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중성미자 경쟁, 한국이 1등 할까?”
과학동아는 2011년 2월호에 위와 같은 제목의 기사를 실었다. 마지막 중성미자 변환 상수를 찾는 경쟁에서 앞서 나가고 있던 우리나라의 중성미자 검출기 ‘레노(Reno)’를 다뤘다. 당시 거의 완공 직전에 있었던 레노는 2011년 8월부터 본격적으로 실험을 시작했고, 올해 4월 마침내 결과를 발표했다.
그런데 뜻밖의 변수가 생겼다. 중국의 다야 베이(Daya Bay)가 3월에 먼저 실험 결과를 발표했던 것이다. 이를 두고 조선일보는 “중국 속도전에 다 잡은 노벨상을 놓쳤다”는 다소 호들갑스러운 제목으로 기사를 싣기도 했다. 그동안 어떤 일이 생긴 걸까.
수수께끼의 변환상수는 11.3%
표준모형의 기본 입자인 중성미자는 검출하기가 극히 어려워 ‘유령 입자’라고 부른다. 전기적으로 중성이며, 전자, 타우, 뮤온 세 가지 종류가 있다. 과거에는 질량이 없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1998년 일본의 수퍼카미오칸데 중성미자 검출기를 이용한 실험에서 뮤온중성미자가 타우중성미자로 바뀌는 현상을 관측했다. 2001년에는 전자중성미자가 타우중성미자로 바뀌는 현상이 발견됐다. 이같은 ‘중성미자 변환’은 중성미자에 질량이 있다는 뜻이다. 하지만 아직 중성미자의 질량을 측정하지는 못하고 있다.
어떤 한 종류의 중성미자가 다른 중성미자로 바뀌는 비율을 ‘변환상수’라고 한다. 뮤온중성미자와 타우중성미자, 전자중성미자와 타우중성미자 사이의 변환상수는 이미 밝혀졌다. 그러나 전자중성미자와 뮤온중성미자의 변환상수는 상대적으로 작아서 지금 입자물리학계의 난제로 남아있다.
중성미자는 지구도 쉽게 통과할 정도로 물질과 반응하지 않아 검출이 어렵다. 매우 낮은 확률로 물질과 반응하곤 하는데 이 때를 이용해 검출해야 한다. 중성미자검출기는 이를 이용하기 위해 ‘섬광액체’와 미약한 빛도 감지할 수 있는 광센서를 이용한다. 중성미자가 섬광액체를 통과하다가 양성자와 부딪칠 때 나오는 빛을 감지하는 것이다. 충돌할 확률은 매우 낮지만, 중성미자의 수를 늘리면 검출기에 걸리는 수도 늘어나기 때문에 보통 가속기나 원자로처럼 중성미자가 많이 나오는 곳 근처에 검출기를 짓는다.

우리나라의 레노 검출기는 입지가 좋았다. 전남 영광원자력발전소 근처에 들어선 레노는 원자로에서 나오는 전자중성미자를 풍부하게 이용할 수 있다. 영광원전은 용량이 커서 원자로에서 나오는 중성미자도 많고, 원자로 사이의 간격이 일정해 중성미자를 균일하게 관측할 수 있다. 원자로에서 나오는 전자중성미자의 수를 300m 떨어진 근거리 검출기에서 측정한 뒤, 1.4km 떨어진 원거리 검출기에서 측정한 수와 비교하면 1km 남짓한 거리를 움직이는 동안 전자중성미자가 얼마나 뮤온중성미자로 바뀌었는지 알 수 있다.
레노 연구팀은 올해 3월까지 중성미자를 관측한 결과 마지막 변환상수가 11.3%라는 결과를 얻었다. 앞서 발표한 중국 다야 베이의 수치는 9.2%였다. 레노가 얻은 결과의 신뢰도는 4.9시그마로 틀릴 가능성이 1000만 회 중 6회 정도다. 통상 물리학에서는 3~5시그마면 거의 확실한 것으로 본다. 김수봉 한국중성미자연구센터장은 “현재는 두 결과 사이에 약간의 차이가 있는데, 앞으로 오차를 줄이는 실험을 계속해 최종 변환상수를 얻을 것”이라고 밝혔다.

중국과 동등한 업적으로 인정받을 수 있어
마지막 남은 변환상수를 측정하기 위한 국제 경쟁에 우리나라가 뛰어든 건 2006년. 경쟁 상대인 프랑스의 ‘더블 슈(Double Chooz)’와 중국의 다야 베이에 비해 출발이 3~4년 늦은 상태였다. 하지만 실험 시작은 오히려 더 빨랐다.
레노는 지난해 8월부터 실험을 시작했다. 작년 1월 기자가 취재를 갔을 때는 “3년 정도 자료를 쌓으면 충분히 측정할 수 있다”는 설명을 들었다. 8월경에는 김수봉 센터장이 기자와 통화하면서 “상황이 좋아서 예상보다 빠르게 결과가 나올 수 있을 것 같다”고 말했다.
‘우리나라 연구진은 실험을 늦게 시작한 중국이 먼저 결과를 발표할 수 있었던 것이 학계의 관례를 어기면서까지 눈치작전을 펼쳤기 때문이라고 밝혔다. 중국 연구팀은 검출기 건설 일정을 전혀 학계에 보고하지 않아 다른 나라에서는 상황을 알 수 없었다. 또한, 시설이 채 완성되기도 전인 지난해 12월부터 서둘러 실험을 시작해 결과를 얻었다. 현재는 두 연구팀의 논문이 모두 투고된 상태로 아직 학술지에서 승인을 받아 출판된 것은 아니다.
그렇다면 레노 연구팀은 업적을 인정받을 수 있을까. 비록 레노의 발표가 3주 정도 늦었지만, 가능할 듯하다. 연구팀은 “지난 5년간 진척 상황을 정기적으로 학계에 보고했고, 학계에서도 발표 시기를 예상하고 있었기 때문에 독립적인 결과로 인정받을 수 있을 것”이라고 밝혔다.
연구팀은 앞으로도 레노를 중성미자 연구에 꾸준히 활용할 계획이다. 레노는 국제협력 없이 우리 스스로 중성미자를 연구할 수 있는 첫 시설이다. 연구진은 중성미자를 이용해 원전의 열 발생량을 측정하는 기술도 개발할 계획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