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라이브러리









그가 붓을 들면 우주가 잠을 깬다

로버트 허트 NASA 시각화 과학자



“당신이 내가 봤던 것들을 ‘당신의 눈’으로 볼 수 있으면 좋을 텐데.”

SF영화 ‘블레이드러너’에 나오는 복제인간 로이 배티가 자신의 눈을 만든 인간(한니발 츄)에게 던지는 대사다. 미국항공우주국(NASA) 제트추진연구소(JPL) 스피처과학센터 홍보팀의 ‘시각화 과학자(visualization scientist)’ 로버트 허트 박사는 자신의 작업을 이 대사에 빗대어 표현한다. 우리 눈을 능가하는 시력을 가진 ‘인공 눈’ 망원경으로 포착한 우주의 신비를 아름다운 그림으로 표현해 일반인에게 보여준다는 뜻으로 말이다.

보통 사람들은 우주 하면 ‘스타워즈’ 같은 SF영화의 한 장면이나 잡지에서 보는 환상적인 그림을 떠올린다. 한국에서는 아직 낯선 시각화 과학자는 과학자의 연구결과를 대중이 좋아하는 멋진 그림으로 만들어 보여주는 사람이다. 우리는 이미 잡지나 신문, 인터넷에서 허블우주망원경이 찍은 천체 사진에 감탄해오지 않았던가. 미국 패서디나 캘리포니아공대 안에 있는 스피처과학센터에서 허트 박사를 직접 만나 이런 우주 이미지가 어떻게 탄생하는지 들어봤다.

적외선으로 보는 스피처우주망원경

스피처과학센터는 NASA의 스피처우주망원경으로 관측한 자료를 처리하고 분석하는 곳이다. 스피처우주망원경은 우리 눈에 보이지 않는 적외선으로 신비한 우주와 그 속의 천체를 관측해왔다. 허트 박사는 이렇게 찍은 적외선 영상자료를 각 파장마다 다채로운 색깔을 선택해 합성하고 시각화한다. 일종의 ‘영상처리 예술’인 셈이다. 예를 들어 적외선은 가시광선으로 볼 수 없는 ‘속살’도 드러내는데, 우주 먼지 구름에 숨어 있는 우리 은하 중심부도 적외선으로 찍으면 컬러 영상으로 들여다볼 수 있다.

그는 대학에서 화학과 물리를 공부했고 대학원 2학년 때 전공을 천문학으로 바꿔 박사 학위까지 받았다. “탐정 수사하듯 단서를 갖고 우주 비밀을 풀어내는 것이 천문학의 매력”이라는 그는 오랫동안 컴퓨터 그래픽, 사진 촬영을 취미로 즐겼다. 그러다가 NASA의 적외선자료처리분 114 www.dongascience.com석센터(IPAC)에서 일하게 됐다. 허트 박사는 당연히 행성, 성운, 은하 사진에 푹 빠졌다. 2003년 스피처우주망원경이 발사되자 시각화 과학자로서 이곳에 몸담게 됐다.

시각화 과학자는 허블우주망원경, 찬드라X선망원경 등과 관련된 프로젝트에서도 활약해 왔다. 허트 박사는 스피처우주망원경이 발사된 직후 시각화 워크숍에 참여해 ‘선배들’로부터 영상처리에 대한 노하우를 배울 수 있었다. 천문학 영상처리 분야는 작지만 끈끈한 분야다. 이 일을 하는 사람들이 커뮤니티를 구성해 대략 2년에 1회씩 워크숍을 열어 협력하고 교류한다. 그동안 워싱턴, 샌프란시스코, 패서디나 등에서 워크숍을 개최했는데, 새로 시작하는 우주관측프로젝트에 관련한 워크숍도 연다.

이런 교류 때문인지 이곳에 전시된 시각화 작품에는 스피처우주망원경의 적외선 영상자료에 허블우주망원경의 가시광선 영상자료를 합친 작품도 눈에 띈다. 커다란 새가 날개를 펼친 듯한 오리온성운, 멕시코 모자를 닮은 솜브레로은하 등이 대표적인 예다.


[먼지 없는 원시 거대블랙홀 스피처우주망원경으로 약 130억 년 전의 모습이라고 밝혀진 원시 거대블랙홀의 상상도. 우주 초기에는 아직 먼지가 생기지 않아 거대블랙홀(중앙의 까만 점) 주변에 먼지 원반이 없고 기체 원반만 보인다. 블랙홀이 공간과 주변의 빛을 어떻게 일그러뜨리는지도 보여준다.]


