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세 살 기억 여든까지 못할까](https://images.dongascience.com/uploads/old/article/2014/05/1471915929538419c558275.jpg)
열렬히 사랑하는 연인이 있다. 예기치 못한 교통사고로 여자는 기억상실증에 빠져 자신의 과거를 모두 잊었다. 하지만 남자를 만날 때마다 이유를 알 수 없는 설렘을 느끼다, 결국 처음 만나 사랑을 나눈 장소에서 갑자기 모든 기억이 되살아났다. 둘은 다시 사랑에 빠진다.
드라마에 나올 법한 이야기이다. 실제로 기억상실증은 영화나 드라마의 단골 소재다. 하지만 현실에서 기억상실증은 매우 드문 현상이다. 머리를 세게 부딪히는 정도로 기억이 사라지거나 다시 돌아오는 일은 더더욱 없다. 하지만 놀라지 마시라. 이 글을 읽는 모든 독자들은 과거에 기억상실증을 겪은 적이 있다. 그 동안 경험한 거의 모든 기억을 완전히 망각하는 심한 수준의 기억상실증, 바로 ‘유년기 기억상실증’이다.
초등학교 입학 전의 유년기를 자세히 기억하고 있는 사람은 거의 없다. 혹시 기억이 난다 하더라도 단편적으로 몇몇 기억만이 남아있거나, 나중에 가족의 이야기나 사진 등을 보고 만들어진 ‘조작된’ 기억이 대부분이다. 실제로, 만 5세 이전에 다른 집으로 입양된 아이는 친부모에 대한 기억을 거의 하지 못한다. 심지어 자신이 입양됐다는 사실 자체도 기억하지 못하는 경우가 다반사다.
하지만 이상한 점이 있다. 2~3살 때 배운 낱말이나 감정, 동작 등은 이후에도 계속 사용한다. 기억이 완전히 사라지는 것은 아니라는 뜻이다. 왜 그럴까.
엄마는 잊어도 젓가락질은 기억해
답은 간단하다. 둘이 서로 다른 기억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기억상실증은 그 중 특정한 종류의 기억을 대상으로만 일어난다.
심리학자 엔델 털빙 교수는 기억을 크게 외현기억과 내재기억으로 나눴다. 외현기억은 다시 의미기억과 삽화적 기억, 자서전적 기억으로 나누고, 내재기억은 절차적 기억이나 지각적 기억 등으로 나눈다(아래 참조).
![기억이라고 다 같은 기억이 아니다](https://images.dongascience.com/uploads/old/article/2014/05/108094361353841a00bade0.jpg)
이 가운데 기억상실증의 대상이 되는 것은 삽화적 기억과 자서전적 기억이다. ‘5살 생일에 무슨 일이 있었나?’ 같은 자서전적 기억은 나이가 들면 거의 완전히 사라진다(기억나는 사람 손 들어보시라). 입양 전 부모에 대한 기억도 마찬가지다. 반면 절차적 기억에 해당하는 젓가락질이나 자전거 타는 법, 지각적 기억에 해당하는 ‘난로는 뜨겁다’나 ‘소금은 짜다’ 같은 기억은 사라지지 않는다.
기억을 분류한다니 이론적이고 추상적으로 느껴질 수도 있다. 하지만 이들 기억은 뇌의 각기 다른 부위에 저장된다는 사실이 1950년대에 뇌과학적으로 확인됐다. 여기에는 H.M.이라는 환자의 기이한 사례가 큰 도움이 됐다. 이니셜로만 알려진 이 환자는 어린 시절에 자전거를 탄 사람과 부딪혀서 머리를 크게 다쳤다. 머리 부상으로 심각한 간질을 앓게 됐는데, 도무지 약이 듣지 않았다. 결국 최후의 방법으로 양측 측두엽(머리의 양 옆에 위치한 대뇌의 부분)과 해마(옆머리 안 쪽에 위치한 ‘C’자 모양의 부분)를 잘라내는 수술을 받았다. 수술은 성공적이었지만, 대신 후유증으로 심각한 기억상실을 앓게 됐다.
