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믿어 주길 바래~ 함께 있어~.’
14일 오전 10시 서울 홍은예술창작센터의 연습실. 말 그대로 ‘막춤’을 추기 위해 이곳을 찾았다. 스피커에서는 원조 요정 SES의 ‘아임 유어 걸’이 흘러나오고, 사방엔 거울이 설치돼 있었다. 거울 속의 안절부절 못하는 내 모습을 보자 등에선 식은땀이 쫙 흘렀다. 기자생활 6년 동안 쌓아온 노래방 경험을 살려 적당히 움직이면 될 거란 생각은 오산이었다. 대낮에 그것도 맨 정신으로 춤을 춘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민망한 웃음만 터뜨리고 있는 기자에게 홍댄스컴퍼니 대표인 홍혜전 영남대 교수는 “자신감을 가지라”는 얘기를 10번도 넘게 했다.
3분쯤 지났을까. 드디어 팔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머리 위 허공을 오른손과 왼손으로 번갈아 찌르는 동작. 누가 가르쳐주지 않았는데 박자에 맞춰 저절로 몸이 움직이는 것이 신기했다. 다음 동작은 팔 돌리기. 양손을 ‘안녕’ 인사하듯 접고 가슴 높이에서 돌리는 춤이었다. 홍 교수는 “자신감이 붙으니 춤을 시원시원하게 잘춘다”며 칭찬했다.
자신감이 춤과 정말 관계가 있을까. 기본적으로 춤은 추는 사람의 성격이나 심리상태를 반영하고 있다. 무용이론가 루돌프 라반은 춤과 심리상태의 연관성을 분석해 ‘라반동작분석(LMA)’ 이론을 정립했다. 그는 춤을 추는 사람이 공간을 어떻게 활용하는지, 얼마나 빨리 움직이는지, 신체의 모양을 어떻게 변화시키는지, 얼마나 세게 움직이는지 등에 주목했다. 움직임이 세고 역동적인 사람은 자신감이 넘치고 자신의 욕구를 잘 표현하는 사람, 신체 모양을 적게 변형시키는 사람은 차분하고 소극적인 사람, 주어진 공간을 적극적으로 활용하는 사람은 공감능력이 뛰어난 사람이라는 설명이다. 그의 이론대로라면 기자가 이날 처음 춤을 출 때 평소의 실력(?)을 발휘하지 못한 이유는 ‘잘 못 추면 어쩌지’하고 걱정하는 마음이 컸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자신감이 춤의 전부는 아니다. 기자와 동행한 디자이너도 막춤을 춰봤는데 같은 음악에 동일한 동작을 하는데도 느낌이 완전히 달랐다. 막춤에도 ‘클래스’가 있었던 것이다. 홍 교수는 경험의 차이라고 설명했다. 팔 다리를 원하는 대로 움직일 수 있는 운동감각과 박자 및 공간 정보를 해석하는 능력, 타인의 동작을 분석하거나 따라할 수 있는 능력이 막춤의 수준을 좌우한다. 홍 교수는 “오랜 반복 학습을 통해 몸의 신경과 근육이 박자에 조건반사적으로 반응하는 것을 조절할 수 있다”며 “평소에 춤을 많이 춰 본 사람이 막춤도 잘 추는 것은 당연한 일”이라고 말했다.
당연히 조기 학습이 막춤에도 중요하다. 막춤의 수준을 좌우하는 운동감각은 4~7세 때 집중적으로 발달한다. 춤의 기본 동작이라고 할 수 있는 회전, 팔다리 뻗기 등의 동작을 이 시기에 익히기 때문이다. 몸에 순간적으로 힘을 줬다가 빼는 운동감각 또한 어린 시절 길러진다. 어릴 때 이런 운동감각을 익히지 못하면 자라서 ‘몸치’가 될 가능성이 높다.