[가시광선과 적외선 영상 합한 솜브레로은하 스피처우주망원경의 적외선과 허블우주망원경의 가시광선으로 찍은 영상을 합성한 솜브레로은하. 타원은하 주변의 먼지 고리가 생생하게 드러난다. 멕시코모자(솜브레로은하)보다 황소의 눈을 닮았다.]
 
[백색왜성에서 나온 빛 지구에서 157광년 떨어진 백색왜성에서 파장에 따른 밝기 변화를 나타내는 그래프. 관련 그림을 그려 넣어 그 밝기가 백색왜성 때문인지, 주변 원반 때문인지를 잘 보여준다.]

영상 처리에서 상상화까지

한 폭의 예술 작품 같은 천체 이미지, 언뜻 SF영화의 한 장면을 연상시키는 외계의 상상도. 허트 박사에 따르면 천문학 시각화 작업은 크게 세 종류다. 첫째, 망원경으로 관측된 영상을 처리하는 작업(rendering)이다. 영상을 수정하고 강조하며 때로 색을 넣어 보기 좋은 이미지로 만드는 것이다. 특히 적외선 영상은 눈으로 볼 수 있는 원래 색이 없기 때문에 각 파장에 따라 가짜 색을 지정한 뒤 여러 장을 합성해 컬러 영상으로 만든다.

둘째, 데이터를 시각화하는 작업(data visualization)이다. 예를 들어 점과 선이 있는 그래프가 있을 때, 관련 이미지를 함께 그려 넣어서 각각이 의미하는 바를 이해할 수 있도록 돕는 식이다. 허트 박사는 주변에 원반이 있는 백색왜성에서 파장에 따른 밝기 변화를 나타내는 그래프를 예로 들었다. “이 그래프에 관련 그림을 그려 넣으면 그 밝기가 백색왜성 때문인지, 주변 원반 때문인지를 잘 보여줄 수 있죠.”

끝으로, 연구결과에서 아이디어를 얻어 상상도를 그리는 작업(artwork)이다. 이것은 그야말로 예술 작품을 만드는 작업이다. 태양계의 초기 상태, 외계행성의 모습, 블랙홀 주변 등을 가능한 한 과학적 근거를 바탕으로 상상해 화려하게 그려내는 것이다. 예를 들어 행성을 그린다고 하면, 얼마나 큰지, 기체 상태인지, 궤도는 어떤지 등을 고려해 표현한다.

세 종류의 작업 중에서 허트 박사는 어느 작업을 좋아할까. 자식 중에서 누가 제일 좋냐는 질문처럼 곤란해 하다가 “그래도 첫 번째 작업이 가장 좋다”고 답한다. 왜일까. 화가가 정물화를 그릴 때 어떻게 배치하고 조명은 어느 쪽에서 쏠 것인지 등을 고민해서 그림을 그리듯이 다양한 파장으로 찍은 영상자료 중에서 어떤 것을 선택할지, 어떤 부분을 강조할지 등을 심사숙고해 멋진 영상을 만들기 때문이란다.


[우리은하의 ‘다운타운’ 우리 눈에 보이지 않는 우리은하 중심부를 스피처우주망원경의 적외선으로 관측한 영상. 별(파란색), 탄소가 풍부한 분자(초록색), 먼지(황적색)가 어우러져 있다. 허트 박사가 좋아하는 이미지.]

[별 탄생의 초기 성간구름에서 먼지와 가스가 소용돌이치며 뭉치기 시작할 때 별이 탄생한다. 원시별 주변에 원반이 생기고 양극 쪽으로 일부 물질이 뿜어져 나간다. 이 상상도는 허트 박사의 작품이다.]


[오렌지상자에 담긴 ‘나노 축구공’ 스피처우주망원경으로 우주공간에서 최초로 발견한 고체 상태의 풀러렌 상상도. 탄소 60개가 축구공 모양으로 연결된 분자인 풀러렌을 흥미롭게도 나무상자 안에 오렌지를 차곡차곡 쌓아서 채워 넣듯이 그렸다.]


[괴상한 외계행성 지구에서 33광년 떨어져 있는 외계행성 GJ436b의 상상도. 스피처우주망원경의 관측 결과, 특이하게도 태양계 행성과 달리 대기에서 메탄이 발견되지 않았다.]
 
[우리은하 지도 위에서 바라본 우리은하의 상상도. 4개의 주요 나선팔과 함께, 중심을 가로지르는 막대 끝에서 뻗어 나와 막대를 감싸는
작은 나선팔이 보인다. 허트 박사는 2008년 최신 자료를 모아 이 지도를 완성했다.]

