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빅 아일랜드를 일주하면서 몇 시간을 운전하는 동안 낯선 용암지대가 숲으로 변하고, 어느 틈에 메마른 사막을 지나 열대 우림과 마주하고, 곧이어 드넓은 초원이 펼쳐졌다. 지구가 가질 수 있는 다양한 기후와 환경이 파노라마처럼 흘러가면서 ‘나는 지금 어디에 있는가’라고 스스로에게 물을 수밖에 없었다.
화산 국립공원에서 생생하게 활동하는 킬라우에아 화산의 움직임을 온 몸으로 생생하게 느꼈을 때는 말로 표현하기 힘든 깊은 감동이 전해졌다. 그것은 수없이 보았던 화산과 용암 사진에서는 경험하지 못한 감동이었다. 지구 내부에서 작동하는 열점현상(Hot Spot)의 거대한 움직임이 새롭게 다가왔다.
마우나케아산에 올라 세계에서 가장 크다는 제미니(Gemini), net켁(Keck), 스바루(Subaru) 천문대를 차례로 둘러볼 때는 여러 가지 생각이 스쳐갔다. 그곳은 지구에서 가장 별이 잘 보이는 곳 중 하나다. 그리고 인류가 우주의 가장 깊은 곳을 들여다보는 곳이다. 우주와 과학의 역사가 한줄한줄 써지는 현장을 목격하면서 가슴이 뭉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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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개의 기후를 하루에 만나다
하와이 제도를 이루는 주요 섬은 카우아이, 오아후, 몰로카이, 라나이, 마우이, 하와이(빅 아일랜드)다. 이 중 하와이 섬은 하와이 주(미국의 50번째 주)와 이름이 같아 혼동을 피하기 위해 빅 아일랜드라는 애칭으로 불리게 되었다. 빅 아일랜드는 이름 그대로 하와이에서 가장 큰 섬이자 가장 최근에 생긴 섬이다. 면적은 제주도의 6배 정도다. 하와이 제도에서 가장 오래된 섬은 북서쪽의 카우아이다. 유명한 와이키키 해변과 호놀룰루가 있는 섬은 오아후다. 하와이 제도의 기후는 일 년 내내 비슷하다. 굳이 두 계절로 나눈다면 5월에서 10월이 여름이고, 11월에서 4월까지가 겨울이다. 평균 기온은 낮을 기준으로 여름철이 29℃, 겨울철이 25℃ 정도로 연중 온화하다. 그러나 빅 아일랜드를 만나는 순간 전혀 다른 세상을 마주하게 된다. 지구의 13개 기후대 중에서 극지방을 제외하고 11개의 기후대를 모두 보여주는 섬! 기후학 교과서를 한장한장 넘기는 심정으로 하루 동안 섬을 일주하기로 마음먹었다. 이른 아침 와이콜로아의 해변에서 탐험의 첫걸음을 내딛기로 했다. 서쪽 해안을 따라 코나공항 쪽으로 차를 몰았다. 차창 밖으로 보이는 길의 풍경은 메마르고 거칠었다. 용암이 만든 비현실적인 지형을 가로지르면서 마치 외계행성에 와있는 느낌이 들었다.
마우나로아의 남쪽 산자락에 올라서자 조금씩 풍경이 바뀌었다. 풀이 보이고 나무가 하나둘 나타났다. 듬성듬성 숲이 보이기 시작했다. 제주도 올레길을 걸으며 보았던 것과 닮은 모습이다. 불과 몇십 분 사이에 낯설었던 외계의 풍경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박자를 맞추듯 이 하늘에 스멀스멀 구름이 올라온다. 곧 보슬비가 내리나 싶더니 다시 파란 하늘이 고개를 내밀었다. 지형만큼이나 날씨도 변화무쌍했다.
자동차는 하와이 화산 국립공원을 지나는 11번 도로를 내달렸다. 공원 내의 고지대에는 카우(Kau) 사막이 있다. 킬라우에아 분화 활동으로 생긴 화산재, 모래, 자갈이 뒤덮여 있는 곳이다. 독특하게도 연간 강수량이 1000mm가 넘는 사막지대다. 빗물이 화산활동으로 생긴 이산화황 가스와 결합해 강한 산성비가 되고 그것이 식물이 자라는 것을 억제하기 때문에 사막으로 변한 것이다. 또 지표에서 물이 잘 빠지고, 수분증발이 잘 되는 것도 사막이 된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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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와이에도 눈사람이 있다
어느 새 힐로를 가리키는 도로 표지판이 나타났다. 힐로는 빅 아일랜드에서 가장 큰 도시다. 스치듯이 도시를 벗어나 다시 자연을 품은 길로 들어섰다. 힐로를 지나면서 주변의 풍광이 예사롭지 않게 변한다. 제법 굵은 나무들과 우거진 숲이 성큼성큼 다가왔다. ‘와, 드디어 열대우림지역에 들어섰구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후두둑 빗방울이 떨어졌다. 점점 굵어지던 빗줄기는 운전하기 힘들 정도로 장대비가 되어 쏟아진다. 열대우림은 산기슭의 아카카 폭포를 만들어내고 섬의 동북쪽에 자리한 와이피오 계곡까지 이어졌다.
