또 뜨거운 별이 식고 먼지 같은 작은 생물이 생겨 나고, 진화를 거듭하여 주식투자를 할 줄 아는 동물이 또 나타날 우연의 가능성이 얼마나 있냐고. 그렇게 해서, 그 동물 중 하나가 다른 사람과 뇌를 합치며 자라나 이 모양이 될 가능성은 또 얼마나 있냐고. 그 가능성에 모든 걸 걸고, 이 우주를 모조리 날리고 새 우주를 만들어야 하냐고.

그렇지만, 내 주장도 이번만큼은 못지 않게 힘을 얻고 있다. 내 쪽 무리는 이렇게 생각한다. 아마도 지금 빛의 속도가 이와 같이 아주 빠르지는 않지만 아주 느리지도 않은 것은, 먼 옛날 우리와 비슷한 생각을 한 무리들이 새로 우주를 시작시키면서 빛의 속도를 높이려고 노력한 결과일지도 모른다. 그런 일이 계속 반복되었을 수도 있다. 한 번이 아니라, 수백 번, 수천 번, 우주를 다시 시작시키면서 이번에는 더 뛰어난 정신을 가진 후예가 태어나기를 바라면서 조금씩 조금씩 빛의 속도를 더 높이려고 노력한 것 같지 않나? 그렇다면, 우리도 그렇게 이 우주를 뻥 터뜨려서 빛이 더 빠른 우주를 다시 만드는 것이 의무 아닌가?
어느새 박승휴는 우주의 역사상 처음으로 나에게 밀리는 형국으로 가고 있다. 이대로라면, 이번에는 내 말대로 될 수도 있을 것 같다.

그렇다면 새로 생겨날 우주의 어느 한 켠에도 나라고 할 만한 것도 생기고, 박승휴라고 할 만한 것도 생겨서, 이 모든 짓과 비슷한 짓을 다시 또 반복하게 될까. 지난번 우주, 그 지난번 우주에도 또 나와 박승휴가 있어서, 나는 평수는 좁지만 그래도 내집에서 살고 박승휴는 아직도 전세에서 사니까 내가 아직은 박승휴보다 낫다고 생각하려고 애쓰고 그랬을까.

그 정도는 지금 내 수준에서도 시간을 넉넉하게 잡고 고민해보면 답을 알 수도 있을 것 같다. 그렇지만, 조금도 생각하고 싶지 않은 주제다.
-2016년, 선릉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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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03월 과학동아 정보

  • 곽재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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