H.M.은 새로운 사실은 잘 학습할 수 있었지만, 기억이 몇 분밖에 지속되지 않았다. 새로운 기억을 받아들이지 못하니, 수술을 받은 이전만 기억하고 이후는 전혀 기억하지 못하는 ‘시간이 멈춘 사람’이 됐다. 나중에는 거울에 비친 자기 얼굴도 몰라보게 됐는데, 젊은 시절의 자기 얼굴만을 기억하기 때문에 늙어버린 자신을 알아보지 못한 것이다.
![유년기 기억상실증, 왜 일어날까?](https://images.dongascience.com/uploads/old/article/2014/05/190242367353841a5cadbbf.jpg)
![잃어버린 유년의 기억을 되살릴 방법은 없다. 하지만 기억을 더 많이 남기도록 도울 수는 있다. 아이들에게 자신의 이야기를 말해보게 하면 어떨까.](https://images.dongascience.com/uploads/old/article/2014/05/41630253841aa2494c7.jpg)
H.M.의 사례에서도 유년기 기억상실은 외현기억에서 주로 일어난다는 점을 확인할 수 있다. 만약 내재기억도 사라진다면 우리는 걸음마나 젓가락질부터 다시 배워야 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관련한 뇌부위가 다르기에, 다행히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
언제, 왜 일어날까
그렇다면 이런 유년기 기억상실증은 언제, 왜 일어날까. 시기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연구가 돼 있다. 미국 에모리대의 파트리샤 바우어, 마리나 라르키나 교수팀은 5살이 된 어린이 83명을 모은 뒤, 3세 때 겪었던 일을 회상하게 했다. 주로 캠핑여행이나 생일파티와 같은 중요한 사건에 대한 것이었다. 그리고 5년 동안, 아이들을 불러서 같은 기억을 다시 회상하게 했다. 그 결과 7세까지만 해도 3세 때에 있었던 일을 60% 이상 기억하던 아이들이, 8세가 되자 갑자기 40%도 기억하지 못하게 된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7세에서 8세로 넘어가는 시점에 유년기의 기억이 급격히 사라져 버린 것이다. 우리의 삶은, 초등학교에 들어갈 무렵부터 새롭게 시작한다고 해도 틀린 말이 아니다.
![뇌세포 교체는 어렸을 때에만..](https://images.dongascience.com/uploads/old/article/2014/05/173592491453841acbdc291.jpg)
하지만 이유는 아직 논쟁중이다. ‘정신분석학의 아버지’ 지그문트 프로이트가 제안한 외상 이론부터 유아의 뇌 신경 발달이 미숙해서라는 이론, 유년기의 기억이 중요하지 않기에 진화 과정에서 제거됐다는 이론, 언어와 이야기(내러티브) 구사 능력이 약해 기억을 저장하지 못해서라는 주장까지 다양하다. 최근에는 이들을 나이에 따라 종합한 이론이 주목 받고 있다(84쪽 그림 참조).
그런데 최근 캐나다 토론토대의 쉬나 조슬린 교수와 폴 프랭크랜드 교수는 유년기 기억상실증에 대한 새롭고 유력한 가설을 제시했다. 마치 젖니가 빠지고 새로 튼튼한 간니가 나는 것처럼, 기억을 담당하는 뇌의 뉴런(신경세포) 일부도 새로운 뉴런으로 바뀐다는 것이다. 기억도 뉴런을 따라 ‘초기화’된다.
원래 뉴런은 한번 형성되면 좀처럼 다시 재생되지 않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예외적으로 해마(특히 치상회라는 해마의 일부분)는 새로운 뉴런이 지속적으로 재생되며, 특히 출생 후 몇 년 동안은 엄청나게 빠른 속도로 만들어진다. 성인의 수백~수천 배에 달할 정도다. 인간과 비교적 가까운 원숭이는 출생 시 만들어진 해마의 40%가 출생 후 재생된 뉴런으로 대치된다. 이렇게 새로 만들어진 뉴런은 기존 뉴런보다 새로운 정보를 더 효과적으로 기억하고 저장할 수 있다.
뉴런은 다른 수천 개의 뉴런과 밀접한 연결(시냅스)을 유지하고 있다. 그런데 만약 해마에서 많은 뉴런이 새로 만들어지면, 이들이 기존 뉴런들 사이를 파고들면서 종래의 시냅스를 끊어버릴 가능성이 있다. 특히 해마 내 치상회와, CA3라 불리는 부분 사이의 연결은 외현기억 유지에 아주 중요한 곳이다.
