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종은 과학적으로나 사회적으로나 ‘사망선고’를 받은 용어다. 인종 개념이 처음 등장한 19세기 이래, 학자들은 사람이 지역에 따라 서로 다른 종이라는 생물학적 근거를 찾는 데 실패했다. 현재 인류는 ‘호모 사피엔스’ 하나의 종이라는 게 정설이다. 지역 혹은 피부색에 따라 언뜻 다양한 외모와 기질을 지닌 사람들이 있는 것 같지만, 이런 차이는 하나의 종 안에서 70억명이나 되는 인구가 보여주는 다양성이라고 이해하고 있다.
사회적으로도 인종 개념은 퇴출 직전이다. 누군가를 ‘스스로가 결정하지 않은 조건(성, 피부색, 출신 지역, 신체 조건 등 태생적인 조건)’에 따라 차별해서는 안 된다는 인식이 늘고 있다. 인종이 바로 이런 대표적인 개념이었다. ‘너와 나’를 구분 짓고 나아가 ‘나는 너보다 우월하다’는 차별 의식으로 발전한 끝에 나타난 것은, 18~19세기의 노예무역이나 20세기 나치의 인종청소 등 우울하고 끔찍한 역사였을 뿐이다.
과학이 인종 개념을 되살린다?
인종은 사망선고를 받았지만, 완전히 죽지는 않았다. 특히 최근에는 일찌감치 인종이 없다고 선언했던 과학계 일각에서 다시 인종을 입에 올리는 사례가 심심치 않게 나오고 있다. 물론 이런 낙인에는 논란이 있지만, 논의 자체는 주목할 만하다.
지난 2월 14일, 미국 시카고에서 열렸던 미국과학진흥협회(AAAS) 연례총회에서는 특이한 학술대회가 열렸다. ‘인종이 사라진 사회의 신인종주의와 과학적 인종주의’라는 제목이었다. ‘피부’라는 책으로 국내에도 잘 알려진 니나 자블론스키 미국 펜실베이니아대 인류학과 석학교수가 좌장을 맡고, 다양한 생물학자와 인류학자, 심리학자, 사회학자 등이 발표자로 나섰다. 이들은 최근 부쩍 늘고 있는 ‘인종별’ 맞춤 의학과 교육을 언급하며 “과학과 사회의 미래에 위험을 가져오게 될 것”이라고 경고했다.
이런 토론회가 마련된 배경에는 최근 한창 주가를 올리고 있는 유전체학(게노믹스)이 있다. 2003년 인간게놈프로젝트에 의해 인류의 첫 번째 유전체가 해독된 이후, 유전체 해독 기술은 빠르게 발전했다. 이제는 개인의 유전체를 약 100만 원의 비용으로 한달 이내에 해독할 정도가 됐다. 현재는 서로 다른 사람의 유전체 서열을 비교해 개개인의 신체 특성은 물론, 발병하기 쉬운 질병까지 예측할 수 있는 단계다. 이를 바탕으로 병원과 연계해 개인에게 맞춤형 의학 상담과 진단을 해주는 서비스도 늘고 있다.
문제는 이렇게 유전체학 정보가 쌓여가면서 이들을 ‘집단’으로 묶어 비교하는 연구가 가능해졌다는 부분이다. 이렇게 얻은 인구 집단의 유전체 특성을 ‘그 집단의 생물학적 특성’으로 일반화하는 일도 가능해졌다. 이들은 이를 지적하며, “과거의 인종 개념을 되살리는 게 아니냐”고 꼬집고 나선 것이다.
미국 노스캐롤라이나대 생명과학과 조셉 그레이브스 교수는 비판의 선봉장이다. 그는 이런 연구 경향을 ‘인종의학(racial medicine)’이라고 명명했다. 그는 “인종의학에는 세 가지 가정이 있다”고 주장한다. ‘현생인류에게 여러 생물학적인 인종이 따로 있고’, ‘이들의 유전자 조성이 다르며’, ‘인종에 따른 유전자 차이로 사회 구성원의 건강상의 차이를 설명할 수 있다’는 가정이다. 그레이브스 교수는 세 가지 모두 허구라고 주장한다. 그는 “현대의 유전체학에 따르면 생물학적인 인종은 없다”며 “지리적인 이유로 생긴 유전자 변이에도 불구하고, 유전체의 상당 부분은 단일함을 유지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과학자들도 인종에 반대한다!”
하지만 이들의 주장이 이미 오래 전부터 존재했던 ‘집단유전학’에 ‘인종’이라는 이름을 부적절하게 갖다 붙인 매도라는 반론도 있다. 집단유전학은 어떤 인구 집단(ethnic group, ‘민족’이라는 뜻으로 문화적, 사회적 경험을 공유하는 집단을 말한다)의 특성을 유전학을 이용해 밝히는 연구다. 특별히 새로운 분야도 아니고, 궁극적인 목표도 전세계 인류에 대한 보편적인 의료 복지일 뿐, 차별이 아니라는 주장이다. 과학자들 역시 생물학적 인종 개념이 부활하지 않도록 극도로 주의해서 연구하고 있는데, 괜한 트집으로 생사람을 잡고 있다고도 항변한다.
