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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남 Scene#1 죽죽 자라나는 인연의 끈을 찍어라
3사랑을 위해 가장 중요한 것이 뭘까요? 외모? 성격? 아닙니다. 과학지식? 설마, ‘로맨틱한 호관씨’도 아니고. 바로 ‘인연의 끈’입니다. 로맨스영화 ‘아토믹러브’의 첫 장면은 ‘인연의 끈’에서부터 시작합니다.
그런데 인연의 끈은 재질이 참 중요합니다. 재질이 튼튼하지 못했다가는 단숨에 끈이 끊어져 달달한 로맨스가 아니라 ‘사랑과 전쟁’이 돼버립니다. 질기고 유연한 ‘탄소나노튜브’로 인연의 끈을 찍어보는 건 어떨까요? 탄소나노튜브란, 탄소가 6각형 구조를 만들면서 파이프처럼 길게 생긴 나노구조체입니다. 탄소나노튜브가 얼마나 질기냐면, 양쪽에서 잡아당길 때 강철보다 100배 더 강합니다. 또 지름이 1나노미터(10억분의 1m)로 눈에 보이지 않습니다. ‘인연의 끈은 눈에 보이지 않는다’는 리얼리티를 살리기에도 적합한 물질이죠. 영화 ‘아토믹 러브’의 첫 번째 씬은 남녀 주인공 ‘앨리스’와 ‘밥’ 사이를 연결해줄 인연의 끈, 탄소나노튜브가 자라나는 장면부터 시작합니다.
뭐, 기체는 못 찍는다고?
이 장면을 찍는 데는 숨겨진 일화가 있었습니다. 나노미터 수준에서 일어나는 일을 실시간으로 관찰하고 촬영하는덴 투과전자현미경(TEM)이 제격입니다. 그러나 이 전자현미경으론 기체를 쓰는 실험을 촬영할 수가 없다고 알려져 왔습니다. 투과전자현미경으로 촬영을 하려면 진공인 환경이 꼭 필요하거든요.
왜냐고요? 투과전자현미경은 빛 대신 전자를 써서 사물을 봅니다. 만약 전자가 지나가는 경로가 공기 분자로 차 있으면 어떻게 될까요? 전자가 피사체와 충돌하기 전에 공기와 먼저 충돌해서 전자가 직진하기 힘듭니다. 그 결과, 제대로 된 영상을 얻을 수 없죠. 그런데 탄소나노튜브를 자라게 하려면 니켈 촉매에 메탄과 수소가 혼합된 기체가 필요합니다. 메탄에 있는 탄소가 모여 탄소나노튜브를 만들거든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황에서 어떻게 했을까요?
저는 2004년 덴마크공대 프랑크 아빌드-피더슨 교수팀이 최초로 탄소나노튜브의 성장을 촬영한 실험을 참고했습니다. 연구진은 평범한 투과전자현미경 대신 ETEM(Environmental TEM)이라는 특수한 장비를 사용했습니다. 기체 실험을 찍을 수 있는 특수한 장비죠. 실험에 꼭 필요한 기체를 흘려보내는 동시에 기체를 뽑아내 진공에 가까운 상태를 유지합니다. 과학자들은 이런 방식을 ‘차동 펌프 방식’이라 부릅니다. 어때요, 원리를 알고 보니 ‘인연의 끈’이 더 근사해 보이지 않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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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십억 원의 제작비는 쿨~하게 넘기자
그런데 이 방식으로 찍고 나서 투자자들에게 한 소리를 듣고 말았습니다. 너무 많은 돈을 썼다는 거예요(명감독이 명화 한 편 찍겠다는 데 그 정도의 돈을 아까워 하기는!). ETEM의 가격은 약 수십억 원입니다. 그런데 요즘엔 몇 백만 원 수준에서 기체 실험을 촬영할 수 있는 ‘TEM 스테이지 개조’ 방식이 유행이라네요?