흥미와 정확성, 2마리 토끼 잡기

스피처우주망원경으로 관측한 자료를 이용해 훌륭한 연구성과가 나오면 보도자료를 낸다. 이때 시각화 과학자가 활약한다. 보도자료는 과학자의 결과물을 대중에게 보여주고 싶을 때, 언론을 상대로 배포하는 자료를 말한다.

이곳에는 보도자료를 쓰는 사람이 따로 있다. 허트 박사 같은 시각화 과학자는 연구자의 논문과 함께 보도자료의 글을 훑어보고 글의 초점에 맞춰서 그림을 그리게 된다. 이렇게 그린 그림은 연구자가 다시 검토한다. 잘못 표현된 부분이 있으면 수정한다. 이 과정을 몇 번 거쳐 그림은 완성되고 보도자료에 포함돼 언론에 배포된다.

이 과정에서 어떤 내용을 그림으로 그려야 할지 심사숙고하며 번뜩이는 아이디어를 떠올리는 게 중요하다. 지난 2월 22일에 내놓은 보도자료를 보면 이런 고민의 흔적을 엿볼 수 있다. 보도자료는 스피처우주망원경으로 우주공간에서 고체 상태의 풀러렌을 최초로 발견했다는 내용이다. 탄소 60개가 축구공 모양으로 연결된 분자인 풀러렌을 흥미롭게도 나무상자 안에 오렌지를 쌓아서 채워 넣듯이 그림으로 그려 표현했다. 이 그림은 ‘나노 축구공’ 풀러렌이 고체 입자를 형성하려면 차곡차곡 쌓여 있어야만 한다는 글에서 아이디어를 얻은 것이라고 한다.

허트 박사는 “이런 그림이 사람들의 흥미를 끌 수 있어야 하는 동시에 전달하고자 하는 내용을 왜곡하지 않고 정확히 표현하는 것 또한 중요하다”고 말한다. 천문학 분야의 시각화 작품이 ‘스타워즈’처럼 흥미롭지만 과학의 정확성도 유지하는 식으로 균형을 잡는 게 중요하다는 뜻이다.

2008년 그는 우리은하를 위에서 바라볼 수 있다면 어떻게 생겼을지 정확히 그려내기 위해 노력한 적이 있다. 당시 관련 워크숍에서 우리은하 구조에 관한 특별 세션을 맡고 있던 로버트 벤저민 박사와 함께 최신 자료를 모두 모아 ‘우리은하를 위에서 본 모습’이란 작품을 완성해내기 위해 애썼다. 예를 들어 어떤 자료에서 우리은하가 대칭적이란 사실을 발견하고는 대칭성을 구현하기 위해 우리은하 이미지에 몇몇 특징적 구조를 그려 넣기도 했다.

허트 박사는 단순히 시각화 작품을 그려내는 데 만족하지 않는다. 지난 1월 19일과 20일에는 ‘영상처리의 예술’이란 제목으로 ‘2012년 JPL 폰 카르만 강연’의 문을 열었다. 그는 스피처우주망원경, 자외선망원경(GALEX) 등으로 찍은 우주 영상이 어떻게 눈에 보이는 화려한 영상으로 탄생하는지에 대해 강연했다. 또 2008년부터 그는 ‘숨겨진 우주’라는 제목의 팟캐스팅용 비디오를 제작해오고 있다. 방송시간이 2~6분으로 짧지만 하나의 주제로 우주의 신비를 보여주는 재미가 쏠쏠하다. 스피처우주망원경 홈페이지(www.spitzer.caltech.edu)에 들어가 ‘비디오 및 오디오(Video & Audio)’ 속의 ‘숨겨진 우주(Hidden Universe)’ 코너를 클릭하면 그동안 허트 박사가 만든 비디오를 감상할 수 있다.


[특이한 슈퍼지구 지구에서 40광년 떨어져 있는 게자리 55번별을 놀랍게도 17시간 40분 만에 한 번씩 도는 외계행성(55 Cancri e). 반지름은 지구보다 2배쯤 더 크지만 질량은 7.8배 더 무거운 슈퍼지구다.]

2012년 5월 과학동아 정보

  • 미국 패서디나 = 이충환 기자

🎓️ 진로 추천

  • 천문학
  • 물리학
  • 컴퓨터공학
이 기사를 읽은 분이 본
다른 인기기사는?