서정선 서울대 의대 유전체의학연구소 소장은 “이미 2000년에 인간게놈프로젝트 초안을 처음 발표할 때 국가인간게놈연구소장이던 프랜시스 콜린스 박사 등이 ‘인종은 없다’고 전제할 정도로, 이 분야 연구자들은 (과거의) 생물학적인 인종 개념과 선을 긋고 있다”며 집단유전학 연구에 “인종 딱지를 붙이는 것은 전혀 옳지 않다”고 말했다. 서 교수는 “게놈이 해독된 초창기만 해도 인간은 350만 개의 염기서열 변이(단일염기다형성, SNP)만이 존재한다고 믿었기에 인간별 유전체 차이가 0.1% 미만이라고 믿었고, 따라서 인구 집단별 차이를 알아낼 필요가 없었다”며 “하지만 이후 수천, 수만 개의 염기서열이 뭉텅이로 사라지거나 변하는 ‘유전자수 변이(CNV)’가 발견돼 개인별 차이가 예상보다 훨씬 크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사정이 바뀌었다”고 말했다.
서 교수는 “민족별 차이(ethnic differences)가 정말 없다면 모르겠지만, 흑인에게만 듣는 약이 나오는 등 특정 집단에게만 통하는 의학이 존재한다”며 “의학적 차이를 활용해 모두에게 적합한 의료 서비스를 제공하는 게 목적이지 우열을 가르는 등 인종주의에 활용하자는 것이 아니다”라고 말했다.
또다른 분석도 있다. 이 토론회가 열린 곳이 미국이며 미국 학자들이 주도한 논의라는 점에서, ‘표준게놈(인간게놈프로젝트로 완성한 첫 게놈. 유럽계 백인들의 유전체를 조합해 완성했다)’을 보유한 미국의 시각을 일방적으로 반영했다는 주장이다. 미국인들은 백인 유전체(표준게놈)를 이미 완성했기 때문에, 그와 ‘다른’ 인구 집단의 유전체를 연구하려는 시도에 대해서는 인종 개념을 들먹이며 견제한다는 뜻이다.
문제는 인종 자체가 아니라 그에 대한 부정적인 사회적 반응 즉 ‘인종주의’라는 주장도 있다. 데이비드 채 미국 매릴랜드대 공중보건대학 교수는 30~50대의 미국 흑인 92명을 대상으로 식당, 경찰, 주거 등 일상생활에서의 차별 경험과 생물학적 예상 수명을 조사해 그 결과를 지난 1월 ‘미국예방의학저널’에 발표했다. 채 교수는 이들의 백혈구 속 염색체 텔로미어의 염기 서열을 분석해 비교했다. 텔로미어는 생물의 수명과 관련이 있는 염기서열로, 매년 50~100개씩 줄어들며 일정 길이 이하로 줄어들면 그 개체는 사망한다.
언뜻 생각하면 이 연구도 두 인구집단의 수명 차이를 생물학적으로 해석하려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사실은 정반대다. 채 교수는 이 실험을 하면서 응답자인 흑인이 ‘자신이 속한 사회가 자신에게 얼마나 차별적이라고 느끼는지’를 묻는 항목을 넣었다. 즉 인종에 의한 부정적인 반응을 접하고 느끼는지 물은 것이다.
그 결과는 놀라웠다. ‘차별적으로 느낀다’고 응답한 흑인이 그렇지 않은 흑인보다 텔로미어 길이가 약 140 염기서열만큼 짧았다. 햇수로 치면 1.4~2.8년 수명이 짧은 것과 같다. 같은 흑인인데도 주관적인 스트레스에 따라 결과가 다른 것이다. 인종간 생물학적 차이가 아니라 사회에서 주는 차별과 그에 대한 스트레스가 문제의 본질이라는 뜻이다. 채 교수는 “인종주의적 차별을 내면화한(부정적으로 느끼는) 사람은 그런 대우에 대처를 잘 못하고 더 큰 스트레스를 받아 텔로미어 길이가 짧아졌을 것”이라고 해석했다.차별을 없애려는 노력이 중요
인종 개념은 분명 과학적으로나 사회적으로나 죽었고, 유전학을 연구하는 과학자들 역시 주의를 기울이고 있다. 과도한 걱정은 오히려 소모적이고 피로한 논쟁만 일으킬지도 모른다. 한편 과학에는 제동도 필요하기에, 일부 인류학자와 과학자의 주장대로 이들이 갑자기 생물학적 인종 이야기로 ‘튀고’ 그게 다시 차별적인 인종주의를 불러올 가능성은 경계해야 한다.
과학은 그 동안 차별적인 인종 개념에 의문을 제기하고 허구성을 폭로하는 데 앞장서 왔다. 블리스 교수도 “내가 쓴 책 ‘해독된 인종’도 그 전통을 이어가는 과학자들의 이야기”라고 말했다. 과학계가 안팎의 목소리에 귀 기울여, 과학 발전이 견제와 자성과 함께 이뤄지기를 기대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