ETEM은 표본을 두는 곳에서 새나오는 기체를 붙잡는 것이 핵심이에요. 그런데 스테이지 개조 방식에서는 전자가 통과하는 구멍으로 기체가 빠져나가지 못하도록 막아놓았어요. 기존의 전자현미경을 약간만 개조해서 사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아직 성공 확률이 낮다는 게 단점입니다(어이, 투자자들! 그래도 멋진 장면 찍었으면 된 거 아닌가? ETEM은 비싸긴 하지만 확실하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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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별 Scene#2 사랑에도 시련이
마침내 인연의 끈이 연결됐으니! 우리의 주인공 앨리스와 밥의 사랑은 달콤하고도 아름다워라. 저는 요새 너무 빤한 사랑 이야기는 다루고 싶지 않았습니다. 명감독의 자존심이 있는 한, 여성이 재벌가 도련님과 사랑에 빠지는 진부한 신데렐라 이야기는 절대 사절입니다. 저는 주변에서 가장 흔하게 만날 수 있는 사랑이야기를 다루기로 했습니다. 언제나 곁에 있으며 공기의 80%를 차지하는 질소 분자가 바로 우리의 주인공 앨리스와 밥 커플의 정체입니다.
앨리스와 밥은 서로의 전자를 공유하는 ‘공유 결합’을 통해 아주 단단히 묶여있죠. 지금 둘 사이의 거리는 약 0.11nm로 정말 땀나도록 가까운 사이입니다(질소가 과연 땀을 흘릴 수 있을까요?). 그런데 둘 사이에 위기가 닥쳐옵니다. 원자의 사랑은 실로 번갯불에 콩 구워먹는 것만 같아서 둘 사이가 무려 10펨토 초(1펨토 초는 100조 분의 1초)만에 멀어집니다. 둘 사이가 멀어진 거리는 0.002nm. 그런데 0.002nm라는 미세한 변화를 어떻게 촬영하죠? 탄소나노튜브가 자라나는 첫 번째 씬을 촬영할 때 사용한 투과전자현미경의 해상도는 최대 1nm 수준. 로맨스 영화의 생명은 ‘위기와 불화’인데 이대로 포기해야만 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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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별 통해 이별 돌아보기
그런데 왜 앨리스와 밥의 거리가 멀어진 걸까요? 사실은 앨리스와 밥 커플을 강타한 한 줄기의 레이저 때문이었습니다. 시련이 지속된 시간, 즉 레이저 펄스의 길이는 50펨토초로 매우 짧았습니다. 하지만 이 시련 때문에 커플은 소중한 무언가를 잃어버리게 됩니다. 둘이 서로 찰떡처럼 붙어있게 해주는 공유결합의 전자 하나를 잃어버린 겁니다. 그 결과 서로의 거리가 멀어진 거고요.
떨어져나간 전자는 다시 양전하를 띤 원자핵에 이끌려 돌아가려 합니다. 하지만 전자의 에너지가 너무 세기 때문에 처음처럼 두 원자핵(앨리스와 밥) 주위를 돌지 못하고 그냥 스쳐 지나가게 됩니다.
이때 전자는 직선으로 곧장 지나가는 것이 아니라 원자핵 때문에 진행방향이 휘게 됩니다. 그리고 이 순간은 두 원자 사이의 거리가 변하고 있는 찰나가 됩니다. 따라서 전자가 어떻게 휘는지 분석하면 그 순간 원자 사이의 거리가 어땠는지 알 수 있게 됩니다. 불화를 일으킨 레이저가 연인 사이가 멀어지는 상황을 찍게 해주는 단서였던 거지요.
이 촬영 기법을 알려준 사람은 미국 오하이오주립대 코스민 블라가 박사입니다. 2012년 3월 블라가 박사는 레이저를 이용한 이 방법으로 질소와 산소분자의 결합거리가 변하는 짧은 순간을 측정해 ‘네이처’에 발표했습니다. 블라가 박사가 사용한 방법을 ‘레이저 유도 전자 회절 분석(LIED)’이라고 합니다.
블라가 박사는 파장이 다른 3종류의 레이저를 이용해 원자 사이의 거리가 변하는 각기 다른 순간을 찍어 연속적인 ‘스틸 컷’ 3장을 완성했습니다.