연구팀은 이 가설을 입증하기 위해 두 가지 실험을 했다. 먼저 어른 쥐를 수조에 넣어 목적지까지 헤엄을 치도록 훈련시켰다. 처음에 쥐는 온 수조를 헤매며 돌아다니다가, 점차 경로를 기억하면서 목적지에 신속하게 도달하게 됐다. 훈련이 끝나자 실험한 쥐의 절반에게 특수 처리를 해 해마의 뉴런 재생을 2~3배 증가시켰다. 인위적으로 새끼 쥐의 뇌로 돌려놓은 셈이다. 그러자 새끼 쥐의 뇌로 조작된 쥐들은 목적지까지 헤엄치는 길을 잊고, 다시 처음부터 헤매는 경향을 보였다. 새로 만들어진 뉴런이 기존의 기억을 파괴했기 때문이다.
이번에는 반대 과정을 실험했다. 새끼 쥐가 특정한 상자에 들어갈 때마다 전기자극을 줬더니, 쥐들은 점차 이를 기억하고 상자를 피하게 됐다. 이후 실험 쥐의 절반에게 특수한 처리를 해 뉴런의 재생이 일어나지 않도록 조작했다. 즉 새끼 쥐의 뇌가 어른 쥐의 뇌로 ‘교체’되지 않도록 한 것이다. 이 쥐들에게 4주 후에 다시 상자를 보여주자, 조작하지 않은(즉 정상적으로 뉴런 교체가 일어나 어른이 된) 새끼 쥐들은 과거를 ‘잊고’ 다시 활발하게 상자 안으로 들어갔다. 하지만 뉴런 교체가 일어나지 않은 쥐들은 여전히 상자를 피했다.
이 연구가 시사하는 것은 무엇일까. 새로운 뉴런이 만들어지면 기존 기억이 사라지고, 새 뉴런이 만들어지지 않으면 기존 기억도 그대로 유지된다는 것이다. 이 연구를 당장 인간에 적용하기는 어려움이 있다. 그러나 유년기 기억상실증의 원인을 설명해 줄 유력한 가설로 보인다.
소중한 어린시절 기억, 유지할 수는 없을까
앞서 제시한 연구에 따르면, 3살 무렵의 기억은 7~8세를 지나면서 갑자기 상당부분 사라진다. 하지만 로빈 피부쉬의 통합 이론에 따르면, 자서전적 기억은 5세 무렵에 완성된다. 왜 2년이나 지나서 기억이 갑자기 사라지는 걸까. 바우어 등은 지수함수적 망각곡선(지수함수는 급격히 줄어드는 곡선 그래프 형태를 띤다)을 이용한 흥미로운 주장을 했다. 사실은 자서전적 기억 능력이 완성되면서부터 망각은 시작되지만(내러티브의 구조를 띠는 의미 있는 기억은 자서전적 기억으로 편입되고, 나머지는 사라진다), 그 과정이 지수함수적인 양상으로 일어나기 때문에, 특별히 초기에 더 많은 기억이 한꺼번에 사라지는 것처럼 ‘착시’가 일어난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보자. 5세부터 기억이 쌓이기 시작해 7세경에 도달했을 때 약 1년치(즉 절반의 기억)를 망각한다면 전체 기억의 50%를 잊은 것이다. 그러나 55세에 도달한 성인이 1년치 기억을 잊으면 고작 2%의 기억을 망각한 것이다.
유년기 기억은 아주 소중한 추억이다. 그 기억이 대부분 사라진다니 속상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잊어버린 유년기의 기억을 되살릴 수 있는 방법이 있을까? 아쉽게도 그런 방법은 없다. 하지만 우리의 아이들이 유년기의 기억을 더 많이 남길 수 있도록 도와줄 수는 있다. 아이들에게 자신의 이야기를 더 재미있고 정교하게 들려주고, 반복해주자. 매일매일의 이야기를 직접 말하도록 해주고, 이를 보다 짜임새 있게 재구성해주자. 그리고 즐거웠던 일들을 자주 반복해서 함께 이야기해보자. 나중에 어른이 되어서도 아이는 즐겁고 행복한 유년기의 기억을 보다 더 많이, 오랫동안 간직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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