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과의사는 인류가 태어날 때부터 있었을 것이다. 선사시대의 인류도 다치거나 짐승에게 물리면 누군가는 그를 싸매 주고, 피를 멎게 도와주고, 뼈를 맞춰 주고, 화살촉을 뽑아내고 했을 테니까. 이런 일이 반복되다보면 그일에 능숙해진 사람들이 생겼을 것이다. 선사시대의 유골이나 미라 등을 살펴보면 두개골에 구멍을 뚫는다든지(천두술), 아니면 외과 처치를 받은 흔적이 남아 있다. 음경의 포피를 자르는 할례술 역시 외과술의 일종이다.
3800년 전 최초의 외과의사 기록
기록에 남아있는 최초의 외과의사는 기원전 18세기 바빌로니아를 다스렸던 함무라비왕의 법전에서 발견된다. 이 법전에 따르면 의사가 수술에 성공하면 환자의 사회적 신분에 따라 치료비를 달리 받을 수 있으나 수술 도중 자유인을 죽게 하거나 장님으로 만들었으면 두 손이 잘린다. 만약 자유인이 아닌 노예를 죽게 하였다면 같은 값의 노예로 배상해야 한다. 당시 바빌로니아에는 돈을 받고 시술을 하던 외과의사가 있었던 것이다.
또 기원전 16세기경 이집트에서 기록된 것으로 알려진 ‘에드윈 스미스 파피루스’에는 48종의 증례가 실려 있는데 ‘머리-목-몸통’ 순으로 외상의 치료에 대해 서술한다. 중국에는 관우를 치료한 명의 화타의 이야기가 남아있다. 관우가 독화살을 맞았는데 화타가 화살을 뽑고 독이 퍼진 뼈를 긁어내는 동안 관우는 태연하게 바둑을 두었다고 한다. 그러나 고대의 외과의사는 오늘날처럼 외과수술만을 하는 사람이라고는 볼 수 없고, 의료시술의 일환으로 그러한 일도 함께 하였을 것이다.
이제 유럽으로 가 보자. 고대 그리스의 코스 섬에 근거지를 두었던 히포크라테스와 그의 학파는 서양의학의 시조다. 기원전 5세기의 인물로 추정되는 히포크라테스와 그의 후계자들이 저술한 의학 문헌은 기원전 3세기 이집트의 프톨레마이오스 1세의 명에 의해 오늘날 알려진 ‘히포크라테스 전집’으로 묶이게 되는데 이 안에 수술과 외과에 대한 내용도 들어 있다. “약으로 치료할 수 없는 것은 메스로 치료할 수 있고, 메스로 치료할 수 없는 것은 불에 달군 인두로 치료하며, 인두로도 치료할 수 없는 것은 치료 불가능한 것이다” 는 구절이 있는데 히포크라테스 학파의 의사들도 상처와 골절, 종양의 치료 등에 외과술도 사용한 것을 알 수 있다.
그리스의 뒤를 이은 로마 시대에는 전쟁이 잦고 검투사 경기도 유행했기 때문에 외과술도 유행했다. 그리스 출신의 해방노예들이 의술 분야에 종사했고, 지금도 로마 시대에 사용했던 여러 종의 외과 기구들이 남아있다. 가장 유명했던 사람은 갈레노스인데 그는 검투사를 치
료하는 의사로 일했다. 갈레노스는 돼지와 원숭이를 대상으로 다양한 실험을 해서 해부학과 생리학 분야에 큰 업적을 남긴 것으로도 유명하다.
푸대접 받던 중세의 외과의사
그러나 로마 제국이 멸망하고 중세가 시작되었을 때 외과술을 포함한 고대의 학문과 기예는 대부분 이민족의 손에 파괴돼 사라졌다. 고대의 외과술은 비잔틴 제국과 아랍 제국에서 명맥을 유지했고 11세기 이후 관련 서적이 이탈리아를 통해 유럽에 수입되면서 관심이 살아나기 시작했다.
하지만 고대와 달리 기독교 문화가 지배했던 중세 서구사회에서는 외과처럼 손으로 하는 일은 천하게 여겼다.대부분의 수술은 정식으로 교육을 받지 못했던 ‘이발사-외과의사(Barber-Surgeon)’가 담당했으며 이발사-외과의사의 교육은 도제식으로 진행됐다.
그것으로도 충분했던 이유는 19세기에 이르도록 외과시술이란 지혈, 상처의 치료, 고름의 배농, 종기의 제거, 화살이나 탄알의 제거 등이 전부였기 때문이다. 심각한대수술이란 탈장수술이거나 상처가 심해 썩어 들어가는 팔이나 다리를 자르는 사지절단술이었다. 19세기 중반에
이르도록 마취는 개념조차 없었고, 가슴이나 배를 열었을 경우에는 쇼크와 출혈, 또는 감염으로 사망하는 일이 다반사였기 때문에 거의 이뤄지지 않았다. 모든 수술은 가급적 빨리 끝내야 했고, 최소한의 절개를 해야 환자의 통증과 출혈을 줄일 수 있었다. 외과 시술이 신체 표면에 국한됐기 때문에 이발사의 업무로 충분했다.