이제 서쪽으로 방향을 틀어 와이메아로 향했다. 이곳은 다른 지역과는 전혀 다른 분위기다. 파니올로(하와이 카우보이) 컨트리라 불리는 이 일대는 여유롭게 풀을 뜯는 소떼와 카우보이, 목장을 만날 수 있는 아름다운 초원이 펼쳐지는 곳이다. 아쉽게도 날이 저물고 있어 어둠속에서 초원의 흔적을 바라보아야 했다.
하루 사이에 지구의 기후 박물관을 다녀온 기분이 들었다. 빅 아일랜드를 살아있는 기후학 교과서로 만들어 놓은 것은 누구일까? 해발 4200m를 자랑하는 마우나케아와 마우나로아 두 산이 그 주인공이다. 마우나케아는 하와이말로 ‘하얀 산’이라는 뜻이다. 겨울에는 마우나케아 정상 부근에 눈이 쌓이기도 한다. 사람들은 이때를 놓치지 않고 정상 부근에 올라 스키를 탄다고 한다. 어떤 이는 자동차 짐칸에 한가득 눈을 싣고 내려와서는 앞마당에 눈사람을 만들어 놓는다고 한다.
마우나케아와 마우나로아는 세로 방향으로 나란히 자리하면서 섬의 동쪽과 서쪽 기후를 극단적으로 나누어 버린다. 빅 아일랜드의 북동쪽 사면은 거의 일 년 내내 무역풍을 몰고 오는 북태평양 고기압의 영향을 받는다. 습기를 가득 머금은 무역풍은 산의 경사면을 타고 상승하는 과정에서 습기가 구름으로 응결돼 비를 뿌린다. 비의 대부분은 섬의 동쪽과 북쪽에 쏟아지면서 열대 우림에 가까운 환경이 나타난다. 그래서 힐로는 비가 많은 도시로 유명하다. 반면에 섬의 서쪽에 자리한 코나는 사막에 가까운 건조 기후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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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네스코가 지정한 세계유산
하와이 제도는 서서히 움직이는 태평양판을 뚫고 분출해낸 화산섬들이 줄지어 서 있는 지형이다. 살아있는 지구과학 교과서를 만나는 여정 역시 해변에서 시작했다. 하지만 이 해변의 이름은 남다르다. 검은 모래 해변, 파란 바닷물이 넘실대며 들어오다 해변의 검은 모래와 만나 하얗게 부서진다. 검은 모래에 뿌리를 내린 야자수 나무의 녹색 잎이 그려내는 색의 조화는 이국적이라는 표현의 한계를 넘어선다. 검은 모래를 한줌 쥐어 살펴보았다. 작지만 각진 표면에 유리처럼 매끄러운 질감이 느껴진다. 검은 모래의 고향은 어디일까. 용광로처럼 끌어 오르는 분화구임에 틀림없다. 검은 모래 해변에서 한가로이 일광욕을 즐기고 있는 바다거북과 짧은 만남을 뒤로 하고 킬라우에아 화산을 찾아 나섰다.
1980년 유네스코는 킬라우에아 화산과 마우나로아 산이 중심이 된 하와이 화산국립공원을 ‘세계 생물권 지구’로 지정했고 1987년에는 ‘세계유산’으로 선정했다. 화산으로 가는 길에 용암 흐름의 한 형태인 ‘아아(aa flows)’를 만났다. 용암이 흐르는 와중에 온도가 내려가면서 표면에 거품 같은 작은 구멍들이 생겨난다. 구멍에서 가스가 빠져나가고 나면 날카롭고 뾰족한 표면 질감이 만들어진다. 아아는 돌 표면이 날카로워서 걸을 때 발이 ‘아프다’는 뜻의 하와이 말인데 이제는 과학용어가 됐다. 이와 다르게 상대적으로 높은 온도에서 용암이 식으면 부드럽고 매끄러운 표면을 가질 수 있다. 이 경우는 ‘파호에호에’라고 부른다. 역시 하와이 말인데 ‘편안하게 걸을 수 있다’는 의미다.
킬라우에아 화산과의 첫 만남은 국립공원의 방문자센터에서 1km 가량 떨어진 스팀벤트에서였다. 지표면 아래의 수증기가 분화구의 뜨거운 열기를 뿜어내는 곳이다. 화산이 만들어내는 자연현상이 내 눈앞에서 일어나고 있는데 과연 어떤 느낌일까. 그 답을 몸으로 체험하고 싶었다. 스팀벤트에 한발한발 가까이 다가서는데 어느 순간 얼굴이 화끈거릴 정도의 열기가 지나갔다. 코끝에서는 독한 유황 냄새가 진동했다. 킬라우에아 화산과의 생생한 첫 만남은 그렇게 이루어졌다.
