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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소리 없는 대화

브레인 & 머신 ➓ 생각으로 쓰는 타자기





루게릭병처럼 시간이 갈수록 점점 신경이 마비되는 퇴행성 신경질환 환자에게 가장 마지막까지 온전히 남아 있는 운동기관은 일반적으로 ‘눈’이다. 앞서 소개한 눈 깜빡임을 이용한 타이핑 방식은 최근까지도 많이 쓰지만 글자 하나하나를 옆에서 불러주고 환자가 반응을 해야 하기 때문에 분당 타수가 아주 낮다. 좀 더 빠른 방법은 문자표를 눈앞에 보여주고 환자가 특정 문자를 응시하면 옆에 있는 사람이 시선 방향에 있는 문자를 가리키고 근처의 문자들 중 하나를 눈을 깜빡여서 확인 받는 방식이다. 하지만 이런 방법은 환자를 도와 줄 수 있는 사람이 항상 옆에 있어야 한다는 제한이 있다.

그렇다면 환자가 누군가의 도움 없이도 스스로 글을 쓸 수는 없을까. 그래서 개발된 기계가 바로 안구 마우스다. 안구 마우스는 카메라로 동공의 움직임을 추적하는 ‘아이트래킹(eyetracking)’이라는 첨단 기술을 쓴다. 영상처리 기술의 발달 덕분에 최신 안구 마우스는 높은 정확도로 분당 40~50자의 문자를 타이핑할 수 있다. 하지만 안구 마우스도 역시 한계가 있다. 눈앞의 문자표 위치가 달라지면 시선도 달라지기 때문에 사용할 때마다 위치 보정을 해야 한다. 번거로울 뿐만 아니라 위치 보정을 도와줄 사람이 여전히 필요하다는 뜻이다.








2012년 베티나 소르거 네덜란드 마스트리히트대 교수는 기능적 자기공명영상(fMRI) 장치를 이용해 글자를 타이핑할 수 있는 정신적 타자기를 개발해 주목을 받았다. 소르거 교수는 MRI 기계 안에 누워 있는 사람이 팔을 움직이는 상상, 곱하기 암산, 마음속으로 시 외우기 등의 생각을 할 때 뇌에서 일어나는 변화를 관찰하는 방법으로 27개의 문자를 타이핑하는 데 성공했다. 소르거 교수의 방법은 정확도가 높지만 실용화하기엔 분당 타수가 낮고 고가의 MRI 기계를 써야 한다.

현재까지 개발된 정신적 타자기 중에서는 뇌파를 이용해 문자를 입력하는 방식이 가장 효율이 높다. 그 중 가장 많이 쓰는 방식은 문자판에 나열된 문자가 순차적으로 반짝일 때, 집중하고 있는 문자가 반짝이는 순간 발생하는 P300이라는 특수한 뇌파를 검출하는 방식이다. 최근에는 정상상태시각유발전위(SSVEP)라는 뇌파를 이용하기도 하는데, SSVEP는 특정한 주파수로 깜빡이는 빛 자극을 쳐다볼 때 후두엽(뒤통수 부근) 뇌파에서 깜빡이는 빛과 동일한 주파수 성분이 증가하는 현상이다. 사용자가 서로 다른 주파수로 깜빡이는 여러 문자 중 어느 하나에 집중하고 있을 때, 후두엽에서 어떤 주파수 성분이 증가하는지를 관찰하면 어떤 문자를 바라보고 있는지를 역으로 추측해낼 수 있다. 필자의 연구팀에서도 2012년 이 방식을 이용한 정신적 타자기를 개발해 세계 최고 수준의 분당 타수를 기록했다. 뇌파를 이용한 방법은 안구 마우스보다 타수가 다소 느리지만 위치 보정을 할 필요가 없다.





뇌공학자들은 비용 문제와 착용 시 편이성만 개선된다면 뇌파 타자기를 지금이라도 신경계 손상 환자에게 보급할 수 있다고 말한다. 필자의 연구팀에서는 정신적 타자기의 정확도와 속도를 높이는 연구뿐만 아니라 우리나라 환자를 위한 한글 정신적 타자기 개발에 집중하고 있다.

심각한 루게릭병을 앓고 있는 세계적 석학 스티븐 호킹 박사가 세상과 소통할 수 있었던 것은 보조공학기술 덕택이다. 지금까지 호킹 박사는 약간의 움직임이 가능한 두 손가락을 이용해 컴퓨터에서 문자를 선택하는 방법으로 책을 집필하거나 강연 활동을 해 왔다. 하지만 최근 호킹 박사의 상태가 나빠져서 손가락의 움직임조차 부자연스럽게 됐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많은 이들이 안타까워했다. 다행인 점은 최근 미국 뉴로비질 사가 호킹 박사의 뇌파를 분석해 타이핑을 할 수 있게 하는 정신적 타자기 개발 프로젝트를 시작했다는 것이다. 이 프로젝트가 성공해 호킹 박사가 앞으로도 인류 과학 발전에 더 큰 기여를 하길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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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11월 과학동아 정보

  • 에디터 이우상 | 글 임창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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