극적인 순간은 초고속 촬영이 제 맛
화살이 사과를 뚫는 장면이나 물풍선이 터지는 모습을 슬로우 모션으로 본 기억이 있나요? 모두 극적인 순간을 초고속 카메라로 촬영한 것입니다. 극적인 순간은 초고속 카메라 촬영이 제 맛이라는 데 이의를 달 관객은 없겠죠?
저 또한 우리의 주인공 앨리스와 밥이 멀어지는 극적인 순간을 초고속 촬영으로 담았습니다. 문제는 그 촬영 분량이 달랑 3펨토 초. 블라가 박사도 이 문제를 안타까워했습니다. 원자 사이 결합 거리가 변하는 것을 분명히 영상으로 담긴 했어요. 하지만 그 순간이 너무 짧아 정말 결합거리가 변하고 있는지 확인이 힘든 게 문제였지요.
듣고 보니 영화를 보고도 앨리스와 밥이 정말 멀어지고 있는 게 맞는지 의심이 간다고요? 멀어지고 있다고 믿으세요! 영화는 눈으로 보는 게 아니라 마음으로 보는 겁니다. 흠흠.
재회 Scene#3 죽죽 자라나는 인연의 끈을 찍어라
사이가 멀어진 앨리스와 밥. 0.002nm만큼 소원해진 거리를 어떻게 다시 가깝게 할 것인가! 소원해진 남녀 사이를 다시 가깝게 해주는 덴 선물만한 게 없겠죠? 밥은 백금 반지를 준비합니다. 그런데 영화에서 중요한 것은 바로 디테일입니다. 그래서 밥의 마음을 전달할 백금 결정이 형성되는 과정을 투과전자현미경으로 디테일하게 촬영했습니다. 백금 결정이 수 나노미터 크기로 자라는 모습을 또렷하게 볼 수 있죠.
그런데 첫 번째 씬을 찍을 때와 비슷한 문제가 발생했습니다. 백금 결정은 용액 속에서 백금 원자들이 서로 엉겨 붙으며 성장합니다. 투과전자현미경은 진공이 필요하다는 거, 이제 아시죠? 그런데 진공에 액체 상태의 용액을 두면 순식간에 증발해 버립니다. 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해야 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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액정보호필름의 골칫덩이 공기방울이 바로 정답
휴대폰 액정에 보호필름을 붙이다보면 도저히 안 빠지는 공기방울 때문에 짜증난 적이 있을 겁니다. 그런데 얇고 투명한 보호필름에 공기방울이 아니라 ‘용액방울’을 넣고 투과전자현미경으로 찍는다면 어떨까요?
2012년 4월 카이스트 신소재공학과 육종민 연구원은 그래핀을 이용해 액체가 증발하지 않고도 투과전자현미경으로 관찰할 수 있는 방법을 ‘사이언스’에 발표했습니다. 그래핀이란, 육각벌집 모양으로 결합한 탄소 원자들이 한 층으로 된 매우 얇은 막입니다.
방법은 이렇습니다. 먼저 두 장의 그래핀막 사이에 백금원자가 든 용액을 넣습니다. 그래핀막 사이에 액체가 스며들어가면 반데르발스 힘(분자와 분자사이에 작용하는 약한 인력) 때문에 그래핀막 두 장이 서로 달라붙습니다. 육 연구원은 그래핀막 사이에 생겨난 용액 방울을 투과전자현미경으로 관찰했습니다. 그래핀은 수소보다 큰 원자는 통과시키지 않습니다. 또 빛의 99.8%를 통과시킬 만큼 투명하고, 전자도 자유롭게 통과시키기 때문에 투과전자현미경으로 선명하게 관찰할 수 있습니다. 육 연구원은 이 방법으로 백금 결정이 퍼즐 조각을 맞추듯 서로 같은 방향성을 가진 원자끼리만 결합해 결정을 이룬다는 사실을 알아냈습니다.
어떻습니까, 관객 여러분? 앨리스와 밥 커플의 마음을 확인할 백금 결정이 자라는 모습을 영상으로 보니 마음이 따뜻해지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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