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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로 돌리고 우로 돌리고 그러면 시력이 좋아질까?



나이를 먹어갈수록 점점 건강에 신경을 쓰게 마련입니다. 저도 예외는 아닙니다. 이런저런 건강 정보가 눈에 띄면 전보다 유심히 바라보게 되지요. 요즘 들어 신경을 쓰고 있는 부분이 바로 눈입니다. 온종일 모니터를 쳐다보며 일을 하고, 출퇴근 시간에도 틈이 나면 스마트폰을 들여다보고, 집에 가면 또 책상에 앉아서 모니터를 쳐다보다 보면 가끔 눈이 침침해지거든요.

신경이 쓰이니까 일을 하다가도 눈을 쉬게 해주려고 노력하는 편입니다. 눈을 감고 있거나 잠시 창 밖의 먼 산을 바라보고 있는 식이지요. 물론 그런다고 눈이 좋아지리라는 생각은 안 합니다. 그저 나빠지는 걸 조금이나마 막기 위해서지요. 그런데 지난 호에 실린 ‘일본을 공격한다!’를 쓰려고 서점의 건강 코너를 둘러 보다가 ‘당신의 눈도 1.2가 될 수 있다’는 제목의 책을 봤습니다. 눈 운동을 통해서 나쁜 시력을 좋게 만들 수 있다는 주장을 담은 책입니다.


100년 묵은 이론, 눈 훈련법
훈련으로 시력을 회복시킨다는 주장을 처음 듣는 건 아닙니다. 과학적으로는 근거가 없다고 알고 있었기에,
‘또 누가 사기를 치나’ 생각하며 책을 좀 들여다봤습니다. 저자는 해럴드 페퍼드라고 하는 미국의 안과의사이자 의학박사였습니다. 안과의사가 썼다는 말에 생각이 조금 바뀌었습니다. 혹시 최근 들어 뭔가 새로운 내용이 추가됐을지도 모르니까요.

하지만 내용을 훑어보니 딱히 그런 건 보이지 않았습니다. 페퍼드 박사가 어떤 사람인지 궁금해 회사로 돌아와서 검색해 봤습니다.
인터넷 교보문고의 서지 정보에 따르면 이 책의 원서는 ‘The Quick Recovery of Your Eyesight’라고 돼 있었습니다. 아마존에 가서 이 제목으로 검색을 했는데, 웬걸요? 그런 책은 없다고 나옵니다. 요즘 나온 책이면 있을 것 같은데 없다니 이상했습니다. 구글로 검색해도 그런 제목의 책은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이번에는 해럴드 페퍼드로 검색했습니다. 책이 한 권나옵니다. ‘Sight Without Glasses’라는 제목의 책입니다. 제목은 달랐지만,
서평을 보니 같은 내용을 다루고 있는 책 같았습니다. 같은 책인데 제목만 다른 건지, 같은 저자의 다른 책인지는 알 수 없었습니다. 중요한 건 이 책이 나온 연도입니다. 1940년이더군요.

그렇습니다. 페퍼드 박사는 무려 70여년 전에 활동했던 의사였습니다. 이 이론도 최소한 그 정도 나이는 먹었다는 뜻이지요. 저자 소개에 이 내용이 빠져있었다니 배신감이 들었습니다. 물론 70년 전의 이론이라고 해서 무조건 틀렸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그동안 의학은 크게 발전했습니다. 뭔가 달라졌어도 많이 달라졌을 테니 확인을 해보는 게 좋겠지요.





훈련으로 시력회복? 학계는 NO!
페퍼드 박사는 베이츠 박사의 ‘안근론’ 연구를 평생의 과제로 삼았다고 합니다. 베이츠 박사가 누군가 해서 찾아보니 이름은 윌리엄 호레이쇼 베이츠이며 1860년에 태어나서 1931년에 세상을 떠났습니다. 베이츠 박사는 근시나 원시를 비롯해 눈에 생기는 모든 문제가 안구를 둘러싼 근육이 긴장하기 때문에 생긴다며, 안경은 필요하지 않을 뿐더러 나쁜 시력을 회복하는 데 오히려해가 된다고 주장했습니다.

그 대신 손바닥으로 눈 가리기, 눈을 이리저리 움직여 운동하기, 강한 햇빛 쪼이기 등을 치료법으로 제안했습니다. 그러나 효과는 없었습ㅌ다. 유명한 작가인 올더스 헉슬리 같은 사람이 눈을 치료했다고 주장한 사례가 있었지만, 정식 치료법으로 인정받기엔 부족했습니다.

이 연재를 꾸준히 읽은 독자라면 개인적인 일화가 왜 충분한 증거가 되지 않는지 이해할 수 있을 겁니다.
베이츠 박사 사후 이 이론은 여러 사람이 이어받아 나름대로 변형해가며 명맥을 유지했습니다.
어떤 사람은 눈 운동을 단순화시 키기도 했고, 어떤 사람은 식단과 관련을 짓기도 했습니다. 페퍼드 박사 역시 이런 사람 중 한 명입니다.
서점에는 페퍼드 박사의 책 외에도 비슷한 내용을 다룬 책이 많이 나와 있습니다. 눈 운동에 쓰는 기구를 파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나 나쁜 시력을 눈 훈련으로 회복시킬 수 있다는 이론은 현재 의학계에서 인정받지 못하고 있습니다.

2004년 미국 안과 협회(AAO)가 관련 연구를 종합해 발표한 바에 따르면, 눈 훈련이 근시나 노안으로 나빠진 시력을 회복시킨다는 증거는 없습니다. 눈을 너무 혹사해서 일시적으로 나빠진 시력은 쉬어주면 회복될 수 있지만, 눈의 구조적인 문제 때문에 시력이 나쁜 것은 운동으로 치료할 수 없습니다.


공부 안 하면 당한다
이렇게 과학적인 근거가 없다고 밝혀진 낡은 이론이 새 표지를 달고 출간되는 모습을 보면 참 안타깝습니다. 누군가는 잘 모르고 곧이곧대로 받아들일 수도 있습니다. 만일 잘못된 이론만 믿고 적절한 치료를 받지 않아 상태가 더 나빠진다면 누가 책임질건가요? 모르긴 몰라도 출판사가 책임질 것 같지는 않습니다.

서점에 널려 있는 건강 서적을 볼 때면 출판사가 좀 더 책임감을 무겁게 느껴야 한다는 생각이 듭니다. 독자 역시 비판적인 시각으로 제대로 된 책인지 확인할 필요가 있습니다. 요즘처럼 정보가 넘쳐나는 시대에도 공부하지 않으면 당하기 쉽습니다. 저만해도 이 책을 처음 보고는 1940년대에 나온 건지 몰랐지 않습니까. 교묘하게 그 사실을 숨긴 출판사도 문제고요. 그나저나 아직도 ‘The Quick Recovery of Your Eyesight’가 실제로 있는 책인지 없는 책인지는 모르겠네요.




 

2013년 09월 과학동아 정보

  • 고호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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