이발사-외과의사의 지위는 내과의사(Physician)와는 매우 달랐다. 내과의사는 대학을 졸업하거나 내과의사회가 요구하는 교육과정을 거쳐 인정을 받아야 했다. 대학에서는 히포크라테스와 갈레노스의 저서들을 주로 가르쳤다. 이런 과정을 거친 내과의사는 교양 있는 ‘신사’로서
대우를 받았던 반면 외과의사는 그럴 수 없었다.
전쟁과 함께 신분이 올라가다
이발사-외과의사의 수요는 전쟁터와 항해 중인 배에서 제일 많았다. 참전 군의관과 배의 선의는 꼭 필요한 사람이었고 외과의사의 정체성은 주로 이러한 환경 속에서 발전했다. 16세기 프랑스의 외과의사 앙브루와즈 파레는 이발사-외과의사로서 도제 교육을 받고 26살에 이탈리아로 진군하는 프랑스 군대의 군의관으로 참전했다. 여기서 그는 새로운 총상의 치료법과 지혈법을 발견했으며, 베살리우스의 해부학을 깊이 연구했다. 그는 방광결석 치료법, 얼굴 안면 봉합법, 의수와 의족을 고안했고 외과에 대한 저서를 남겼다.
뒤이어 17세기 프랑스의 조르주 마레샬은 루이 14세와 루이 15세의 외과 주치의가 되어 외과의 지위를 내과와 대등하게 올리는 데 큰 기여를 했다. 그는 1731년 왕의 승인을 받아 ‘왕립외과아카데미’를 설립했고 이 단체가 1776년 ‘왕립내과의사회’와 통합해 1820년 프랑스 국
립의학아카데미가 된다. 이로써 외과의사가 제대로 된 의사 취급을 받기 시작했다.
외과와 내과가 한 학문의 두 갈래라는 생각은 18세기 병리해부학의 발전에 힘입은 바가 크다. 의사들은 각종내과 질환의 증상을 사후 부검을 통해 발견한 각 장기의 형태적 이상과 연결했는데 이를 주도한 인물은 외과의사 출신 사비에르 비샤였다. 그는 서른한 살의 이른 나이로 죽기 전 겨울 한 철에만 600구의 시신을 부검하는 등 근대 병리해부학의 창시자가 됐다.
이러한 노력이 한데 모여 비로소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형태의 외과의사가 탄생했다. 대표적인 인물은 비엔나종합병원의 외과를 책임졌던 테오도르 빌로트다. 그는 마취과를 발전시켰고, 수술 후에 얻은 조직을 병리적으로 분석했으며, 수술 후 관리를 체계화했다. 무엇보다 후두 절제술을 비롯하여 식도절제술, 위절제술을 세계최초로 시도해 성공했다. 빌로트 이후로 외과의사는 확신을 갖고 환자의 배 안을 열게 됐다.
기술 발전으로 의학의 꽃이 되다
19세기 말에는 다양한 기술이 발전했다. X선을 이용해 인간의 몸 내부를 들여다볼 수 있게 된 것도 그 중 하나다. X선 진단은 사람이 살아있는 상태에서 몸 내부를 들여다볼 수 있는 기술이었으며 20세기에 초음파영상진단 및 컴퓨터단층촬영, 자기공명영상장치의 출발점이 됐다. 또 방광경, 검안경 등의 다양한 진단기구가 개발됐는데 이는 인체의 좁은 통로를 통해 그 안의 장기에 접근해 수술하는 것을 가능하게 해 주었다. 이로 인해 안과와 이비인후과, 비뇨기과 등이 전문 분야로 성장했다.
외과술은 20세기에 들어와 두 차례의 전쟁을 거치면서 크게 발전했다. 혈액형이 발견되면서 안전한 수혈이 가능해졌고, 혈액을 대치할 수 있는 각종 수액요법들이 발전하면서 외과의사는 환자의 호흡과 맥박 등 핵심 생체기능을 유지하면서 오랜 시간 안전하게 수술을 할 수 있게 되었다. 또 설파제와 페니실린 등 항균제 및 항생제가 발견돼 수술 후 감염의 위험도 크게 줄었다. 마지막으로 인체의 면역기능이 밝혀지면서 다른 사람의 조직이나 장기를 이식받을 수 있게 됐다. 이 결과 외과의사의 손은 환자의 뱃속은 물론 이전에는 불가능하다고 생각했던 심장과 폐 등의 흉강, 그리고 대뇌가 들어 있는 두개강 속으로 들어갈 수 있게 됐다. 근대 신경외과, 흉부외과, 그리고 이식외과도 함께 발전하게 됐다.
외과의 발전을 통해 인류는 더 작은 고통으로 더 적은 피를 흘리며 더 많은 질병을 치료할 수 있게 됐다. 앞으로는 줄기세포 등을 이용해 장기와 조직을 만들어 병든 장기를 대치하는 재생의학, 인간과 기계를 결합한 사이보그, 나아가 몸을 절개하지 않고도 혈관 내로 들어가 수술을 하는 나노로봇 등이 외과의 영역이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