몸의 근육과 뼈도 춤사위에 영향을 미친다. 미국의 체육과학자 W. 셀든 박사는 뚱뚱한 체형과 마른 체형, 보통 체형에 적당한 ‘맞춤형 춤’이 따로 있다고 주장했다. 그의 주장에 따르면 키가 크고 지방이 적으며 근육이 얇은 체형(이 기사를 편집한 디자이너 체형이 이러하다)은 관절과 근육의 유연성이 떨어진다. 때문에 테크노댄스와 같은 운동 능력이 크게 필요 없는 가벼운 막춤이 유리하다. 반면 부드러운 근육 조직을 가진 뚱뚱한 체형(안타깝게도 기자의 체형이다)은 뛰어난 운동신경을 바탕으로 웨이브 동작과 역동적인 동작으로 막춤을 추면 효과가 뛰어나다.
20분쯤 무아지경으로 막춤을 추고 나니 ‘사람들이 왜 막춤을 출까’하는 궁금증은 머릿속에서 깨끗이 사라졌다. 노래방에서, 마을 축제에서, 관광버스 안에서 사람들이 막춤을 추는 이유는 ‘즐겁기 때문’이다. 홍 교수는 이를 두고 “본능을 표출함으로써 카타르시스를 경험하는 것”이라고 분석했다.
무용인류학에서 춤은 인간의 가장 본능적이고 원초적인 행위다. 특히 언어가 존재하기 전부터 최근 문명사회까지 춤은 ‘구애 본능’을 표출하는 강력한 무기였다. 실제로 10년 전 영국의 과학학술지 ‘네이처’에는 남성이 춤을 잘 출수록 여성들에게 인기가 많다는 연구결과가 실렸다. 남성 댄서 183명이 똑같은 음악에 맞춰 춤추는 모습을 찍어 여성 115명에게 보여줬더니(얼굴 표정은 드러나지 않도록 애니메이션으로 보여줬다), 여성들은 남성이 춤을 잘 출수록 매력을 강하게 느꼈다. 재밌는 사실은 초반에 호감이 없었던 남성도 춤을 잘 추면 매력이 급상승한다는 것. 클럽에서 마음에 드는 이성과 섹시한 춤을 출 때 기분이 좋아지는 것이 바로 이런 이유에서다.
막춤은 두뇌 기능을 활발하게 한다. 국내의 한 두뇌학습클리닉에서 고등학생 33명을 대상으로 춤을 추는 실험을 진행했다. 클리닉은 학생들에게 5분씩 하루에 3번, 4주 동안 춤을 추게 한 뒤 뇌 기능을 비교했다. 그 결과 33명 중 27명의 뇌 기능이 향상됐다. 특히 자신의 의지와 무관한 행동을 조절하는 기저핵과, 정서적인 불안감을 담당하는 변연계가 춤을 추기 전보다 활성화 됐다. 춤을 추면 오히려 차분하게 집중하는 능력이 올라간다!
막춤은 심리 치료나 정신 수련에 효과가 있다. 미국 의학계에서는 1930년대부터 정신과 환자, 정신지체 및 신체장애 환자들에게 춤을 이용한 치료를 적용해왔다.
치료의 기본 원리는 춤을 통해 내 마음의 상태를 알아내는 것이다. 몸을 자유롭게 움직이는 과정에서 스스로 어떤 감정과 느낌, 생각들이 떠오르는지 살펴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몸치라고 주눅들지 말고 일단 가볍게 시작하는 것이 중요하다. 좋아하는 음악을 틀어놓고 몸과 친해지는 시간을 가지는 것이다. 춤을 출 때 어깨가 올라가 있고 호흡이 급하다면 평소 과도하게 긴장을 한 것일 수 있고, 눈빛이 불안하고 몸짓이 망설이는 듯 자신이 없으면 우울한 마음이 반영된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홍 교수는 “내면의 부정적인 성향을 긍정적으로 바꿔나가는 데도 역시 춤이 도움이 된다”고 말했다. 항상 ‘빨리빨리’를 외치는 조급증인 사람에게는 느린 춤동작이, 한 가지 춤동작만 고집하는 고지식한 사람에겐 변화무쌍한 춤동작이 도움이 되는 셈이다. 집으로 돌아오는 차 안, 기자의 막춤을 찍은 영상을 돌려보며 ‘과연 나에게 필요한 춤은 무엇일까’ 생각했다. 취재 생각은 멀리 안드로메다로 보낸 채 마냥 신난 기자에겐 정신이 번쩍 들게 하는 춤이 필요해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