스팀벤트를 지나서 1.5km를 더 가자 재거박물관이 나타났다. 킬라우에아 화산의 정상 풍경을 조망할 수 있는 곳이다. 4km×3.2km 너비의 칼데라가 펼쳐지고 칼데라 벽면의 높이는 120m 가량이다. 칼데라의 서쪽 편에 할레마우마우 분화구가 있다. 이 분화구는 칼데라 내부에서 현재 가장 높은 활동성을 보이는 곳이다.
큰 기대를 가지고 갔지만 곧 낙담으로 이어졌다. 툭툭 빗방울이 떨어지고 짙은 안개가 사방에 가득했다. 눈을 부릅뜨고 살펴보았지만 분화구는 드러나질 않았다. 칼데라 표면에서 군데군데 피어오르는 흰 연기만 먼발치에서 언뜻언뜻 보였다. 그대로 물러서기에는 무척이나 아쉬운 풍경이었다. 잠시 눈을 감고 책에서 보았던 분화구의 모습을 머리속에 그려보았다.
그때였다. 멀리서 아주 희미하지만 천둥소리 같은 것이 들렸다. 귀를 쫑긋 세우고 소리의 진원지를 찾아보았다. 놀랍게도 할레마우마우 분화구 쪽에서 들려왔다. 1분에 한두 차례 비슷한 크기의 소리가 흘러나왔다. 박물관의 화산 안내자에게 달려가서 물었더니 분화구의 용암 활동이 만들어내는 소리라고 알려주었다.
“드드득… 쩌억… 지직.” 그 소리를 내 몸 안에 담아두려고 온 감각을 집중했다. 이 순간은 46억 년을 이어온 지구 내부의 살아있는 숨소리를 직접 만나는 시간이었다. 그렇게 내 몸의 눈과 피부, 코와 귀는 가장 섬세한 감각을 깨워내서 화산과 만났다. 그 감각의 기억들은 몸 속 깊이 들어와 지구 내부의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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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주와 맞닿은 곳 마우나케아
마우나케아 정상에는 지금까지 인류가 만들어낸 가장 뛰어난 성능의 망원경을 갖춘 천문대가 여럿 있다. 천문학과 우주과학을 연구하는 과학자들에게는 꿈의 천문대이자 별빛 가득한 성지다.
최고의 천문대를 찾아가는 길은 하늘과 가까워지는 길이었다. 조금씩 고도가 올라가면서 하늘의 색감은 더 짙은 파랑으로 물들어갔다. 해발 2800m에 이르자 방문자 센터가 나타났다. 센터에서 가까운 곳에 할레포하쿠라고 부르는 관측자 숙소 건물이 있다. 이곳에서 스바루 천문대에 10여 년째 몸담고 있는 표태수 박사를 만났다. 고산증에 대한 안내를 받고 해발 4200m 정상으로 향했다. 고지대의 희박한 산소 때문에 연구자들의 경우 천문대에 머무는 허용 시간은 14시간 이하라고 한다. 며칠 간 관측을 해야하는 연구자들은 해지기 전에 천문대에 올라가서 관측을 하고 아침에 다시 숙소로 내려온다.
비포장 길을 굽이굽이 돌아 드디어 하늘과 맞닿아 있는 듯한 마우나케아의 정상에 올랐다. 맑고 검푸른 하늘을 향해 하얗게 빛나는 천문대들이 나란히 서 있었다. 장대하고 놀라운 광경에 압도돼 나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천문대는 우리 인류가 가장 생생하게, 가장 진지하게, 우주와 만나는 공간이다.” 그 말은 곧 현실이 되어 눈앞에 나타났다.
제미니, 켁, 스바루 천문대를 차례로 둘러보면서 그 망원경들이 밝혀낸 우주의 역사가 새롭게 다가왔다. 천문대에 들어있는 망원경의 둥근 반사경은 매일 밤 우주를 들여다보는 거대한 눈동자가 될 것이다. 드넓은 우주에서 펼쳐지는 별빛의 웅장한 하모니를 들을 것이다. 그리고 아득한 시공을 지나 미지의 우주 공간 어딘가에 첫 눈길을 줄 것이다. 그것이 담아낸 영상은 과학의 언어로 풀이돼 우주의 역사책을 한 줄 한 줄 써내려갈 것이다.
인간은 왜 탐험을 하는가
귀국편 비행기에 오르기 전 잠시 여유가 생겨 공항내의 작은 서점을 들렀다. 책꽂이 사이를 거닐다가 나도 모르게 ‘내셔널 지오그래픽’이라는 잡지책 한 권이 눈에 들어왔다. 표지에 이런 글귀가 적혀있었다. ‘Why we explore(왜 우리는 탐험을 하는가).’
지난 일주일 동안 내가 탐험한 빅 아일랜드를 다시 떠올려 보았다. 그곳은 하늘을 향해서 가장 뛰어난 거대 망원경들이 우주의 역사를 밝혀내고 있었다. 그리고 땅을 향해서 가장 생생하게 움직이는 용암이 지구의 역사를 들려주고 있었다. 우리가 탐험을 하는 이유는 자연의 역사, 결국 우리의 역사를 알고 싶어 하기 때문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